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15화
와장창!!!
“꺄아아악!!”
처참한 비명과 함께 분홍빛 머리칼의 여성이 눈을 부릅뜨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하아…… 하아…….”
동시에 소리 없이 다가온 같은 분홍빛 몽마들이 그녀의 몸에 묻은 땀을 정성스레 닦아주기 시작했다.
“여왕님, 어찌하여…….”
“……”
숨을 헐떡이며 인상을 찌푸리던 그녀는 이를 빠득 깨물었다.
“으윽…….”
분명 정신이 링크된 존재일 뿐인데. 지금 얼굴에 느껴지는 화끈한 통증은 엄연히 지독한 공격의 여파가 전해져왔다.
단순히 정신체를 넘어서서 본체에까지 타격을 줄 정도로 섬뜩한 힘.
대체 누가.
안절부절못하며 그녀를 진정시키려 드는 몽마들을 바라본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손을 휘저었다.
촤악!!!
동시에 면사를 쓴 몽마 하나가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다들 꺼져.”
싸늘한 목소리에 몽마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천천히 일어났고, 이내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 뒤 사라졌다.
콰앙!!
이후 벽면을 강하게 후려친 그녀가 천천히 일어났다.
고혹적인 자세로 일어난 그녀는 곧 눈을 번뜩이며 중얼거렸다.
“그 빌어먹을 인간 여자. 마지막 한 수를 숨기고 있었구나.”
당장 찾아가 찢어발기면 되는데.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유시르 들어와.”
이윽고 그녀의 목소리에 문이 열리며 면사를 쓴 검은 머리칼의 몽마 하나가 천천히 들어와 부복했다.
“지하에 가둬놓은 놈들을 모조리 풀어.”
“그것은…….”
“그리고, 검의 사용을 허가한다. 마음껏 날뛸 준비해.”
싸늘하게 말한 그녀는 허공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한쪽 벽면에 걸린 날카로운 가시가 박힌 채찍이 그녀의 손으로 휘리릭 날아들었다.
짜드드득…….
단단한 채찍이 늘어지는 소리와 함께 마르카의 표정에 독기가 서렸고, 한순간 그녀가 채찍을 든 손을 가볍게 휘두르자 엄청난 파공음과 함께 채찍이 지면을 강하게 후려쳤다.
그리고,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그녀의 손으로 빨려들어 온다.
“죽여버리겠어.”
싸늘한 목소리였다.
* * *
몽마의 왕인지 뭔지의 머리통을 날려버린 건 좋은데.
어차피 본체가 아닌 것을 눈치챘기에 일리나에게 맡겼건만.
정신 차려보니 이미 몽마의 여왕의 화신체는 상반신이 사라져 있었다.
“망할, 되는 게 하나도 없네.”
“방금 그거……”
“질문 안 받을 거다.”
이게 다 그 망할 몽마 때문이다.
갑작스레 나타나서 고압적으로 사람 성질 건드린 그 망할 여자.
비록 여성에게 매너를 지키는 신사 같은 본인이라 자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양성을 차별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러니.
이 모든 사태의 책임을 물어, 그 파괴의 마왕인지 나발인지 하는 몽마의 여왕.
내 손으로 지옥 밑바닥에 처박아주리라.
모두 그 여자 때문이다.
이 빌어먹게 더운 지하산맥에 찾아오게 된 것도.
신을 모시는 차원이 다른 곳에서 살 것만 같은 미치광이 리치를 만난 것도.
칭호 해금을 위해 사용한 귀하디귀한 환골탈태 스택 6개를 쓰고도 건진 게 없는 모든 것도.
모두 그 여자 때문이다, 이 말이야.
“피에는 핏값으로.”
환골탈태 스택의 경우 약 100 스택에 한 번의 시도를 할 수 있다. 한차례 성공했으니 더 들어갈지도 모를 일이니 200이라고 잡았을 때 그 결괏값과 기댓값을 계산하고 공간좌표의 이론에 따라…… 시그마 극한값을 대입하고, 거기에 가중적분을…….
“6스택이면 꿀빵이 몇만 갠데…… 그 양이면 빈민가에서 허기를 때울 인간이 몇 명인데…… 망할!”
