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98화
150. 어서 와, 내 유산창고에
주변은 고요함으로 가득 찼다.
말없이 침묵하고 있던 찰나 그녀가 중얼거렸다.
“헤라클래스라…….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야.”
그녀가 이름을 곱씹듯 중얼거렸다.
“그래, 진리의 벽에서 언뜻 본 적이 있어.”
담담하게 말한 그녀가 손을 움직였다.
이윽고 그녀는 누군가의 초상화를 빠르게 그려냈다.
덥수룩한 머리칼에 거구의 체격. 분명히 헤라클래스였다. 외향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말이다.
“이 남자?”
“맞아.”
“흐음……. 미안하지만 나도 이 남자를 본 건 진리의 벽에 새겨진 것으로밖에 본 적이 없어. 혈육이 무슨 말인지는 나도 모르겠는데?”
의외의 발언에 내 눈이 가늘어졌다.
“그 진리의 벽이라는 건 뭐야.”
“심연의 공주가 각기 특성을 지닌 것은 알고 있지? 내 능력은 진리를 보는 눈동자, 뭐 그래 봐야 볼 수 있는 건 단편적이지만.”
“별로 의미 없어 보인다고는 못하겠네.”
지식이라는 것은 겉보기엔 무력에 하등 도움이 안 되지만 그녀가 볼 수 있는 게 무엇인가에 따라 어마어마한 능력이 될 수도 있다.
그 외에 모든 힘은 그녀의 고유능력인 듯 보였다.
“네가 보기에 내가 속한 이 심연이라는 곳은 어떤 곳 같아?”
“끝없는 무저갱, 침략자, 양심 없는 도둑놈들, 납치범, 양심 없는……”
“그만! 그만! 그냥 두면 끝도 없겠구나. 그래……, 도둑놈이란 말이지…….”
베르단데가 표정을 지우며 진중하게 말했다.
“헤라클래스라는 인물에 관한 정보는 만족스러울 만큼은 줄 수 없지만 일단 짚고 넘어갈 게 있으니 확실히 하자고.”
“짚고 넘어갈 것?”
“넌 지금 내 근본인 심연을 도둑놈이라 칭했지만, 실상 알고 보면 진짜 도둑놈은 우리가 아니라 너희들, 아니 역겨운 주신 프리아 여신이야.”
오, 신이시여.
이 여자가 지금 성자 앞에서 신을 대놓고 모독하네.
얕은 분노가 서린 그 목소리에 나는 조용히 침묵했다.
* * *
베르단데와 대화를 마친 뒤 나는 페르세르크를 영지에 두고 단신으로 떠났다. 륀느가 나와 동행을 요구했지만, 이번엔 울드의 일도 있었던 만큼 영지에 남겨두는 쪽을 택했다.
물론, 디셉티콘 편대의 골렘 두기와 어벤져 편대의 메라몽을 데리고 오긴 했지만 말이다.
“데이비. 데이비? 왜 그래? 표정이 안 좋아 보이는데.”
서남부지역 타르타로스 지하산맥을 감시하는 라스트위스프 기사단이었던 폐허를 조사하던 중 일리나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다가왔다.
“별거 아니야.”
진실을 모르기 전엔 단순히 때려죽일 놈들이라고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마냥 욕하기도 어려운 입장이라는 것을 알아챈 건 베르단데와의 대화 이후부터였다.
[우리가 있는 곳과 이곳이 왜 동전의 앞면과 뒷면이라 불리는지 모르지? 그건 주기적으로 뒤바뀌기 때문이야. 한번 바뀌면 보통 어지간해선 잘 바뀌지도 않지만 순서라는 게 있지.]
현재 동전의 앞면을 차지하고 있는 건 티오니스 대륙의 생명과 주신 프리아 여신이다.
그래, 그게 정상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빌어먹을 도둑놈은 심연이 아니라 이쪽이라던 말.
무슨 개소리냐 할 수 있는데 이게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주기적으로 동전의 앞면 세상과 뒷면 세상은 위치를 바꾼다.
마치 동전의 면이 바뀌듯 말이다.
