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20화
[우린 하나야.]
마치 오직 델라만을 보고 있다는 듯한 말투였다.
다시 한번 피를 토한 그녀가 이를 악물고 나를 노려보았다.
“인간, 언젠가 네놈을 반드시 직접 찢어 죽여버리겠어.”
저주 섞인 말을 내뱉으며 그녀는 자신이 쓰러진 지역에 보랏빛의 타락한 늪을 만들어냈다.
반사적으로 그녀가 도망치려 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녀 자체가 부패의 늪과 같은 존재이니 세상에 퍼져있는 부패의 늪 전체가 곧 그녀의 영역이나 다름없다.
투웅!!!!
하지만 그녀의 힘이 제대로 발현되기도 전에 거대한 충격파가 동서남북 각지에서 퍼져나오며 그녀의 움직임을 제지했다.
“윽?!”
그리고, 그 아주 잠깐의 방해는 곧 치명상을 입은 그녀가 더 이상 힘을 사용하지 못하게 만들어버렸다.
선계의 존재를 꼬드겨서 준비시킨 항마봉사진.
본래 진짜 용도는 이것이 아니다만
심연의 공주가 가진 힘을 완전히 억제하진 못하지만 아주 잠깐 틈을 만들어낸 것으로 충분했다.
“다시 말하지만 사연 없는 무덤은 없다.”
“…….”
“유언은 듣지 않으마.”
그 말과 함께.
멜트의 몸이 어마어마한 크기의 고깃덩어리처럼 부풀어 올랐고 이내 증발하듯 사라지기 시작했다.
울드에게서 처음 들었었던 진실.
심연의 공주끼리도 세력 다툼이 있다던 말은 어쩌면 이들도 포함되는 일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린…… 하…… 나…….”
끝내 죽어가면서도 델라를 향해 손을 뻗던 그녀는 그렇게 사라졌다.
약간 피곤한 얼굴로 두 심연의 공주의 소멸을 지켜본 나는 곧장 신의 기적을 퍼뜨렸다.
“데이비! 손이…… 어라?”
나를 향해 걱정스레 소리치던 그녀가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나를 바라본다.
“왜 멀쩡한 게야?”
그도 그럴 것이 좀 전까지만 해도 죽을 것처럼 감염되던 질병의 흔적이 말끔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잊었냐? 성흔은 질병 면역이야.”
성흔이 없었다면 나도 조금 곤란했을 거다.
“그럼 빙하기 마법으로 온도를 계속 바꾼 건…….”
“멜트의 힘 때문이야.”
델라의 질병 자체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멜트와의 싸움 이후 그녀가 내 저항력을 부패시킴으로써 그사이에 아주 잠깐의 틈이 생겨버렸다.
그 결과가 이것이다.
“오히려 중요한 건 너야. 빙하기 마법은 내 몸의 질병 속도를 늦춘 것도 있지만 사실상 널 위해서 사용한 거니까.”
그렇게 말한 내가 그녀의 뺨을 쓸어내렸다.
“오빠 믿지?”
“본녀가 누나이니라.”
“그러던가.”
픽 웃으며 그녀를 끌어안은 내가 눈을 감았다.
그녀의 육신은 일반적인 인간과 다르다.
그렇기에 일반적인 인간의 기준으로 생각하면 곤란한 것들이 많다.
예를 들자면.
보통 인간의 육신에는 알게 모르게 수많은 기생충이 살아간다 하지 않던가.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육신 자체가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진 만큼 사실상 기생충 같은 게 살아남을 여건이 전혀 되지 않았다.
예쁜 장비엔 독이 가득한 법인 것처럼.
그렇다면 기생충의 존재로 이점을 챙기는 부분은 어찌 되는가.
해답은 간단했다.
그녀의 육신 자체가 그런 기능을 내재하고 있는 경우.
다시 말하지만, 그녀의 육신은 인간도 아니고, 진짜 마족도 아니었다.
프리아 여신이 만들어놓은 규칙 하에서 창조되고 진화한 생명체와는 조금 다르다는 뜻이었다.
