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21화
[이 땅에 흐르는 인간의 염원으로 만들어진 자여. 나의 목소리를 들어라.]
청명한 내 목소리가 주변에 울려 퍼진다.
푸욱!!
이윽고 뼈로 만들어진 주술검이 한차례 지면을 찌른다.
“땅의 울림을 듣고 바람의 울림을 들어라.”
이윽고 검을 뽑아 익숙하고 절도있는 자세로 검을 들어 하늘 찌른다.
[신수의 근원이자 평온의 상징은 나의 목소리를 들어라.]
이윽고 다시 한번 주술검이 휘둘러진다.
핏!!
내 팔에 큰 상처가 생기고 피가 흘러내리자 주술검의 면에 피를 먹인다.
우우우우우웅!!!!
서서히 거대한 힘의 염원이 모여들기 시작하자 사신수의 힘 또한 그에 따라 더욱 강해지기 시작했다.
우치가 살았던 세상과 이곳의 원류는 같다.
그리고.
지금 내가 소환하고자 하는 녀석은 사실상 이 세상에 존재하는 절대 신수이기도 하다.
단순 무력만 따져도 정령왕의 상위. 상황에 따라선 최상의 상태인 환수왕과도 비벼볼 수 있다.
그렇다면 별로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닌가.
그런 의문은 애초에 우문이나 다름없었다.
상황에 따라서 신수가 더욱 효율적인 곳이 있는 편이기도 하거니와 세 마리의 환수왕은 환수 소환사에 의해 소환되는 일반적인 환수와는 아예 별개의 존재라 불러도 될 만큼 강해진 존재들이니 말이다.
갓 자아를 고정시킨 신수가 이겨낸다는 건 어불성설이리라.
기린, 해태. 황룡.
세 마리의 신수중 하나가 지금 내 의지에 따라 눈을 뜬다.
수만 년 동안 신의 보호를 받지 못했던, 이 땅의 인간이 품은 헛된 기도는 마냥 헛되지 않았다.
그 신념이 곧 염원이 되고 염원이 물리적인 힘이 되어 거대한 존재를 구현해냈으니까.
신수라는 건 사실상 그 힘에게 자아를 부여하는 방식일 뿐이었다.
즉, 실제로는 신수가 아니라 염원을 다루는 것이다.
문제는 근원은 같다 할지라도 주술스승인 우치의 세상과는 격리되어버린 세상이 바로 이곳 천중원인 터라 실패할 가능성도 상당히 높다는 점.
설사 성공한다 할지라도 다른 신수와 다르게 황룡은 소환방식부터가 다른 신수와 다르게 까다롭기 그지없다는 점.
그런 페널티나 위험 요소도 존재하지만 안 할 수도 없었다.
[그대의 신자로서 그대가 소납할 나의 이름은 데이비 올 라운이다.]
청명한 목소리와 함께 거대한 풍압이 일기 시작한다.
신수. 그것도 그냥 사신수가 아니라 중앙 신수를 구현하는 내 모습을 보는 이들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린다.
어마어마한 풍압에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하면서도 어떻게든 내 모습을 시선에 담으려는 듯한 모습들이었다.
파직!!!
파손율이 1퍼센트 가까이 늘어난다.
가능하다면 차라리 무리하게 힘을 쓰지 않고 혼을 동기화시켜서 구현하는 게 안정적일 수밖에 없다.
이윽고 내 주변에 깔린 수많은 부적들이 일제히 반응하며 거대한 빛의 줄기를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하늘 위에서 어디서 날아든 것인지 모를 빛의 입자들이 모여들며 부적의 빛줄기들과 합쳐져 거대한 형체를 허공에 구현해내기 시작했다.
[네 녀석의 이름을 말하라.]
내 말에 형체가 크게 요동친다.
[다시 한번 묻겠다. 네 이름을 말하라.]
본래대로라면 황룡의 소환식을 이렇게 번갯불 콩 볶듯이 볶아낼 순 없다.
하지만.
나는 칭호의 힘으로 거기에 걸리는 부하와 제한을 해제한 상태.
거리낄 것은 없었다.
아직 완성되지 않는 황룡의 형체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마치 나를 시험하기라도 하겠다는 듯한 그 모습에 내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리고. 청명하던 내 목소리가 일순간 본래대로 돌아왔다.
“건방지게 시험 같은 짓은 집어치워, 비늘 발라먹기 전에 당장 튀어나와.”
싸늘한 경고에 형체가 크게 흔들린다.