문제는 현재, 앞면 세상이 그런 규칙을 개무시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네가 모시는 신 주신 프리아 여신은 외부의 인물을 끌어들였고, 본래 동전의 앞면이 돼야 했을 우리 세상을 그림자 속에 영원히 처박아버렸지. 원래 너희 자리에 우리가 있었어야 했다고. 이건 세상이 가진 운명의 흐름이고 순리야. 이쯤 되면 누가 도둑놈인지 말 안 해도 알겠지?]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내게 딱히 적의를 드러내지 않았다.
[모든 심연의 존재는 프리아 여신의 이면이자 그림자인 신 타나토스의 파편이야. 심연의 공주는 그중에서도 많은 사념체가 뒤섞인 강한 파편이고 그 외의 것들은 다양한 방면으로 변화한 소수의 사념파편이고.]
그녀의 말을 풀어보자면 1만 년 전 본래 심연과 지금의 세상은 위치를 바꿔야 했다.
하지만 주신 프리아 여신은 모종의 이유로 세상에 일정 수준 이상 강림해버렸고, 그녀의 그림자와 같은 동일한 신, 타나토스를 찢어발겨 세상의 교체 순환을 끊어버렸다.
그 과정에서 신의 힘도 거부하는 진화자인 헤라클래스의 힘이 사용되었다는 건 분명해 보인다.
그러니까 순서를 어기고 뒤통수를 후려갈겼다는 소리였다.
그러니 심연의 입장에선 이쪽 세계가 도둑놈이 될 수밖에.
결과적으로 베르단데는 자신의 의지가 활성화된 건 길어야 100여 년 정도로 울드나 스쿨드도 큰 차이가 없기에 헤라클래스의 혈육이라는 건 말도 안 된다고 부정했다.
-우리는 하나다.
그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던 것이 이제야 이해가 되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강한 힘을 지니고 태어난 심연의 공주들은 그 증오와 힘을 바탕으로 닥치는 대로 본래 의지가 가지고 있던 증오를 발산하기 시작했다.
닥치는 대로 파괴하고 멸망시키는 것으로 말이다.
물론, 그런 행동이 심화한 건 오래되지 않았다. 그러니 아직 멀쩡한 세계도 남아있는 것일 테고 말이다.
그렇다면, 왜 심연의 공주는 페르세르크에게 관심이 없는가.
그녀는 분명 심연에서 찾아 헤매는 존재다.
여왕이며, 어머니라고 했다. 실제로 심연에서 넘어온 공주가 아닌 괴물들은 페르세르크를 부르짖으며 그녀를 어떻게든 데려가려 했다.
그런 내 질문에 그녀는 참 간결하게도 심연의 문제점을 읊어주었다.
페르세르크는 잘게 찢겨 나간 프리아 여신의 이면, 신 타나토스를 부활시킬 수 있는 유일한 힘을 품은 영혼이라는 것.
[아무리 위대한 의지의 파편이라 해도 이제는 과거 신이라 불렸던 잔재에 불과해. 그런 압도적인 힘을 지닌 존재가 제약이 없을 거 같아? 우린 다른 세상의 법칙을 무시하고 우리 규칙을 내세우지. 하지만 우리 쪽도 규칙이 없는 건 아니야.]
심연의 공주는.
페르세르크를 어찌할 수도, 관심을 가질 수도 없다.
태생적인 금제라는 말이었다.
[그렇다고 안심하면 안 될 거야. 심연의 공주 이외의 수많은 사념체들은 아직도 그녀를 갈구하고 있어. 내가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은 지는 꽤 되었지만 안 봐도 알 수 있지. 아마 이른 시간 내에 이곳을 대규모 습격할 가능성이 커.]
심연이 전면전을 준비하고 있다. 베르단데 조차 그 끝을 알 수 없는 깊이의 어둠 속에서 그들이 앞면의 세계를 부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설명에 나는 질문을 던졌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는 가정하에.
어째서 그녀는 프리아 여신을 증오하지 않는가. 이곳에 녹아들어 살려고 하는가였다.
그런 내 질문에 그녀는 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진리를 보는 눈은 때때로 원치 않는걸 보여주지. 주신 프리아 여신의 행동은 역겹기 그지없지만, 그년은 그년 나름의 방법을 쓴 것일 테니.]
그 자세한 이유에 대해선 그녀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다고 했다.
주신 프리아 여신이 그저 악심을 가지고 타나토스를 찢어발겼는지, 아니면 타나토스에게 문제가 생겼는지는 아마 영원히 모를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내놓을 수 있는 해결방법은 딱 세 가지.
