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54화
천칭을 녹여낸 창.
별과 은하를 상징하는 문양이 서린 왕관.
그리고 태양을 머금은 6개의 날개.
절대 있을 수 없는 변화에 카트시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의 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수 없었다.
조화의 신 넬타리드가 만들어낸 신의 부대, 발키리아와는 다른 신의 처단부대, 백익 세피로스.
이미 세피로스라는 종족은 다 사라졌지만 기본적으로 여러 개체수가 있는 발키리아와 다르게 세피로스라는 종족은 특이한 방식을 적용한다.
온몸에 극심한 부상을 입은 채 페르세르크가 힘겹게 륀느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럴 리가…… 분명 당신은 여신 프리아를 받아들이고 소멸했을 텐데요?”
카트시의 물음에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감은 륀느가 천천히 미동했다.
그녀의 육신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고 천천히 눈을 뜬 그녀의 눈에 푸른 안광이 마치 혜성의 꼬리처럼 따라 일렁였다.
동시에 그녀의 머리가 빛나며 로우 트윈테일 형식으로 묶어둔 머리카락이 풀렸고, 이내 그녀의 종아리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어지며 푸른빛이 더욱 진해지기 시작했다.
“전장의 여신화…….”
그 모습을 본 카트시가 쓰게 중얼거렸다.
“모든 게 계획대로였는데 여기서 발목을 잡힐 줄은…… 야단났네요.”
부웅!! 카앙!!
허공에 창을 휘두르자 마치 금속을 후려친 것처럼 청명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커헉?!”
그리고. 섬광처럼 흩어지듯 사라졌다가 나타난 그녀의 작고 흰 손에 쥐어진 새하얀 초열의 창이 그의 몸을 꿰뚫었다.
“천칭을 녹여낸 창…….”
육신을 불태우는 창이 그를 꿰여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순식간의 공격에 카트시가 피를 울컥 토하며 손을 휘젓자 허공에서 검은 창들이 쏟아져 나와 그녀를 향해 파고들었다.
하지만 흑창들은 그녀에게 닿기도 전에 초고온의 화염에 녹아 사라져버렸다.
불타지 않는 창을 일순간 녹여버릴 정도의 고온 때문일까.
주변의 공기가 일렁이더니 바닥이 불타 모래화되고, 녹아내려 유리로 변해버렸다.
압도적인 고열을 내뿜으며 그녀는 카트시를 꿴 채 붕붕 돌리다가 그대로 내팽개치듯 던져버렸다.
“커헉!! 쿨럭!”
이전의 륀느와는 완전히 다른 화력을 선보이며 그녀의 손에 힘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입자가 반응하더니 이내 그녀의 날개가 한차례 번쩍이며 기이한 장비가 날개 한쪽에서 생겨났다.
그리고.
치잉!!
마치 굴절된 것 같은 빛의 줄기가 수십 가닥 그녀의 등 뒤 날개에서부터 쏟아져 나와 꺾어지며 카트시를 향해 날아들었다.
콰아앙!! 쾅!!!
귀가 먹먹해지는 소리와 대지가 갈라지며 땅의 울음소리가 퍼져 나왔다.
고열로 인해 녹아내린 지면 속에서 카트시는 엉망이 된 상의를 거칠게 찢어버리고는 천천히 일어났다.
기계 같은 눈빛으로 그를 직시하던 륀느가 익숙하게 창끝을 겨누고 침묵했다.
잠시간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후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륀느였다.
그녀는 곧바로 쓰러져 있던 페르세르크에게 다가갔고 말없이 그녀의 몸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페르세르크의 주변에 새하얀 장막이 서렸다.
막대한 밀도를 지닌 에너지가 그녀를 보호하는 보호막이 된 것이다.
“바뀌는 건 없습니다. 어차피 그녀는 돌이킬 수 없어요.”
“…….”
카트시의 도발에도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6개의 날개가 펄럭 거리더니 마치 섬광처럼 흩어지며 카트시를 향해 날아들었다.
카트시는 이에 질세라 전신에 검보랏빛의 기운을 모으더니 기괴하고 거대한 괴물의 형태로 변하여 그녀에게 저항하듯 덤벼들었다.
콰앙!!
