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02화
보통 사람은 맡지도 못하는 냄새라……. 그냥 넘길 문제는 아닌 듯하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고 말해. 겉으론 별개의 관계지만 넌 내가 보호하는 사람이니까.”
“고마워요. 그래도 말해야 할 것 같아서 륀느 양을 찾아 전하는 거예요. 네토 라 리리 공작. 그 사람과 일리나의 혼담을 막아주세요.”
반쯤은 질러보자는 식이었던 모양이다.
“알고 있어요. 당신과 일리나 사이에 괜한 풍문이 돌면 서로 안 좋은 거. 하지만…… 당신이 말했잖아요. 도움을 받을 일이 있다면 언제든 말하라고. 그걸 지금 사용할게요.”
하고 싶다고 다할 수 있는 건 본래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하자.”
“한 번만…… 네?”
내가 흔쾌히 승낙할 줄 몰랐는지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그렇게 쉽게요?”
“네 부탁인데 안 들어줄 수야 있나. 게다가 그걸로 빚을 갚니 마니 하지 마. 어차피 내 일이니까.”
“어째서요?”
“그렇게 됐어. 에이리아와 일리나 두 사람 전부.”
내 말뜻을 이해한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러더니 이내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뭔가 먹먹한 기분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전에 직접 들은 적은 있지만…… 결국 마왕 페르…… 아니, 왕자비님의 계략대로 됐네요.”
“뭐? 너도 알고 있었어?”
“알 사람은 다 알 걸요? 당신이 둔해 빠져서 몰랐던 거겠지.”
페르세르크의 손에 놀아난 기분이 든다. 어디 가서 지략으로 딸린 적은 없는데. 괜히 한 방 먹은 것 같아 복수심에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밤에 두고 보자.
“더 말할 건?”
“없어요. 다만 조심하세요. 조금 께름칙하니까.”
걱정을 드러내는 그녀였다.
“알겠어. 무리하지 말고 쉬어.”
“데이비.”
그녀가 돌아서는 나를 불렀다.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세요.”
“너도 좋은 사람 만나.”
“쿡쿡…… 이미 닳고 닳은 제가요?”
“누가 닳고 달았데. 너 내가 네 육신 구현할 때 얼마나 공들였는지 알면 그런 소리 못한다.”
“쿡쿡…… 고마워요. 하지만 남자는 좀…… 아직 두렵네요.”
그녀는 조용히 후드를 덮어쓰고는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조용히 사라졌다. 아마 하던 일도 멈추고 잠시 온 것이니 본래의 일로 돌아가는 것이리라.
“레이나.”
“…….”
“다시 말하지만 정착할 땐 꼭 말해.”
“네.”
그녀의 미소는 환했다.
“륀느. 시킨 건?”
“이미 전달 완료. 륀느가 이것을 높게 평가!”
“잘했어.”
씨익 웃으며 아공간을 열고 그 안에서 고소한 향이 풍기는 빵을 꺼낸다.
“네가 좋아하는 빵…….”
콰작!!!
동시에 작은 륀느가 몸을 튕기듯 날아들어 입으로 내가 손에 쥔 빵을 한입에 삼켜버렸다.
마치 먹이를 향해 돌진하는 해양생물처럼 말이다.
이런 의도는 없었는데?
게다가 200kg이 넘어가는 저 작은 몸으로 매달려 들러 붙어있으니…… 그 치악력이란…….
“으악! 야 손은 깨물지 마!”
“우므므으므으므”
내 손까지 덥석 물고 뭐라 말하지만 입을 오물거리고 있어서 소리가 뭉개진다
반쯤 졸린 나른한 표정으로 대롱대롱 매달린 채 이리저리 흔들리다 한참 후에 혀를 날름거리며 제 입술을 훔치고 떨어져 나갔다.
상상을 초월하는 집착에 내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내가 뭐 이걸로 장난이라도 칠 줄 알았냐?”
“륀느, 기억 회로 속 데이비님의 장난 23가지를 모두 저장. 현 상황을 추론할 때 데이비님이 밤꿀 빵을 주기 직전 빼는 식의 장난을 자주 쳤음을 확인, 이에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채택.”
담담하게 물어버리는 게 최고였다고 말하는 걸 보니 이 녀석의 머릿속은 대체 무엇으로 돌아가고 있는지 의문이 서린다.
“후우…… 내가 말해 뭣하냐.”
한숨을 내쉬며 돌아서려던 그 순간이었다.
이상한 냄새가 내 코를 찌른다.
“이게 무슨 냄새야.”
기묘한 냄새. 그 향에 내가 인상을 찡그리자 륀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륀느의 후각 센서에 아무것도 걸리지 않는다고 판단.”
륀느의 후각은 활성화하면 킬로미터 단위의 냄새를 구분한다.
