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92화
아무리 잘난 소드마스터라도 마나 하나 쓰지 않고 오로지 검술로만 상대하면 검술대련은 어떨지 몰라도 목숨을 건 싸움에선 익스퍼터급 기사에게도 질 수 있다.
마나라는 존재는 그만큼 단순히 방출문제를 넘어 육신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니까.
정신은 따라가는데 육체가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는 소리였다.
그런데. 약해진 차원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잘라버리는 망할 검신의 시그니쳐 검술. 시공격검을 써대는 일리나를 상대로 무기도 마나도 아무것도 없이 단순히 육체능력만으로 상대하라?
이건 뭐 어린애를 상대로 이종격투기 선수와 킥복싱을 하라는 소리와 다를 게 무엇인가.
일리나는 내 기준에선 확실히 약골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녀는 대체 검신에게 무슨 수련을 받은 것인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강해져 있었다.
오랜 시간 고통받고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검을 익혔던 평행선의 일리나, 레이나 조차도 가볍게 뛰어넘는 수준.
이미 그녀의 경지는 소드마스터로 분류할 수 있는 부류의 것이 아녔다.
나를 제외한. 사실상 티오니스 대륙 최대의 무력.
과거의 나라면 승산을 절대 장담할 수 없는 강자.
그런 강자를, 단순히 내 몸과 임기응변만으로 이기라니 기가 막힐 수밖에.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못한다고 버틴들 돌아오는 건 매타작뿐이니 하는 수밖에 없다.
회랑에서 나는 그렇게 배웠고, 마법학교 샤쿤탈라의 낙제생들이나 하인스 아카데미의 교수진들을 가르칠 때 내가 쓴 방식의 강화판을 익숙하고 질릴 만큼 겪어보았다.
이제 와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그나저나 앨리스 대주교와 고르네오 아카데미를 잘 이끌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사람에겐 각기 분수라는 것이 존재한다.
일리나가 익히기 시작한 시공검, 정확한 명칭으로 시공격검은 하레스가 회랑에 와서야 만들어낸 그의 검술로 사실상 그의 시그니쳐 스킬이라 봐도 무방했다.
시간을 무르게 넘기고, 공간을 가리지 않고 베어내는 검술.
그 검술은 옅게 닫힌 차원 정도는 가볍게 찢어발길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으나 나는 그 검술을 배울 수 없다.
헤라클래스의 무한한 진화도 익힐 수 없고.
데스 로드만의 초월 흑마법 또한 엄두도 낼 수 없다.
오딘의 천체마법은 당연하거니와 정령 여제 유리아나가 만들어 내는 모든 정령왕 동시소환과 그 정령왕의 동기화를 극대화 시켜 만들어 낸 독자적인 정령술이나 정령계 구현은 사용할 수 없다.
나는 대량의 영혼 개조를 통해 많은 것을 받아들일 수 있고, 그것들을 익혀 내 것으로 사용할 재능을 지녔지만.
일리나처럼 일정 이상의 수준까지 올라설 재능은 가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는 내 방식대로의 성장 루트라는 것이 존재한다.
츠츳…….
일리나는 아주 작정한 듯 나를 몰아붙였다.
“이때가 아니면 언제 이겨보겠어! 각오 단단히 해!”
이년이?
“누굴 죽이려고 작정했나.”
“치사하게 아닌 척하면서 마나 쓰기 없기야.”
“대체 언제부터야. 언제부터 저 양반이 네게 붙은 게.”
“꽤 됐어. 그동안 말하지 못했을 뿐이지.”
“왜?”
“그건…….”
[신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다. 집중해라 데이비.]
검신의 엄한 목소리에 나는 정신을 퍼뜩 차리고 몸을 날려 검을 피해냈다.
탄환처럼 날아드는 검기를 피하는데에도 한계가 오니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다.
흉신도 처리했고.
“하레스.”
대답 대신 그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담담하고 진중한 표정이다.
“다시 묻겠는데, 다른 양반들은…… 어디 있습니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네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니다. 데이비.]
허공에 드러누운 채 하품을 쩍쩍하지만 그 나름의 감정을 숨기는 방식이라는 걸 내가 모를 수가 없었다.
대체…….
나 한 명을 위해서 몇 명이 희생하고 있는 것인가.
