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99화
나는 노아스를 갈아 넣을 대로 갈아 넣어 이곳저곳의 기억을 복원시켰다.
놀라울 정도로 철저하게 숨겨놓긴 했다만 그래 봐야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 앞의 촛불일 뿐이다.
불면 훅 꺼질 놈들.
“이럴 줄 알았다면 곧바로 자네에게 도움을 요청할 걸 그랬군. 일 처리 속도가 놀라울 정도야. 내가 다 부끄럽군.”
“바로 확인해보죠.”
그렇게 말하며 영상석을 가동하자 화면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화질은 나쁘지만, 말살 단위로 지워버린 기억을 복원한 것만 해도 기억을 지운 당사자의 입장에선 거품을 물 사안인 건 분명했다.
“……”
영상에 드러난 모습을 본 모두의 시선이 굳었다.
영상에 보인 것은 예상과는 다른 존재.
다름 아닌 성국 문양의 로브를 입고 있는 신관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이들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지만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들을 면밀하게 살폈다.
영상에 보인 것은 궁지에 몰린 기사단원들을 학살하는 사제와 성기사로 보이는 이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있는 용병 같은 인간들이었다.
“저 인간들의 전투방식은 꽤 이질적이네.”
“그 이방인인지 뭔지 하는 이들인가?”
이방인.
즉, 지구 놈들은 이곳을 게임이라 여기고 있다. 즐기는 입장에서 이곳의 생명을 중요히 여길 놈들은 몇 되지 않을 터다.
“대화를 나누는군. 목소리를 복원할 순 없었는가?”
“잠시만요.”
담담하게 말하면 나는 보석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쾅! 쾅! 쾅!!
무식하게 그것을 테이블에 내리쳤다.
지지직! 지직!
그러자 놀랍게도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역시 전자물품이건 마법물품이건 맞아야 말을 잘 들어요.”
내 심드렁한 중얼거림에 보리스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영상석은 꽤 비쌀 텐데……”
장난스런 분위기가 이어졌지만, 들려온 목소리에 모두의 표정이 굳었다.
“이봐요. 의뢰니까 돕긴 하는데 이들이 정말 악신을 부활시키려는 이들이라는 거 맞아요? 암만 봐도 선량한 사람 같은데?”
“자네들에게 해주는 말이지만 겉으로 보는 게 전부가 아닐세. 이들은 전부 이 세상을 전복시키려 하는 자들이야.”
백색 로브를 입은 사제의 말에 젊은 청년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이씨…… 찝찝하게 시리……”
“싫으면 지금이라도 관두게. 보상은 없겠지만.”
“아, 아니 누가 안 한데요? 그래도 저렇게 어린아이들까지 죽일 필요는…….”
“싫으면 관두라니까, 악신을 모시는 이들은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위험하네.”
“아, 알겠어요! 까짓거 뭐 게임에 뭘 바라.”
그렇게 말하며 다시 기이한 힘을 발현하기 시작하는 청년들이다.
그들의 힘은 신기하기 그지없었다. 옅은 빛과 함께 발현된 힘이 기사단원들의 장벽을 마치 부식하듯 부서져 나갔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보리스가 이를 빠득 깨물며 테이블을 내리쳤다.
쾅!!
동시에 충격을 받은 영상석에서 소리가 다시 사라졌다.
“커흠! 커흠!”
놀란 그가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자 나는 미련 없이 다시금 영상석을 집어 들고 몇 차례 내리쳤다.
“사제라니!! 성국의 사제가 어찌하여 우리를 공격한단 말인가!”
격분한 보리스의 말에 멜베크가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일단 소재를 찾아보겠습니다. 인상착의 정도라도 건졌으니 다행이네요.”
“만약 정말 성국에서 벌인 짓이라면…….”
그 말에 보리스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영상 내에 보인 모든 장면은 대부분 비슷했다.
대부분은 사제나 성기사였고, 이방인은 극소수였다.
말없이 영상을 지켜보던 나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딜 가는가?”
“범인 잡아야죠.”
내 말에 모두가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을 그 순간.
검을 뽑아 든 나는 밖으로 나가려던 멜베크의 목에 홍단이를 겨누었다.
“가긴 어딜 가려고.”
내 말에 좌중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는다.
순식간에 멜베크와 함께 온 이들이 무기를 빼 들고 나를 향해 겨누었고 반사적으로 필디르와 일리나가 검을 뽑아 그들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데이비! 무슨?!”
