제 468화
144. 영지 수호 최후의 보루
“깜짝이야! 저리 가지 못할까!”
“악몽이라도 꾸셨습니까?”
“그 콩알만 하던 녀석이 왜 이렇게 벽이 된 거야!”
“예전엔 더 커야 부려먹기 좋다고 하셨지요.”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하는 중년 남성과 투정을 부리는 검은 머리의 소녀.
둘의 투닥거림을 보고 있으면 겉보기엔 아빠와 딸이 싸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대화를 들어보면 정반대였다.
“어머니, 과일을 좀 받아왔습니다. 드셔 보세요.”
“흥, 나는 그런 것 따위 관심 없다.”
“다 드실 때까지 책은 안 드릴 겁니다.”
“어허, 이 녀석! 어서 내놓아!”
바락바락 화를 내는 흑발의 소녀는 내가 아는 존재와는 너무도 달랐다.
대체 무엇이 그녀를 이토록 변하게 한 것인가.
그녀가 본래부터 이런 성정이 아니었다는 건 대충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심연의 공주.
환수의 세계 룩스 대륙을 날려버린 울드의 동생이니 말이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베르단데 또한 티오니스 대륙을 날려버릴 생각으로 이곳으로 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아는 것과 다른 결과로 변했다.
“네가 말한 그 심연의 공주라는 것 말이다. 내가 볼 땐 조금 괴이하구나.”
세계수 알의 말에 나는 거목의 가지에 선 채 조용히 말했다.
“그래서 지켜보는 겁니다. 당장은 모르겠어요. 심연과 관련된 건 하나하나가 위험하기 짝이 없으니까요.”
지금이라면 울드에게 마냥 패배하진 않겠지만 그런 존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큰 변수가 생긴다.
본래의 계획대로였다면 그녀를 죽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당장 무언가를 할 생각이 없는 그녀.
“너나 먹거라! 그렇게 앙상해서 청소나 제대로 할까 걱정이다!”
“하하하, 제가 이래 봬도 몸 하나는 튼튼합니다. 어머니.”
그리고 말은 저렇게 하면서도 베르단데는 전(前) 브리우크의 국왕 그리드 말론 브리우크를 이래저래 챙기는 모습이었다.
저런 걸 두고 새침데기라고 하던가.
과거에도 언급한 바 있지만, 회랑에도 비슷한 이가 있었다.
초대 성녀 다프네.
험하게 표현해서 x발 데레라는 조금 특이한 명칭이 가장 잘 어울리던 인물 말이다.
아닌척하진 않지만, 언변이 거칠다는 점을 보면 비슷한 느낌이었다.
“거짓말이구나.”
세계수 알의 말에 나는 침묵했다.
“네 녀석, 저 둘의 모습에서 그리움을 느끼고 있구나.”
“……”
“이를테면, 가족의 정이더냐?”
그 말에 나는 심드렁하게 손을 휘저었다.
“적당히 하세요.”
“흐음, 흥미롭구나. 의외의 면에서 인간적인 면모가 드러날 줄은.”
“가지 꺾어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깔깔 웃는 목소리에 괜스레 기분이 나빠졌다.
“본녀가 보기에도 그래. 그대는 심연에 관해선 과할 정도로 냉정한 면이 있었어. 하지만 이번엔 좀 달랐지.”
“조용히 해. 그냥 지켜보는 거니까. 나중에 다른 심연의 공주를 상대할 때 필요한 정보를 캐내는 용도로 쓸 거다.”
내 말에 페르세르크는 어깨만 으쓱여 보였다.
그리고는 귀엽다는 듯 떠올라 내 양 뺨을 자신의 손으로 잡고 도리 도리질 했다.
말없이 그녀의 손장난을 무시하고, 두 사람을 바라보던 나는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그런데 저 마법서는 대체 뭐야.”
심연의 힘과는 조금 다르지만, 그녀의 힘과는 밀접하게 관련이 있었다.
“직접 물어보지 그러더냐.”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내 시선에 정확히 보이는 마법서.
심연의 공주가 가지고 있었으니 심연과 관련된 물건일 줄 알았는데 그 내용물에는 어떤 심연의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이 세상에 있던 물건처럼 말이다.
“페르세르크, 보여?”
내 말에 그녀는 흥미로 받는 듯 마법서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키득거렸다.
“직접 알아내 보아. 힌트를 주자면…….”
말끝을 흐린 그녀가 빙그레 웃어 보였다.