주먹에서 빠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힘이 들어갔지만 애써 표정까지 티 내지는 않았다.
영웅들이 어째서 갑자기 이런 간섭, 그리고 선택을 내렸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나를 위해 그런 선택을 내렸다면.
나는 그들과의 약속을 어겨선 곤란하다.
“언제까지 놀 거냐. 데이비. 혼수상태에서 깨어나더니 혓바닥만 길어진 거냐? 집중 안 해?!?!”
“망할!!”
갑작스런 고함에 일리나 조차 놀랄 정도였다.
망할 스승들이지만 약속은 철저한 편이다.
나는 그 양반들을 믿으면 되는 것이고. 그 양반들은 그들을 믿는 나를 이끈다.
그것이 전부.
나는 숨을 짧게 고른 채 한 손을 뒷짐 지듯 등 뒤로 빼고 나머지 한 손을 펼쳐 일리나를 향해 겨누었다.
“아파도 책임 안 진다.”
“흥. 쉽지 않을걸?”
자존심이 상했는지 그녀가 나를 향해 파고 들어왔다.
검신 하레스에 비하면 확실히 엉성하지만, 그녀는 엄연히 시공격검을 배운 검사.
그렇기에 절대 가벼운 상대가 아니지만 나는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뜨며 한 발 내디뎠다.
이보다 더 거지 같은 조건에서도 시험을 통과해왔다.
이런 것에 무너질 정도였다면.
나는 예전에 객사했으리라.
터엉!!!
정면승부는 불리한 만큼 나는 일리나의 과격하면서도 절제된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빗겨내거나 흘리는 식으로 반격을 가했다.
당연히 그녀의 검과 정면으로 충돌하면 받아내는 것은 물론 빗겨내기도 쉽지 않다.
그렇기에 나는 손등이나 손바닥으로 그녀의 두꺼운 검면을 밀어내듯 빗겨치거나 검면을 걷어차며 반격을 가했다.
콰앙!!! 쾅!!
일리나의 얼굴에 놀라움이 서린다. 그리고 그렇게 놀라는 그녀의 틈을 만들기 위해 나는 갖은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순식간에 바닥을 걷어차 모래를 뿌리는 것은 물론, 허초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근처의 지형지물을 빠짐없이 이용한다.
가장 힘든 것은 내가 위험한 순간에 멋대로 날뛰려 드는 마나 때문이었다.
평소에 말을 잘 듣던 것들이 갑자기 위험신호를 보내면서 멋대로 움직이려 드니 그것을 제어하다 보면 이쪽도 틈이 생겨난다.
“앗! 치사하게!!”
그녀의 검을 몸을 굴려 피해내고는 튕기듯 일어나며 바닥을 걷어차 모래를 부리자 그녀가 인상을 찡그렸다.
“명심해라. 목숨 걸고 하는 싸움에 비겁 같은 건 없다.”
내 경고에 그녀가 인상을 찡그리며 소리쳤다.
“지금 너와 내가 죽자고 싸우는 건 아니잖아?!”
“분명히 말하는데. 네 검 일검을 지금 이대로 맞으면 나는 그대로 골로가는…… 흡!!”
기습적인 공격이 쏟아진다.
무식한 위력이 담긴 그녀의 일검은 분명히 이 폐공장조차 부수지 못할 정도로 축소된 범위를 부수지만 그녀의 검이 닿은 바닥은 마치 종이를 거대한 칼로 잘라버린 것처럼 깔끔하게 지워져 버렸다.
“히힛! 어때? 네게 배운 거야.”
“그런 못된 건 어디서 배워가지고!”
“방금 네가 그랬잖아!”
역시 배우는 속도 하나만큼은 놀랍다.
일리나의 공격이 정직함에서 사도로 물들기 시작하자 공격을 피하기가 더더욱 어려워진다.
거기에 대고 하레스는 한 가지 더 요구를 던졌다.
[데이비. 독고준에게 절문혈도를 배웠지? 네 몸에 사용해라.]
“이 미치광이가!”
절문혈도.
상당히 사용하기 힘든 혈도술로 아주 잠깐 마나의 흐름을 강제로 막는 혈도술이다.
단순히 적에게 사용하면 잠깐의 효과를 보는 정도에 그치지만 그것을 내 몸에 사용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욕지기를 뱉으면서도 나는 망설임 없이 절문혈도를 내 몸에 짚었다.
