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36화
갑작스러운 난입에 모두가 침묵한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직 사태파악을 못 한 젊은 영식들은 그녀의 화사한 미모에 얼굴을 붉혔지만 페르세르크의 머릿속엔 생각을 정리하느라 머리 회전하는 소리로 가득했다.
‘달라, 거짓말을 하는 이가 하나. 하지만 데이비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 하나 끼어 있다.
“새아……. 크흠! 왕자비.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느냐.”
새아가라고 부르려다 공적인 자리라는 것을 상기했는지 크리아네스 국왕이 조심스레 불렀다.
물론, 그녀의 직위는 현재 왕자비라고 하기에도 모호한 위치이지만 그것을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이 나라에서 데이비가 하고자 하는 걸 막을 간이 부은 인간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계승권도 잃어버린 왕자이지만 그의 존재는 이 나라를 현재 지탱하고 있는 가장 큰 기둥이었다.
권력이 귀족파 전체에서 데이비 한 명에게 넘어갔다는 것도 틀린 말이 아니다.
“우선 확인하겠나이다. 폐하.”
“유통한 것이 유르바라 공작 영애라는 것이 확실시된다면, 그녀의 처분은 어찌 되는 것이온지요.”
“간악하디 간악하고 악랄한 약을 제조하고 퍼뜨린 죄는 절대 가볍지 않다. 당장 잡아 처형하고 삼족을 멸해야 할 것이다.”
보통 귀족들이나 왕족들은 여러 가지 마약을 하곤 한다.
담배, 약간의 중독성과 흥분을 일으키는 약주, 그 외에 중독성이 그리 크지 않은 각성제까지.
다만, 지금 난리의 근원이 된 이 달맞이 꿀이라는 마약은 그런 약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절대 금지 물품으로 보인다.
법으로 허용하는 마약 수준이 아니라 거의 대역죄인 수준으로 처벌받는 마약을 굳이 이용했다는 건 그 목적이 너무 훤하다.
“유르바라 공작 영애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지요.”
“무슨……”
“그녀는 달맞이 꿀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소리이옵니다.”
페르세르크의 말에 주변에서 술렁임이 커지기 시작했다.
“무, 무슨 증거로 그녀를 두둔하는 것이오! 왕자비! 왕자비께서 알고 계신지는 모르겠으나 왕자비 또한 달맞이 꿀의 복용혐의가……”
“대답해보세요. 유르바라 공작 영애.”
귀족 사내의 말을 무시한 채 유르바라에게 다가간 페르세르크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 그녀에게 물었다.
“영애는 달맞이 꿀의 존재를 알고 있었습니까?”
“아, 아니에요! 저, 전 그저! 영애들과 그 조용한 숲에 갔던 건 단순히…… 다, 단순히 질투 때문이었어요! 맞아요! 데이비 왕자님께 저도 기회를 달라고 부탁하려 했어요! 그리고 페르세르크 양이 평민이라는 말에 울컥해서……”
거짓은 없다.
페르세르크의 미소가 짙어졌다.
‘알고 있었다만. 그래, 본녀가 없는 사이에 데이비에게 꼬리 쳤다는 말을 저리 당당하게 할 줄은 몰랐는데.’
기분이 갑작스레 가라앉으면 그냥 내버려 둘까 하는 생각이 드는 페르세르크였다.
하지만 그녀의 단순 치기로 벌어진 일이 아닌 만큼 확인을 해야 했다.
아주 잠깐 고민을 마친 페르세르크가 다시 입을 열었다.
“거짓은 없사옵니다.”
“거짓을 판별할 수 있다…… 이 말인가?”
“정확히는 보는 것이지요.”
“허면, 왕자비의 말대로라면 저 영애들 중 다른 이들이 거짓을 말한 것인가?”
이어지는 크리아네스 국왕의 질문에 페르세르크는 고개를 저었다.
“다른 영애들 또한 거짓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담담하게 말한 그녀가 빙그레 웃자 귀족들의 표정이 모호하게 변했다.
“한쪽은 거짓이 아니고, 또 한쪽도 거짓이 아니라면, 대체 뭐가 거짓이란 말인가!?”
