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69화
울드의 등장에 주변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는다.
나는 웃음 짓고 있는 울드를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했던 말이 이런 뜻이었나?”
[네 곁에 있는 금발의 인간을 노리는 이가 있어, 조심하는 게 좋을걸?]
다만, 그녀는 언제 무슨 일이 어떻게 터질지 자세하게 알려준 바가 없기에 대처가 힘들었다는 점도 있었다.
아니, 적인 그녀의 말을 함부로 믿을 수 없다는 점이 안일한 대처의 원흉이었다.
“후우…….”
“이제 믿을 마음이 조금 들어?”
“들어는 보지.”
이것조차 계략일 수 있지만 그렇게 파고들면 끝도 없어진다. 그러니, 단서를 최대한 찾는 수밖에.
“베르단데를 돌려줘, 그렇게 해준다면 이번 사태의 전말을 알려줄게.”
“거절하지, 어떻게 된 건지는 알 것 같으니.”
페르세르크의 권능을 속인 건 제법이었다만, 그게 거짓이라면 대충 감이 잡히기 시작한다.
내 거절에 울드는 잠시 침묵하더니 이내 강수를 두었다.
“너와 우리가 벌이는 이 전쟁에서 스쿨드와 나는 빠지겠어.”
“뭐?”
“그렇게 하면 돌려줄 건가?”
어째서 베르단데를 그렇게 찾는 것일까.
심연의 공주들의 생태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한 신의 파편에서 나온 이상 모든 심연의 공주나 심연의 존재들은 하나와 같다.
가족애를 들먹이고 싶으면 지금까지의 심연의 공주들의 행동은 이상한 점이 너무 많다.
“이번 분쟁에서 빠지겠다?”
“그래, 결과가 어떻게 되건 전혀 간섭하지 않겠어.”
혹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심연의 공주가 둘.
하나는 지금까지 만나본 심연의 공주들 중 하드웨어가 압도적이었던 한 명, 그리고 또 하나는 직접적인 전투계열은 아니지만, 힘을 분석하고 해킹하는 능력이 있다.
“적어도 둘이야. 제법 흥미로운 거래 아닐까?”
“왜 그런 거래를 하는 거지? 그냥 뒀으면 한참을 빙빙 돌았거나 이쪽에서도 큰 타격이 있었을 텐데?”
심연의 권능이 뚫렸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그럴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내가 말리면 말릴수록 울드가 베르단데를 찾을 확률이 높아진다는 소리였다.
그럼에도 거래를 걸어온다는 건…….
“심연이 이겨도 네게는 큰 도움이 안된다는거네.”
“…….”
내 대답에 그녀는 잠시 침묵했다. 확실히 신들은 그녀 세 자매를 헤라클래스의 흔적이라 말한 바 있으니까.
그리고는 이내 픽 웃어 보였다.
“어떻게 할래?”
굳이 거부할 이유가 없다. 베르단데는 감시대상이지 필요인질이 아니니까.
이제야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이 제 양 어머니와 함께 살 수 있게 된 그리드 전 국왕이 반발하겠지만, 베르단데가 심연의 공주 출신인 이상 아무리 과거에 무슨 일이 있어, 그녀가 이 티오니스 대륙에 정을 붙이고 있다 할지라도, 변절의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러니.
“x이나 먹으시지,”
나는 환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화답해주었다.
* * *
재수가 없으면 엎어져도 뒤통수가 깨진다고 했던가.
“메아리, 이 새끼들 일 처리 진짜 못하는구나.”
아이나가 있었다면 이런 정보 미스는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메아리 길드원은 일리나가 축복의 석을 가지고 오크들을 찾아갔다고 말했다.
그들이 사용하는 특수한 마법은 이번 일의 원흉이었다.
물론, 오크들이 이것을 노린 바는 아닐 테지만.
“그들이 거짓말을 한 건 아닐 텐데.”
“위장한 모습을 보고 착각한 거겠지. 망할, 도움 안 되는 새끼들!”
이 창의성 없는 놈들.
아이나를 처음 정보원으로 써먹었던 건 정말 제대로 된 선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는 정보에 관해서 미스가 거의 없는 편이었으니 말이다.
