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70화
륀느와 어벤저 편대 두 골렘의 사이에서 감시당하는 입장인 일리나는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흑…… 흐흑…… 나쁜 새끼…… 나쁜 새끼…….”
그녀는 자신이 아니라 계속해서 결백을 주장했다.
하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너무 억울했던 탓에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일리나! 그 자식 나쁜 자식이야! 같이 지내온 시간이 얼만데 이렇게 헌신짝처럼 버릴 수가 있어?!]
칼디라스가 악악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지만 일리나에겐 배신감보다 슬픔이 앞섰다.
믿는 사람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다른 이들 모두가 손가락질해도 그가 그녀를 믿지 않는다는 사실은 너무 고통스러웠다.
든 자리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하던가.
다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런 상황이 되니 눈물이 안 날 수가 없다.
덜컥…… 덜그럭.
그때 그녀가 유폐된 객실 문이 열리며 익숙한 인물이 들어왔다.
“페르 언니…….”
“일리나.”
“나, 나 아니에요. 정말 아니라구요!”
그녀는 결국 설움이 폭발했는지 엉엉 울며 페르세르크에게 안겨들었다.
“괜찮아……괜찮아…….”
“그런데…… 그런데…… 데이비가…….”
“나 여기 있다.”
뒤이어 등장한 데이비를 본 일리나가 다시금 흐느끼기 시작했다.
“흐어엉!!”
그리고는 서럽게 울며 그에게 달려들어 그대로 안겨들 듯 붙잡고는 소리쳤다.
“데이비! 나 아니야! 정말 나 아니야!”
“진짜로?”
“아니야, 아니야!”
“그래, 믿어줄게.”
믿어준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계속해서 아니라는 말만 반복했다.
사람 마음 갈대라곤 하지만 신념에 반하는 일을 해내는 건 사실상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일리나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누명을 뒤집어쓴 게 너무도 억울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대상이 다른 이도 아니고 그 사람이라면 더더욱.
“진짜로?”
“그래.”
가장 믿고 믿음을 받고 싶은 대상이 보내는 싸늘한 시선은 그녀에게 생각 이상의 공포를 주었던 모양이었다.
“흥, 그런다고 내가 헤벌레할 줄 알면 큰 오산이야! 너 실수한 거야 나한테!”
“그대로 뒀으면 네가 더 큰 사고를 쳤을 테니까.”
데이비의 말에 그녀가 움찔거렸다.
“무…… 무슨 말이야?”
“데이비는 그대가 혹여 더 수렁에 빠질까 봐 재빨리 그대를 빼돌린 게야.”
뒤이어 나선 페르세르크가 나서 그녀를 끌어안고 다독였다.
“착하다, 착해. 데이비가 다 처리했으니 이제 안심하려무나.”
“흑…… 흐흑…… 나…… 난 무서웠는데…… 그렇게 아무도 안 믿어주는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
“그래, 그래. 착하구나.”
페르세르크는 데이비에게 자리를 비우라는 눈치를 슬쩍 보내왔고 그런 태도에 그는 뭔가 불만스럽게 바라보다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데이비 님. 접근하는 기척이 하나 있었다고 보고.”
“음…….”
겉보기엔 너무 완벽하게 페르세르크를 노린 암살 시도였다.
하지만, 연가시의 목적도 목적이고 이번 사태에 있었던 몇 가지 이상 움직임을 보면.
‘이놈들, 일리나를 노리고 있다.’
꿩 대신 닭이라고, 일리나를 노렸다고 하기엔 말이 되지 않는다.
“특징은?”
“그저 기척만 출현, 륀느의 전자기장 필드에 진입하자마자 후퇴했다고 보고.”
진화를 거듭하는 륀느가 최근에 이르러서야 내면의 전력을 펼쳐내는 전자기장이다.
보통사람에겐 기별도 가지 않을 만큼 은밀하지만, 륀느의 의지에 따라 전투 의사가 섞이면 대번에 치사성 높은 전기장으로 변하는 것도 한순간이다.
당연히 륀느는 위장형식으로 펼쳐놓았고.
그것을 느꼈다는 건 보통존재는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래.”
일리나가 가지고 있는 화이트버드의 통솔권한을 노리던 렌도스의 욕망.
그것을 이뤄주는 척 페르세르크를 노린 것 만 보면 일리나는 그저 휘말린 대상이지만.