그런 그녀가 모른다는 말은 단순히 물리적인 냄새가 아니라는 소리였다.
신기한 게 있네.
냄새가 짙어지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였다.
“데이비 올 라운 왕자님.”
부드러운 어조로 내 앞을 막아서는 이가 있었다.
투명한 안경에 부드러운 미소 길게 늘어뜨린 검은 머리에 쌍두룡의 브로치를 달고 있는 남자.
젊지만 능력을 상징하는지 제법 귀티가 난다.
“이런 데서 만나는군요. 한 번쯤 꼭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네토 라 리리 공작입니다.”
“…….”
내가 말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자 그가 빙그레 웃어 보인다.
“데이비 왕자님?”
“잠시만요.”
그를 무시하고 지나가려던 순간이었다.
“이런, 제가 방해를 했나 보군요. 그런데 어딜 그리 급히 가시는지.”
“글쎄요. 그걸 굳이 보고해야 할 이유라도 있으신지.”
“아뇨. 문제는 없습니다.”
그가 빙그레 웃어 보였다.
“하긴, 뭐 이런 건 의미가 없지요. 사실 다른 이유 때문에 찾아뵈었습니다.”
“굳이 담소를 나눌 생각은 없네요.”
냄새가 짙어진다. 레이나가 말한 기이한 냄새라는 것.
게다가 단순한 냄새가 아닌 특수한 냄새다. 분명 여기서 사라지면…….
“일리나 데 팔란 황녀님.”
그 말에 그를 무시하고 지나가던 내가 멈춰서 그를 돌아보았다.
감정이 없는 표정으로 그를 나지막이 지켜보고 있자 그가 조용히 말했다.
“알고 계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제 곧 저와 혼약을 하게 될 겁니다. 뭐, 상당히 과분한 분이시지만 말이지요.”
“그렇습니까?”
부드럽게 웃는 그 모습에 위화감이 든다.
“그런데…… 일리나 황녀님이 왕자님과 가까우신 관계라지요.”
“…….”
“이런 말씀 드리긴 뭣합니다만. 세간의 이목도 있고, 저도 제 부인이 되실 분께 흠이 될만한 소문이 남는 건 그리 원하지 않습니다.”
정중한 어조로 말하는 그를 보며 가만히 있던 내가 돌아선다.
“그럼, 현명하신 대륙의 성자님이라면 제 말뜻을 이해해주신 것으로 믿고.”
그렇게 돌아서는 그를 무시한 채 나는 냄새가 짙어진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냄새의 진원지에 도착했을 때 나는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
지독한 피 냄새다.
“한번, 두 번, 세 번…… 열일곱.”
바닥에 쓰러진건 익히 알고 있는 이였다.
페르세르크에게 반해 그녀를 따라갔다가 내게 막혔던 그 철부지 영식.
그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처참하게 죽은 몰골로 쓰러져 있다.
혈기왕성하고, 아직 겁 없는 놈이라곤 하지만 이렇게 처참하게 죽을 놈은 아니었는데.
그리고, 그런 그의 앞에는 그를 죽인 것으로 추정되는 검이 보인다.
천천히 몸을 숙여 검을 짚으려던 그 순간.
찰그락 소리와 함께 수많은 기사들이 주변을 에워싼다.
“멈춰라!! 검을 놓지 않으면 엄히 죄를 물을 것이다!!”
내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라운 왕실의 내궁기사단이 투기를 내뿜으며 주변을 진동하게 만들었다.
척 보기에 내가 그를 죽인 것으로 의심을 받아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다.
실제로 보기엔 그렇겠지.
조용히 검을 잡으려던 손으로 검날에 손을 올린 내 손끝으로 마나가 퍼져나간다.
“이름.”
“뭐…… 뭐라?”
“네 이름을 밝혀라.”
담담하게 말하며 천천히 일어나자 기사들의 검이 일순간 내 목을 겨누었다.
카가가각!!!
하지만 검의 끝이 내 몸에 닿기도 전에 내 몸에서 발산된 이클립스의 마나로 인해 완전히 일그러진다.
“데…… 데이비 왕자저하?!”
“허억!”
경악한 기사들의 외침이 퍼져나간다. 마치 지뢰를 밟았다는 표정이 가득했다.
“소속과 이름.”
고개를 돌린 내가 기사장으로 보이는 이를 향해 다시 묻자 그가 바짝 얼어붙은 표정으로 조심스레 대답했다.
“내…… 내궁 7…… 7기사단 단장 오르파…… 입니다.”
내가 범인일 수도 있기에 마냥 의심을 거두지는 않는 눈빛이었다.
좋아. 내궁을 지키는 기사면 그래야지.
그를 지나치며 내가 조용히 말했다.
“시신 수습하고, 검 회수해.”