완전히 새로운 구현이라면 모르겠지만 내 몸 안엔 주술 스승 우치의 도력이 잠들어있다.
한차례 황룡을 구현한 바 있는 우치의 도력은 그것을 기억하듯 다시금 황룡의 소환에 스스로 힘을 내기 시작했고 이내 황룡의 모습을 구현시켰다.
거대한 몸길이를 자랑하는 청룡과는 달랐다.
전신이 빛나는 황금빛 비늘로 만들어진 거대한 용은 머리가 무려 두 개였고 팔의 길이도 짧지 않았다.
몸의 길이는 수십에서 수백 미터는 되어 보였고.
놈이 한번 움직일 때마다 구름 속에서 마치 거대한 물줄기가 흐르듯 움직임이 느껴졌다.
이윽고.
거대한 육신을 지닌 황룡의 푸른 눈동자가 뜨여진다.
황룡의 어마어마한 위압감에 놀란 선계의 존재들은 입을 쩍 벌린 채 어찌할 줄 모르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세상에…… 대체 이게 무슨…….”
“저…… 저게 대체…….”
제대로 된 인간의 염원이 모여 만들어진 힘의 근원. 평온의 상징인 황룡을 불러낸 나는 나를 말 없이 바라보는 거대한 존재를 향해 말했다.
“이미 느끼고 있을 거다. 이 땅에 거슬리는 힘이 잠들어있어. 신성력과는 다른 네 힘의 정화라면 지울 수 있을 거다.”
황룡의 힘은 정화. 만물의 명령.
조금 함축적인 의미가 담겨있지만, 상위 신수들은 하나같이 이 모양이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이윽고 서서히 하강하기 시작한 황룡의 푸른 눈동자가 멜트가 죽고 만들어낸 거대한 타락의 늪에 꽂혔다.
그리고.
녀석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째, 다른 신수와는 다르게 제법 정상적인…….”
“그럴 리가 있나.”
담담하게 말한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콰드득!!!
이윽고 황룡이 긴 팔을 모아 양손을 곱게 접어 쥐었다.
“주작은 분노의 신수야. 그래서 분노조절 장애가 있는 거고.”
백호는 즐거움을 관장한다. 그렇기에 자신이 즐거우면 전장 한복판에서도 배를 까뒤집고 자는 병신미를 드러낸다.
현무는 기쁨으로 인해 마조가 되어버렸고.
청룡은 슬픔으로 인해 자신을 더더욱 과시하고자 하며 흉포하게 군다.
그렇다면 황룡의 상징인 평온은?
녀석은 평온의 상징답게 지극히 평화적일까.
일단은 그러하다.
하지만.
내가 신수중에 정상은 없다고 말하는 이유는 녀석에게도 염원이 만들어낸 결점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지독한 결벽증.
녀석의 눈에 이 땅에 맞지 않는 힘이 느껴진 모양이었다.
타락의 늪이다.
곧이어 녀석은 전신을 사시나무 떨듯 부르르 떨며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입을 쩍 벌린다.
[사일런스.]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사일런스 마법으로 일대를 보호하기가 무섭게.
자신의 앞에 이물질을 발견한 황룡의 포효가 쏟아져 나왔다.
[----------!!!!!]
“저놈은 시대를 잘못 탔어. 현대 지구에서 구현됐으면 최고의 락커가 됐을걸?”
물론, 우스갯소리이지만 말이다.
외부의 소리를 차단하는 공간 안에서 내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네 마리의 신수가 가진 각기 싸이코같은 특성도 곤란하지만. 황룡의 결벽증은 내가 아는 다른 신수들의 어떤 특성보다도 가장 심각했다.
그것은 신수를 소환하고 구현하는 주체가 나이기에 변할 수 없는 현실이며. 우치의 도력을 물려받은 내게 정해진 미래와 같으리라.
쿵!!!!
쿵!쿵!!
동시에 사방에서 빛의 줄기들이 타락한 늪으로 쏟아지기 시작했고.
대여섯 줄기의 빛은 곧이어 어디 우주인이 쏘는 정화광선 마냥 지면을 불태워버리기 시작했고 멜트가 죽어가며 만들어낸 최후의 침식 부패의 늪을 그대로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힘의 우위는 어쩌면 멜트가 위쪽일지 모른다.
하지만. 상성이 너무 극상성이었다.
그것도 황룡에게 압도적인 우위로.
