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06화
페르세르크와 두기의 어벤저 편대 인형 골렘인 에나벨과 메라몽을 이용해 밑밥을 깔기 몇 시간 전.
극성 마조 성향을 지닌 현무는 말없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다른 신수와 다르게 가장 이질적인 외향을 지닌 현무는 우치에게 듣기로는 사신수 중 가장 먼저 태어난 존재로 물과 얼음을 다루는 신수다.
“지금부터 네 이름은 기우제다.”
기우제.
말없이 나를 바라보던 현무, 기우제는 곧이어 무언가 생각한 듯 고개를 돌리더니 그대로 근처에 있던 윤희령에게 다가갔다.
“어…… 어어?”
콱!!
그리고는 긴 목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물어버렸다.
“어?”
벙찐 표정으로 페르세르크가 탄성을 내질렀다.
“으그으으으으!!”
찰싹찰싹하며 현무의 뺨을 두드리는 윤희령은 반사적으로 내공을 끌어올려 저항하려 한다.
하지만.
내공은 물론 그녀가 처음부터 품고 있던 기운 또한 응답하지 않았다.
악림문을 상대할 때 봤던 심연의 힘과는 닮았으면서 묘하게 청명한 기분이 드는 힘.
그것이 윤희령, 아니 이실디의 본질이었다.
베르샤의 저주로 회복 불가 상태를 만들고, 그녀의 몸 안에 저항 없이 자리하고 있던 힘의 근원을 끌어내 내가 보관한다.
심연의 공주는 수많은 사념이 뭉쳐서 만들어진 존재.
하지만 베르샤를 통해 나는 그들의 힘에 근원이 있고, 그 근원을 내가 빼앗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이실디는 힘을 잃었다.
이 정도면 각성한다 해도 최상의 적과 싸울 가능성은 줄어들었으리라.
다만 내가 사용할 수는 없었다.
“베르샤 때처럼 쉽게 되진 않네.”
심연의 공주, 저주를 다루던 베르샤의 힘은 로 아이아스의 저주인 흐름 거부로 인해 내 몸에 끝없이 가해지는 저주를 찍어누른다.
그 덕에 베르샤의 힘은 어렵지 않게 사용하지만…….
다른 심연의 공주들의 힘은 독이 든 사과나 다름없었다.
우우웅!!!
버둥거리며 현무의 꼬장에서 벗어나려 드는 윤희령을 보며 나는 마나를 끌어내 길게 늘어뜨렸다.
휘리리릭!!! 차아아악!!!
동시에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지며 현무, 기우제의 눈이 부릅 뜨여졌다.
그리고는 마냥 물고 놓아 주지 않던 입을 쩍 벌리며 윤희령을 놓아주었다.
“때려주길 원해?”
-그우우우우우우!!
현무, 기우제가 가진 두 개의 머리가 베베 꼬이며 맹렬한 갈망을 품기 시작했다.
극 마조 성향을 지닌 신수라니.
이런 녀석은 과하게 굴수록 말을 듣지 않는다.
당근과 채찍을 써야 하는데.
지금 들고 있는 4서클 무 속성 마법 마나 휩은 녀석에게 당근일 뿐이다.
그렇다면 녀석에게 정말 채찍은 무엇인가.
“한 번만 더 아무나 물어대면 널 확실하게 케어하고 돌봐주는 수가 있다.”
-그우우우우우우우!!!!
경악한 듯 버둥거리는 녀석은 어찌나 놀랐는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주저앉아버렸다.
그리고는 갈망 어린 눈으로 나를 본다.
“그러니 말 잘 들을 수 있지?”
두 개의 머리가 끄덕여지자 나는 말 없이 마나 휩으로 녀석의 등딱지를 가볍게 후려쳤다.
짜아아악!!!
-그우우우우우!
채찍이 녀석의 등을 후려치자 녀석은 흥분한 듯 온몸을 비틀고 부르르 떨며 기이한 소리를 냈다.
“본녀가 살면서 많은 걸 봤지만…… 이건 좀.”
