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72화
케인의 등장에 나는 짜증 서린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베어버린 연가시의 흔적이 또 발견되었습니다. 죽기 전에 여기저기 자신의 흔적을 남겨두었던 모양입니다. 그냥 두면 아마 큰 사고로 번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 알아서 처리해.”
내 말에 그가 벙 찐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예?”
“심연과 싸우기 위해 만들어진 놈들이라면서. 그럼 너희 실력도 보여줘야 믿지.”
내 말에 그는 잠시 침묵했다.
“뭐, 좋습니다. 잔재 따위 처리하는 건 어렵지 않죠. 다만 당신도 당신의 일을 해주십시오.”
“야.”
“당신이 말하지 않았나요. 신혼여행을 떠나실 거라고.”
그가 말을 이었다.
“당신이 다녀올 동안 이곳을 지키는 건 제가 할 겁니다. 심연을 죽일 힘은 없지만 적어도 그놈들이 이곳에 넘어오지 못하게 하는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가능할 때 다녀오십시오. 저도 언제든지 놈들을 다 틀어막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슬리지아가 죽었을 텐데, 그놈들은 대체 어딜 통해서 넘어오는 거지?”
“당신이 딛고 있는 이 이 티오니스 대륙은 뒷면과 가장 가까운 대륙입니다. 가장 헐거워서 지금처럼 차원이 뒤틀려 있는 상태에선 얼마든지 흘러들어올 길이 있어요.”
그의 말에 나는 잠시 고민했다.
어차피 떠나야 할 길이기도 하다. 만약 그가 이곳을 지킬 수 있는 게 지금뿐이라면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
“어디부터라고 했지?”
“중원과 페스리사 대륙입니다.”
“중원부터 가보자고.”
“언제 떠나실 겁니까?”
“한 일주일 정도 느긋하게 다녀올 생각이야.”
“알겠습니다. 준비해두지요. 하면 출발은?”
지구를 제외한 다른 차원의 경우 현재 차원 열쇠를 통해 넘어갈 수 있다.
나는 짧게 고민하다 답을 내려놓았다.
“사흘 뒤.”
* * *
“나, 계속 여기 있어?”
“케인의 곁에 있는 게 안전할 거야. 그리고, 여기 있어. 무슨 일이 있어도 널 지켜줄 수 있는 요소가 많으니까.”
내 말에 일리나는 뭔가 샐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좋아 보인다?”
“좋지 그럼.”
“부럽네…….”
그 말에 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럼 너도 좋은 남자 하나 찾아서 결혼해.”
“…….”
내 말에 뭐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일까.
일리나는 나를 잠시 흘겨보더니 몸을 돌렸다.
“부럽네…….”
누구를 향해서 하는 말인지 모를 푸념이었다.
“당분간만이야. 안전만 확보되면 그때 보내줄게.”
“살리반 오라버니의 짓이지?”
그녀는 다 알고 있다는 듯 쏘아보았다.
“그래.”
“그럴 줄 알았어.”
그와 그녀의 사이가 좋아질 거라곤 생각지 않는다.
전 황태자만큼 동생을 아끼는 살리반이지만 그의 방식은 일리나와 충돌하기 딱 좋은 스타일이었으니 말이다.
일리나가 심통이 난 듯 성큼성큼 걸어가 버리자 그녀와 함께 있던 케인이 천천히 다가왔다.
“약속 잘 지켜라.”
“알겠습니다.”
“일리나는 반드시 지켜, 만약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너와의 거래는 그걸로 끝이다.”
“알겠습니다.”
적들의 공세를 해결할 방법이 없어서 당장 멀리 떠나는 것 조차 힘이 든다니, 웃긴 일이 아닐 수 없다.
대륙 내에만 있다면 어디에 있건 상관없는 일이지만 이번엔 차원을 넘는 행동이니 말이다.
“그곳에도 절대보옥의 흔적들이 있을 겁니다. 절대보옥의 흔적은 보옥이 가까이 있을수록 더 크게 반응하니 그 점 유의해주세요.”
“알았다.”
담담하게 말한 나는 황금빛으로 빛나는 열쇠를 꺼내 들었다.
“준비는 됐어?”
내 물음에 페르세르크는 가벼운 이동용 케이스를 쥔 채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래. 본녀는 준비가 끝났어. 그대의 짐도.”
“잘됐다. 가자.”
“잘 다녀오십시오. 저하.”
베르닐 시종장과 몬미더 그리고 에이미의 배웅을 받으며 나는 허공에 열쇠를 찔러넣었다.
“중원으로 간다.”
그리고는 내 의지를 열쇠에 담아 그대로 열쇠를 비틀었다.
쩌억!
동시에 옅은 빛과 함께 허공이 열리기 시작했고 나는 말 없이 그들을 돌아본 뒤 페르세르크를 데리고 균열 속으로 몸을 던졌다.