“이게…… 무슨 짓이지?”
보리스가 놀라 소리치고 멜베크가 인상을 찌푸리며 의문을 표했다.
“무슨 짓이냐라…… 범인 잡고 있잖아요?”
내 말에 멜베크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잠시간의 침묵 후에 그가 인상을 찌푸리고 조심스레 물어왔다.
“지금 내가 이 사태의 범인이라 말하고 싶은 건가??”
“아니었습니까?”
“이봐! 모욕에도 정도가 있네!”
“그, 그렇소! 멜베크 상급 기사님이 지금 범인이라 말하고 싶은 건가??!”
“증거도 없이 사람을 이리 몰아가다니! 리인포스 알파의 방식이 이런 것입니까?! 보리스님?!”
그들의 외침에 나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증거도 없이 몰아간다라.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네요. 확실히 잘 숨기긴 했어요.”
담담하게 말한 나는 품 안에서 작은 마석을 꺼내 들었다.
보통 음성 녹음용 저급한 마석이지만 그 안에는 조금 특이한 룬어가 다수 새겨져 있었다.
“이게 뭔지는 나중에 말씀드릴 테고. 솔직히 말하면 곱게 보내드리지요.”
“이봐. 데이비. 장난은 적당……. 흑?!”
깜짝 놀란 그가 움찔거렸다.
홍단이의 검신이 그의 목에 붉은 혈선을 그려냈기 때문이었다.
“날 봐.”
이윽고 존대를 집어치운 내가 그를 향해 말했다.
“……”
“당신 눈앞에 있는 내가 누구로 보여.”
내 물음에 그는 침묵했다.
“누구로 보이냐고.”
“리인포스 알파의 건방진 기사로 보이는군.”
“그 외엔?”
“뭐, 성자라고 말하길 바라는 건가? 증거도 없이 사람을 모함하는 이가 성자라니 성자라는 호칭도 갈 데까지 갔군.”
그의 이죽거림에 나는 싱글거리며 웃어넘겼다.
“데이비! 일단 검을 내리게! 대체 왜 이러는 겐가!”
보리스의 당황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이에 나는 홍단이를 천천히 내렸다.
대신 이기어 검술로 떠오른 청단이의 날카로운 검 끝이 그의 목을 겨누었다.
“세, 세상에 검이 스스로!”
“마, 마검인가?!”
“그래 성자…… 성자 좋네. 검사에 성자. 보리스 선생님 퍽 재미있지 않아요? 보통 성기사처럼 특이한 단련을 한 것도 아닌데 복합 능력을 다루니까.”
내 물음에 대답한 것은 보리스가 아닌 멜베크였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
“내가 재능이 좀 많아요.”
재수 없을 정도로 당당하게 말하는 내 말에 그가 눈을 찌푸린다.
“그 덕분에 내가 흑마법에도 제법 민감하거든.”
사제? 성기사?
개소리.
느긋하게 걸음을 옮긴 나는 피가 묻은 회의실의 벽을 스윽 훑었다.
그리고는 손끝을 코에 대고 냄새를 살짝 맡으며 피식 웃어 보였다.
“이렇게 흑마법 잔향을 남겨놓고 사제라고? 거짓말도 적당히 쳤어야지.”
“……”
“내가 꺼내놓은 게 뭔지 궁금하지?”
내 물음에 멜베크는 내가 꺼내놓은 룬어가 새겨진 보석을 바라보았다.
“오는 길에 하나 만들었는데.”
노아스가 기억을 추출하고 그 기억을 마석에 담는 과정에서 만든 즉석물건이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이윽고 마석을 건드린 내가 마나를 슬쩍 끌어 올리자 그 안에서 노이즈와 함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큰일 났습니다. 대륙의 성자가 합류했습니다. 그의 무력은 정령왕을 소환할 정도. 어떻게 성자가 정령왕을 부리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 이상 활동하다간 꼬리를 잡힐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됩니다.
“이, 이 무슨?!”
“아니?!”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멜베크였다.
굳어버린 멜베크를 보며 빙그레 웃어 보인 내가 조용히 물었다.
“당신이 흑마법을 익히고 있고 이번 사태에 가담했다는 거에 내 돈 전부와 내 모가지를 건다. 당신은 뭘 걸래.”
“자네!”
“판돈은 비슷하게 걸어야지?”
애초에 승패가 정해진 도박에 의미는 없다.
나는 굳어있는 멜베크를 향해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바인드.]
