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42화
208. 이클립스의 하드 트롤링이 부른 참사
사실 반쯤은 흥미 위주였다.
오래전 죽을 위기에 처했던 아이를 한 양자로 들인 적이 있다.
아이의 이름은 그리드.
언젠가 한 나라의 국왕이 될 아이였다.
평화와 존속을 유지해야 할 인간의 왕과 세상을 파괴하는 마녀의 조합이라니 퍽 우습기 그지없다.
그녀는 파괴의 화신이었고, 실제로 그럴 힘조차 가진 존재였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그녀는 아이를 양자로 들였고,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아이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진짜 인간의 엄마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원인에 대해선 그녀도 알고 있었다.
오래전 티오니스에 처음 도착했을 때, 장난감으로 삼기 위해 잡았던 한 인간 남자에게 정을 느껴버린 것.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어버리고, 상황과 우연이 겹쳐 그녀가 어느새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그 인간을 가족으로서 사랑하고 말았다.
이실디와 흡사한 경우가 아닌가.
하지만 이실디처럼 본능에 의해 끊임없이 갈등하는 경우와 다르게 베르단데는 너무도 쉽게 본능의 유혹을 떨쳐내 버렸다.
“흥. 나는 나를 이용하는 놈이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야. 그리고…… 이런 곳에서 죽을 순 없어.”
그녀는 하늘에서 싸우고 있는 두 여성을 보며 눈을 찌푸렸다.
그리 달가운 상황은 아니었다.
혹시나 싶어 남겨둔 것이 이렇게 보험이 되어 발현되었다는 말은 자칫했다간 이쪽이 크게 흔들릴뻔했다는 뜻과 일맥상통한다.
콰앙!! 쾅!!!
묵직한 타격음과 함께 울드가 시커먼 채찍을 이용해 서열 2위 흉신을 묶어 수차례 타격한 후 마치 말에 매달아 끌고 가듯 창공 저 높은 곳으로 사라졌다.
한치의 용서도 없는 강대한 공격 세례였다.
베르단데에게 장악당한 심연의 공주, 울드는 가진바 엄청난 고스펙의 하드웨어로 적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어서 가. 나는 언니를 도와야 하니까.”
“적이었던 심연의 공주가 이쪽의 방패막이나 해주고 있다니. 웃기기 짝이 없네.”
“본래의 언니라면 저 정도 적을 상대로는 조금 버겁겠지. 하지만, 내가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 어서 꺼져버려.”
처음 만났을 때처럼 말은 격하게 하면서도 망설임 없이 데이비를 보내주는 그녀였다.
이후 그녀는 하늘에서 흉신의 목을 틀어잡은 채 묵묵히 그녀를 아스가르드의 갑판으로 내리꽂는 울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힘은 본래보다 더 강해져 있었다.
다른 심연의 공주들보다 유별날 정도로 하드웨어는 좋던 그녀였다.
슬리지아조차 그 육체 스펙만큼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강하고 생명력이 질긴 그녀가 억눌려있던 본성까지 끌어내 싸우고 있으니.
고작해야 힘이 반절밖에 되지 않는, 게다가 모종의 이유로 도저히 상위 흉신이라고 보기도 힘들 정도로 약해진 지금의 흉신이 그녀를 압도하긴 쉽지 않을 것이다.
“크윽?!”
고통스런 신음을 흘리는 흉신을 보며 베르단데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데이비가 떠났으니 이곳을 정리할 일만 남은 것이다.
마법서를 허공에 띄운 그녀의 손에 붓이 하나 쥐어졌다.
현실을 멋대로 왜곡하며 키르시나를 방해하고 울드를 강화하여 싸움의 판도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카트시에 비하면 하위호환에 가까운 힘이지만 적이 카트시가 아니라면 충분히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녀는 오래전부터 머릿속에 남아있던. 한 인간에게 정을 느끼면서 깨워버린 기억을 되짚었다.
[네 엄마 아빠는 돌아가셨다. 이제는 돌아오지 않아.]
싸늘한 한마디.
하지만 새삼스러울 건 없었다.
[그러니. 나를 따라오려무나. 내가 네 부모가 되어줄 터이니.]
[이름이 무엇이냐? 베르단데? 그렇구나. 나는…….]
허공에 붓질하는 베르단데의 눈이 번뜩였다.
“어떻게 단서를 찾았는데. 이제 와서 죽을 거 같아?”
이곳에서 찾은 유적지에 서린 기억.
프리아 여신이 티오니스에서 말살에 가까울 정도로 흔적을 지웠지만, 넬타리드의 영역인 이곳에서는 그 흔적이 남아있었다.