이번만큼은 감이 그게 아니라고 부르짖는 기분이다.
* * *
일차적으로 문제가 해결되자 남은 것은 노곤함이었다.
축제 분위기는 묘하게 돌아가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 취소할 순 없었다.
“편히 쉬어라.”
단단한 목재 관을 내려다보며 내가 중얼거렸다.
이번 사태에 휘말려 희생된 수인족 남성, 바트의 시신이 관속에 담겨있었다.
“전원, 발검.”
이윽고 관 위에 백색의 국화를 올려놓은 내가 천천히 입을 열자 몬미더를 포함한 영지 근위대가 일제히 절도있는 자세로 발검한 채 검 끝을 하늘로 직각 향하게 했다.
“비록 명예롭다고 할 순 없지만 소중한 영지의 가족이었다. 모두 조용히 명복을 빌어 주도록.”
내 말에 가장 먼저 나선 것들은 시종들이었다.
수인족 시종들은 말없이 국화 한 송이를 가져와 관 위에 올려놓고는 조용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하나둘.
계속되는 행렬 속에서 관 위엔 새하얀 꽃밭이 만들어졌지만, 그 행렬은 끊어지지 않았다.
희생된 수인족 시종 바트의 존재는 사실 그렇게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저 일개 시종이다.
하지만 영지의 가족이었기에 근위대, 시종, 시녀, 가릴 것 없이 모두가 찾아와 국화 한 송이를 가져다 놓았다.
장례식은 엄숙하게 진행되었고, 그중에 누군가가 울음을 터뜨려도 나는 그저 감정을 토해내게끔 놔두었다.
그중에는 이번 일에 휘말렸던 일리나도 있었다.
황족 출신이지만 고작 수인족 시종하나를 위해 찾아온 그녀는 말없이 관 위에 새하얀 국화를 올려놓으며 조용히 말했다.
“나 때문에…… 미안해요. 부디, 좋은 곳으로 가세요.”
그녀의 말에 몇몇 시종들이 감동한 듯 그녀를 바라본다.
하지만 일리나의 시선은 오로지 관에만 꽂혀있었다.
“당신의 희생…… 절대 잊지 않을게요.”
엄숙하고 조용하게 장례식이 이어졌다.
“전원, 검! 받들어!”
이윽고 몬미더의 외침에 근위대가 절도있게 검을 내려 세웠다가 다시 올린다.
그리고는 하늘을 향하듯 비스듬히 뻗어 올렸다.
뒤이어 시종들이 나서서 바트의 시신이 담긴 관을 조심스레 들어 올렸고, 조용히 관을 진 채 영주성 밖으로 떠나갔다.
장례식은 엄숙하고 조용했다.
* * *
보통 어떤 귀족도, 왕족도 혼약을 하는 경사스러운 날에 평민의 장례식을 허락하지 않는다.
영지에 재수 없는 일이 부부의 관계에 혹여라도 악영향을 미칠지 모른다는 미신 때문이었다.
본인과 관련이 없는 일에도 장례를 치르지도 못하게 하는 게 정상이지만.
이곳은 달랐다.
혼약을 치른 영주가 직접 나서서 장례식을 주관하고 성자의 이름으로 시신과 억울하게 죽어간 혼을 달래주었다.
고작 평민인데도. 영지를 위해 일하고 죽은 이를 기리기 위해 어디 한 나라의 귀족의 장례식에서나 볼법한 엄숙한 모습을 연출해냈다.
거짓이라도 평민들에겐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영지를 위해 일하면 저렇게까지 대우를 받는구나.
의욕의 고취.
그리고 평민 하나를 위해서 미신이고 뭐고 모든 것을 내버려 두고 장례식을 진행해준 영주이자 그들의 왕자를 향한 믿음이 샘솟았다.
기본적으로 하인스 영지는 지지율이 굉장히 높은 영지라 할 수 있다.
외부에서 온 이들은 쉽게 그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거의 광신도에 가까울 정도로 데이비를 따르는 영지민들과 이런 일이 겹치자 하나둘 개심하듯 데이비를 믿고 따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영지민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명예로운 기사가 순직했을 때처럼 길가로 나왔고 근위병과 시종에 의해 옮겨지는 관이 지나가는 길에 새하얀 국화를 뿌렸다.
그렇게 수많은 이들의 애도를 받으며 떠나간 바트의 관은 곧 정갈하게 만들어진 화장터에서 새빨간 화염으로 불타올랐다.
