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03화
데이비 왕자의 구금.
갑작스러운 소식에 연회에 참석한 수많은 이들이 술렁였다.
쾅!!!
“거짓말!! 말도 안 돼요! 데이비가 왜 갑자기 사람을 죽인다는 건데요!!”
일리나의 외침에 외부 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궁에 머무르고 있던 황태자 살리반이 인상을 찡그렸다.
“넌 지금 그걸 왜 내게 묻는 것이냐.”
“오라버니가 뭔가 한 거 아닌가요?”
“일리나 데 팔란!!!”
그가 엄하게 소리치자 일리나가 움찔하며 물러났다.
“넌 내가 그렇게 한가해 보이나? 네 그 멍청한 대가리에서 나온 생각을 마구 내뱉어도 되는 존재였나?”
“…… 죄송합니다. 황태자 저하. 실언…… 했어요.”
일리나도 자신이 무리한 억측을 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애초에 살리반이 그렇게 데이비를 모함해서 득이 될 게 전혀 없었으니 말이다.
“정황이 너무 들어맞고 있다. 페르세르크 왕자비에게 굴란 백작가의 영식이 추근댄 것도 사실이고, 현장에서 데이비 왕자가 발견된 것도 사실이다. 피 냄새가 퍼졌다고 해도 그곳에 굳이 갈 인간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야.”
“오라버니.”
“피 냄새가 퍼졌을 땐 이미 데이비 왕자는 그곳에 있었고, 즉!! 데이비 왕자는 피 냄새가 퍼지기 전부터 그곳에 있었다는 게 된다.”
“그게 무슨…….”
“네토 라 리리 공작과 만났다면서요.”
“그래. 안 그래도 알아봤다. 그도 데이비 왕자와 만난 시각을 정확하게 해명했다더구나.”
“그럼…….”
“다만 그게 의심을 풀진 못해. 그는 마스터와는 비교도 안 되는 강자다. 고작 몇백 미터를 주파하는데 그가 몇 초나 허비할 것 같냐 일리나.”
“오라버니는…… 정말 데이비가 그런 짓을 저질렀다고 생각하세요?”
“아니.”
단호하게 말한 살리반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가 그렇게 허술한 인간이 아닌 건 내가 가장 잘 알지.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이건 라운 왕국의 일이지 우리의 일이 아니야.”
“오라버니!!”
“넌 그와 무슨 관계더냐!”
친우? 보호받는 자와 보호하는 자의 관계?
그런 게 무슨 소용인가.
왕족이든 귀족이든 타국의 일에는 적정선이라는 게 존재한다.
“일리나. 나설 때와 나서지 말아야 할 때를 잘 구분해라. 그게 황족으로서 갖춰야 할 덕목이다. 그리고 넌 지금 혼사를 앞둔 상황이다. 쓸데없는 소문이 퍼지면 너만 피곤…….”
“미안한데요. 난 그렇게 못해요. 데이비는 그때 그를 죽일 생각도 없고 그를 조사하고 있는 입장이었다구요. 게다가 그 녀석. 악인이면 가차 없이 베어버리지만, 굳이 그런 애송이를 상대로 잔혹하게 죽이지 않아요.”
차라리 깔끔하게 죽인 후 영혼을 뽑아 분쇄시켜버리지.
한숨을 포옥 내쉰 그녀가 돌아섰다. 그런 그녀를 향해 살리반이 단호하게 말했다.
“곧 돌아간다. 너도 준비해서 황실로 갈 것이다. 가서 신부 수업부터 새로 받아. 팔란 제국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게. 네 입지가 줄어들지 않게.”
“안 가요.”
“철없이 굴지 마라. 일리나! 분명 내가 말했을 터인데?! 리리 공작과의 혼사…….”
“그 사람하고 결혼 안 한다고!!”
“…… 너!”
“난 평생 그 녀석 곁에 있을 거예요. 난 분명 말했어요. 쓸데없는 짓 하지 말아요. ”
“일리나.”