어째서 이 세상이 익숙했던 것일까.
그 이유는 간단했다.
언젠가. 한번 와본 적이 있는 세계였으니 말이다.
아주 잠깐이지만. 그 짧은 찰나에 이곳에서의 기억이 그녀를 이끌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그녀는 무언가를 발견했고. 마치 홀린 것처럼 자신을 찾아 헤매던 울드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내 이름? 그래…… 그렇구나. 내 이름은 말이다. 헤라클래스라고 한다. 따라오렴. 전쟁은 곧 끝난다.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
침묵하는 베르단데를 노려보며 흉신 키르시나가 이를 뿌득 갈고 독설을 내뱉었다.
“큭…… 역겨운 심연 놈들 감히 배신을 하다니!”
“웃기는 소리 집어치우지그래? 애초에 난 너희 편이었던 적이 없어. 처음부터 적이었겠지.”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네놈들의 배신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그래. 마음대로 싸워보던가. 오히려 그게 더 좋겠네.”
베르단데의 도발에 흉신 키르시나는 분한 듯 입술을 짓씹고는 그대로 도망치듯 사라졌다.
남은 흉신은 이제 둘. 넬타리드 쪽은 대부분 정리되었지만 남은 두 흉신이 너무 강대한 전력이다.
물론 그걸 고민해야 할 건 그녀가 아니라 데이비였기에 그녀는 자신의 일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 말이 있다. 인간이 심연을 들여다볼 때, 심연은 인간을 들여다본다.
인간이 괴물을 잡을 때. 인간은 괴물이 될 각오를 해야 한다.
그 말은 어쩌면 그녀에게 해당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키르시나가 도망친 직후 그녀는 가만히 서 있는 울드의 육신에 난 상처들을 쓰게 바라본 뒤 그녀의 등을 가볍게 떠밀었다.
그러자 울드가 정신을 잃은 것처럼 그대로 힘없이 쓰러졌고 베르단데는 그런 그녀를 품에 받듯 안아 들었다.
“조금만 기다려. 내가 반드시 둘을 구해줄게.”
그녀가 눈을 조용히 감았다가 떴다.
* * *
흉신의 비공정 아스가르드 침공은 저지되었다.
아니 정확히는 흐지부지 흩어져 버렸다.
“생각 이상으로 흉신의 계략이 치밀했던 게지. 자책하지 말아.”
페르세르크가 나를 다독이며 말했다.
“빌어먹을 놈들…….”
“죄송해요…… 제가 힘이 없어서…….”
에이리아는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자책하고 있었다.
“네 잘못이 아니야. 대비가 미흡했던 내가 멍청했을 뿐이지.”
“자책하지 말아요…….”
슬퍼하는 에이리아의 울먹거리는 얼굴에 나는 쓰게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안고 토닥여주었다.
그 모습을 페르세르크는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고 세계수의 결계까지 첬지만 결과적으로 최악의 상황은 벌어지고 말았다.
붉은 공허에서 빠져나온 변이체를 이용해 흉신의 근거지를 찾아내고 놈들을 초토화하는 동안 흉신 카트시는 역으로 내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긴장을 풀 수 없는 적대대상인 것은 알았지만, 이제는 예전처럼 적당히 머리를 굴려서는 이길 수 없는 대상이라는 게 확연히 느껴졌다.
“…….”
“데이비 님. 륀느의 실책을 륀느가 낮게 평가. 륀느의 처벌을 요구해.”
팔에 붕대를 둘둘 감은 륀느가 무표정한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표정은 무표정이지만 그 안에 서린 분함이 엿보였다.
카트시의 힘을 등에 업고 아스가르드를 습격한 흉신 키르시나의 힘은 자연 제어.
재앙에 가까운 힘을 이용해 습격을 시작한 그녀는 케인과 륀느의 합공, 그리고 아스가르드의 무식한 화력을 이용해도 쉽게 막을 수 없었다.
그나마 세계수 알의 결계 덕분에 아스가르드 자체가 침몰하는 사태는 막았지만, 그녀를 막기 위해 페르세르크와 륀느가 부상을 당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나마 더 사태가 커지기 전에 변이체를 찾아 학살하던 메가로드리아가 복귀하면서 상황이 호전되었지만 사실상 이클립스의 트롤링으로 카트시가 키르시나에게 심어둔 힘을 거두어들이지 않았다면 큰 낭패를 보았을지도 모른다.
수척해진 얼굴로 잠든 페르세르크를 바라보던 내가 물었다.