“유품이로구나.”
누군가의 유품을 저렇게 소중하게 끌어안고 있는 걸 보면.
“그녀에게 제법 중요한 존재였겠지.”
나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들에게서 등을 돌렸다.
* * *
오래 찾아 헤매던 심연의 공주가 너무 허무하게 드러났다.
그녀와 관련된 일을 처리하고 난 후 나는 하인스 영지에 칩거했다.
아카데미는 멀쩡하게 가동되기 시작했고 그 외에도 여러 부분이 이득을 보기 시작했다
현재 하인스 영지의 가장 큰 고객은 다름 아닌 팔란 제국이었다.
팔란 제국은 가장 큰 강대국이라 불리기 위해 많은 곳에 손을 뻗고 있는 상황이었다.
지구로 치면 국제경찰이라는 명칭을 고집하는 미국과 다를 게 없다.
물론, 취지 자체는 좋았다.
사실상 팔란 제국 덕분에 대륙에서 타국과의 전쟁이 극도로 억제되고 있는 게 현 실정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사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팔란 제국이 매해 지출하는 비용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팔란 제국이 제정문제로 무너지기 시작하면 내부에선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린다.
평화를 유지하면서 살살 약소국들을 흔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당연, 그 범위 안에는 라운왕국도 포함되어있었기에 나는 하인스 영지의 영주가 되어 자금을 만지자마자 팔란 제국과 대규모 거래를 주기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대량의 수입과 수출을 통해 돈이 돌고 돌게 만들어 금융시장을 안정화했다.
지금 당장은 큰 이득을 볼 수 없지만, 유비무환이라고 하였던가. 만일의 사태에 준비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좋든 싫든 얼마 전까지만 해도 팔란제국의 흥망성쇠에 따라 각국의 수많은 상인이 자금을 묶거나 풀거나 했으니까.
“재료는 이게 전부인가요?”
“그렇소, 은사. 허허, 처음 한기에 불과했던 이 전투 골렘이 벌써 이토록 늘어났다니.”
평행세계에서 관조자의 도움을 받아 내가 챙긴 것은 마나 신성수뿐만이 아니었다.
세계 각지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그는 내게 일차적인 마정석이 매장된 곳을 알려주었고.
나는 소리소문없이 그곳으로 가 마정석만 날름 캐내 오는 만행을 저질렀다.
들키면 예술 안 들키면 범죄.
아니, 반대로.
어찌 되었건 대량의 마정석이 생긴다는 소리는 그동안 지지부진했던 골렘 편대의 증강을 말할 수 있었다.
실제로 녀석들의 쓸모는 상당한 편이니 말이다.
지휘 개체인 엘더브레인 륀느를 시작으로 디셉티콘 편대의 본래 초기 모델인 메가트론,
이후 스나이퍼나 저거노트 탱커 퓨마 등등 여러 골렘을 만들었다.
이후 생겨난 것이 비룡 형태로 공중 부양이 가능한 골렘인 스타스크림이나 쌍둥이 골렘이 있었다.
물론 지금 쌍둥이 골렘은 티오니스가 아니라 타 세계인 유르기안 대륙에 출장을 보내둔 상태지만 말이다.
다만 단순한 골렘보다는 역시 어떠한 것을 만들고 싶었던 나는 그동안 고이고이 모셔온 설계도를 복원해내는 데에 성공했다.
유르기안 대륙의 연금술의 신이라 불리던 존재.
이바.
이바 반 호엔하임.
연금술이 발달한 유르기안 대륙은 연금술을 기반으로 한 수많은 발전을 이룩한 세상이다.
그리고, 그런 이바 반 호엔하임의 생전 그가 만들어낸 존재가 하나 있다.
“륀느가 설계도의 질을 매우 높게 평가. 이것을 고도의 기술력이라 판단.”
그 무식한 고대놀러지 출신의 륀느도 기함을 토할 정도의 정교함, 크기, 용도.
“세상에……”
드워프들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수많은 세월 동안 정말 많은 것을 봐온 장로급 드워프.
골다와 골고다 형제나 다른 장로들도 그러했지만 그들의 시선에 비친 이것은 그 궤를 달리했다.
“이게 그겁니다.”
물건을 꺼낼 수 있는 권능, 그게 있어야 한다.
나는 한 장의 설계도를 가득 메우고 있는 한가지 장치 그림을 보여주었다.