“내 인생은…… 내가 정해! 그게 황족으로서 방해가 된다면 그깟 황족, 버려줄 테니.”
휘이이익 텁!!
순식간에 일어난 그가 일리나의 뺨을 쳐올리려 했으나 일리나의 손에 간단히 막혀버렸다.
간단한 이치였다.
지금의 일리나는 사실상 단 한 명을 제외하고 그 누구도 이길 수 없는 강자가 되었으니 말이다.
“일리나.”
“부탁이야…… 오라버니…….”
“뭐?”
“오라버니가 날 싫어하는 건 알지만…… 제발 부탁해. 큰 오라버니의 유언을 봐서라도 한 번만…….”
“…….”
울먹거리며 말하는 그녀를 보며 살리반은 속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그 녀석은 그런 시답잖은 이유로 이렇게 분별없는 짓을 할 녀석이 아니야. 그러니까 내가 그 녀석의 결백을 증명할 거야.”
쾅!!
그렇게 나가버린 일리나를 보며 살리반이 벙찐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한참을 침묵하다 인상을 찡그렸다.
“데이비 이 인간. 설마 마음에도 없으면서 일리나를 덮치기라도 한 건 아니겠지…….”
그가 손톱을 물어뜯으며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많이 크긴 컸구나…… 쓸데없이 걱정한 게 무색할 정도로…….”
씁쓸하지만 그의 입가엔 다 자란 딸을 보는 아비의 미소가 서려 있었다.
* * *
일반인도 아니고 마스터 급조차 씹어먹어 버릴 정도의 강함을 지녔기에 범죄가 성립될 가능성이 존재한다.
참 모순이면서도 웃긴 일이었다.
물론 왕국 내에서도, 타국에서도 이름 없는 백작가의 영식보다는 나라는 존재가 더 크기에 적당히 솜방망이 질 후 풀려날 가능성이 높다.
굴란 백작의 경우 피를 토하는 슬픔을 느끼겠지만 국가운영이라는 게 참 냉혹한 법이니까.
일반적으론 그렇다는 뜻이다.
하지만 수많은 국가의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이런 사건이 터졌으니 라운 왕국의 입장도 난처할 수밖에 없다.
나는 그렇게 궁에 유폐될 때까지도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았다.
우선 상대를 물어뜯어 죽여버리기 위해서는 상대를 명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지금 내게 중요한 건 범인도 범인이지만 범인이 남긴 이 특이한 힘과 연동되는 사령 마나를 완벽하게 변환시키고 내게 걸맞게 바꾸는 정도.
신성력은 마나의 증폭을 받아 압도적인 피아구분, 그리고 화력 증폭의 효과를 얻었다.
그뿐만 아니라 상위 신성마법에 대한 제약도 사라졌다.
원소 마나는 다른가.
그 또한 마찬가지. 9서클 경지에 해당하는 세 가지 경지를 넘어선 그 위의 단계. 완전제어를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제한이 사라졌다는 소리였다.
차가운 불, 뜨거운 얼음, 딱딱한 바람, 바람처럼 마찰이 없는 대지. 간단히 표현해도 이 이외에도 여러 종류가 존재한다.
본래 원소 마나가 가진 한계점을 넘어서는 데 큰 역할을 한 건 역시나 신성력이 가지는 복합성이었다.
그렇다면, 사령 마나는 어떻게 변할 것인가.
아직 알에서 깨어나지 않았지만, 기왕이면 데스 로드의 고유 마법에 손을 댈 수 있으면 하는 마음도 없잖아 있다.
“형님!!”
“오라버니!”
궁에 유폐된 나를 가장 먼저 찾아온 것은 나의 가족이자 소중한 존재인 동생들이었다.
바리스와 윈리, 타냐. 그 외에 원수의 자식이며 나를 무서워했으나 언제부터인가 나를 따르기 시작한 에오니샤까지.
네 사람 모두가 나를 찾아와 나를 만나게 해달라며 아우성을 쳤다.
“죄송합니다. 저하! 아무도 들이면 안 되는 법이 있습니다!”