그러자 내가 위험할 때마다 날뛰던 마나가 서서히 둔해지기 시작하며 멈추기 시작했다.
그나마 마나가 찔끔찔끔 새어 나와 나를 보조해주던 것까지 사라진다.
이제는 완전히 환골탈태로 초월한 육체능력만이 남은 상황.
거기에 대고 검신은 더 빡센 요구를 던져왔다.
[후손님. 저놈, 죽일 작정으로 덤벼.]
“뭐…… 뭐라구요?! 아무리 그래도 저더러 데이비를 죽이라니요!”
[반론은 받지 않아.]
단호한 그의 말에 일리나가 우물쭈물한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 숨을 몰아쉬던 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죽일 생각으로 덤벼.”
“데이비!”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장인 어르신.”
[저 망할 놈! 장인어른이라 부르지 마! 이 자식아!]
투덜거리는 그를 뒤로한 채 나는 숨을 천천히 고르며 비축해둔 체력을 끌어올렸다.
마나도 사용할 수 없고, 무기도, 금기의 힘도 무려 신력도 사용할 수 없다.
정령 마나나 주술 또한 어떤 의미로는 마나의 계통.
그렇다면 내가 가진 힘 대부분을 봉인 당한 상태인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검신 하레스가 미친 척하고 나를 죽이려 드는 이 수련 속에서 그가 바라는 게 무엇인지 찾아내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물론, 오랜 시간 생각할 것도 없었다.
단순무식 무대뽀식 가르침은 그들의 종특이고, 나의 종특이기도 하다.
-수련 한 번에 목숨을 걸어라! 네가 안전을 생각하고 한 수련은 결국 그 안전바를 벗어나지 못한다!
헤라클래스가 처음 아무것도 없던 나를 가르칠 때 했던 말이었다.
뭔가 있으니 이런 가르침을 주는 거겠지. 나는 거기에 맞춰 시련을 이겨내면 그만이다.
일리나가 절도있는 자세로 검 끝을 내 쪽으로 겨누고는 발 간격을 벌린다.
“아…… 아아! 난 몰라!”
순식간에 돌진해 찌르겠다는 의지였다.
새카만 정장을 입은 채 환한 금발을 날리는 그녀의 모습은 이때까지 본 적이 없는 신선함이 든다.
하지만 그녀의 투기는 진심이었다.
대체 이 망할 검신이 그녀를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상당히 믿음을 가지고 있다.
조금만 실수해도 내가 죽는다는 건 알고 있겠지. 아니, 그게 무슨 상관인가.
생각을 비우며 내가 눈을 감았다가 떴다.
마나 하나 움직이지 않지만 두려움은 남아 있지 않았다.
아무리 반신의 위계니 환골탈태를 통해 육체능력이 초인에 들어섰다 해도 그녀에 비하면 느린 속도였다.
[중검]
[시공격검]
[대분화]
일리나의 자세가 일전 하레스가 보여준 적 있던 무지막지한 검기의 기수식으로 변한다.
그리고 그녀의 검이 일직선으로 내 심장을 향해 겨누어지며 당겨진다.
콰드드드득!!!
그녀의 주변에 휘몰아치는 태풍 같은 바람이 더욱 강해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그녀와 내가 전혀 건드리지 않았던 폐공장 전체가 기세만으로도 뒤틀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내가 칼디라스를 개조해 그녀가 모든 힘을 끌어낼 수 있게 해주었고 검신 하레스와 재앙에 가까울 정로도 압도적인 검의 재능을 지닌 시너지가 좋다곤 하지만, 이건 거의 환골탈태를 넘어선 무언가의 수준이었다.
거기서 내가 느낀 것은 부정이나 허탈함이 아니었다.
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을 그에게서 배운 것인가.
그녀는 내가 체감한 시간 이상으로 많은 시간을 그에게서 배웠다.
단순히 바깥에선 1초일지라도 그녀가 겪었을 시간 격류가 어떤 일그러짐을 냈을지 모른다.
어쩌면 그녀는 그 안에서 상상도 못 할 시간을 검에 몰두했을지 모를 일이다.
거기에 시공격검까지 뒤섞였으니.