“이게 대체 무엇이오? 연금술로 만들어진 촉매를 통해 돌아가는 심장부입니다. 이것의 원래 제작자는 본래 다른 용도로 마나가 아닌 다른 연료를 사용했지만 나는 이걸 쓸 생각이에요.”
거대한 원 형태의 물건을 보며 드워프들의 표정이 굳었다.
“하지만 설계도는 완벽해도 이곳의 재료나 기술력으론 힘들겠소. 은사.”
설계도가 대단한 건 알겠는데.
이걸 이해하는 존재는 단둘밖에 없다.
륀느와.
나.
드워프들도 대단한 기술력을 지니고 있지만 그들의 시선에 이것은 중학생이 대학교 논문을 보는 것만큼이나 복잡한 내용투성이였다.
“드워프들도 그렇습니까?”
“뭐, 자존심 상하지만 별수 없지. 이 정도로 정교한 기계 공학이라면……. 그래, 푸른 바위 부족이라면 알지도 모르겠군.”
푸른 바위 부족.
황색 바위 부족과 흑색 바위 부족은 주로 무구나 마법 도구를 만드는 데에 특화되어있다.
평범하면서도 심도 있는 장인이라는 소리다.
반면 적색 바위 드워프들은 건축에 한해서 굉장한 기술력을 지니고 있다.
실제로 아카데미를 설립할 때 그들에게 기술 몇 가지를 공유해주고 뚝딱 만들어버렸으니 말이다.
“기계장치에 관해선 푸른 바위 부족밖에 없지.”
“그들은 어디 있습니까?”
“그들 말이오? 허허, 사실 우리도 모르오.”
그 말에 주변의 분위기가 차갑게 식었다.
“뭡니까? 그럼, 차라리 황색 바위 분들을 가르치는 게 더 빠르겠네요.”
“뭐, 그들의 마을을 모를 뿐이지 푸른 바위 부족 출신의 꼬장꼬장한 노친네 하나는 알고 있소이다.”
그 말에 내가 멈칫했다.
“알고 있어요?”
“알다마다, 제법 유명한 곳에 있으니.”
그의 말에 나는 계속해보라는 표정을 지었다.
“연금학파의 본산. 그곳에 있다는 말을 들었소.”
연금학파 내에서도 수많은 학파가 존재한다. 실제로 내가 이전에 만났던 생명공학을 다루던 연금술사 페니실린이이 있었고 그와 만났던 골렘 학파의 장로, 인형사 프란시스가 그 주요 예시였다.
그냥 유르기안 대륙으로 넘어가 그곳의 기술자들을 납치해오는 게 가장 효율적이겠지만, 사실상 불가능한 방법이라는 것을 가장 잘 알기에 이곳에서의 방법을 통하는 수밖에 없다.
실제로 그곳에선 발견되는 자원이 이 땅에는 없는 경우도 있으니 말이다.
“헌데, 그 노친네. 하도 꼬장꼬장해서 말이외다. 어지간해선 제국의 황제도 잘 만나주려 하지 않소.”
연금학파의 총장급 되는 인물이라면 그 정도 위세는 있겠지만…… 내가 아는 바로 총장급의 인물은 다른 이로 알려져 있다.
“대단한 양반이네요.”
“에잉. 늙어서 그 모양인 게지. 은사, 어찌하시겠소? 내 비록 이번에 도움은 못 드리지만 그를 만나게 어찌어찌 해볼 순 있을 것 같소.”
그의 말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되었건 이걸 만들 기술자를 확보하려면 어떻게든 봐야 하니까요.”
“허허, 일단 내 그 고집불통 똥자루에게 서신이라도 써보리다. 이름은 빌릴 수 있지만 역시 총장급에게 서신이 도달하려면 은사의 이름도 필요할 듯하오.”
그 말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 * *
거만한 오만함.
그를 부르는 여러 명칭은 존재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를 오만하다며 비웃진 않았다.
천재이면서, 그 누구보다 독종같이 노력하는 존재.
그게 바로 드워프 연금술사 에디손이었다.
때문에 연금학파에선 학파를 불문하고 그를 두고 꼬장꼬장한 노친네라 칭할지라도 기술력과 그의 열정, 그리고 업적에 관해선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성격이 괴팍한 노인이지만 그가 만든 수많은 물건은 이미 세상에 나와 수많은 발전을 거듭하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오죽하면 그의 기술력에 반한 왕족들이 돈을 바리바리 싸 들고 찾아와 만나게만 해달라고 빌겠는가.