“근위대의 조사에 따르면 거기서 마약을 의도적으로 유통할 수 있는 이는 단 한 명 뿐이오! 그리고 정황상 차를 대접한 유르바라 공작 영애가 그 가능성이 높소이다!”
“지금 장난을 칠 사안으로 보이시오?!”
와들와들 떠는 영애들을 슬쩍 바라본 채 페르세르크가 다시금 말을 이었다.
“틀림없어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한 영애들은 모두 진실입니다.”
“허면……,”
“그럼, 말을 하지 않은 이가 거짓말쟁이겠지요.”
말을 하지 않은 이.
다른 이들의 외침에 섞여 한마디도 하지 않은 이가 딱 하나 있다.
페르세르크는 곧이어 유일하게 한마디도 하지 않고 스며들어있던 영애의 앞에 섰다.
“다른 이들이 전부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때, 한 명만 입을 다물고 있었지요. 감이 좋은 건지, 알고 있었던 건지.”
담담하게 말한 그녀가 무릎을 꿇고 앉은 금발의 소녀에게 물었다.
“영애, 본녀의 말이 어떠하다 생각되는가?”
마치 왕족이 하대하듯 자연스러운 말투였다.
하지만 그것을 걸고넘어지는 이가 없을 만큼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세실리 영애. 아니지, 본명을 댔는데 거짓이라는 건 본인이 아니라는 소리겠지.”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다시 빙그레 웃었다.
“볼티즈 왕국 귀살대 단장? 그리 사이가 좋지 않은 타국까지 와서 영애의 흉내를 내어가며 이 상황을 벌인 이유가 무엇인가?”
페르세르크의 말에 세실리 영애의 얼굴에 경악이 어린다.
“그……. 아, 아니 무슨 말을 하시는 건가요!”
“특질능력자는 개개인의 힘을 사용하기에 단순히 마나로 간섭해서 그걸 드러내긴 어렵고 감지하기도 어려운 게지.”
페르세르크의 말에 그녀가 인상을 찌푸리고 소리쳤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죠?! 페르세르크양?! 달맞이 꿀 같은 마약을 제가 탔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요?! 그렇다면 다른 영애들께서 제가 약을 타는 것을 봤을 텐데요!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그녀의 외침에 페르세르크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허공에 분말을 뿌려 섞이는 거로 효과가 드러나면 이야기가 달라지는 법이지. 어떠한가? 영애, 본녀가 속내를 끄집어내서 조금 당혹스러웠나?”
담담하게 말한 그녀가 화사하게 웃으며 세실리 영애와 눈을 마주치고 한 손을 그녀의 뺨에 올렸다.
“다른 이는 전혀 모르지만, 데이비는 영애를 의심할 만큼 민감해, 그래서 정보꾼까지 매수해 그에게 잘못된 정보를 주고 의심을 피했을 터.”
담담하게 말한 페르세르크의 얼굴에서 장난스러운 미소가 사라졌다.
“본녀는 누군가가 데이비를 노리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아.”
쿠웅!!!
동시에 어마어마한 마나가 그녀에게서 쏟아져 나오며 주변을 짓누르기 시작한다.
“본디 특질능력자는 마나와 다른 독자적인 힘을 사용하는 초능력자에 가깝기에 단순히 마나로 그 힘을 제어할 수 없지. 다만, 그렇다고 제어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닌 게야.”
주변 전체를 힘으로 짓누르는 건 엄연히 마나였다.
정확히는 그녀가 사용하는 마기였지만, 페르세르크는 생전에 8서클 이상의 마법사였고, 그런 그녀에게 있어서 마기를 마나처럼 위장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끄으윽…… 끄윽!”
“세상에 이게 무슨 마나!”
일반귀족들은 그저 위압감에 당황한 듯 보이지만 궁정 마법사나, 마나를 다룰 줄 아는 급 이상의 존재들은 페르세르크가 내뿜는 마나에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크윽?!”
이윽고 세실리 영애의 몸을 묶고 있던 밧줄이 일순간 끊어졌고 그녀가 반사적으로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려 했다.
휘릭!!!
쿠웅!!