나는 페르세르크의 몸에 신성력 대신 사령 마나를 쓸어 넣기 시작했다.
“질병 한정으로는 사령 마나가 더 효율적이야. 그리고, 넌 그중에서도 특출나고.”
그녀의 육신에서 그녀의 존재를 제외하고 살아있는 것이 없게 만들어버리면 되는 일이다. 질병의 근원은 모두 델라의 힘에 기생하는 수억의 질병 바이러스.
바이러스가 죽어 사라져버리면 질병이 걸릴 수가 없다.
하나하나 구분하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지만 페르세르크처럼 다른 것은 신경 쓰지 않고 단 하나만 남긴 채 포맷해버릴 수 있는 육신이라면 질병 자체는 사실상 거의 무의미하다 봐도 무방했다.
파스스스스스스…….
사령 마나가 퍼져나가며 그녀의 몸을 정화, 아니 사멸시키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녀의 몸을 침식하던 바이러스들이 하나둘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고 이내 완전히 사라졌다.
그녀의 몸은 내가 만들었고.
그녀의 몸에 관해서는 그녀 본인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다.
정밀한 힘으로 그녀의 생명을 제외한 그 외의 생명만을 불태워버리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멀티를 칠 거면 좀 안전한 곳에 했었어야지.
이후 나는 이미 변해버린 그녀의 몸 일부를 다시금 재생시켜 그녀를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려 주었다.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 이제야 실감이 나는 게지…….”
생명과 흡사하지만, 그녀의 육신은 생명체이되 인공적인 생명체였다.
기적이라도 있지 않는 한 그녀는 아이를 가질 수 없으리라.
“적어도 매달 스트레스 받는 것보단 낫지 않아?”
“…… 아플지라도 그대의 아이를 품고 싶은 마음을 왜 몰라.”
내가 무슨 방법으로 그녀의 문제를 해결했는지 깨달은 페르세르크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이에 나는 천천히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코를 콕! 하고 한번 찌른 후 그대로 그녀를 등에 업었다.
“읏…….”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해.”
“…….”
페르세르크가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아이는 나중에 생각해보자.”
내 말에 그녀는 잠시 멍하니 나를 바라보다 쿡! 하고 웃어버렸다.
* * *
내 손을 떠나 스스로 붕괴하기 시작하는 거대한 산맥.
악림문, 아니 악림문이었던 터는 이제 생명이 살 수 없는 죽음의 땅이 되어버렸다.
세상을 태우는 레바테인의 영향력은 사라졌지만, 심연의 공주들에게 선빵을 치기 위해 사용한 레바테인의 영향으로 인해 지반 구조가 뒤틀리고 녹아내리면서 도저히 자연적으로도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 되어버린 것이다.
레바테인의 화염은 직접 꺼뜨릴 수 있지만, 지하 깊숙한 곳까지 태워버린 탓에 생겨난 시너지 효과까지 제어하기엔 보석이 너무 아까웠다.
게다가.
“역시나.”
멜트가 죽자마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내가 있던 지역부터 해서 거대한 타락의 늪이 퍼져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당장 내 몸을 대번에 부식시켜버릴 힘은 없지만 일반 인간이나 생물, 무생물에게는 지옥과도 같은 재앙이다.
제아무리 잘난 무인이라도 특수한 힘으로 보호받지 않는 이상 부패의 늪에 다가가는 순간 몸이 썩어 문드러질 수밖에 없으니까.
“생각 이상으로 많이 거대해지는데.”
멜트의 시체가 있던 곳을 기준으로 서서히 퍼져나가는 거대한 늪…….
늪 자체를 없애는 방법은 간단하다.
공간 자체를 지워버리는 흑마법으로 공간 자체를 덜어내 버리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그렇게 이곳을 처리한다 한들 임시방편일 뿐 이 땅 곳곳에 퍼진 오염을 모두 제거하기란 어렵다.
그러니.
“언제까지 구경만 할 거야. 빨리 나와.”