조화의 신 넬타리드에게서 파생된 두 존재가 충돌하며 어마어마한 여파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재앙을 부르는 두 존재의 충돌은 한 치의 망설임도, 주저함도 없었다.
수십, 수백 줄기의 광선을 쏘아내며 포격하는 륀느와 그 광선들을 피해내는 카트시의 싸움은 점점 여파가 강해지며 주변을 파괴시켰다.
후웅!!
이윽고 천칭을 녹여낸 창의 끝을 높이 들어 올린 그녀가 그것을 빛의 입자로 바꾸어 하늘로 쏘아 보낸다.
그에 따라 카트시는 녹아내린 지면의 공간을 일그러뜨리며 환상을 현실화시켜 흑창들을 끌어냈다.
“흑과 백의 싸움이라…… 퍽 재밌겠네요.”
무언가를 긁는 듯한 묵직한 목소리가 나오며 륀느와 카트시의 힘이 일순간 충돌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거대한 여파는 이내 방대한 범위로 자비 없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 * *
흉신 서열 1위, 넬타리드의 힘이라 불리는 카트시였지만 지금 그는 생각외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의 거대한 육신은 여기저기 갑각이 찢어져 있었고, 피가 흘러내렸다.
반면 륀느의 경우 눈에 띠는 외상은 없었다.
“하…… 상처까지 분석해서 재구성할 정도로 회복한 겁니까.”
그의 일렁이는 안광이 흉흉하게 빛났다.
“하지만 그게 당신의 한계이지요. 이미 내 계획은 성공했습니다. 타나토스의 화신이 그렇게 된 이상 내가 여기서 더 시간을 끌 이유도 없습니다.”
담담하게 말한 그가 흑창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당신이 살아있는 건 그리 달갑지 않네요. 감히 창조주를 배신한 주제에 우리의 창조주께서 하사하신 힘을 뻔뻔하게 사용하다니.”
여기서. 당신만큼은 죽이고 떠나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검은 기류가 수십 가닥의 줄기가 되어 지면에서 끌려나와 그에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명백히 위험해 보이는 힘이었다.
이에 륀느가 다시 손에 입자를 모아 천칭을 녹여낸 백금빛의 창을 다시 불러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없…… 어.”
어렵사리 입을 연 그녀의 눈에 푸른빛이 순간적으로 일렁였다.
“더 이상 이 의미 없는 전쟁을 지속하게 둘 수 없어.”
“그래 봐야 당신이 뭘 할 수 있습니까. 빌어먹을 고대룡으로 인해 제 몸이 만신창이라 할지라도 지금의 당신이 나를 이길 가능성은 희박할 텐데요.”
쿠웅!!
창끝을 겨눈 륀느가 비틀거렸다.
맹렬하게 회전하던 기하학적인 문양은 속도가 줄어들고 있었고 그녀의 날개는 빛이 많이 바랜 듯 보였다.
겉보기엔 상처가 없어 보이지만 사실상 타격이 상당히 심하다는 소리였다.
“그래서. 혼자서 뭘 할 수 있습니까.”
그 말에 륀느가 조용히 침묵했다.
“그 반면 나는 이 싸움을 위해 많은 것을 준비해왔습니다.”
따악! 소리와 함께 그가 손을 튕기자 주변 공간이 일그러지며 그 안에서 검은 형체를 지닌 무언가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형체가 없던 그것들은 이내 검은 기사의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아틀란티스. 동족 오르가가 만들어낸 질병의 군세입니다. 그가 과거부터 자신의 힘을 갈라내 제게 맡긴 것들이지요.”
순식간에 일그러진 공간들이 점차 넓어지며 그 안에서 튀어나온 검은 기사들이 륀느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카트시와의 싸움도 힘든 마당에 이만큼 많은 수의 적이 몰려든다면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리라.
“죗값을…… 치러.”
어렵게 입을 연 그녀가 창을 빙그르르 돌렸다.
콰앙!!!
그리고는 창끝을 지면에 꽂아 넣어 고정시켰다.
완전한 포위.
주변뿐만 아니라 하늘까지 새까맣게 메울 정도로 방대한 수의 검은 기사들이 그녀를 향해 언제든 덤벼들 준비를 한다.