하지만 가볍게 손을 휘저은 페르세르크의 손짓에 따라 세실리 영애의 몸이 지면에 짓눌렸다.
“끄윽…… 꺄아아아악!!”
고통에 몸부림치는 그녀를 가볍게 짓밟으며 페르세르크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생각지도 못한 모습에 놀란 귀족들이 멍한 표정을 짓는다.
“자, 볼티즈 왕국에서 본녀와 데이비를 노렸다는 건 알았으니.”
그녀의 얼굴에 어린 미소는 흡사 사디스틱한 여왕님 같은 미소였다.
“단순한 분풀이인 게야.”
“이, 이 미친?!”
콰드드득!!!
페르세르크가 짓밟은 세실리 영애의 몸을 기준으로 지면이 뒤틀리며 그녀를 짓누른다.
동시에 거대한 힘에 노출된 세실리 영애의 육신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육신은 더욱 늘씬해졌고, 키는 더욱 커졌다.
금발은 순식간에 갈색으로 변했고, 그녀의 얼굴 또한 다른 얼굴로 변했다.
“흉내쟁이. 제법 희귀한 특질능력자로구나.”
페르세르크가 내뿜는 위압감은 도저히 평민이라고 볼 수 없었다.
필사적으로 그녀의 위압에서 벗어나려 세실리 영애였던 이가 발버둥 치지만 페르세르크는 마치 체벌을 내리는 자처럼 싸늘한 미소를 지은 채 그를 처참하게 짓밟았다.
그 미소에 모두가 굳은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유일하게 바리스만큼은 속이 철렁하는 기분이 들었다.
다른 이들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각도 상 그녀가 훤히 보이던 바리스는 유일하게 그녀의 얼굴에 서린 것을 본 것이다.
“내가 방금…… 뭘 본거지?”
그는 자신이 본 것이 확실한지 확인하기 위해 다시 눈을 비비고 페르세르크를 바라보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그의 행동을 저지하는 것이 있었다.
언제 날아왔는지 모를 검은 칼날이 바리스가 기대고 있는 테이블에 날카롭게 꽂혔다.
동시에 그녀와 눈이 마주친 바리스는 곧 페르세르크가 한 손으로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하는 걸 보고 깨달았다.
이 여자, 내숭을 부리고 있었구나.
그쯤 되니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데이비에게 들은 페르세르크에 관한 모든 추억과 이야기들.
그게 과연 그녀의 본모습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그녀의 내숭이었을까.
생각해보면 페르세르크의 겉으로 드러난 성격은, 어떤 의미로는 팔란 제국의 황녀와 비슷했다.
마냥 정의롭진 않지만, 생명을 사랑하는 진실하고 착한 소녀였다. 물론 장난기가 가득하긴 하지만 최근 들어 데이비에게 자주 약한 모습을 보이곤 했다.
물론,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페르세르크의 성격은 어딜 봐도 일리나나 에이리아 황녀의 성격 중 일부를 가져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쯤 되니 싸한 느낌이 들었다.
만약 정말 내숭이라면.
그녀의 진짜 본성은 무엇인가 하고 말이다.
* * *
페르세르크와 영애들이 푸닥거리하던 작은 정원에 들어선 나는 천천히 연못을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이 정원은 사실 아는 이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선 어머니와 함께한 얼마 되지 않은 기억 중 일부였다.
“……지면이 녹았네.”
추억 일부다.
[데이비. 이곳은 이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란다. 언젠가. 네가 힘든 일이 있을 땐 이곳에……]
어머니와의 기억은 많지 않다.
전생의 기억을 각성하기 전에는 그저 그렇구나 했고, 그 후엔 씁쓸함만이 남았다.
지금에 와서도 별 다른 건 없다.
본래엔 그녀를 이곳에 데려와 어머니와의 추억을 이야기해 주려고 했었다.
그런데.
방해가 들어왔다.
“나와.”
내 말에 뒤편에서 스르륵 하며 세 명의 남성이 흑무복을 입은 채 모습을 드러냈다.
“찾으셨습니까.”
“이래서 내가 아이나만 신뢰했던 거야. 망할 그 은인인지 뭔지 빨리 찾아주고 다시 데려오든지 해야지.”