[물을 다루는 기묘하면서도 놀라운 존재가 저런 꼴이라니…….]
그녀뿐만 아니라 방금까지 현무에게 물려있던 윤희령도 표정이 좋진 않았다.
“나…… 쟤 싫어.”
이제는 신수님에 대한 어떤 미련도 남아있지 않는듯한 자조 섞인 목소리였다.
“현무는 여기서 기다려. 네가 해줄 일은 간단해.”
짜아악!!
녀석의 등딱지를 가볍게 때려주며 내가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괴롭히는 취미는 있다지만…….
이렇게 때리는 취미는 없는데.
-그우우우우.
“비는 뿌리지 말고 흑운을 계속 유지해. 어렵지 않을 거다.”
흑운.
존재 자체가 강대한 정령왕에 비할 바는 아니라곤 하지만 물과 가장 친숙한 동물이며 영역 내에 존재하는 자신의 힘을 방출하는 건 그리 어려운 게 아니었다.
나는 유영하듯 움직이는 녀석의 머리를 불러들여 귓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일만 똑바로 해주면.
마음껏 때려주마.
녀석의 녹빛 피부가 붉게 물든 것 같은 섬뜩한 기분이 들었지만 나는 애써 무시했다.
이후 놀라울 정도로 열심히 자신의 임무에 임하는 현무를 뒤로한 채 나머지 세 신수에게 철수 명령을 던진 나는 샨드라 미네아 제압 이후 날려 보냈던 메가로드리아를 타고 곧바로 유나라 황궁으로 향했다.
먼저 황궁으로 향해 소문이 퍼지지 않도록 은밀하게 움직이며 작업을 준비하고 있을 그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메가로드리아의 거대 육신 전체에 5서클 투명화 마법인 인비저빌리티를 사용해 가리고 황궁의 외곽 정원에 도달한 나는 그녀의 심복으로 보이는 한 사내를 뒤 따라 그곳으로 향했다.
“아, 데이비 공자님. 어서 오십시오.”
그곳에는 옥화 공주 수윤이 믿을 수 있는 이들이 모여 무언가 제단을 준비하고 있었다.
복잡한 과정은 필요 없었다.
내가 그녀에게 건네주었던 쪽지 모양의 문양을 그리면 그만이었으니 말이다.
“어서 오시게. 내 비록 주술에 조예가 없어서 확인할 순 없었지만, 주술에 조예가 깊은 제갈 대신의 도움을 조금 받았네.”
“반갑소. 제갈묵이라 하오이다. 무림맹의 군사를 맡고 있는 환이 놈의 조부요.”
“데이비 올 라운입니다. 제갈 환 군사의 조부님이 이런 충신일 줄 생각 못 했네요.”
“허허, 그놈이 비록 야욕이 많다곤 하나 충절은 이 노부에 못지않소.”
포권을 취해오는 그에게 맞춰 응대해주자 그가 만족스러우면서도 뭔가 기대 섞인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공자께서 공주마마를 지켜주셨다고 들었소. 이 제갈가의 노부, 공자에게 큰 빚을 졌소이다.”
“서로 맞는 게 있어서 구해준 것뿐이니 괘념치 마시지요.”
“하면 내 감사 인사는 여기까지만 하겠소.”
뻔뻔한 미소를 지어 보인 그는 깃털로 만들어진 부채를 가볍게 부치며 고개를 돌렸다.
“공자께서 부탁한 진법이오. 마마께서 홀로 골머리를 앓고 계시기에 내 부족하나마 주술 지식을 명받았소.”
“잘 만들어졌네요.”
“한데. 이것이 주술식이라는 것은 알겠소만…… 대체 무엇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소이다.”
“쉽게 알기 힘들겠죠.”
“하지만 한가지는 알 것 같소.”
이 진식 주술의 일면에 곁들인 기술이 어디의 것인지를.
“제갈 세가의 기술이 맞습니다.”
천중원은 우치의 고향이 아니다.