“애초에 네가 할 수 있는 건 다 한 거 아니야? 네가 이 녀석들을 지키고 있으면 절대 이기지 못해.”
확실히 방어만 하고 있어선 답이 없다.
하지만. 나름대로 준비해둔 방어가 너무 무색할 정도로 돌파당한 것이 그리 좋을 수는 없었다.
“울드는 어떻게 됐어.”
“정신을 잃었어. 근간이 뒤흔들렸으니까 당분간 깨지 않을 거야.”
베르단데의 말에 모두가 침묵했다.
카트시가 힘을 거둬들여 상당히 약해져도 상위 흉신이다. 그런 그녀를 막아낸 것은 울드였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그런 의문들이 서린 시선들이었다.
“데이비. 본녀는 걱정 말아. 아직까진 멀쩡하니.”
“다음엔 더 확실하게 대비해놓고 갈 테니까 안심해.”
“본녀는 언제까지고 그대의 보호만 받을 순 없는 게지.”
그렇게 말한 그녀가 베르단데를 바라본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보이는데.”
“맞아.”
짧게 답한 그녀가 흑발을 흩날리며 걸어왔다.
“알고 싶은 게 있지?”
“넌 대체 뭐야.”
처음부터 이상하긴 했었다. 심연의 공주치고 너무 본능과 괴리되어있는 게 바로 그녀였다.
고작 인간과의 약속과 정 때문에 이렇게 된다고 생각하기엔 이상한 점이 너무 많았다.
“이실디도 본능과 이성을 분리했지만, 아직도 불안정해. 하지만 넌…… 좀 다르네.”
말끝을 흐린 내가 정곡을 찔러넣었다.
“애초에 본능이 없는 것 같던데.”
“……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 정확히 말하자면 심연의 공주로서의 본능은 여전해. 이 마법서를 통해 분리해두었을 뿐이지.”
그녀가 그렇게 말하며 가죽 마법서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게 가능하기 위해선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해.”
그렇게 말한 그녀는 곧 어디선가 꺼낸 나이프로 제 손가락을 베었다.
붉은 피가 흘러나온다.
“어때?”
“너…….”
그녀의 상처와 함께 흘러나오는 기묘한 기류에 내 표정이 굳었다.
“조건은 본질이 심연의 공주가 아닌 불완전한 심연의 공주일 것. 그게 전부야.”
그녀의 말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 그녀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바보는 없었다.
이곳에 와서 겨우 상황의 전말 일부를 들은 에디손 기술고문이나 티아라의 경우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페르세르크와 나, 그리고 케인은 놀란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에이리아는 과거 울드에 대한 공포스러운 기억이 떠올랐는지 몸을 파르르 떨었다.
잠시간의 침묵 끝에 케인이 나섰다.
“당신이 심연의 공주가 아니란 말입니까? 웃기는 이야기군요. 제 눈에는 당신도 심연의 공주입니다. 그 사실은 변치 않아요.”
“발키리아 꼬맹이의 말이 맞아. 심연의 공주는 맞지.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태생 심연의 공주가 아니라는 뜻이야.”
그녀는 간단하게 설명해주겠다며 운을 뗐다.
“데이비. 당신이 심연의 공주를 죽였을 때. 공통점이 있었지?”
“수많은 사념의 통합체, 그리고, 우리는 하나다.”
그 말과 함께 심연의 공주의 파편 속에서 수많은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수많은 타나토스의 사념들이 모여 만들어진 심연의 공주였으니까.
슬리지아도, 베르샤도, 그 외에 중원에서 본 심연의 공주들도.
“모두가 그래. 하지만 나는 달라. 죽더라도 그걸로 끝일뿐 타나토스의 사념으로 분열되진 않아.”
애초에 통합체가 아닌 개인이었으니까.
이어지는 그녀의 말을 내가 끊었다.
“쓸데없이 돌리지 말고 말해줄래?”
“인간이라고. 인간이 심연으로 끌려가서 오랜 시간 잠식되며 변한 특수한 케이스.”
“웃기는 소리! 심연에 빠진 인간이 심연의 공주가 되는 건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소리일 텐데?”
말도 안 되는 소리.
페르세르크의 외침과 같이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애초에 그녀가 정말로 1만 년 전에 헤라클래스와 연관이 있었다면.
아비트가 그녀를 몰라볼 리 없다.
‘아비트. 어떻게 된 거야.’
[죄송합니다. 맹주. 저로선 그 사실의 진위를 판별할 수 없습니다.]
‘판별할 수 없다고?’