페르세르크를 다시 세상의 주역인 마왕으로 만들어 대적자인 나와 대적을 하게 하는 것.
주신 프리아 여신이 공식적으로 간섭할 수 있는 영향권에 들어가면 심연도 별수단이 없다.
둘째, 그런 건 개무시하고 심연 전체를 무너뜨릴 힘을 가지던지.
현재로썬 회랑의 상위 영웅을 불러오거나 내가 힘을 완전히 되찾다 못해 조금 더 강해지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
그것도 아니면.
동전의 앞면과 뒷면의 모든 연결고리를 끊어버리던지.
사실상 가능성이 있는 건 딱 하나뿐이었다. 바로 페르세르크를 마왕으로 만드는 것.
검신 하레스는 심연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지만 아마 어느 정도 개인적인 힘으로 알아챈 것들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결정을 내렸을 것이고.
소중한 수양딸의 영혼이라도 지키기 위해서.
그렇다고 해서 나 또한 그렇게 할 생각은 없었다.
“너 뭐 숨기는 거 아니지?”
이전의 사태를 몇 번이고 봐왔기 때문일까. 일리나가 불안한 얼굴로 물어왔고 나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단순히 생각할 게 많아서 그래. 신경 쓰지 마.”
“혹시라도 힘들면 말해. 도와줄 수 있는데 까진 도와줄게.”
“케인이라고 했나? 그 녀석은?”
“네 말대로 확인은 하고 있는데. 그냥 말 잘 듣는 아이라는 것 외엔……. 데이비, 아무 잘못도 안 한 아이잖아. 그저 평범한 아이처럼 투정이 있을 뿐이지 악의가 있는 것도 아닌……”
그녀의 말에 나는 일리나의 이마를 가볍게 때렸다.
생각해보면 웃긴 일이었다. 조화의 신 넬타리드. 그의 존재는 진리의 벽을 보는 베르단데조차 고개를 갸웃거렸었다.
“읏?!”
“리인포스 알파의 기사 총장의 이야기 못 들었냐? 괴멸된 기사단을 해친 흉수가 지구에서 넘어온 놈들이야. 물론, 그놈들 수준으로는 어림도 없겠지만 관련되어 있다고.”
“그, 그건.”
“그리고, 그놈들을 보낸 건 넬타리드라는 듣도 보도 못한 신이고.”
케인은 그 신의 종자인 발키리아라는 종족이다.
내 말뜻을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이지만 일리나는 씁쓸함을 지우지 못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하지만 아직 어린 애야. 태어난 지 얼마 안됐잖아. 그런 아이가 부모라 여기는 이들에게까지 버림받으면…….”
그건 얼마나 슬픈 일이겠어.
그녀의 말에 나는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그녀의 의견에 내가 못 이긴 척 넘어가며 그냥 사태를 지켜보는 것은 어쩌면 머릿속에 아직도 남아있는 기억 때문이 아닐까.
소중한 이들은 조금이라도 더 소중하게 대해줘야 한다.
있을 때 잘해.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일리나 또한 가족과 떨어지는 슬픔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그런 감성적인 부분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케인이 일리나를 극도로 따르고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페르세르크의 확인만큼 확실한 보증이 없으니까.
당장 머릿속에 무언가 숨긴 능구렁이가 아니니 다루기 쉬운 멍청이가 오히려 나은 법이다.
“쯧. 쓸데없는 짓을 한다 싶으면 무조건 내가 준 당근 모양 보석을 흔들어. 곧바로 갈 테니.”
“만약 그렇게 되면 그 아일 죽일 거야?”
그녀의 씁쓸한 물음에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해. 그놈은 몰라도 그 뒤에 있는 놈은 위험해. 만약 놈이 허튼수작을 부린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그놈을 죽일 거다.”
위험하다고 바로 죽이는 건 멍청한 짓이다. 게임을 통해 넘어온 소수의 지구인과 다르게 케인은 넬타리드라는 신과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이니까.
주신 프리아 여신이 용인하고 있는 것을 볼 때 협상의 여지가 있다는 뜻으로 비친다.
내 설명에 그녀는 말없이 안겨왔다. 그리고는 이마를 내 가슴에 가져다 대고 씁쓸하게 말했다.
“쉽게 믿지 못하는 건 슬픈 일이야.”