“하아, 골치 아픈 게야, 증거들이 모두 일리나가 범인이라 말하고 있으니, 여기서 그대가 아니라고 해본들…….”
가장 좋은 방법은, 이 일을 묻는 것이다.
하지만 일리나에게 덧씌워진 악명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딴 함정에 놀아나 소중한 영지민을 죽인 사태를 무마시킬 생각은 티끌만큼도 없다.
내가 그녀를 객실에 유폐한 이유는 쓸데없는 짓을 해서 일을 더 키우지 말라는 뜻도 있었지만.
페르세르크가 아닌 굳이 일리나를 노린 범죄라는 점을 생각할 때 상대측이 일리나를 2차적으로 공격할 가능성도 있다는 판단하에서였다.
물론, 이런 과격한 과정 때문에 일리나가 나를 부득부득 씹고 있어도 할 말은 없는 상황이다.
“오늘 밤까지는 시간 좀 남았지?”
“음?”
내 물음에 페르세르크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나는 답해주지 않았다.
결혼식의 후반부를 방해받았는데 이제는 그 후까지 방해를 받는다?
절대 사절이다.
“한 시간 안에 이 사태를 끝내자.”
이 사건의 주요 범인은 하나.
엿이나 까잡수라 말했지만, 울드는 내게 이번 일의 전말에 관한 힌트를 몇 가지 더 던져주었다.
그리고, 쓸데없는 복잡한 문제를 떠나 단번에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힌트 또한 주고 떠났다.
[심연의 공주는 몰라도, 다른 것들은 네 곁에 있는 저 여자를 어떻게든 데려가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지. 그건 단순한 욕망이 아니야. 본능에 기인한 염원 같은 거지. 하지만 지금 이 사태를 일으키는 녀석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거든.]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쉽게 말해서 네 주변을 서서히 깎아내릴지도 모른다는 뜻 아니겠어? 내가 해줄 이야기는 여기서 끝.]
덜컥.
내가 들어서자 떠날 준비를 하고 있던 렌도스 황자가 나를 바라본다.
“곧바로 돌아가시는 겁니까?”
“예, 일리나의 일을 본국에 보고해야 하니까요. 팔란 제국의 명예를 실추시켰으니 극형까진 아니더라도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할 겁니다.”
그렇게 말한 그는 다시금 짐 정리를 시작했다.
“렌도스 황자님.”
“예.”
“화이트버드의 통솔권한도 박탈당하겠죠?”
내 물음에 그가 멈칫했다.
“왜 그런 걸 물어보시는지…….”
“그거 때문 아니었습니까?”
내 물음에 그가 나를 바라본다.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뇨, 정황을 보다 보니 조금 황당해서 말입니다.”
침묵하는 그를 무시한 채 나는 뒷짐을 지고 걸음을 옮겼다.
“황당하다라…… 무엇이 황당하죠?”
“일리나가 했다고 하기엔 너무 앞뒤가 안맞아서요.”
내 말에 그는 의아한 듯 나를 보며 물었다.
“글쎄요, 일리나가 왕자님과 각별한 사이인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죠. 일리나의 명예가 추락한 것도 문제지만, 저는 이 영지의 영지민 하나하나가 너무 소중합니다. 그런 이를 죽음에 이르게 했으니 대가는 치르게 해야죠.”
“그걸 제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그가 눈을 찌푸리며 물었다.
“황자님께서 조금 뒤집어 써주시죠.”
내 말에 그의 표정이 대뜸 굳었다.
그리곤, 한참 동안 침묵하는 듯 하더니 헛웃음을 흘렸다.
“이야기는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제가 그렇게 해야 할 이유도 의리도 없거니와, 일리나의 범죄는 명백합니다. 비록 동생이지만 이런 질이 나쁜 장난질은 오라비로서 넘길 수가 없어요.”
“그렇죠. 질이 많이 나쁘죠. 대체 몇 명을 기만한 건지.”
“왕자님.”
싸늘해진 어조로 그가 나를 불렀다.
“제게 왜 이러시는 겁니까.”
“반대로 물어봅시다. 렌도스 황자.”
스릉…….