“나는 이 나라의 태자다! 당장 문을 열어!”
“저…… 저하! 하지만!”
“하지만이고 저지만이고! 당장 문 열라고!!”
당장이라도 문을 부술 것처럼 씩씩거리는 녀석들을 그냥 두면 사고를 칠 가능성이 높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잠긴 문을 열고 문을 활짝 열었다.
“형님!!”
“오라버니!”
담담한 얼굴로 내가 모습을 드러내기가 무섭게 바리스와 윈리가 내게 달려들어 나를 껴안는다.
“형님! 괜찮습니다! 형님은 누명을 쓰신 거예요! 제가 반드시, 반드시 형님의 억울함을 풀어드리겠습니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식사는 하신 거예요? 왜 이렇게 야위신 거예요…….”
“오바하기는…… 쯧”
짧게 일축하며 녀석들의 이마에 가벼운 딱밤을 때린 내가 두 사람을 밀어냈다.
“왕족이라는 것들이 채신머리없이 뭐 하는 짓이야. 기사들이 곤란해한다.”
“형님!”
내 대답에 바리스가 울컥한 듯 소리친다.
덩치도 큰 녀석이 왜 이렇게 눈물이 많은지.
그만큼 나를 소중히 여겨주고 있다는 뜻이기에 사실 고마움이 앞섰다.
“바리스. 네가 보는 나는 이깟 일에 내가 흔들릴 사람이었나?”
“아…… 아뇨.”
“윈리. 너는?”
“…… 하지만 걱정되는걸요! 오라버니, 아니잖아요. 그쵸? 오라버니가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실 분은 아니잖아요!”
“만약 내가 정말로 죽였다고 하면 너희들은 어찌할 거냐.”
내 물음에 네 사람 모두가 침묵했다.
“정말…… 이세요?”
“당연히 거짓말이지 멍청아. 내가 그런 햇병아리를 그렇게 난자할 이유가 어딨어. 게다가.”
내가 그놈을 죽일 생각이었으면 확실히 몰아붙인 다음에 죽였을 것이다.
그딴 식으로 멍청하게 칼로 쑤시는 게 아니라.
“형님은 걱정 마십시오. 제가 반드시…….”
“아니. 너희는 이번 일에서 손 떼.”
내 말에 바리스가 눈을 크게 떴다.
“타국이 모두 보고 있다. 너희 앞날에 방해만 될 거야.”
“형님이 누명을 뒤집어쓰셨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습니까!”
“거참. 나도 손 놓고 당하진 않을 거라고.”
담담하게 말하며 바리스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내가 씨익 웃어 보였다.
“어떤 새낀진 몰라도 사람 잘못 건드렸다는걸 보여줄 생각이다. 그때까지 경거망동하지 마.”
“…… 필요한 게 있다면…… 꼭 말씀해주세요. 제가 뭐든 도와드리겠습니다.”
“오냐. 필요하면 말할 테니 걱정 말고 물러가.”
내 웃음에 네 사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를 찾아온 건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페르세르크와 일리나, 에이리아 또한 마찬가지.
그녀들은 내가 그를 죽일 생각이 없다는 걸 잘 알았기에 분개하며 이번 사건의 범인을 찾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단호하게 그들을 막았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
“어떻게 가만히 있어! 너 아니잖아! 네가 아닌걸 우리 모두가 아는데 어떻게 그래!”
“마…… 맞아요! 잘못되면 데이비님의 앞날에 큰 문제가…….”
단순 앞날이 문제일까. 잘못하면 왕족이라도 큰 처벌을 피할 수 없다. 그만큼 사체의 훼손이 심했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그녀들에게 무언가를 맡길 생각은 없었다.
무력이 문제가 아니라 이번엔 다른 점으로 조금 위험한 냄새가 난다.
세 사람을 어르고 달래어 돌려보내는 것까지는 성공한 나였다.
그 후에 찾아온 것은 조금 의외였다.
“네가 죽였느냐?”