게다가 팔신시의 옥으로 황룡이 기본적으로 가지는 정화의 힘이 배 이상으로 강해져 있다.
마치 자신의 방에서 바퀴벌레를 발견한 자취생이 빗자루를 들고 전쟁을 선포하는 것 마냥 녀석의 표정은 진지하기 그지없다.
미친 듯이 쏟아져 내리는 빛의 기둥은 급기야 늪을 서서히 중화시키다 못해 증발시켜버리기 시작했고. 이내 완전히 흔적도 없이 지워버렸다.
“세상에…… 저게 정화가 될 줄이야.”
“아직. 저 미친놈이 왜 미친놈인지는 이제 알게 될 거다.”
내 말에 페르세르크는 물론 황룡을 처음 본 선계의 존재들도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결벽증 환자들의 주 공통점이 바로 지나친 진압이라는 점이다.
쿠우웅!!!!!
이미 늪은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황룡의 정화광선은 이미 깔끔하게 변해버린 지면에 계속해서 내리꽂혔다.
마치 바퀴벌레가 지나간 자리를 미친 듯이 닦는 아직 경험 부족한 자취생마냥.
미친 듯이 흔적을 지우고 또 지우는 황룡의 모습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빌어먹을 놈의 장점은 강한 힘 넓은 범위지만.
단점은 너무 깔끔을 떨다보니 간단한 오물을 처리하는데에도 전력을 때려 박아버릴 만큼 제멋대로라는 점이었다.
“늪은 사라졌는데 어제까지 저러는 거예요?!”
“내버려 둬. 길면 반 시진 정도만 정화광선을 내리 꽂을 거야.”
늪을 지우는데 걸린 정화광선의 시간은 고작 십 초 남짓.
하지만 녀석의 행동이 거기서 멈출 리 없다.
“음 팔신시의 옥으로 몸보신을 했더니 더 오래갈지도 모르겠다.”
새로 태어난 신수야 내가 조기교육을 잘 시켰다지만 황룡처럼 존재하는 녀석은 이미 교육하기 글러 먹었다.
포기하면 편하다는 말이 이런 데에서 쓰이리라.
* * *
데이비가 황룡을 소환하던 그 시각.
수룡검희라 불리던 윤희령은 자성과 함께 환나라 황제를 알현한 뒤 자성과 천지희를 데리고 천열문으로 향하는 길에 올랐다.
[악림문은 무너졌어요. 교원들은 죽고 교주는 사라졌죠. 더 이상 복수의 대상은 없으니 이제 남은 건 사문으로 돌아가 문파를 재건하는 일일 거예요…….]
윤희령은 현무대 단장이라는 직위도 내려놓고 다시금 사문으로 돌아왔고 다시금 천열문이 봉문을 해제할 수준이 될 때까지 오로지 천열문을 재건하는 데에 힘을 쓰겠다고 말했다.
본래라면 별로 신경 쓰지 않았을 황제 월곤이었지만 그는 일찍이 자신의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불사의 약까지 찾아 헤맨 전적이 있는 황제였다.
이제 와서 다 부질없음을 깨달았다지만 목숨에 대한 집착은 남보다 뛰어난 편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목숨을 살려준 데이비에게 무한한 고마움을 느끼는 그였기에 데이비라는 인물이 누가 되었건 그에 관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으려 했다.
“천열문을 환나라의 이름으로 지원한다. 과거 악림문의 잘못으로 인해 불화를 겪은 것을 짐이 대신 사과하마.”
오만한 환나라 황제치고는 너무 파격적인 발언이었지만 윤희령은 그 한마디조차 눈물이 날 만큼 울컥한 기분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남은 것은 이 땅에 뿌리내린 이 끔찍한 늪이거늘…….”
환나라 황제 월곤과 유나라 황제 대리 옥화 공주 수윤이 복잡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데이비 공자께서 나섰으니…….”
“그렇게 말한 그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소.”
돌아올 거라 예상한 시간보다 한참 더 걸리는 그 모습에 월곤이 복잡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와중에도 늪의 크기는 시시각각 커져만 간다.
그때였다.
쿠릉!!! 쿠르르릉!!!
갑자기 하늘에서 황금빛 뇌광이 머금어진다.
그리고 모두가 멍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 순간.
결벽증에 미친 한 마리의 거대한 황룡이 황궁에 생긴 이물질을 발견하고 눈을 부릅떴다.
“적당히 해, 이 x끼야!!!”
짜증이 난듯한 데이비의 외침도 한몫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