[애초에 저는 인간에 대해선 별로 관심이 없었으니까요. 게다가 종족전쟁의 막바지에도 타종족과 교류가 거의 없었던 탓에 알고 있는 건 세피로스 출신이나 넬타리드를 배신하고 1대 맹주의 곁에 남은 륀느 님뿐입니다.]
오래전 있었던 전쟁이 다시금 재현된 것일 뿐이다.
그 당시 어린 용이었던 아비트는 인간에게 관심이 없었고, 전쟁에서도 베르단데를 본 적이 없기에 그녀를 못 알아본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너무 상황이 복잡했다.
다만, 이쯤 되니 그런 생각도 들었다.
헤라클래스가 정말 단순히 회랑의 영웅에 걸맞게 하기 위해 나를 이렇게 만들었던 것일까 하고 말이다.
“여신 프리아는 지독할 정도로 치밀한 여신이야. 티오니스 대륙에선 나에 대한 모든 단서가 말살되어있어서 나조차도 그곳에서 내 존재를 알 수 없었어. 하지만 넬타리드 신의 영역인 이 지구에서는 다르지. 실제로 나에 대한 단서를 이곳에서 찾았거든.”
그녀가 나를 따라온 진짜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오래전 벌어진 전쟁은 넬타리드와 프리아 여신, 그리고 타나토스의 싸움이었다.
그 배경이 꼭 티오니스에 한정된다는 보장은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불가능한 가설은 아니었다.
이어지는 그녀의 설명을 간단히 하자면 이러했다.
오래전 삼신의 주도하에 벌어진 종족전쟁에서 헤라클래스의 세 양녀가 심연으로 끌려들어 갔다.
정확히 끌려들어 간 것인지 자발적으로 들어간 것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어찌 되었건 결과는 같다.
그곳에서 타나토스의 잔념은 전쟁을 끝내게 만든 인간에게 극도의 분노를 품었고, 그 분을 풀기위해 그의 세 딸을 잠식시켜 심연의 공주로 바꾸었다.
“내가 아는 건 거기까지야. 나는 기억이 드문드문해. 내 부친일지 모르는 그 인간의 얼굴도 기억이 나지 않고 당신의 말대로 본래 인간의 편이었던 고대룡 이클립스에 대해서도, 또 흉신에 대해서도 기억나는 건 하나도 없어. 그래서 더 의심스러웠던 거지만 말이야.”
그렇게 말한 그녀가 나를 바라보며 침묵했다.
“헤라클래스의 흔적…….”
“프리아 여신이 당신에게 말했다고 했지? 울드 언니와 스쿨드에게 헤라클래스의 흔적이라고 말했다고.”
그녀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나는 당신을 최선을 다해서 돕는 거야. 내 기억을 되찾고, 내 근본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단서가 이제 당신의 손에 있으니까.”
그녀는 자신을 위해 나를 돕는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헤라클래스에 대한 정보가 최근 들어 많이 굴러들어오네.”
웃긴 일이다.
꼬인 족보도 이것보단 편리하리라.
물론, 과거는 과거일 뿐 지금에 와서는 관계없는 일이라지만 복잡한 심경이었다.
누군 그의 부인이라고 하질 않나. 헤라클래스의 흔적이라고 아리송한 힌트만 던져주던 심연의 공주 세 자매는 알고 보니 헤라클래스의 양녀라는 결과이질 앓나.
“그럼 울드나 그 스쿨드라던 이름의 쥐방울만 하던 심연의 공주도…….”
“확실하지 않아. 그렇기에 일단 본능만 억눌러놓았어. 다만 이실디 때처럼 쉽게 되진 않을 거야. 아마 언니가 일어난다면 금방 내 제어를 깨고 날뛰겠지.”
시한폭탄을 배에 들인 꼴이다.
“당신이 도와준다면 가능해. 언니를 제압해. 그 후에 언니의 본능을 억누르는 건 내가 할 테니.”
“애초에 네가 정말 그녀와 친혈육이 맞는지부터 의심해야 하는 거 아닌가?”
“흥. 내가 네 녀석처럼 단춧구멍 눈알을 가진 줄 알아?”
“어허! 지금 본녀의 남편을 흉보는 게야?”
“글쎄? 적어도 당신을 그냥 두는 게 이해가 가지 않을 뿐이야.”
사이가 좋지 않은 듯 페르세르크와 베르단데가 서로를 노려보았다.