* * *
사박!! 사박사박!!
어두운 숲속. 한 청년이 저보다 어린 소녀를 데리고 필사적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여기저기 찢어지고 상처가 가득해 달리는 것 조차 쉬워 보이지 않았지만, 청년은 필사적으로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하아…… 하아…… 희아야. 내가 너만큼은 꼭 지켜주마.”
천열문 문주의 유일한 후손인 천지희.
청년이 안고 가고 있는 소녀는 그런 존재였다.
의식을 잃은 듯 눈을 감고 있는 소녀는 전신에 검은 기류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검은 기류는 끊임없이 소녀의 피부를 잠식하며 그녀의 피부를 검게 만들었다.
물론, 그런 끔찍한 변화는 소녀뿐만 아니라 청년에게도 이어지고 있었다.
“크윽!!”
필사적으로 휘청휘청 걸어가던 청년, 한자성은 머리를 찌르르 울리는 격통에 그대로 쓰러졌다.
“하아…… 하아…….”
쓰러지면서 놓친 소녀는 힘없이 바닥을 뒹군다.
끔찍한 여파 속에서 한자성은 필사적으로 천지희를 향해 손을 뻗었다.
“희…… 희아야…….”
지켜야 했다. 무슨 수가 있어도 천열문의 마지막 흔적인 그녀만큼은 지켜야 했다.
못나고 재능 없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죽어간 천열문의 일곱 가족을 위해서라도.
또 조용히 섬에서 살아가던 천열문의 가족들을 죽인 악림문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라도.
천열문을 배신한 세 명의 사형과 사저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라도.
“여기서 죽을 순 없어!”
검은 피를 울컥 토해내며 그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천열문의 건물이 있던 섬 쪽에서 하늘을 찌를 듯 검은 연기가 하늘 높이 퍼져 나간다.
서서히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그는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가다간 악림문의 장로가 펼친 대살악귀의 힘이 전신을 지배하고 곧 이성을 잃은 광인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래선 안 되었다.
그가 움직이려 할 때마다.
한 줌밖에 없는 내공을 끌어올리려 할 때마다, 온몸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악림문의 추격대가 쫓아오기 전에 천열문에서 독립하여 중원 무림맹으로 간 사저를 찾아가야 했다.
그녀에게 이 사태를 알리고 아버지나 다름없던 문주의 유일한 딸이자 천열문의 흔적인 그녀를 보호해야 했다.
처벅…… 처벅…….
하지만 하늘은 그의 편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호오. 형님, 여기 다 죽어가는 놈이 있는뎁쇼.”
“에이씨. 죽어가는 놈을 보면 재수가 없다는데. 상황 봐라.”
‘노…… 녹림도…….’
우악스러운 복장에 두터운 거도를 쥔 산적들의 존재에 한자성은 이를 악물었다.
“거, 좀 놔둬도 죽겠습니다요.”
“그래? 그럼 내버려 둬. 어차피 죽을 놈 명줄 끊어봐야 업보만 쌓인다.”
“그럼 짐만 털어가겠습니다요.”
우악스레 품을 털어가는 그들의 행동에 한자성은 저항할 수 없었다.
몸을 움직일 힘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극심한 부상을 입고 헤엄쳐서 섬 반대편 육지까지 왔다.
그리고는 소녀를 안아 들고 이 숲속까지 걸어온 그의 초인적인 인내심으로도 이제는 한계였다.
서서히 죽어가는 그를 보며 녹림도 사내는 낄낄거렸다.
“하이고야. 좋은 거 가지고 있네. 응? 이건 뭐지?”
그렇게 품을 뒤적거리던 중 녹림도 사내는 한자성의 품 안에서 작은 호리병 장식이 달린 목걸이를 꺼내 들었다.
“호오…… 형님! 이것 보시우! 이놈 좋은 걸 가지고 있수다!”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은 그 금속에 녹림도는 곧바로 제 형님을 향해 그것을 가지고 가려 했다.
그때였다.
한자성이 죽어가던 몸의 모든 힘을 쥐어짜내 그를 잡아챘다.
“아…… 안돼…….”
“흐음…… 안되긴 뭐가 안 돼 이눔아! 내가 이건 잘 써줄 테니까. 편히 죽으라고, 낄낄.”
그리고는 그의 부질없는 저항을 뿌리치고 지희를 안아 들고 있는 녹림도에게 달려갔다.
“제발…… 안돼…….”
이곳에 녹림도가 있을 리가 없는데.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있나.
그는 죽어가는 몸을 억지로 이끌며 움직였다.
그때였다.
핑~
저 하늘 높은 곳에서 눈에 띌 정도로 거대한 별똥별이 두 개 정도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 장엄한 모습에 놀란 녹림도들은 멍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이내 그 별똥별들이 이곳으로 천천히 내려오는 것을 보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혀…… 형님 이게 무슨 일…….”
“시방 나도 몰러!”