담담한 질문. 그 질문에 나는 조용히 감고 있던 눈을 뜨며 대답했다.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래…… 그거면 되었다.”
나의 혈육 상 부친인 크리아네스 올 라운 국왕은 더 이상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그래. 네가 이런 일로 거짓말을 할 녀석은 아니지.”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바리스가 엄한 짓을 못하게 잘 막아주십시오.”
내 말에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내 어깨에 손을 올리더니 그대로 나를 당겨 제 품에 안았다.
“미안하다…… 미안해…….”
“…….”
“끝까지 짐은 네게 못난 아비로구나…….”
“제 처분이 이리하여 배웅은 못 나갈 듯싶습니다. 또한, 폐하께서 제게 미안해 하실 일은 애초에 없었습니다. 걱정 마시옵소서.”
차갑게 대꾸한 내가 그에게서 떨어져 고개를 숙여 보이자 그는 담담하게 나를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문을 지키는 기사들에게 듣기로는 죽은 굴란 백작가의 영식의 친부, 굴란 백작은 피눈물을 흘리며 아들의 죽음을 슬퍼했다고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범인을 확실하게 잡아달라며, 자신의 가산까지 팔아 정보를 구하고, 활발하게 정계 활동을 시작한 모양이다.
현재 용의자로 잡혀있는 것은 나. 그리고 굴란 백작 영식을 추종하던 세 명의 귀족자제가 전부다.
그 외엔 사실상 살인범이라고 잡아낼 만한 이가 없었으니까.
나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노랫소리, 보통 존재는 맡을 수 없는 독특한 냄새. 죽기 전 굴란 백작의 영식이 내게 몰래 집어넣고 간 인챈트 스크롤.
나를 겨냥한 함정.
현재 생각할 수 있는 범인의 존재는 내가 가진 입지가 못마땅한 이.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내가 방해된다고 판단한 이. 마지막으로 타나토스를 돕는다던 그 배신자 정도.
퍼즐을 어디서부터 맞추면 이야기가 매끄러워질까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신중함에 신중함이 필요하니까.
애초에 왜 굳이 실종사건을 일으킨 범인은 나를 함정에 몰아야 했나.
단순히 네토 라 리리 공작을 의심해볼 순 있다. 그는 단순한 대화를 이용해 내가 현장으로 가는 시간을 늦췄다.
마치 그곳에 뭐가 있는지 아는 것처럼.
하지만 반대로 명분이 없었다.
그가 나와 적대할 이유도 없거니와. 굳이 이런 상황에 들어가 나를 함정에 빠뜨릴 이유 또한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한들 반대로 그가 무고하다는 것에도 모순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공범의 가능성?
빠른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손에 모여들었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두 가지의 힘. 내가 먹은 정체불명의 힘과 사령 마나가 완전히 내 몸에 녹아들기를 기다렸다.
추리는 머릿속 생각일 뿐 증거가 되지 않는다.
그러니 쓸데없이 머리를 써서 당분 빼느니 차라리 확실한 범행 수단을 잡아내는 방법이 옳을 것이다.
“데이비 왕자저하.”
상념을 지우고 다시 마나의 활성화에 집중하려던 그 순간이었다.
나를 유폐시키고 있던 방문이 열리며 서너 명의 기사들이 걸어들어온다.
“오랜만입니다. 페일트리스 후작.”
“저하…….”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소드마스터, 페일트리스 후작이 내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가시지요. 소신이 재판장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이런 상황에 재판까지 뚝딱 밀어붙인다라…… 제법 빠르네요.”
“신도 같은 생각입니다만…… 저하. 정말 저하께서 죽이신 게 아니십니까?”
“내가 뭣 하러 그렇게 비효율적으로 처리할까요.”
차라리 공개적으로 죄를 드러내 베어버리면 몰라.
그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간 저하를 보필해본 경험상 이번 사건은 저하께서 일으켰다고 하기엔 너무 허술했지요.”
그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면…… 어찌하실 겁니까. 놀랍게도 저하께서 범인이라는 정황증거가 계속 나오고 있는 모양입니다만…….”