이곳에서의 주술은 오로지 이곳의 것이며.
주술 하면 최고로 일컫는 제갈세가의 기술이 들어가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보통 제갈세가라고 해서…….
“그래도 보통 제갈세가의 가주라 해도 이걸 알아보는 건 쉽지 않겠죠.”
천마 독고준이 활동하던 당시 독고준에게 저항하던 제갈세가의 주왕이 직접 여생을 들여 만들어낸 진식이니까.
“그게 무슨…….”
“천마 독고준이 살아있을 당시, 제갈세가의 현왕이 그의 부탁을 받고 수년에 걸쳐 만들어 낸 진식입니다. 간단해 보여도 다루는 게 쉽진 않죠.”
내 말에 그의 눈에 경악이 서린다.
“혀…… 현왕께서 직접?!”
“그 내용물은 봉인진식.”
정확히는.
“선계와 이곳 하계를 잇는 통로를 봉인하는 진법이죠.”
내 말에 그의 얼굴에 경악이 서린다.
“정확히 말해서 이건 봉인 진식이라기보다는 약간 변형된 봉인에 구멍을 뚫는 진식입니다.”
만든 것은 현왕이지만 우치는 그것을 보자마자 내용물을 파악했다.
[오호, 술고래. 재밌는 걸 알고 있네? 어디 보자. 어디 봉인이라도 하셨나? 데이비, 넌 오늘부터 이걸 분석해라. 해주, 파훼, 우회, 전부 해내기 전엔 다음 수업은 없다.]
주술 스승 우치의 말은 아직도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서…… 선계?!”
경악하는 그를 뒤로한 채 진식이 완성되자 나는 그대로 도력을 끌어올려 주술진을 발동시켰다.
그리고는 수윤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조금 따끔할 겁니다.”
그렇게 말한 뒤 그녀의 손가락 끝에 빠르게 바늘을 찔러 피 한 방울을 냈다.
“꺅!”
“마…… 마마!! 뭐 하는 짓이오! 공자!”
당황한 제갈묵이 소리친다.
다른 그녀의 충신들도 당장이라도 덤벼들 것처럼 흉흉한 기세를 흘렸다.
하지만 그들의 그런 외침은 수윤의 행동에 의해 멈춰졌다.
“그만! 소란들 피우지 말아라, 가벼운 혈을 한 방울 흘리는 것으로 호들갑이더냐.”
“마마! 장차 이 나라의 지존이 되실 분께 상처라니요! 당장 극형에 처해도…….”
“지금은 그런 고리타분한 전통 따위 신경 쓸 데가 아니오, 대신.”
짧게 말한 그녀가 나를 올려다본다.
“소녀의 몸에 상처를 낼 생각도 하고, 정말 겁이 없는 게지.”
“당신의 피가 조금 필요했어. 잘 봐.”
내 말에 진식이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아…… 아니?!”
사람의 피를 받고 가동하는 진식이라니.
제갈묵의 얼굴에 경악이 서린다.
독고준은 내게 그렇게 말했었다.
봉인진식을 만들 때.
유나라의 선조 중 하나가 손을 보태어 피로써 그 자물쇠를 채웠다고 말이다.
“문을 조용히 따야지 강하게 노크질하다간 무더기로 넘어올 겁니다.”
담담하게 말하며 나는 방울 가지와 섭선을 꺼내 들고 진법 위로 올라갔다.
모두가 지켜보는 와중에 나는 말 없이 부적을 던져 주술을 펼치며 주문을 읊었다.
동시에 몽환적인 빛의 가루들이 흩어지며 나를 선회하며 회전하기 시작했고 붉은빛을 띠는 진식과 섞이며 거대한 빛의 향연을 만들어냈다.
“아름답구나.”
페르세르크의 중얼거림이 들려온다.
조용히 주문을 읊으며 방울 가지를 수차례 휘두른 나는 진식이 발동하기 시작하자마자 진의 바깥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통로에 생긴 틈 너머 느껴지는 존재들을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쩌어엉!!!