마음을 깔끔하게 비운 채 자세를 잡은 나는 일순간 바닥을 완전히 박살 내며 쏘아져 들어오는 그녀에게 파고들었다.
방어? 웃기는 소리.
회피? 가능하지도 않은 소리.
내게 남은 건 반격뿐이다.
마나를 사용할 수 없다면.
나의 경험과 깨달음에 모든 것을 걸어라.
이미 일리나와의 교전이 수차례 진행되며 내 전신엔 크고 작은 상처로 가득하다.
페널티도 적당히 덮어써야지 상대가 마냥 약자도 아닌데 손발 다 끊어내고 이빨로 싸우는 게 쉬울 리가.
동시에 그녀의 검을 본 내 본능에 죽음이라는 단어가 다가온다.
죽으려고 작정한 게 아니고서야 이런 싸움은 말도 되지 않는 싸움이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믿음이란 그런 것이다. 믿고 따르면 반드시 효과는 오는 법이니까.
일리나의 거친 투기가 마치 칼날처럼 내 몸을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유형화된 투기가 물리적인 힘을 발휘하는 건 아마 그녀의 검이 가진 특성 때문일 것이다.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그녀는 아주 자비 없이 나를 몰아붙여 왔다.
이러면 곤란한데.
마나까지 봉한 상태에서 위험에 처하면 당연히 생물은 생존본능을 끌어낸다.
“앗?!”
놀란 일리나가 한발 물러났다.
그럴 수밖에.
아주 잠깐이지만 내가 억눌러둔, 무리하게 힘을 축적하면서 쌓아온 부작용으로 생겨난 광기가 다시 머리를 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망할 놈의 광기. 누굴 미친놈으로 만들려고 들고 있나.
다만 이전과 다르게 지금의 나는 마나로 그 광기를 억누를 수가 없다.
그렇기에 단순히 내 의지력 하나만으로 그것을 억누르고 있는 실정이었다.
말 좀…….
스스스슷…….
정신이 혼미해지며 눈앞의 그녀를 찢어 죽이라고 외친다.
들어라. 이새끼야.
내가 제어하지 못하는 힘은 독과 같다. 그런 걸 제어하지 못하면 앞으로도 문제가 되리라.
어쩌면 검신 하레스는 이것을 내게 제어하라고 이런 상황을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낮은 가능성이지만 말이다.
그녀에게서 한 발, 두 발 물러나며 나는 속에서 튀어나오려는 광기를 정신력으로 억눌렀다.
충동을 제어하고 거칠어지는 숨을 억지로 가라앉힌다.
두려움이 설핏 어린 일리나를 바라보던 내가 이를 악물었다.
말해서 안 듣는 새끼는 혼이 나야 하는 법.
나는 근처에 널브러진 쇠파이프를 집어 든 채 망설임 없이 내 머리를 후려쳤다.
막대한 힘으로 후려침과 동시에 쇠파이프가 휘어버렸지만 아주 잠깐동안 효과는 있었다.
멈칫한 광기를 억누르며 내가 이를 부득 갈았다.
‘야.’
좋은 말로 할 때 말 들어라.‘
단순히 마나로 억제하는 게 아닌, 정신력으로 누르는 것.
‘데자뷰?’
문득 나는 이것과 비슷한 상황을 겪어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완전기억능력인 만큼 내가 기억을 못하는 게 있을 리가 없는데 기억이 날 듯 말 듯 한다?
나는 그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몸을 웅크리며 이를 악물고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내면의 무언가를 찾아 헤맸다.
그때 허공에 누워있던 하레스가 입을 뻐끔거렸다.
그 뻐끔거림을 반사적으로 읽어 들인 내 머릿속에 그가 무슨 말을 한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역시, 없어진 게 아니었구나. 정신이 성장한 덕에 제어가 조금씩 되기 시작했어. 로 아이아스 님. 이제 풀어도 될듯합니다.]
뭘 풀어?
검신 하레스의 중얼거림과 동시에 내 몸 안에 광기가 한순간 흐려지며 틈이 생겨난다.
[뭣들 하나!! 언제까지 서로 구경만 할 거야! 빨리 안 움직여?!]
검신 하레스의 호통에 화들짝 놀란 일리나는 곧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생긴 틈을 놓치지 않았다.
콰아앙!!!
마나를 사용하는 나조차 순간적으로 놀랄 정도로 빠른 속도를 보이며 그녀가 파고든다.