나는 사자를 베는 푸른 검, 청단이를 천천히 뽑아 들며 그에게 물었다.
“대체 내게 왜 그랬습니까.”
“…… 하…… 하하하 농담이 지나치시네요. 이 일을 마치 제가 했다는 듯 말씀하시는 게…….”
“맞으니까 찾아왔지요.”
“…….”
내 말에 그의 얼굴에 오싹함이 어린다.
“하하하하하. 뭔가 착각하신 듯 합니다. 일리나가 오크 마법사들을 통해 축복의 석에 저주를 담은 것도, 페르세르크 왕자비께서 하신 장식에 그 효능을 증폭시키는 능력을 담아둔 것도 확실할 텐데요.”
그의 말에 나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모든 정황이 일리나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가지고 있는 거짓말 탐지기에서도 일리나가 범인이라 말하고 있죠.”
내 말에 눈을 찌푸린 그가 나를 노려보았다.
“잘 알고 계신 분이 지금 억지를 부리는 겁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렌도스 황자.”
내 부름에 그가 멈칫했다.
“아니지, 연가시. 내가 언제 페르세르크의 머리에 있던 장식이 그 효능을 증폭시켜주는 거라고 공표했던가?”
“…….”
“일리나가 오크 마법사들에게 찾아간 사실도 공표한 적이 없는데.”
내 말에 그가 침묵했다.
“뭐 이런 말장난은 사실 의미가 없으니 본론으로 들어가지.”
내 말에 그가 눈을 부릅뜨며 움직인다.
[마령검]
[발검술]
[가지치기]
쩌억!!
마치 살점을 아주 얇게 떠내듯 푸른 검이 그의 몸을 한 차례 베어 넘겼다.
비록 청단이가 비 물리 법칙을 베어 넘기는 검이라지만 예리도가 홍단이에 못 미칠 뿐 검은 검이다.
그럼에도 그의 몸엔 상처하나 나지 않았다.
“그래, 심연의 권능이 내게 거짓말을 했을 거라는 것을 알지만 않았으면 제법 속 시원하게 속아 넘어갔을 거다.”
“커헉!!”
“렌도스 황자의 몸을 집어 먹고 참 재밌는 짓을 하네.”
바닥에 쓰러진 렌도스 황자의 몸이 경련하기 시작한다.
동시에 그의 몸에서 희끄무리한 액체 슬라임 같은 것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끄르륵…… 끄륵…….
물컹물컹한 형체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자 나는 놈을 짓밟았다.
콱!!!!
동시에 희끄무리한 형체가 된 렌도스, 아니, 렌도스 황자의 몸에서 나온 것이 움찔거렸다.
“도망 못 치겠지? 이야기 못 들었나? 금기의 업은 너희들의 힘만큼 독불장군 같은 힘인데.”
신의 힘조차 거부하는 완전히 독립된 힘.
그 대상은 심연도 가리지 않기에 놈들에게 치명적이다.
“크륵…… 어…… 어떻게?!”
심연의 형체, 연가시가 내게 짓밟힌 채 끓는 목소리를 냈다.
정확히는 울드가 말해준 진실 속에서 답이 나왔지만, 놈에게 그걸 말해줄 이유도, 의리도 없다.
“글쎄, 그걸 내가 말해줘야 할 이유나 의리가 있나?”
렌도스의 탈을 쓴 연가시가 했던 말, 그대로 되돌려주자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르르르륵…….”
내 말에 움직이지 않던 녀석의 형체가 서서히 끌어 오르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운 좋은 놈!!”
그리고, 끓어오르던 형체가 마치 폭발할 것처럼 기포가 되어 부풀어 올랐고, 서서히 거대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이상 네놈에게 큰 저주를 심어주마!!”
내가 저주면역이라는 걸 심연은 모른다.
베르샤도 그저 내가 슬리지아를 죽일 정도로 막대한 힘을 사용해 죽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까.
폭발할 것처럼 부풀어 오른 연가시의 모습에 나는 청단이를 다시 한번 빙그르르 돌린 뒤 역수로 틀어쥐고 기수식을 잡았다.
“신혼 첫날부터 피 뿌리게 하지 마, x자식아.”