* * *
사람 마음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모두 다르다고 했던가.
많은 일이 있었다.
살리반과 이야기를 나누어 일리나를 공식적으로 하인스 영지에 체류시키기로 결정을 내린 나는 그녀를 하인스 아카데미의 고등부 첫 학생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된 이상 학생을 더 받지 않겠냐는 변명도 소용없어진 꼴이다.
물론, 그런 귀찮은 요소를 일리나 한 명의 목숨과 바꿀 가치는 얼마든지 있기에 나는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그녀를 학생으로 받아들였다.
우려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건 지금 신경 쓸 문제가 아니었다.
외려 지금 신경 쓸 문제는.
“후우…… 후우…… 긴장하지 말자. 데이비 올라운.”
양손으로 뺨을 착착 때리며 나는 긴장한 얼굴로 숨을 몰아쉬었다.
그 어떤 경우에서도 이렇게 온몸이 떨리고 숨이 가빠진 적은 없었을 것이다.
전생의 삶 20여 년.
현생의 삶 17년!
그리고. 회랑에서의 천년.
무려 1030년이 넘는 삶이다.
그 삶 동안 모태 솔로로 살아왔으니.
긴장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너무 긴장하지 마십시오. 남자는 자신감입니다.”
내 모습에 긴장을 풀어주려 했는지 와인을 가져와 준 베르닐 시종장이 허허 웃으며 말했다.
“웃겨 시종장?”
“솔직히 저하께선 이 노친네가 생각할 수 없는 많은 일을 해주셨습니다.”
“…….”
“하지만 지금 모습을 보니 역시 저하도 사람은 사람이구나 싶은 생각이 드는군요.”
그는 손자의 재롱을 보는 듯 허허 웃어 보였다.
“저하.”
“왜.”
손톱을 물어뜯는 내 모습에 그가 조용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잊지 마십시오. 남자는 자신감입니다. 절대 꿀리지 마십시오. 모든 것은 저하께서 옳사옵니다.”
“시종장.”
“부부의 첫 합방은 전쟁이라 해도 무리가 없지요. 부디 건투를.”
그렇게 말하며 떠나가는 베르닐 시종장을 보며 나는 숨을 크게 몰아쉬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래. 삼천 년 모태 솔로보다야 내가 더 낫지. 암.”
“닥쳐 데이비.”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내가 고개를 돌리자 검은색의 네글리제를 입은 채 시선을 회피하고 있는 소녀가 보였다.
너무도 아름다운 그 모습에 멍하니 그녀를 지켜보고 있자 그녀가 천천히 붉어진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그…… 그대도 천년 모태 솔로였으니까. 별 차이도 없는 게야.”
천년 모태 솔로와 삼천 년 모태 솔로.
사실 이쯤 되면 어느 쪽이 잘났다. 못났다 할 수준이 아니었다.
“뭐……뭐부터 해야 하지?”
분명 초야를 치르는 부부가 해야 할 의식에 대해 들은 것 같은데.
나는 머릿속이 백지장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페…… 페르?”
“무…… 묻지말아! 보, 본녀도 지금 기억이 안 나니까…….”
내가 앉아있는 의자의 맞은편에 앉은 그녀가 와인잔을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떨리는 손으로 와인잔의 코르크 마개를 무식하게 손으로 열려는 행동을 보였다.
“끄응…….”
당연히 빠질 리가 없으니 끙끙대던 그녀의 눈에 불이 튄다.
챙강!!!
동시에 열이 뻗친 그녀의 손에 검은 마기가 몰려들고 그대로 수도를 내리쳐 와인의 목을 날려버린 그녀가 바들바들 떨었다.
“이…… 이렇게?”
“아닌 것 같은데…… 일단 마시자.”
얼굴에 피가 쏠려 시선을 마주하기도 힘든 느낌이다.
페르세르크도 마찬가지인지 서로 잠시 침묵하던 나와 그녀는 곧이어 말없이 빈 잔에 와인을 따르며 말했다.
“나이 먹고 이게 무슨 짓인지…….”
“내가 할 말이다.”
천년 단위의 모태 솔로들이 벌이는 초야의 방은 그야말로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떨리는 손을 뻗어 잔을 가볍게 부딪친다.
그리고는 서로 시선도 마주하지 못한 채 와인을 벌컥벌컥 들이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