벙 찐 얼굴로 하늘에서 내려오는 별똥별을 보던 그들은 곧이어 별똥별이 그들의 앞에 내려서자 반사적으로 몸을 숙였다.
“아이고 천지신명께서 오셨다!”
“부처님! 원시천존님! 혈신님! 누가 됐건 구…… 구원하소서!”
반사적으로 몸을 납작 엎드리고 필사적으로 비는 그 모습에 반응이라도 한 것일까.
별똥별은 이내 천천히 빛을 서서히 지웠고 이내 그 안에서 두 명의 남녀를 만들어냈다.
은발에 붉은 눈동자를 지닌 천상 선녀라고 봐도 이상하지 않을 법한 소녀와. 검은 머리에 붉은 눈동자를 지닌 청년이었다.
“여기 맞나?”
“거, 이동이 요란스럽기 그지없구나.”
뭔가 기분이 별로인지 투덜거리며 모습을 나타낸 이들은 곧이어 바닥에 쓰러진 천지희와 한자성, 그리고 엎드리고 있는 두 명의 녹림도를 발견할 수 있었다.
“시선 제대로 끌었네.”
“데이비. 저 아이는 죽어가고 있는데.”
그 말에 데이비라 불린 소년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재밌는 꼴이네. 이봐 두 사람.”
이윽고 데이비가 고개를 돌린다.
녹림도들은 화들짝 놀라 움찔거리며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마…… 말씀하십시오 하늘님들이시여.”
“하늘님? 뭐 좋아. 쟤 왜 저래.”
“그…… 그것이……”
벙 찐 얼굴로 대답을 하지 못하는 녹림도들을 보며 데이비가 인상을 찌푸렸다.
“누가 죽인데? 왜 이렇게 겁을 먹어.”
“아…… 아닙니다! 그것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때부터 그랬습니다!”
그의 말에 데이비는 천천히 다가가 청년, 한자성의 맥에 손을 짚었다.
그리고는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이, 녹림도 둘.”
“히익?!”
“끄읍!”
설마 하늘에서 오신 분이 자신들을 알아볼 거라곤 생각지 못했는지 그들이 움찔거렸다.
“내가 지금 누구 죽일 생각이 없으니까 거기 애 내버려 두고 가는 게 좋을 거야.”
신혼여행에 피를 뿌리고 싶지 않다.
데이비의 그런 마음이 천금 같은 기회를 선사했지만 사실상 녹림도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아니면, 굳이 피 보고 싶으면 보던지.”
동시에 데이비의 몸에서 주변을 뒤흔드는 투기가 쏟아지자 녹림도의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뜨여졌다.
“고…… 고수!!”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낀 녹림도 들이 벌벌 떨었다.
이렇게 유형화된 살기라니!
정확히는 그것과는 다른 힘이지만 그들이 그 사실을 알 리 없었다.
와들와들 떠는 녹림도들을 보며 데이비가 짜증스레 말한다.
“안가?”
“가…… 가겠습니다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고수의 눈에 띠이고 살아남을 확률이 되어봐야 얼마나 되겠는가.
녹림도 둘은 고수 같은 힘을 지닌 하늘의 사자 두 명이 자비를 베풀었다는 사실에 기겁하며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아, 잠깐!”
그때였다.
갑자기 자신들을 다시 불러세우는 그 모습에 녹림도 두 명이 파르르 떨리는 시선으로 고개를 돌려 그를 본다.
“왜…… 왜그러십니까요?”
“그거 내놔.”
이어지는 청년, 데이비의 말에 녹림도 하나가 의아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거라 하옵시면…….”
“그 칼. 수술할 때 좀 써야 하니까. 나중에 돌려줄 테니 빌려달라고.”
“괘…… 괜찮습니다! 가지십시오!”
절대 안 된다고 속으로 외치며 그는 재빨리 품에 숨겨둔 송곳을 꺼내 그에게 공손히 내밀었다.
항명은 죽음이다.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세계는 그런 것이니까.
“흠…… 날은 잘 갈려있네. 잘 쓸게. 산채가 어디지? 나중에 찾아갈 테니까.”
“괘 괜찮습…… 읍!!”
절대 괜찮다며 말하려던 그 순간.
곁에 있던 녹림도의 형이 아우의 입을 틀어막았다.
“하하하. 저…… 정 그러시다면 이곳에서 두 시진 정도 떨어진 곳에 저희 산채가 있습니다요.”
그의 말에 아우 녹림도가 기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형은 다른 생각을 품은 듯 보였다.
[형님 미쳤수?!]
[아서라 이놈아. 고수라곤 해도 녹림왕에 못 미치겠냐. 저년은 천상선녀가 와도 뺨따귀를 후려칠 미인이야. 그런 년을 진상한다면 우리도 한자리 꿰찰 수 있다!]
입 모양과 눈치로 빠르게 대화를 나눈 녹림도들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