“데…… 데이비 왕자저하…… 설마 굴란 백작가의 영식을 죽이신 겁니까?”
아무리 왕자라도 누군가를 이유 없이 죽이는 건 용납되지 않는다.
이곳은 외진 장소로 아무리 우연이라도 이곳까지 찾아오는 게 쉬울 리 없다.
유일한 흔적은 냄새뿐인데.
이 냄새. 지금 나를 제외하고 아무도 맡지 못한다.
“대답해주십시오…… 굴란 영식이 페르세르크 왕자비님께 겁도 없이 접근한 것 때문에 실랑이가 있었다는 제보가 있었습니다. 그 후에 영식의 신변이 사라져 찾던 도중에 피 냄새가 나서 찾아온 겁니다.”
피 냄새를 억제하다가 내가 이곳에 오기가 무섭게 퍼뜨렸다.
아주 작정하고 나를 노린 듯한 움직임.
무력으로 되지 않으면 위상을 깎아 힘을 소모시키겠다는 나름의 영리한 수단.
혹은, 단순히 그 희생자로 나를 이용한 것.
나를 견제하고 싶은 움직임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이미 죽은 자라 부활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더 놀라운 건 땅의 기억이 정체 모를 힘에 의해 지워져 있고 시신의 죽음 시간까지 멋대로 위장해놓았다.
작정하고 수사를 해도 크게 어긋날 수도 있는 상황.
범인.
딱 한 놈, 떠오르는 놈이 존재한다.
곰곰이 생각하는 나를 보며 기사장 오르파가 다시 물어온다.
“데이비 왕자저하.”
“기사장 오르파.”
싸늘하게 식은 내 목소리에서 살기까지 흘러나오자 기사들의 몸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내 몸에서 은은하게 피어나오는 드래곤 피어에 영향을 받은 그들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예. 저하.”
“지금 당장 린디스 제국에서 온 네토 라 리리 공작 신병을 확보해.”
“그게 무슨…….”
“그 외에 다른 이들 또한 연회를 파하고 돌려보낸 뒤 사정 조사하도록.”
“저하께서 죽이신 게…… 아니란 말씀입니까?”
“내가 여기까지 오기 전 만난 놈이 그놈이다. 그놈이 결백을 증명해 줄 거다.”
범인이 누구였든 사람 잘못 건드렸어.
콰드득…….
순식간에 이곳에 남아있던 힘을 포식의 특성이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완전히 새로운 힘인 만큼 다루는데에도 시간이 걸리지만, 이걸 포식의 특성으로 먹어치워 내 힘의 증강에 도움이 되는가는 별개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신성력과 원소 마나는 생각보다 빠르게 해결되었지만 사령 마나는 별개의 문제.
두 가지 힘이 뒤섞여 새로이 변환된 두 가지 힘을 얻는 방식인 만큼 이 힘이 언젠가 쓰일 일은 있을지 모른다.
먹어치운 힘의 양 따윈 중요하지 않다. 먹어치웠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니까.
광기가 눈을 뜨려 한다면 안타깝지만 당장은 버리는 수밖에.
그렇게 생각했는데. 마치 기다렸다는 듯 봉인해둔 사령 마나가 흉폭하게 날뛴다.
빨리 자신을 내보내달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에 사령 마나를 풀기가 무섭게 두 가지 힘의 부품이 뒤섞이며 조율이 되기 시작한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득템을 한 골이다.
노랫소리와 냄새. 조금 독특한 조합을 가진 힘이다.
처음 보는 힘? 특질능력? 꼴에 유일한 힘이고 마나나 다른 힘을 어떻게 덮을 수 있는 기괴한 힘인 것 같은데. 그 힘을 쓰는 거.
이제 너뿐만이 아닐 거다.
싸늘한 표정으로 서 있는 나를 향해 겁을 집어먹고 있던 기사장 오르파가 억지로 두려움을 이겨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저하. 저하께서는 상황이 상황인지라 저하의 신병을 구속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국법에 따르면 그게 맞지.”
나는 그가 꺼내든 마나 구속 팔찌를 손에 스스로 채웠다.
“뭐해. 인솔해.”
“저…… 저하를 모셔라!”
식은땀을 흘리며 그가 힘겹게 소리친다. 일순간 내가 자연스레 퍼져나가던 피어를 거둬들이자 크게 숨을 들이켠 기사들이 힘겹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나를 노린 범죄였다. 그런데 왜 하필 이놈인가. 처참하게 죽은 시신을 말없이 흘끗 바라보지만 사자는 말이 없다.
리리 공작의 소행일까.
아니면, 이클립스가 말한 배신자의 소행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굴란 백작가의 영식이 끔찍한 몰골로 살해당한 사실이 경사스러운 왕자의 탄신일에 터졌고, 그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가며 군중을 술렁이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