파직!!
륀느의 신체 일부에서 스파크가 튀기며 그녀의 육신이 한차례 흔들렸다.
막대한 힘을 완전하지 않은 육신이 견뎌내지 못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한계 아닙니까?”
빈정거리는 카트시의 말에 륀느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데이…….”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주제에 말입니다.”
“데이비님의 명령…… 륀느 우선순위. 의식을…… 지키고…….”
힘겹게 말하는 그녀의 몸에서 연기가 나기 시작했다.
“페르님을…… 지킬 것…… 그 과정에서 륀느의 목숨을 지키라는 명령…… 없었다고 분석.”
명령이란 받아들이기 나름이다.
륀느에겐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짧게 중얼거린 륀느의 눈동자 하나가 붉게 변하기 시작했다.
에러 문구가 쉴 새 없이 그녀의 한쪽 눈동자에 붉게 떠오르지만 그녀는 자신의 힘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가 꽂아놓은 창대가 파르르 떨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거대한 스파크를 만들어내며 섬광을 터뜨렸다.
일순간 주변의 모든 시야를 앗아 가버리더니 서서히 멎어간다.
팔을 들어 눈을 보호한 카트시가 안광을 일렁이며 륀느를 바라보았다.
크게 변한 것은 없었다.
하지만.
쿠웅!!
그녀의 주변이 변했다.
거대한 빛이 그녀를 에워싼 검은 형체들을 관통하며 지면에 내리 꽂혔다.
그리고 그녀가 만들어낸 한 가닥의 빛줄기 속에서 새하얀 날개에 풀 플레이트 갑옷을 입은 존재가 천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전 처녀 소집?!”
쿵!! 쿵!! 쿵!!
경악한 카트시의 말과 함께 수십 줄기의 빛줄기가 하늘에서 쏟아진다.
그리고 주변을 에워싼 검은 기사들을 강타하며 그곳에 아무것도 남지 않게 만들었다.
단순한 폭격 같아 보였지만 실상은 달랐다.
그 속에서 처음과 같이 풀 플레이트를 입은 존재들이 하나 둘 나타나 서서히 웅크리고 있던 몸을 일으킨 것이다.
절도 있는 자세로 할버드를 들고 일어난 존재들이 오와 열을 맞춰 일어나 륀느의 주변에 포진한다.
넬타리드가 만들어낸 세 가지 절대 종족.
발키리아와 아틀란티스를 제외한 처단부대이자, 신의 칼날인 세피로스들이었다.
당연 세피로스는 모두 사라졌다.
륀느 또한 마찬가지.
하지만 륀느는 빛줄기 속에서 그녀의 동족을 불러냈다.
아니 정확히는 불러낸 게 아니었다.
이 자리에서 만들어낸 것일 뿐.
“일인 종족…… 참 터무니없는 권능입니다.”
하나 둘. 이내 수십 수백.
주변을 가득 메워버린 검은 형체들과 대치하듯 빛의 군세가 일어나 창끝을 세우고 륀느의 뒤편으로 절도 있게 도열했다.
륀느의 날개가 마치 회광반조라도 하듯 강렬하게 빛났고 그럴 때마다 더 많은 빛의 기둥이 쏟아져 내렸다.
세피로스란 그녀 한명을 일컫는 말이며 또 수많은 칼날을 일컫는 단어이기도 했다.
그녀가 힘을 발현하면 세피로스는 절대 멸종하지 않으며, 륀느가 죽는 순간 전체가 멸종하는 기괴한 구조를 지닌 종족.
그것이 바로 세피로스였다.
수백에 달하는 방대한 백의 기사들을 만들어낸 륀느의 눈동자에 문자가 어지럽게 움직였다.
붉게 변해버린 한쪽 눈이 서서히 황금빛을 띠다 다시 푸른빛으로 돌아왔고, 이내 그녀는 카트시와 그가 불러낸 검은 기사들을 향해 그녀의 창을 겨누며 입을 열었다.
처음과 다른 무언가 후련함까지 느껴지는 말투였다.
“엘더 브레인. 륀느가 명령을 하달.”
[적을 섬멸.]
