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44화
현실? 게임이 아니고 현실이라고?
개소리하지 말라고, 그냥 단순히 버그라고 소리치고 싶다.
하지만 어딜 가든 음모론은 존재한다.
소년은 집에 처박혀 있는 동안 인터넷을 통해 많은 글을 봐왔다.
게임을 하다가 행방불명이 된 이들부터 정말로 죽은 이들까지.
단순히 유언비어라는 말을 들었지만,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사라지지 않는 유언비어였다.
실제로 죽은 사람은 없다고 나왔다.
그게 나왔다면 알프 온라인이 이토록 인기를 끄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게임은 즐기기 위해 존재한다.
아파선 안 되고 쇼크를 받아서도 곤란하다.
하지만 이곳은 달랐다.
미성년자인 소년에겐 모자이크가 처리되어야 할 그로테스크한 장면들과 본래대로라면 전해져오면 안 될 끔찍한 고통이 전해져온다든가.
로그아웃이 안 된다는 점까지도.
“으으으!!! 으으으으으으으으!!!”
신이 있다면 이럴 순 없는 것이다.
동생을 향해 매번 미소를 지어주던 저 착한 누나가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게임에서 생긴 버그로 인해 이토록 잔혹하게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그런데 뭐?
현실이라고?
이건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이게 현실이라면.
자신을 대신해 끔찍한 고문을 받다 죽어간 제 누나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으으으으!! 으으으읍!!”
추욱 늘어진 반라의 소녀를 둘러메고 가는 로브의 인간들은 살아있는 인간 같지 않았다.
마치 구울, 혹은 좀비 같은 망자 느낌이었다.
“그 육신은 필요가 없군요. 이방인의 장점은 그 특이한 힘에 있습니다만……. 이미 사경을 헤매고 있다면 별수 없지요. 처분하세요.”
“알겠습니다.”
“뭐, 맹수의 먹이로 주든지 박제를 해서 전시를 하든지 마음대로 해 셔도 좋습니다. 어차피 제가 관심이 있는 건 이분뿐이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수줍은 소녀처럼 다가온 사내는 광기 서린 눈을 번들거리며 매달린 소년의 상처 난 몸을 스르륵 쓸어내렸다.
으으읍!!!
지독한 고통에 소년이 온몸을 비튼다.
이젠 몸을 움직일 힘도 남지 않았는데 눈앞에서 누나가 처참하게 죽어 나가는 걸 봐온 소년에게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힘이 솟구쳤다.
으으으으으으!!
“흐음……. 대화가 안 되니 조금 불편하군요. 뭐 그래도 들리긴 할 테니 들어주세요. 당신을 살려드리지요. 죽어 나자빠져 버린 저 불량품은 쓸모가 없지만, 당신의 힘은 저희에게 쓸모가 있습니다. 이방인들의 힘은 독자적이면서 기존의 시스템을 따르지 않거든요.”
키득거리는 사내의 말에 소년의 눈에 살기와 독기가 서렸다.
죽인다! 반드시 죽인다! 라는 감정이 절절히 묻어나왔다.
“하지만 계속해서 거부하시면, 별수 없죠. 죽이는 수밖에요. 저렇게 말이죠!”
그렇게 말한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소녀를 둘러메고 가던 망자가 멈춰 선다.
그리고는 로브를 천천히 벗어넘겼고, 소년은 그 모습에 경악한 얼굴을 했다.
로브 안에서 드러난 얼굴은 민머리의 사내였지만 살아있지 않은 사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눈이 마치 후벼 판 것처럼 눈꺼풀 채로 시뻘겋게 척출되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자!! 식사시간입니다. 여러분! 거기 그 소녀를 여기 소년분이 관람할 수 있도록 마음껏 씹어 삼켜주세요!”
그 말에 소녀를 둘러멘 괴물이 소녀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을 쩍 벌리고 팔을 물어뜯었다.
콰직!!
끔찍한 소리와 함께 소녀의 희고 고운 팔 일부가 뜯겨 나가자 소년이 비명을 내질렀다.
으으으으으으으으1!!! 으으으으!!
처절한 외침 속에 흑발의 사내는 장난스레 놀릴 뿐이었다.
“그러니까 저희를 도와주시면 되는 겁니다. 물론, 치료도 해드리지요.”
으으으읍!! 으으읍!!!
그 돕는다는 게 어차피 죽는다는 결론이라는 걸 소년은 모르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이 미친놈은 사기꾼이었다.
소녀에게는 소년의 고문을 멈춰준다는 이유로 도움을 약속받았다.
하지만 그 후 소녀는 처참한 지경에 놓였다.