연금술사는 기본적으로 자신의 기술력에 자부심이 대단한 편이다.
하지만 그만큼 열정이 놀라울 정도로 대단한 편이었다.
“에디손님. 서신입니다.”
“으잉? 서신? 내가 자잘한 건 다 넘기라고 했잖느냐.”
집중하느라 자신의 공방 테이블을 노려보던 에디손은 자신을 찾아온 젊은 소녀의 말에 곰방대를 뻑뻑 피우며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에디손님.”
“티아라, 하나하나 다 신경 쓰기엔 세상엔 너무도 배울 것이 많고 알아낼 것들이 많다. 그런 자잘한 것을 신경 쓸 틈 따윈 없느니라.”
꼬장꼬장한 말투로 말하며 툴툴대는 그 모습에 티아라라 불린 아름다운 소녀는 자신의 적발을 슬쩍 넘겼다.
“할아버지.”
“에잉…… 또 왜 그러는 게야!”
“그냥 서신이 아니에요.”
“으잉?”
“하인스 영지에서 왔어요. 하인스 영지의 데이비 올 라운 왕자. 아시죠?”
“그건 또 누구여.”
“네? 이 사람을 몰라요? 대륙의 영웅. 빛의 용사 레이나가 나타나기 이전부터 수많은 업적을 세운 성자요.”
티아라의 말에 에디손이 인상을 찌푸렸다.
“거 인간 애송이 놈 이름 하나하나 기억하기엔 이 할애비는 바쁘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얼렁 가서 학술서나 더 가져 오거라!”
“에이씨, 괴팍한 노친네.”
“뭐, 뭬야?!”
“아, 내가 뭐 틀린 말했나?”
부루퉁한 표정으로 티아라가 투덜거렸다.
“할아버지. 그렇게 골만 쌓고 살면 같은 편도 다 떨어져 나갈 거예요. 말년에 편하게 사셔야지 이 무슨 생고생이에요?”
“이, 이년이! 아주 그냥 오냐오냐 키웠더니!”
“아 몰라! 할아버지가 자꾸 맨날 그렇게 오만하게 구니까 주변에서 나보고 뭐라 하잖아요!”
“네 녀석도 열심히 해서 남들의 콧대를 눌러버려라! 그러면 누구도 널 업신여기지 못할 게다!”
“그러다가 더 뛰어난 사람이 나타나면요?”
그 질문에 에디손이 눈을 찌푸렸다.
“뭘 묻고 자빠졌느냐. 당연히 배워야지! 그게 배움을 추구하는 자의 숙명인 게다!”
정작 그를 가르칠만한 이가 없기에 이런 상황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 서신 말이에요. 골고다 장로의 이름도 있는데요?”
그 말에 작업하던 에디손의 표정이 굳었다.
“누구라고?”
“골고다 장로라고 적혀있어요.”
“가져와 보아라.”
그 말에 티아라가 에디손에게 서신을 가져다주었다. 그곳에는 아주 짤막한 글귀가 적혀있었다.
“관심 갈만한 내용이 있는데, 관심 있습니까? 서로 합만 맞으면 몇 가지 전수해드리지요.”
데이비라는 어린 애송이가 보내온 서신, 그 안에 적힌 내용에 에디손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에디손에게 보내는 서신인데 오만하기 짝이 없다.
“허, 허허허허허!! 그놈 참! 오만한 놈이로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에디손도 알고 있었다. 그가 대륙의 성자로 불리며 어떤 무력을 보여왔는지를 말이다.
하지만 연금술과 이것은 별개의 일이었다.
무력과 지식은 별개의 일이다. 그렇기에 더욱 흥미가 생겼다.
“근데 할아버지. 이 데이비라는 사람, 혹시 나랑 혼담 오가던 그 사람 아니에요?”
그 말에 에디손이 입맛을 쩍쩍 다셨다.
그제야 기억이 나기 시작했다. 눈앞에 있는 이 소녀, 대륙 6대 미녀 중 한 명이었던 이 소녀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됐을 때, 동갑내기 나잇대의 소년과 혼담을 주고받은 적이 있었다. 그 왕국의 이름이 라운왕국이었고.
그 왕자의 이름이…….
“흐음…… 어깨만 스쳐도 인연이라더니 별의별 일이 다 있구나. 그래. 이토록 자신만만하다면 한번 만나봐야겠지.”
마침 그 망할 영감탱이의 부탁도 있으니까.
그는 입맛을 쩍쩍 다시며 서신을 다시금 읽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