“저기…… 데이비?”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두 소녀가 보였다.
“너…… 뭐하는 거야?”
기겁한 얼굴로 질문하는 일리나와 다르게 아무 말 하지 않는 리리네는 지쳐 보였지만 눈빛은 일리나와 동일했다.
“가자.”
말없이 둘을 바라보던 나는 겁에 질린 듯 움찔거리는 리리네에게 시선을 옮겼다. 때려죽여도 곱게 협조할 것 같진 않고, 그녀의 협조를 받을 바에 내가 정면 돌파하는 게 빠르리라.
진정해라……. 냉정하게 가는 거다. 방법은 많고 시도수단은 다양하다.
냉정하게 가는 거다.
말없이 내 앞길을 막아서는 마계와의 경계, 혹은 결계라고 불리는 안개에 손을 뻗은 나는 뻣뻣하게 달라붙는 기분 나쁜 분말 같은 안개의 표면을 보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런 거란 말이지.
파훼는 내 전문이요. 냉정하고, 침착하게 일을 처리하는 거다.
그래. 냉정하게.
다 불태워버리겠다.
[나와라, 방화범]
다시 한 번 내 손끝을 타고 초록빛의 정령마나가 거대한 화염의 거인을 불러내기 시작했다.
동시에 어마어마한 양의 정령마나가 폭주하기 시작하며 곧이어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고, 바닥이 녹아내리며 거대한 거인이 녹아내린 용암 속에서 천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화염으로 이글거리는 붉은 팔이 먼저 지면을 짚고 천천히 나오는 그 모습은 소설 속에서나 볼법한 괴물 그 자체였다.
[감히……]
“방화광, 레바테인 좀 빌리자.”
내게 속은 걸 알고 상당히 열 받은 모양이지만, 지금 내가 네 투정을 봐줄 상황이 아니다.
* * *
이프리트.
정령계에 몇 없는 정령왕 중에서도 다른 화염 정령과 다르게 레바테인이라는 특수한 힘을 지닌 정령왕은 오로지 그뿐이었다.
[그게 뭔데 이 방화범아.]
매번 그를 두고 방화범이니 방화광이니 놀리던 계약자가 있지만 해온 짓이 있으니 할 말은 없었다.
하지만 눈앞의 인간은 다르다.
감히 그녀도 아닌 주제에 자신을 소환하고 이용하고, 속인 것도 모자라 감히.
[입을 조심히 놀려라, 인간. 노아스와 엘라임의 얼굴을 보아 계약을 해주었다지만 나는 감히 정령왕을 우롱하는 빌어먹을 인간을 도울 생각은 없다. 게다가 그 명칭은……]
“유리아나만 부를 수 있다 뭐 그런 독점욕이냐?”
소년, 아니 청년의 말에 거대한 화염 손끝에 검을 끌어낸 이프리트가 침묵했다.
[너……]
“눈치가 느리다는 건 이미 몇 번이고 겪어봐서 알고 있고. 됐으니까 따라와 봐.”
담담하게 말한 청년의 표정이 묘하게 달랐다. 처음 그와 만났을 땐 다급해 보였고, 그 후엔 장난기가 가득해 보였다.
하지만 지금 그가 본 이 청년의 눈에 비친 감정은…….
정령왕 조차 움찔하게 하는 분노와 광기가 가득하다.
“네가 유리아나 그 여자와 무슨 연을 쌓았건 그건 너희가 남겨놓은 추억이니 신경 쓰지 않겠다. 다만, 약속은 약속이니 나는 너희들 모두의 생사를 확인할 필요가 있어.”
[그게 무슨 소리지? 마치 네놈이 유리아나를 만난 것처럼.]
“됐고, 이거 보여?”
청년, 데이비의 말에 이프리트는 눈 앞에 펼쳐진 보랏빛 안개를 확인했다. 기이한 힘으로 만들어진 인공안개다.
정령왕의 안목으로 보건대 이건 누군가가 이곳과 저 너머를 차단하기 위해 만든 대규모 마법 결계로 보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힘이 약화 돼서 조금만 찔러도 틈이 생겨. 이런 건 이제 필요 없어.”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아직 인간을 향한 분노가 가지 않은 이프리트가 전신의 화염을 더욱 강력하게 일으키며 묻자 데이비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웃는 얼굴인데.