그런 주제에 이제는 소년에게 와서 제 누나의 신변을 걸고 이런 사기극을 펼치는 것이다.
받아들여도 죽고, 받아들이지 않아도 죽는다.
끔찍한 지옥 속에서 소년은 체념한 듯 피식 웃어 보였다.
“음?”
이에 검은 머리 사내가 의아한 듯 그를 바라보자 소년이 입을 뻐끔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모든 것을 포기한 것처럼 말이다.
이에 흑발의 사내가 과장된 행동을 보이며 귀를 가져다 댄다.
“자! 말해보세요! 도와주시겠다구요? 당신의 힘을 저희에게 넘겨주시겠다구요?”
마치 연극이라도 하듯 소리치며 귀를 가져다 댄 사내의 모습에 소년은 죽은 눈빛으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을 벌렸고, 이가 모조리 빠진 피가 뚝뚝 흐르는 입으로 그의 귀를 물어뜯었다.
“……”
치악력을 제대로 발휘하지도 못할 만큼 끔찍한 몰골인 소년이 물어뜯어 봐야 아프기나 할까.
침묵하던 사내는 가만히 귀를 물려있다가 그대로 몸을 떼어냈다.
그리고는 침묵한 채 소년을 바라보다 그대로 소년의 얼굴을 후려쳤다.
“감히!! 감히 감히!! 데스로드를 모시는 신관장 중 하나인 내 귀를 물어뜯어?!”
퍽!!! 퍽퍽!!!
끔찍한 소리와 함께 소년의 육신이 거침없이 들썩거린다.
지독한 타격에 소년의 정신이 몽롱해지고 한쪽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었다.
하지만 사내는 소년을 구타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이제 됐다! 네놈의 힘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으니 죽여서 저들과 같은 구울로 만들어주마!!!”
그렇게 외치며 사내가 품 안에서 기이한 구슬이 박힌 단검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소년의 심장을 뚫어버리려던 찰나였다.
핑…….
옅은 울림이 들려왔다.
크지도 않지만, 마냥 작지도 않은 기이한 소리.
그 소리에 흑발의 사내가 행동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본다.
“무슨 일입니까.”
소녀의 팔을 거침이 물어뜯던 괴물 또한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하지만 보이는 것은 어둠뿐이었다.
“뭣들 합니까. 나가서 무슨 소리인지 알아보……”
스캉!!
명령을 내리던 사내가 멈칫했다.
섬뜩한 절삭음이 그의 귀를 강타한 것이다.
그리고.
잠시 멍 때리던 그의 눈이 부릅떠졌다.
천장이 수십 미터에 달하는 거대하고 두꺼운 천장이.
빛과 함께 수십 갈래로 갈라지며 누군가가 난입한 것이다.
흑발의 사내, 일루미나티의 신관장의 눈이 부릅떠졌다.
“빙고, 찾았네! 개x끼들.”
“륀느, 탐지능력을 매우 높게 평가!”
은발의 소녀가 자랑스레 빈약한 가슴을 펴며 말하자 흑발에 적안을 가진 소년이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러게 말이다. 마침 타이밍이 기가 막힐 때 찾아온 모양인데.”
침묵하는 소년과 팔이 뜯어먹힌 소녀의 모습.
이 사태를 지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흑발의 남자와 로브를 뒤집어쓴 괴물들까지.
“누, 누구입니까?!”
급기야 흑발의 신관장이 경악한들 과장된 어조로 소년을 향해 소리치자 소년은 헛기침을 몇 번 한 뒤 시선을 슬쩍 돌렸다가 말했다.
“축하한다. 네게 네 조직원의 위치를 모조리 불 기회를 주마.”
“무슨 소릴!”
“협조 안 해도 돼. 협조는 알아서 받아갈 테니.”
그 말과 함께.
은발의 소녀가 몸을 살짝 웅크린다.
반사적으로 위험을 느낀 사내가 급히 몸을 움직였지만.
“륀느가 미사일 드롭킥을 채택!”
낭랑하게 소리친 은발의 소녀가 마치 포탄처럼 부스터까지 일으키며 날아들어 신관장의 몸을 벽면에 처박아버렸다.
“륀느, 깔끔하게 제압완료.”
신관장을 벽면에 완전히 처박아 넣어버린 소녀의 말은 정말 산뜻하기 그지없었다.
뒤이어 벽에 매달려있던 소년이 천천히 의식을 되찾았다.
질긴 목숨, 그놈의 게임 스펙이 아직도 남아 그를 살려두고 있다.
그놈의 스킬 덕분에 목숨을 유지한 것이다.