다른 방법을 쓰는 수밖에.
내 말에 반응이 온 것일까.
저 멀리서 새하얗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선녀가 긴장한 얼굴로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처음과는 다르게 그녀의 뒤엔 다른 선녀가 아닌 두 명의 남성이 서 있었다.
“그대가 하계에서 불왕의 옥새를 지니고 있다고 말하던 인간이로군.”
몸에 밴 버릇을 보면 제법 오만한 인상의 사내들이지만 그들은 내게 말을 조심스레 아꼈다.
그럴 수밖에. 단순히 두 개의 검으로 일대를 지옥으로 바꿔버린 내가 선계와의 문을 여는 방법도 알고 있다.
단순히 나와 반목했을 때 생길 피해가 얼마나 커질지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좋게 말하면 눈치가 빠른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더럽게 얍삽하다는 것이다.
물론 델라를 죽일 때부터 그들의 존재를 눈치챈 만큼 일부러 과한 퍼포먼스를 준비한 것도 사실이었다.
쓸데없는 생각 품지 말라고.
“그쪽은?”
“천둥 대신이오.”
“구름 대신이라 하네.”
근엄한 말투로 대답하는 두 사내를 보며 나는 선녀에게 물었다.
“그래. 약속한 건?”
“이번 일의 심각성을 고려할 때 단순히 하계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하신 상제께서 허락하셨습니다.”
끝까지 불왕의 옥새 때문이라곤 안 하지.
이미 항마봉사진이 펼쳐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소수지만 제법 많은 양의 선계의 존재가 내려온 것으로 보인다.
“분명히 말하는데. 엄한 짓 해서 하계와 충돌을 일으키지 마라.”
“…….”
“그렇게 되면 나는 너희를 보호해줄 명분이 없어진다.”
잊지 마. 나는 니들이 어떤 착각을 하건 일단은 인간이니까.
내 말에 선녀는 긴장한 듯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는 품 안에서 작은 호박석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팔신시의 옥입니다. 하지만 상제께선 당신이 이것을 제대로 다뤄내지 못할 거라…….”
“적어도 그 우치 그 양반이 부리던 주술보단 난이도가 낮겠지.”
담담하게 말한 나는 무거운 힘을 품고 있는 팔신시의 옥을 옷의 주머니에 넣은 뒤 아공간에서 다른 물건을 하나 꺼내 들었다.
프리아 여신과의 거래 과정에서 먼저 받은 주술검.
바로 우치의 신물이다.
“그래서? 이걸 어떻게 조율하려는 거죠?”
“보고나 있어. 그 잘난 기적을 보여줄 테니까.”
담담하게 말한 나는 주홍빛의 주술검을 한 손에 역수로 틀어쥐었다.
그리고는
주술검을 아래로 향하게 한 뒤 한쪽 무릎을 꿇고 도력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투웅!!!
동시에 내 의지에 깃든 사신수가 소환되며 나를 기준으로 네 방향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좌측에 청룡.
우측에 백호.
남쪽에 주작.
북쪽에 현무.
네 마리의 사신수를 본 선계의 존재들은 신비롭다는 듯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렇군. 하계의 인간이 만들어낸 주술의 결정체…… 신수라는 것이로고…… 하나 이것을 구현하는 건 불가능할 텐데…….”
“가능해.”
짧게 중얼거린 내가 주술검에 도력을 불어넣는다.
동시에 미리 준비해두었던 부적들이 나를 기준으로 원 형태로 퍼져나가며 스스로 자리를 잡아 지면에 달라붙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우웅!!!!
더더욱 힘이 강해진다.
내가 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사신수는 각기 다른 포효를 흘리며 자신들의 힘을 내가 쥐고 있는 주술검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삐릭.
[칭호, 가리지 않는 소환자를 착용.]
-영혼에 각인된 소환체를 구현 가능. 그 제한을 일시해제.
넬타리드가 2차 해금해준 칭호를 쓸 데가 왔다.
중앙 신수, 황룡.
놈을 부를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