그 안에 서린 분노에 정령의 화신체가 파르르 떨릴 지경이다.
“네가 불태울래? 아니면, 내가 레바테인을 가져가서 직접 태울까.”
선택은 네 자유지만.
이것 이외에 다른 걸 고르면 어떻게 될지는 내가 지금 장담을 못 할 거 같다.
고작 인간이다.
계약자라곤 하지만 정령왕 정도 되면 계약자라고 해서 그를 헤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육신은 기괴하기 짝이 없지만, 명백히 그는 자신을 소환한 기이한 구조의 정령사.
이런 변수를 남겨놓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당장에라도 이 레바테인을 휘둘러 그를 지워버리는 것은?
머릿속에 복잡한 생각이 감돈다.
하지만 곧 이어진 데이비의 행동에 그는 자신이 보고 있는 이 소년이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몇 초 줄까.”
빙그레 웃으며 말하는 그 얼굴에 분노가 더욱 짙어진다.
그 광기에 정령왕의 정신력조차 뒤흔들릴 정도로 검고 어두운 무언가가 느껴졌다.
[너…… 대체……]
대체 이 인간, 정체가 무엇이기에 이런 기이한 기세를 풍기는 것일까.
또 노아스와 엘라임은 또 왜 이자와 계약을 하는 것일까.
복잡한 생각에 머리가 윙윙 울리고 있던 찰나, 그는 와들와들 떨며 그의 앞에 다가온 작은 자연 정령 하나를 볼 수 있었다.
정령왕의 앞에서 도망치지 않고 모습을 드러낸 것만 봐도 용기가 가상할 지경이었다.
다만 무언가 이유가 있으리라. 말없이 정령에게 가하는 압박을 풀어낸 이프리트는 곧이어 작은 정령의 울림을 들을 수 있었다.
노아스의 손에 의해 태어난 작은 정령 노움.
그 노움이 보내오는 왕의 전갈에 그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계약은 성립되었다. 하지만 나는 네놈의 역량을 믿을 수 없다. 노아스가 전해준 말도 전부 믿을 수 없다. 그러니 보여라.]
유리아나가 만들고, 그녀만이 사용할 수 있던 그 방식을.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초 고열을 띠는 놈의 몸에 손을 뻗어 쑤셔 박았다.
“좋을 대로.”
“데이비?!”
깜짝 놀란 일리나가 타오르는 내 몸을 보며 비명을 내지르지만 나는 방화광, 이프리트의 힘을 전신에 모조리 담았다.
정령과 동화의 극한에 이른 경지의 정령술사가 동화를 이뤄낸 급의 정령과 할 수 있는 유일한 증거이자, 상징이다.
[동화를 실시한다.]
이프리트의 말과 동시에 거대한 화염이 모조리 데이비의 몸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어미어마한 화염 폭풍에 일리나는 반사적으로 리리네의 뒷덜미를 거칠게 낚아채 거리를 벌렸고 곧이어 거대한 화염 회오리가 꺼지기 시작했다.
말없이 손을 내려다보자 멀쩡한 손에 옅은 화염이 머금어진 게 보였다.
마치 화염이 뭉쳐져 사람의 형상을 띤 것처럼 말이다.
[직접 성공하고도 기가 막히는 군, 일방적인 동화라니. 이게 상식적으로 가능한……]
“가능하니까, 네가 소환된 거다. 방화범.”
[……]
정령과의 동화는 정령과 정령사가 오랜 시간 교감을 하면서 이뤄진다. 그것은 등급이 올라갈수록 더더욱 난해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정령은 모르는데 정령사가 일방적으로 동화를 극한까지 끌어올려 동화를 이뤄낸다?
이프리트는 이제는 믿기 싫어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유리아나와 알고 있는 사이이며, 그녀를 통해 자신과의 연결점을 일궈낸 존재라는 것을 말이다.
[제어를 넘겨라. 계약자.]
호칭이 바뀌었다.
[내가, 네놈의 힘이 되어주겠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지금부터 이 빡침을 풀 대상을 찾아갈 거다.”