굳은 얼굴로 지면을 바라보던 소년은 이내 하늘에서 쏟아지는 빛과 그 뒤를 이어 쏟아져 내리는 연녹빛의 비를 공허한 눈동자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소년의 뺨에 닿는 연녹빛의 빛줄기가 그의 피부에 닿자 무언가가 타들어 가는 듯한 소리를 내며 연기를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아프지 않다.
소년은 문득 자신의 시야가 서서히 선명해진다는 것을 느끼며 그대로 의식을 놓아버렸다.
* * *
륀느와 내가 큰 고통을 감내하면서 가동한 증폭 마법진과 공명 마법진.
그 결과 나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다량의 데스로드의 힘이 공명하는 걸 찾을 수 있었다.
그 수는 못해도 아티펙트 3개.
이 정도면 후에 따로 증폭할 것도 없이 륀느가 흡수만 똑바로 하면 문제없이 공명 마법진을 사용할 수 있는 정도의 양이다.
이것을 위해 움직였다.
그 과정에서 빠른 이동을 위해 메가로드리아를 소환하긴 했지만 정작 이곳에 도착한 뒤로 그놈이 나설 일은 없었다.
그랜드마스터급 환수가 날뛰면 보통 여파론 끝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산 채로 지면을 베어 넘겨버리자마자 보인 것은 흑발의 사내와 검은 로브를 입은 일루미나티의 잔당들이었다.
그리고, 아직 20대도 되지 않아 보이는 소년이 벽면에 매달려있고 이제 갓 20대 초반 정도가 되어 보이는 소녀, 아니 여성이 피투성이가 된 채 시체처럼 늘어져 괴이한 괴물에게 물어뜯기고 있었다.
검은 머리의 사내의 손에는 내가 찾던 물건인 데스로드의 육신을 이용해 만든 아티펙트가 꽂힌 단검도 보였다.
저건 또 무슨 효능을 가졌는지 모르겠네.
뭐가 되었건 필요한 물건이다. 망가지게 둘 순 없었다.
“륀느, 저 검은 머리 제압해.”
그 말과 동시에 륀느는 미사일드롭킥을 선보이며 그대로 검은 머리의 사내를 벽면에 처박아 넣어버렸다.
뒤이어 그녀를 따라 동굴 내부로 들어온 나는 홍단이를 천천히 뽑아 들며 붉은 검기를 흩뿌렸다.
쏴아아아아아아!!!
그리고
[아뢰옵기 황공한 위대하신 존재여, 이 불민한 자가 당신께 고이 간청을 드리고자 함이오니. 아직 기회가 많은 이의 생을 이리 거두지 말아주옵시기를.]
[8위계 성마법]
[레인 오브 헤븐]
눈앞에서 저렇게 어린아이들이 죽어가는 걸 보는 게 좋은 기분은 아니니까.
당신의 영향력이 약해졌다곤 하나 아직 그 눈이 멀지는 않았고, 그 귀가 먹지 않았을 터.
그 기적에 의지를 실어 가로되.
신께서 한 말씀을 내가 대신 전하리다.
[살아라, 벌레 같은 놈.]
하늘에서 연녹빛의 치유의 힘을 담은 비가 내 의지를 따라 쏟아지기 시작했다.
대량의 치유비가 쏟아지기 시작하며 소년의 육신에 생긴 상처가 서서히 아물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폭우 속에서 나는 생명의 힘에 당황한 듯 주춤거리는 괴인들을 향해 검을 천천히 당겨 겨누었다.
“그으으으으으으!!!!!”
콰앙!!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나를 향해 덤벼드는 검은 로브의 존재들이 나를 포위한 그 순간.
당겨 들고 있었던 홍단이의 붉은 검신이 한순간 번뜩였다.
서걱!!!
소리는 따로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나를 향해 덤벼들던 로브의 괴물들의 육신은 마치 허공에 멈춘 것처럼 그대로 굳어버렸고 내가 검을 털어내자 그대로 어긋나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륀느, 시간 없다. 가지고 놀지 말고 처리해.”
내 말에 흑발의 사내를 벽면에 처박았던 륀느의 한 손에 입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동시에 그것은 커다란 크로우바, 즉 빠루의 형태로 변했다.
“륀느가 빠루를 높게 평가.”
인류의 구원자는 언제나 높게 평가받는 거다. 륀느의 푸른 눈동자에 빛이 서리기 시작했다.
“커헉! 이게 대체 무슨!”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검은 머리 사내가 급히 소리쳤지만, 그가 눈을 뜨고 본 것은 코앞까지 날아든 륀느의 빠루 뿐이었다.
콰아아아아아앙!!!!!!!
어마어마한 폭음과 함께 동굴의 벽면이 일제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