메아리는 일단 손을 잡은 정보 길드지만, 그 내부에 어떤 놈이 있는지 모른다.
페르세르크는 보지 못했지만 아이나가 떠나며 메아리 길드에서 그의 전속 정보원으로 붙여준 인물들이었다.
“지금부터 하나만 질문할 테니 거기에만 답해.”
내 말에 세 사내의 분위기가 변했다.
“왜 거짓 정보를 줬지?”
스릉!!
촤악!!!
반사적으로 독이 묻은 단검을 꺼내 든 사내가 내게 덤벼들어 왔다.
순식간에 피가 튀며 그의 육신이 움찔거렸다.
분명 검을 휘두르고 검을 찔러넣은 건 흑무복을 입은 정보원이었다.
하지만, 피를 뿌리며 무너져 내리는 건 그 사내였다.
“어, 어떻게……”
독이 묻은 날카로운 단검은 내 심장을 관통하기는커녕 피부나 옷을 뚫지도 못했다.
그림과 리퍼가 쐈던 이방인의 힘으로 만들어진 대물 저격용 총을 이마에 정통으로 맞고도 버틴 내가, 고작 옅은 검기만 씌운 어정쩡한 칼에 당할까.
스릉!!
창!!
뒤이어 나머지 두 명이 또 움직였지만, 그보다 빠르게 내가 움직였다.
퍼벙!!!
순식간에 한 명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고, 나머지 하나는 내 손에 목을 붙잡혀 그대로 나무기둥에 처박혔다.
반사적으로 그가 내 관절을 꺾어 내게서 빠져나가려 했지만 나는 그를 슬쩍 놓는 척하며 그의 인중과 명치, 그리고 팔꿈치를 가볍게 후려쳐 그의 움직임을 완전히 와해시켜버렸다.
“커헉!”
그리고 무너져 내리는 그의 목을 틀어잡아 다시 그를 나무기둥에 처박았다.
콰드득!!
무식한 힘을 견디지 못한 나무가 다시금 크게 울리더니 이내 큰소리를 내며 뒤틀렸다.
“분명 질문을 했는데. 공격이 날아드네. 대답할 생각이 없다고 보면 되겠지?”
내 말에 그는 흉흉한 안광을 빛내더니 이내 입에 힘을 주었다.
우웅!!!!
5위계 [정화(Purification)]
망설임 없이 입에 물고 있는 독주머니를 터뜨려 자결할 생각이었던 모양이었지만 그는 눈앞에 있는 내가 누군지 아직 판단을 제대로 못 한 모양이었다.
“독을 해독하는 것도 가능하긴 한데. 정화마법의 원리를 이용하면 독을 잠시 멈추는 것도 가능하거든. 쓸데없이 자결할 생각하지 말고 말해보자고.”
“……”
“말하기 싫어? 보는 사람도 없으니 조금 과격하게 가자.”
[베르샤 표 저주]
[감각증폭]
우웅!! 순식간에 그의 전신에 감각이 극도로 민감해지자 나는 나머지 한 손에 검은 화염을 일으켰다.
“내가 살면서 이거 버티는 놈은 거의 못 봤거든.”
[삼매진화]
[흑마법 저주의 낙인]
[병합기]
[심문의 불]
화르르륵!!!
“끄아아아아아악!!!!”
“시간은 많아.”
페르세르크는 전 마왕이라는 직급에 맞지 않게 너무 순수하고 연약하다. 그렇기에 그녀가 이런 일에 휘말리게 둘 생각은 없었다.
물론, 그녀가 아무것도 모를 만큼 순진한 인물은 아니라지만 천성이 연약하고 정이 많은 만큼 이런 더러운 일은 내가 해야 했다.
“그래, 피 묻는 건 내가 해야지. 자, 아는 대로 털어보자고. 걱정 마! 말하지 않고 죽으면 영혼을 뽑아내서라도 알아낼 거니까.”
정확히는 나와 그녀 둘 다 노린 모양새지만 상관없었다.
“내 와이프를 엮이게 한 대가는 좀 많이 비싸다. 이 새끼야.”
내 분노에 영향을 받듯 주변이 진동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