기계 같은 그녀의 음성이 쏟아짐과 동시에 빛의 기사들이 일제히 칼군무를 추듯 무기를 움직였고, 이내 검은 형체와 카트시를 향해 무기를 겨누고 에너지를 집약하기 시작했다.
철컹!! 그 말과 함께 두 거대한 세력이 서로를 향해 빠르게 쏘아져 들어갔다.
“흥! 당신의 권능이 얼마나 치명적이건 이 싸움의 결과는 어차피 뻔할 테지요. 그 잘난 처단부대의 천사들이 공포에 질리는 꼴을 어디 지켜보겠습니다.”
괴물로 변한 카트시가 거대한 꼬리를 한 차례 땅에 내리치며 섬뜩하게 중얼거렸다.
“어차피 전쟁은 우리가 승리한다. 모두 찢어발겨라.”
섬뜩한 목소리와 함께 검은 기사들이 륀느의 백익 천사들을 향해 덤벼든다.
일촉즉발의 상황.
당장 엎어지면 닿을 거리까지 접근한 두 종족이 서로를 향해 공격을 쏟아 부으려는 그 순간.
그 틈 사이에서 빛이 모여들며 한 남성의 모습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동시에 륀느와 카트시 모두 놀란 듯 그곳에 나타난 청년을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카락이 산발인 사내는 덥수룩한 수염으로 인해 상당히 폐인처럼 보였지만 조용한 눈매는 둘 모두를 섬뜩하게 만들었다.
“흐음…… 이 정돈가.”
일촉즉발의 상황 속에서도 여유롭게 중얼거린 그는 허리춤에 채워진 호리병을 꺼내들더니 그 안에 든 독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끅! 아이고 취한다. 약속은 약속이니 한 번 정도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린 사내의 행동에 륀느가 다급히 움직였다.
이 와중에 대체 어디서 튀어나왔단 말인가.
데이비가 인간을 지키려 한 이상 애꿎은 인간이 휘말려 죽는 걸 방치할 수 없었다.
그녀가 급히 그를 낚아채 도망치려는 그 순간.
사내는 호리병의 술을 모조리 마셔버리고는 호리병을 휙 던졌다.
그리고는 허리춤에 채워진 낡은 환도를 스르륵 뽑아들고는 딸꾹질을 했다.
“끅!”
고요한 시선으로 검은 기사들을 바라본 그가 검을 익숙하게 빙글빙글 돌렸다.
[마령검 88식]
천지가 반전되며 모든 것이 물 흐르듯 뒤틀리고 잘려나간다.
그의 중얼거림이 입에서 흥얼거리듯 내뱉어짐과 동시에 도저히 눈으로 쫓을 수 없는, 또 원리를 이해할 수 없는 검기가 일대를 완전히 장악해버렸다.
한 차례의 빛이 사라진 끝에 륀느는 경악한 듯 눈앞의 상황을 바라보았다.
평범한 취객에 불과했다.
도대체 인간이 왜 여기 나타난 건지도 이해할 수 없지만 그가 검을 휘두른 직후 생긴 이변은 더욱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당장이라도 일대 전부를 전소시킬 것처럼 서로를 향해 덤벼들던 전쟁의 시작이 순식간에 종결되어버린 것이다.
다른 존재도 아니고 카트시가 강화시킨 검은 기사들이다.
그런 강대한 존재들을 일거에 쓸어버린 사내는 낡은 환도를 빙글빙글 돌리더니 이내 가죽으로 된 검집에 환도를 거칠게 밀어 넣었다.
“인생사 욕심이 무슨 의미가 있나. 끅! 그저 즐기다 가면 되는 것을. 죽은 자를 다시 불러낸 건 설사 여신이라도 용서받지 못할 일이외다.”
누구에게 하는 것인지 모를 그 말과 함께 사내는 마치 먼지가 되듯 흩어져버렸다.
카트시가 아무리 약해져도 당장 각성을 마친 륀느가 이기기엔 어려움이 많다.
죽음을 각오했다는 소리였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모두가 예상한 범위를 아득히 넘어섰다.
경악스러운 상황 속에서 륀느가 멍하니 사내가 사라진 방향을 직시했다.
“커헉?!”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카트시가 몸을 비틀며 전신에 피를 쏟고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