순식간에 마나가 움직이며 그의 몸을 포박했다.
“이게 뭔지 알고 있나?”
나는 룬어가 새겨진 마석을 손가락으로 톡톡 굴리며 물었다.
“흑마법 전언 마법인 [마인드 토크]의 주파수를 저장하는 마석인데.”
“웃기는 소리!! 그딴 물건이 있을 리가 없지 않나!”
“자신감이 넘치네.”
담담하게 말한 내 물음에 그가 코웃음을 쳤다.
“주파수를 저장한다고? 단순 음성 녹음 마석에 룬어 몇 개 그렸다고 마인드 토크의 주파수를 찾아 저장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냐?!”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되니까 있는 거지. 그런데 말이야. 당신. 흑마법에 대해 제법 많이 알고 있는 거 같은데.”
빙그레 웃는 내 미소에 그의 표정이 일그러지고 주변이들의 눈빛에 의심이 서리기 시작했다.
“궤, 궤변이다! 그딴 건 증거가 될 수 없어! 흑마법사는 현재 라스트위스프 기사단 내에서도 상당히 골칫거리들이다! 당연히 그들을 조사하는……!”
“거참. 처음부터 들켜놓고 같잖은 수는.”
짧게 중얼거린 내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럼 이렇게 해보자고.”
담담하게 말한 내가 눈을 살짝 감았다가 떴다.
동시에 흑마법으로 이뤄진 강대한 최면마법이 내 눈을 통해 발현되었다.
“윽?!”
동시에 내 눈에 이채가 서렸고, 나와 눈을 마주친 몇몇 얼굴에 멍한 기세가 돌기 시작했다.
그들 사이엔 나를 바라보던 쌍둥이 자매 중 언니인 샤이르 렌다가 있었다.
보자, 어떤 게 확실할까.
“자. 우선 확인하게 해드릴게. 샤이르 렌다. 오늘 입은 속옷의 색깔.”
“분홍색……”
멍한 얼굴로 답하는 쌍둥이 소녀 중 언니, 샤이르 렌다가 멍하니 답한다.
이후 내가 손가락을 튕기자 그녀의 얼굴에 총기가 돌아왔다.
그러더니 이내 눈을 크게 떴고 그대로 반응을 보였다.
“꺄아아아아악!!!”
수치심으로 가득 찬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주저앉아버리자 필디르가 벌떡 일어나 내게 엄지를 척! 하고 세웠다.
“와씨, 넌 진짜 미친놈이지만 역대급 최고다!”
짜악!!!
동시에 쌍둥이 자매 중 동생인 펜디르 렌다가 핀디르의 뺨을 처 올렸고 루시아 쉘만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필디르의 멱살을 잡아 흔들었다.
“으어억!! 왜 나한테 이래!”
이 사태를 만든 건 나인데 뺨을 맞은 것도 필디르요, 멱살을 잡혀 흔들리는 것도 필디르였다.
그의 필사적인 항변에 펜디르 렌다가 화를 내며 소리쳤다.
“그럼 이 상황에 데이비를 때려?!”
“맞아요! 이건 초대 성녀님이신 다프네님도 절대 용납하지 않으실 거에요!”
이윽고 나는 멍한 얼굴로 나를 보는 멜베크를 향해 입을 열었다.
“보다시피 최면 효과입니다. 적어도 진실을 말할 테니 걱정 마세요. 말해, 몇 명이나 죽였나.”
내 물음에 그가 멍하니 대답했다.
“기사단원 일곱…… 보호 중이던 아이 20명…….”
“자백 고맙다 개자식아.”
[7서클]
[유체이탈]
투웅!!
묵직한 소음과 함께 그의 육신이 무너져 내렸다.
갑작스레 그가 쓰러졌지만, 모두의 시선은 그의 몸을 바라보지 않았다.
대신 내 손에 잡힌 투명하고 흰 것에 꽂혀있었다.
“어차피 죽을 놈 육신은 필요 없잖아? 공수래공수거라고.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가는 건데.”
-으, 으아아아악!!! 이게…… 이게 대체 뭐야!!
기겁하며 소리를 지르는 그를 향해 나는 미소를 지우지 않고 말했다.
“그러니까 빈 머리로 왔으니 갈 때도 머리를 비우고 가라고.”
그렇게 말하면 [공두래공두거]가 되는가? 유체이탈에 사령 마법으로 그의 영혼을 강제로 틀어잡은 내가 섬뜩하게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