“……”
누군가에게 온정을 베푸는 게 잘못일 리가 없다. 생전 처음 보는 작은 아이를 시집도 가지 않은 처녀가 아들로 받아들이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애초에 케인이 태어난 알을 가지고 온 것은 그녀가 아닌 내가 아니었던가.
그때 숲 저편에서 다수의 인기척이 느껴져 왔다. 일단은 괴멸당한 기사단의 본거지인 만큼 그들의 존재를 느낀 일리나가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좀전의 대화 때문에 심란해 보이는 그 모습에 장난기가 샘솟은 나는 조심스레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린 뒤 힘을 발현했다.
“흐끅!?”
동시에 일리나가 새된 비명을 내지르며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바들바들 떨며 몸을 웅크린 그녀가 나를 노려본다.
“데이비!!!”
“긴장 풀어.”
“너 자꾸 내 몸에 이상한 짓 할래?!”
“내가 뭘 했다고.”
아무것도 모른 척 능청스레 답하자 그녀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곧 혼인을 올릴 자식이 이런 짓…… 하아, 됐어.”
그리 말하던 그녀의 표정에 순간 씁쓸함이 스쳐 지나갔다.
이 일대는 괴멸된 기사단의 본부가 있는 곳이니 먼저 조사를 위해 파견되어온 다른 기사단의 선발대이리라.
“어서 오십시오, 보리스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완전히 폐허가 된 숲으로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 숲 저편에서 검은 로브를 입은 이들이 나타났다.
그들의 얼굴에는 곤혹스러움이 어려있었다.
“멜베크. 오랜만이오.”
“이전에 난동을 부렸던 대마수 켈사이크 이후로 처음이지요. 뒤의 분들은 리인포스 알파에서 온 지원병력입니까?”
“그렇소이다.”
보리스의 말에 후발 조사대원으로 파견된 기사단원 성기사 필디르와 사제인 루시에 쉘만, 쌍둥이 렌다 자매와 일리나 이외에 나를 포함한 몇몇을 멜베크가 조용히 응시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이내 내게 닿았다.
“저 남자가 바로 그……”
아무래도 이미 기사단 내에선 나에 대한 소문이 어느 정도 퍼진 모양이었다.
“그렇소. 든든한 아군이지.”
보리스가 허허 웃으며 나를 자랑했다.
“우리 모두를 구한 은인이자 귀인이오.”
“정말 신기하네요. 마나가 한 줌도 느껴지지 않는다니……”
멜베크는 내 몸에서 마나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게 신기한 듯 보였다.
“우선 내부의 상황에 대해 좀 들었으면 하오만.”
보리스의 말에 멜베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추가조사를 더 해봐야 알겠지만 우선 확인해보시지요.”
괴멸된 기사단 본부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로 가득했다.
아무도 없다. 하지만 벽면에 붙은 핏자국이나 파괴된 흔적은 그때 당시의 사태를 너무도 여실히 보여주었다.
“흐음…… 핏자국. 하지만 아무런 흔적도 없다라…….”
마나가 날뛰었으면 마나가, 사령 마나면 사령 마나가.
흔적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너무 깨끗했다.
“우선 팀을 나누도록 하지, 필디르. 루시아와 함께 상층을 조사해보도록, 렌다 자매는 지하를 부탁한다. 혹시라도 낌새가 이상하면 곧바로 철수하고 보고하도록, 명령이다.”
“네, 선생님.”
같은 기사단원이 되었지만, 선생과 견습생의 관계가 그리 쉽게 끊어질까.
절도있는 자세로 대답하고는 흩어지는 그들을 뒤로한 채 나 또한 일리나와 페어를 맺고 기사단의 외부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여기도 핏자국이 있어. 양을 보니 다수의 싸움이 있었던 모양이야.”
고요한 정원에 남은 핏자국을 보며 일리나가 중얼거렸다.
“그런데, 시체는 하나도 없습니까?”
그 현장을 말없이 바라보던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나를 따라온 멜베크에게 물어보았다.
“아, 그렇다네. 시신은 단 한 구도 발견되지 않았……. 어흠! 혹시 말을 편하게 해도 되겠소?”
“편하신 대로 부탁합니다.”
“커흠! 그, 그렇게 하지. 처음 우리 기사단이 왔을 땐 이미 시신이 소수만 남기고 모조리 사라져 있었네.”