그리고.
무형의 거대한 힘이 하늘 위로 쏘아지기 시작했고.
이내.
진식 안에서 세 명의 신비로운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생긴 것은 평범하지만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은 하나같이 전설에나 나올법한 선녀들의 의상이었다.
“하계와의 문이 열리다니…… 공주마마”
“정말 의외로구나.”
가장 화려한 의상을 입은 소녀와 그녀의 시녀로 보이는 두 명의 선녀.
세 명의 선계인들을 본 이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실제로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저 흐르는 소문일 뿐 실제는 아니라 여겨졌으니 말이다.
존재한다.
하지만 입증되진 않았다.
오랜 시간 지속될 논란거리가 이렇게 해결이 되어버린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며 어리둥절해 하는 세 명의 선계인들을 보며 나는 빙그레 웃고 다가갔다.
“환영합니다. 선계의 선녀님들.”
“하계의 인간이 우리를 불러낸 것입니까?”
내 말에 공주라 불린 선녀가 근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일단은 그렇지요.”
“수교를 단절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경계가 막힌 지 150년이 넘었습니다. 사이 좋게 지낼 수 있으면 그렇게 지내는 것도 좋겠지요. 실은 선계와 하계 모두에 중한 일이 있어 당신들을 불렀습니다.”
“요컨대 우리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뜻인가요?”
“그렇게 해석하면 되겠네요.”
내 말에 공주라 불린 선녀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뭔가 마뜩잖은 듯한 태도였다.
“공주마마 돌아가셔요. 하계는 더럽고 위험한 곳이랍니다. 어서…….”
“어허.”
협조하실 생각이 없으시다?
거 들어올 땐 니들 마음대로였겠지만.
“돌아갈 땐 아닌데.”
빙그레 웃으며 내가 손가락을 튕긴다.
동시에 거대한 마법진이 일대 영역 전체를 감쌌고.
선녀들이 당황해 힘을 발현하기도 전에 공간이 전이 되었다.
전체 공간을 접어 넘기는 듯한 공간이동.
황궁 정원에서 순식간에 정체 모를 숲에 도달해버리자 선녀들이 당황한 듯 움찔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체 뭘 하려는 속셈이죠?!”
당황한 듯 그녀가 나를 향해 소리쳤다.
“도움이 필요합니다.”
“또 그 소리. 대체 뭘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우리가 왜…….”
스윽……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가락으로 검게 변질된 늪을 가리키자 그녀의 입에서 말이 사라진다.
뻐억!!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작은 나뭇가지를 집어 든 나는 중검의 힘을 이용해…….
망설임 없이 공주라 불리던 선녀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돕기 싫으면 옷만 빌려주면 돼. 사람이 말이야, 서로서로 돕고 살아야지 어? 그렇게 뻔뻔하고 치졸하게 사니까 그 술고래가 당신네와의 통로를 틀어막은 거야.”
쓰러져버린 세 명의 선녀들을 뒤로한 채 나뭇가지를 휙 던져버린 나는 손을 툭툭 털며 그녀들의 옷을 능숙하게 벗겨내기 시작했다.
“데이비…… 그대 뭐 하는 게야?”
“뭐하긴, 본인들이 돕기 싫다는데. 어쩌겠나. 옷이라도 빌려야지.”
애초에 선계의 존재는 하계와 절대 사이가 좋을 수 없다.
선계는 불편한 동거자임과 동시에.
침략자이며.
하계의 인간들이 생각하는 대로 신성한 존재가 아닌.
그저 새로운 존재들일 뿐이다.
자신들이 신성시하는 선계의 존재가. 사실은 불편한 침입자이며, 하계의 인간을 우습게 여기는 존재라는 진실은 잔혹하기 그지없다.
어차피 선녀의 날개옷만 있으면 믿을 놈들 태반이다.
“무대효과는 나와 사신수 놈들이 해줄 테니까 얼굴이 똑바로 알려지지 않은 페르세르크 네가 나서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