“미친개를 물어뜯으면 자기도 광견병에 걸립니다.”
“저하?”
“지금은 그냥 재롱이나 지켜보면 됩니다.”
그렇게 말하며 재판장으로 들어선 내가 당당하게 7명의 재판장과 수많은 귀족들을 훑어보았다.
두려움, 의문, 그리고 적의, 그 외에 수많은 감정이 오간다.
한편에 앉아 반쯤 초췌해진 얼굴을 한 굴란 백작도 보였다. 제 아들이 처참하게 살해당했는데 어느 아버지가 멀쩡한 모습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는 나를 발견하곤 분노와 증오, 그리고 무력감, 슬픔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이번 사건과 관계없다. 용의 선상에서 제외.
“저하.”
“재판 시작해.”
네토 라 리리 공작도 한편에 보였다. 저놈이 범인이라고 확신은 있지만 지금 확인해야 하는 것은 이 웃기지도 않은 장난질을 치는 게 누구누구인지 명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최면을 통한 자백?
좋은 방법이긴 하지만 놀랍게도 내가 먹어치운 힘은 마나를 흩어버려 제대로 마법의 온전한 발현을 방해한다.
변수가 가득한 마법은 사용하는 게 아니다. 역으로 큰 손해를 볼 수 있으니까.
도무지 일개 인간이 소유할 힘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덕분에 사령 마나를 변환시켜 새로이 변화되기 시작한 사령 마나를 얻을 수 있었다지만
당당하게 올라선 내가 선언하자 재판장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면, 이번 살인사건에 대한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재판이 시작되기가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난 귀족이 진중한 표정으로 걸어 나오며 제 콧수염을 쓰다듬듯 쓸어내렸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심문, 시작하겠습니다.”
재판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내게 다가와 조용히 나를 본다.
일단 현행범인 만큼 왕족이라도 머리를 숙여선 곤란하니 예는 표하지 않는다.
“데이비 올 라운 왕자 저하. 지난날 왕궁의 외정원에서 굴란 백작가의 영식이 참혹하게 살해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직접 현장을 목격했으니 당연하지요.”
내 대답에 그가 긴장감이 서린 표정으로 물었다.
“실례지만 왜 그곳에 가셨는지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 물음에 나는 거짓 없이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냄새.”
담담한 대답에 그가 인상을 찡그린다.
“피 냄새 때문에 가보셨다 하신 겁니까? 피 냄새가 퍼진 것은 이미 저하께서 그곳에 도착한 이후입니다. 즉, 저하의 증언은…….”
“피 냄새라고 한 적은 없습니다.”
“예?”
모두의 시선이 내게 향한다.
“조금 독특한 냄새더군요. 상당히 거슬리면서도 무언가를 홀리는 듯한 냄새. 그래서 확인 차원에서 갔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네토 라 리리 공작과 만났고.”
“사실입니까 ,네토 라 리리 공작님.”
“사실입니다.”
그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데이비 왕자님이 범인이라 생각지 않습니다. 비록 그곳을 급하게 가시는 듯하셨지만 데이비 왕자 저하께서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르기엔 시간이 너무 부족합니다.”
나를 변호하는 리리 공작의 발언은 언뜻 들으면 나를 지키려는 듯한 모습이다.
하지만 나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시간이 부족하다라…… 외람되지만, 저하께서는 마스터 급보다 강한 무력을 소유하고 계십니다. 마음만 먹으면 빠른 시간 안에 그곳에 도달해 그를 살해할 시간이 충분합니다.”
“억측입니다. 그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나를 변호하는 페일트리스 후작이 진중하게 말했다.
“이유는 충분히 존재합니다, 굴란 백작 영식이 페르세르크 왕자비 저하께 추파를 던지다가 직접 왕자 저하께 걸렸으니까요. 무엇보다 그 장소에 완벽하게 찾아간다는 건 있을 수 없지요.”
“내…… 냄새를 맡으셨다 하였지요!”