쩌억!!!
푸른 잔상이 검은 금기의 힘을 머금고 방출된다.
순식간에 놈의 몸에 스며든 그 힘은 심연이 으레 가지고 있는 고유의 방어능력을 모조리 개무시하며 파고들었고, 놈의 핵이 되는 근간을 파괴했다.
“꺼헉…….”
“일리나의 입지를 좁히고 화이트버드를 장악하려 한 모양인데, 왜 그걸 노리고 그렇게 했는지는 묻지 않으마.”
관심도 없고, 이유도 이미 알고 있으니까.
“그아아아아아악!!!”
생각지도 못한 치명상에 놈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애초에 무력에 한해선 심연의 공주보다 일반 심연의 존재들이 압도적으로 약할 수밖에 없다.
심연의 공주도 쉽게 막아내지 못하는걸 이런 놈들이 막아낼 가능성은 실상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과거라면 몰라도, 환골탈태를 하면서 경지와 깨달음의 이해를 더욱 실천하기 쉽게 된 내게는 이제 이놈들은 큰 위협이 되는 무력이 아니다.
“여…… 여왕…… 님…….”
죽어가며 페르세르크를 부르짖는 녀석에게 나는 쏘아붙이듯 말했다.
“내 와이프는 너희들 여왕이 아니라 내 꺼야, 이 새끼들아.”
연기가 되듯 흩어지는 놈을 말없이 바라보던 나는 곧이어 내 어깨에 앉아있다가 모습을 드러낸 페르세르크를 바라보았다.
“이제 저 남자를 어떻게 할 건가?”
“기절한 척 하는 거야.”
내 말에 렌도스 황자의 몸이 움찔거린다.
“울드가 해준 힌트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거든.”
그녀는 연회장에서 나와 처음 만났을 때. 렌도스 황자를 보며 그렇게 말했었다.
[아아, 악의가 가득해.]
일을 저지른 건 연가시였지만.
렌도스 황자는 그 연가시와 동조해 화이트버드의 통솔권한을 빼앗으려 한 자다.
이번일 모를 수가 없다.
“그렇지 않습니까 렌도스 황자?”
내 미소에 쓰러져 있던 그의 눈이 부릅 뜨여졌다.
“황자의 선택권은 두 갭니다. 여기서 죽던지.”
“…….”
“아니면, 잘못을 시인하던지. 참고로 황족이라서 함부로 못 죽인다 뭐다 이야기 나올 거 같아서 드리는 말이지만.”
그딴 건 나는 모르겠고.
살기가 뒤섞이자 그의 표정이 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내가 정말 자신을 죽일 거라 생각한 표정이었다.
동시에 그는 몸을 벌떡 일으키며 내게서 뒷걸음질 치고 양손으로 진정하라는 재스쳐를 취했다.
“하…… 하겠소! 내가 잘못을 시인하겠소! 전부 함정이오! 내가 일리나가 가진 화이트버드 기사단의 통솔권을 빼앗기 위해 정체불명의 존재와 계약을 했었소! 그의 힘을 빌리면 확실하게 당신을 속일 수 있다고…….”
“그렇죠. 진짜 속아 넘어갈 뻔했으니.”
연가시의 능력은 기생도 있지만, 페르세르크의 권능을 속인 건 가볍지 않다.
그의 외침에 나는 빙그레 웃으며 품 안에서 꺼낸 통신용 수정구를 그에게 보여주었다.
“살리반 황태자. 그토록 아끼는 동생을 물 먹이려는 자인데, 어떻게 할까요”
내 말에 수정구 속에서 한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팔란 제국의 황태자. 살리반 데 팔란이다.
“혀…… 형님?!”
기겁한 얼굴로 렌도스 황자가 눈을 부릅떴다.
[그놈이 제국으로 돌아오는 그 순간, 나는 모든 방법을 총동원해 저놈을 죽일 겁니다. 원수를 빼앗길 생각은 없으시겠지요.]
맞아요. 이놈의 목숨은 내껍니다.
그의 말에 렌도스가 눈을 부릅뜨며 무언가 소리치려 했다.
하지만.
그의 외침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이미 그의 머리가 허공을 날고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