“타나토스의 화신이라고 했나? 솔직히 그런 점에서 나는 당신이 마음에 안 들어. 어떤 이유였건 당신은 나를 심연의 파괴 병기로 만든 타나토스 그 자체니까. 프리아 여신도 역겹지만, 진실을 안 이상 타나토스 또한 내겐 똑같이 역겨운 신의 잔재일 뿐이야.”
“본녀의 이름은 타나토스가 아니라 페르세르크야. 한 번만 더 그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면 본녀가 어찌할지 모르니 처신 잘하는 게 좋을 테지.”
“흥, 그럴 거면 우선 당신이 하고 있는 가장 큰 거짓말부터 해명해야 할걸?”
“그 입 닥쳐.”
험해진 페르세르크가 마기를 끌어 올린다.
어지간해선 이성을 잘 잃지 않는 그녀였지만 어째서인지 베르단데의 도발에 극도로 분노하고 있었다.
“프리아 여신의 미움을 받는 주제에 말은 잘하네. 내가 한 말은 충고야. 나는 내분으로 인해 문제가 발생하는 걸 원한다면 어디 마음대로 해봐.”
페르세르크를 향해 차갑게 쏘아붙인 베르단데는 다시금 내게 화살을 돌렸다.
“이미 알고 있지? 카트시는 죽지 않았어. 서열 2위 흉신 키르시나 또한 마찬가지. 3위의 흉신과 4위의 흉신은 카트시의 힘으로 인해 사멸했지만 9위 흉신의 죽음은 확인되지 않았고.”
“그렇지.”
“이곳은 그들의 영역이야. 심연의 공주, 이클립스의 하드 트롤링으로 인해 넬타리드 신의 힘겨루기는 파괴 쪽이 불리하게 변했어. 두신의 힘겨루기는 그냥 둬도 파괴의 패배로 끝날 거야. 그러니 당신은 이제 이곳을 포기해.”
“여보세요!! 지금 넬타리드 님을 그냥 두고 떠나겠다는 겁니까?! 넬타리드 님이 당신들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데!! 만약 흉신이 파괴를 돕는다면 어찌 할겁니까!”
케인이 격분하자 베르단데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효율을 따지라는 거야. 흉신의 경우 이 땅을 포기하고 티오니스로 넘어올 수밖에 없게끔 유도해야겠지. 적어도 그곳엔 이곳보다 믿을 수 있고 강한 전력이 많을 테니까.”
물론 나도 케인과 비슷한 생각이다. 넬타리드는 그리 마음에 드는 신이 아니지만, 지구에는 현아와 연희 누나 그리고 삼촌이 있으며. 보고 있으면 굴릴 맛 나는 두 공돌이나 하인스 영지의 명예시민인 산소 남매. 그리고, 나를 두고 매번 친구라 지칭하는 왕자님도 있지 않던가.
“포기하라고? 이 땅에 인구가 몇십억인지는 알고 지껄이는 거냐? 본래 넌 이런 결정을 마구잡이로 내릴 성격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내 물음에 그녀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야지. 그 과정에서 내가 악녀가 될 수 있다면.”
그만큼 자신의 기억을 되찾고 근본을 잇는 게 중요하단 말인가.
그녀의 말은 현실적이었지만. 반대로 그리 마음에 드는 답변은 아니었다.
“이 세상에는 내 소중했던 가족이 살고 있어. 그들의 터전을 부수게 둘 생각은 전혀 없고.”
내 경고에 베르단데가 나를 조용히 직시했다.
“그렇게 하다 패배할지라도?”
“누구 마음대로.“
“전쟁은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넌 지금 전쟁을 너무 안일하게 보고…….”
“그건 내가 할 말이다. 베르단데.”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베르단데가 양손을 들어 항복선언을 했다.
“하아…… 너무 격해졌네. 그래. 인정할게. 너무 안일했어. 사실 그 절대보옥인지 뭔지만 해결된다면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는데 말이야.”
그녀는 놀라우리만치 조급해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케인! 이걸 봐! 보옥이 빛을 내고 있어! 넬타리드 님의 힘이 서리고 있다고!”
잔뜩 신이 난 두 번째 발키리아. 프레이아가 문을 벌컥 열며 들어왔다가 모두의 시선을 받았다.
“어…… 음…… 잘못 온 거 같네.”
기괴한 분위기에 당황한 그녀가 나가려는 그 순간.
내가 손가락을 튕겨 바람을 일으켰고 그대로 문을 닫아 잠가 버렸다.
“들어올 땐 마음대로지만 나갈 땐 아니야. 그거 가져와.”
내 말에 두 번째 발키리아인 프레이아가 입을 삐쭉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