그에 맞춰 나는 몸 안에 움직이기 시작하는 이 정체 모를 기류에 몸을 맡겼다.
네가 뭐 하는 놈인지. 어디서 굴러먹다 온 놈인지 모른다.
하지만 이용할 수 있다면, 네가 타나토스에게 조금이라도 타격을 줄 수 있다면. 시너지를 발현하여 내가 사용하는 힘과 엮여 그 힘의 증폭을 이끌어 낼 수 있다면.
기꺼이 이용해주마.
공자 가라사대.
엄격한 규칙에도 반드시 빠져나갈 틈은 있다고 하였다.
아주 짧은 순간 나를 바라보는 영체인 검신의 입가에 미소가 걸리는 게 보였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깨달음이 왔을 때 놓치는 건 멍청한 짓이다.’
쩌엉!!!
나를 향해 다가오는 그녀의 검과 정면으로 부딪치듯 파고들며 아주 찰나의 순간 몸을 비튼다.
그녀의 날카로운 검이 내 심장이 있는 살점을 아주 옅게 베고 지나갈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그리고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피해내고 파고들자 일리나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그리고, 나는 아직 제어가 전혀 되지 않는 힘을 모조리 담아 내질렀다.
투웅!!!
무형의 충격파가 터져나간다.
[회랑의 영웅들은 모두가 자기만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헤라클래스는 진화. 오딘은 인피니티 마나. 유리아나는 절대 교감. 무왕 유르그는 신무지체. 그리고.]
그의 설명은 머릿속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단순히 폭주하듯 날뛰는 힘이 신력을 잡아먹고 금기의 힘마저 잡아먹는 것처럼 움직인다는 것만 느낄 뿐이다.
이런 힘이 내게 있었던가.
어쩌면, 처음부터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아니, 있었던 것이다. 왜 모르고 있었는가.
기억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회랑의 영웅 수명을 소멸시켜버린 폭주했던 내 고유의 특성.
[회랑에 네가 온건 절대 우연이 아니다 데이비. 그걸 잊지 마라.]
내게 처음부터 존재했으나 모종의 이유로 존재조차 잊고 있던 고유특성.
그것이 프리아 여신과 넬타리드의 반쪽인 [평온] 신력을 모조리 잡아먹었다.
막아놓은 혈도가 홍수 터지듯 터져 나오며 전신에 폭발적인 힘을 주기 시작했고.
나는 정확히 주먹을 일리나의 얼굴 바로 옆으로 내질렀다.
쩌엉!!
그리고.
그렇게 제어되지 않은 힘은 내 주먹을 타고 뻗어져 나갔고.
일리나의 얼굴 바로 옆을 스치듯 지나가 창공을 완전히 비틀어버렸다.
[데이비. 네가 가진 특성. 우리가 네게서 깨워낸 특성은 일단 기본적으로 포식이란 이름을 붙여두었다.]
“포식?”
[간단하게 생각해, 네가 완전기억능력인 것도 그 특성의 영향이며, 네가 모든 힘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체질로 개선 받을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본래 네가 그걸 전혀 제어하지 못하고 폭주해버린 탓에 로 아이아스가 강제로 저주를 걸어 봉인해두었다만.]
기억을 포식하여 남기고, 영혼개조를 포식하여 변화를 일으킨다.
회랑 영웅들의 기술을 하나하나 포식하며 내 것으로 만들었다.
[이상하다 생각해 본 적은 없나? 두 개의 신력을 먹어치우고 공존시키는 특성. 거기에 넌 대적자이면서 마왕이라는 초유의 말도 안 되는 포식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해냈잖아. 그게 다른 놈들이 될 거 같아? 어림도 없는 소리.]
애초에 처음부터 내 영혼이 가지고 있던 힘.
검신 하레스의 말대로, 내가 회랑에 흘러 들어간 것은 우연이 아니었으며.
프리아 여신이 내게 관심을 보인 것 또한 우연이 아니다.
신력이나 금기의 힘 같은 빌려온 힘이 아닌. 오롯이 존재해온 내 특성이 처음으로 내 의지가 있을 때 깨어났다.
그리고.
잠시 후의 침묵 끝에 나는 전신에 폭주하듯 흘러넘치는 독특한 힘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