페일트리스 후작이 급히 반박한다. 변호를 하려 해도 정보가 너무 부족한 것도 물론이거니와 확신이 드는 것이 하나도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심문관은 제 콧수염을 쓸어내리며 되물었다.
“하면 네토 라 리리 공작님. 묻겠습니다. 수인족인 당신은 후각이 극도로 뛰어나다 들었습니다.”
수인족?
“그…… 그렇습니다.”
“하면 그때 데이비 왕자님이 말씀하신 냄새를 맡으신 바 있으십니까?”
그 물음에 네토 라 리리 공작이 우물쭈물한다.
“그것이…….”
“공작님. 협조해주신다는 점 감사하오나 사실대로 말씀해주십시오. 공작님께 어떤 피해도 가지 않을 것을 약속드립니다.”
제국의 공작이 일개 소왕국의 재판에 증인으로 참석하는 것부터가 웃긴 일이지만 그가 나서겠다고 한 탓에 지금 이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심문관의 말에 한참을 우물쭈물하던 네토 라 리리 공작이 조용히 답한다.
“그것이……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습니다.”
그가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이것으로 저는 심문을 마치고 변호인의 발언 차례로 넘기겠습니다.”
필요한 말을 꺼낸 뒤 곧바로 물러나는 그 모습을 보며 주변에서 술렁임이 커진다.
그렇게 내 변호인의 자격을 취하고 있던 페일트리스 후작이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였다.
“자상.”
“예?”
내 중얼거림에 모두의 시선이 내게 향한다.
“검의 길이 1미터 10센티. 검날은 양날형 롱소드. 실제로 흉기가 그곳에서 발견되었지요. 맞습니까?”
페일트리스 후작을 대신해 내가 고개를 들며 묻자 익숙한 인상의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내궁 7기사장 오르파였다.
“맞습니다. 피 냄새를 감지하는 마법장치의 경보를 듣고 저희가 그곳에 갔을 때 왕자 저하께서 검을 쥐고 계셨습니다만…….
기사장 오르파 범인 제외.
“그게 흉기가 맞습니까?”
“정황상은 그렇습니다.”
“그런 것 치곤 자상이 꽤 이상할 텐데요.”
내 말에 그들의 시선이 내게 향한다.
“베인 흔적, 파인 깊이. 그 정황을 확인해보면 도저히 롱소드로 낼 만한 상처는 아닙니다. 틀립니까?”
“그걸 저하께서 어떻게…….”
“조사하고 있겠죠. 답은 곧 나올 테고.”
담담하게 말하며 고개를 돌리자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법사들이 몇몇 들어왔다. 사건을 감식하는 이들이다.
“보고 드리겠습니다. 백작 영식의 몸을 찌른 자상은 현장에서 발견된 롱소드가 아닌 그보다 훨씬 작은 망고슈 형식의 단검입니다.”
“거봐.”
빙그레 웃으며 내가 말했다.
“내가 유일하게 감지할 수 있는 냄새로 나를 유인하고, 그전에 굴란 백작 영식을 매수하여 내게 일부러 접근시킨 놈.”
“…….”
“그리고 특수한 힘을 이용해 굴란 백작 영식을 불러내고 죽인 뒤 나를 유인하여 피 냄새를 일거에 퍼뜨린다.”
“하…… 하지만 영식의 사망추정 시각은 저하께서 그를 만난 시간입니다! 게다가 혈향을 감지하는 마나 도구에서도…….”
“너무 아다리가 잘 맞는 범죄는 역으로 의심부터 했어야지.”
내 대답에 좌중이 침묵한다.
“변호를 잠시 마치지요. 계속하세요.”
나는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한발 물러난다.
범인은 이 안에 있다.
네토 라 리리 공작이 범인이라고 한들. 그가 정범인지. 아니면 공범이 있는지는 확인해야 한다. 물론 그러면서도 현장에서 먹어치운 이 기괴한 냄새를 유발하는 힘의 사용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고 계속해서 활성화한다.
그때. 저 멀리서 나를 바라보던 페르세르크가 복잡한 시선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는 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