그 말과 함께 이프리트는 자신과 동화한 인간, 데이비의 손에 모여드는 힘을 보고 기겁했다.
[무슨?! 인간이 어떻게 레바테인을?!]
“내가 이걸 한두 번 써본 줄 아나.”
담담하게 말하며 화검 레바테인을 들어 올린 데이비의 눈이 붉게 일렁였다.
이프리트의 화염은 모든 것을 불태운다.
그리고, 지금처럼 안개 같은 결계는 이프리트의 힘으로 베어버리는 게 가능하다.
물론 결계의 강도가 강해 어지간해선 정령왕의 힘으로도 태우는 게 쉽지는 않지만, 레바테인은 다르다.
모든 것을 태우는 검은 정령왕의 힘을 아득히 넘어서는 검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쩌억!!
거세게 타오르는 화염이 안개를 베어 넘겼고.
잠시 후 주변을 잠식하던 보랏빛 안개는 마치 없었던 것처럼 모조리 불타올라 사라지기 시작했다.
* * *
거대한 동굴을 둘러싼 협곡.
그곳에 수십, 수백의 면사를 뒤집어쓴 몽마들이 자리를 잡았다.
얇은 레이피어를 든 이들은 마치 사열이라도 하듯 협곡에 도열한 채 으르렁거리는 마수들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유시르님. 그가 이곳까지 당도할까요.”
“명령에 번복은 없다. 우린 마왕의 명령에 따르면 그만이야. 그가 나타나면 곧바로 글러트니들을 풀어라.”
“이길 수 있을까요…….”
한 몽마가 불안한 듯 중얼거리자 유시르의 곁에 있던 몽마가 그녀의 목을 강하게 틀어잡아 무릎을 꿇렸다.
“건방진 것, 입을 조심히 놀려라.”
“컥, 커헉……”
“유시르님은 마계에서도 손꼽히는 검귀이시다. 제아무리 인간이라 할지라도 마르카님이 보내주신 마수와 유시르님이 있다면 그 어떤 놈도 이길 수 있다.”
확고한 믿음이 서린 말이다.
실로 그럴 수밖에. 유시르라는 이 몽마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 마르카를 따르고 있지만, 단순 무력만으론 얼마 전까지 마계에서도 손꼽히는 강자였다.
소드마스터를 넘어선 그 실력은 그녀를 귀신이라 부르게 할 정도로 두려움의 상징 그 자체였다.
거대한 안개는 마족이 대륙으로 향하지 못하게 막는 결계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지하산맥의 마물들이 넘어오지 못하게 하는 방어선이기도 했다.
오랜 시간 유지되어온 결계이기에 이것을 부술 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인간은 그곳을 한참 헤매다 이곳으로 흘러나올 터.
몽마들은 곧 나올 인간의 모습을 눈에 새기기 위해 기세를 끌어올렸다.
그때였다.
화르륵…….
무언가 안갯속에서 붉은 불씨가 일렁였다.
“어, 방금……”
그 현상을 목격한 몽마들 중 몇몇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려던 그 순간.
화르르르륵!!
그들은 볼 수 있었다.
거대한 화염이 안개를 마치 집어삼킬 듯 먹어치우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모두가 멍하니 그것을 보고 있던 와중, 완전히 타오르고 사라진 화염 너머에서 한 청년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게 다 너희 상관 때문이라는걸 잊지 마라.”
이윽고 청년의 입에서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면사를 슬쩍 들어 올린 유시르의 눈이 번뜩였다.
“전원……”
“너희들도, 질문, 안 받는다.”
유시르는 첫눈에 알 수 있었다.
눈앞에 나타난 두 명의 인간.
자신이 수발을 들고 있는 몽마의 여왕 마르카는 인간 여자를 조심하라 일렀지만, 실상은 정반대.
몽매로서의 본능이 오싹할 정도로 밀려온다.
강자에게 더욱 매력을 느끼는 몽마의 감은 태생부터 전해져온 특징이다. 그리고 유시르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강한 남성을 보고 오싹함을 느낀 적이 없다.
그런데…….
“퇴각해!!!”
다급한 그녀의 외침과 동시에.
시뻘건 불지옥의 검이 협곡 일부를 불태워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