“남아있는 시신도 있었다는 소리네요.”
내 말에 그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 시신들은 이미 기사단 본부로 후송해서 정밀 감식을 의뢰했네. 뭐가 되었건 나올 테니.”
“이 일의 흉수를 찾으면 어쩔 겁니까?”
척 봐도 마수나 몬스터의 소행이 아니라는 게 훤히 보였다.
그렇다면 같은 인간이나 이종족이라는 소리인데, 적이 확정된다면?
“회의를 해야겠지만 그냥 둘 순 없겠지. 하지만 조사에 난항을 겪고 있지 않은가. 흔적이 없네. 정령술사들을 이용해서 기억을 읽어보려 해봤지만 죄다 말소되어있더군.”
담담하게 쏘아붙인 내가 바닥에 손을 짚었다.
“그건 걱정 마시고.”
내 말에 멜베크와 다른 몇몇 기사들이 의아한 듯 나를 바라보았다.
“어찌…… 하려고 하는 겐가?”
“정령을 통해서 땅의 기억을 읽을 겁니다.”
부드럽고 느긋한 어조로 말하는 내 모습에 멜베크가 인상을 찌푸린다.
“아니, 자네. 자네를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내 말을 듣지 않았나. 상급 땅의 정령을 통해서도 기억을 읽지 못했네. 누군가가 확실히 지웠……”
“세상에 안되는 게 어딨어요.”
기술을 개발하고 싶으면 공돌이를 갈아 넣으면 되고.
이렇게 땅의 기억을 읽고 싶으면.
[노아스.]
정령왕을 갈아 넣으면 되는데.
크그그그그극!!!
동시에 지면이 뒤틀리며 거대한 흙의 거인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헉?! 저, 저저저저저저저! 정령왕!”
기겁한 기사단원 하나가 털썩 주저앉으며 경악성을 터뜨린다.
그럴 수밖에.
정령왕은 정령사에게 전설과도 같은 존재다. 최상위 정령도 보기 힘든 마당에 정령왕이 대놓고 튀어나왔으니 정령사의 입장에선 숨넘어갈 만큼 놀랄 경험인 건 당연했다.
숨넘어갈 듯 꺽꺽거리는 사내를 향해 멜베크가 놀라 소리쳤다.
“이보게 마르바스! 왜 그러나!”
“정령왕! 정령왕입니다! 세, 세상에 내가 살아서 정령왕을 보다니! 아, 아아!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그쪽이 갈려 나가면 안 되고.
감격까지 한 듯 노아스를 올려다보는 선발대원 마르바스의 모습은 괜한 짓을 했나 싶을 정도로 안쓰러운 모양새였다.
[오랜만이군. 계약자.]
“노아스. 이 일대의 기억을 읽어줘. 범인이 대충 예상은 되는데 납득은 시켜줘야 하니까.”
“데이비 범인을 알겠다고?”
놀란 일리나가 나를 본다.
“뻔하지 뭐.”
내 심드렁한 대답에 노아스는 곧이어 땅에 손을 짚었다.
[기억을 지웠군.]
“그래서?”
[확인하기 힘들다.]
대뜸 답하는 그 모습에 멜베크는 아직 얼떨떨한지 노아스를 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정령왕도 놀랍지만…… 정령왕조차 알아볼 수 없도록 지웠다니. 철저하게 기억을 지웠나 보……”
“찾아봐.”
“엥?”
이어지는 내 말에 멜베크가 하던 말을 멈추고 멍하니 나를 본다.
[뭐라고?]
“찾아보라고.”
담담한 내 요구에 노아스의 표정이 찌푸려지는 것처럼 보였다.
[계약자, 내 말을 듣지 못한……]
“유리아나식으로 굴려줘? 어디서 약을 팔아. 할 수 있는데 귀찮아서 안하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았냐?”
내 정령 술사 스승인 유리아나가 정령을 참 잘 굴렸는데 말이다. 나라고 못할 건 없다.
[빌어먹을 악랄한 여자! 죽어서도 나를 괴롭히는군! 잠시 기다려라!]
노아스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잠시 후.
[확인 끝났다. 기억을 복원시키는 건 보통 귀찮은 일이 아니건만.]
“아예, 말소된 기억을 복원시켰다고?”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기가 막히는지 멜베크가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