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08화
“세상은 동전의 앞면과 뒷면이 번갈아 가며 존재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나?”
“알고 있습니다.”
심연과 현재의 티오니스를 포함한 수많은 세계.
심연은 본래 새로운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공간이지만 동전의 앞면으로 나오지 못해 절대적인 공허 그 자체가 되었다.
“뭐, 내 취향도 아니고 복잡한 건 의미도 없으니 최대한 간단하게 설명해주마. 프리아 여신은 너를 계속해서 신과 가까워지게 만들었다. 최종적으로 네가 타나토스나 넬타리드 같은 창조된 초월체가 되기를 바랐으니.”
반신으로써의 위계.
금기의 힘.
신력.
거기에 본래라면 각성하지 못했을 포식의 힘까지.
“뭐, 한물간 대적자와 마왕마냥 또 역할놀이라도 한답니까? 적이 신의 위계를 지니고 있으니까 이번에는 대적자도 그에 준하게 만들기 위해서?”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대적자와 마왕. 지금은 내가 둘 다 먹어치운 상황이다.
심연과의 싸움은 대적자와 마왕의 싸움과는 그 궤가 다르다.
아무리 스케일을 크게 했다고 해도 말이다.
마왕이 세상을 부수진 않는다.
하지만 심연의 타나토스는 세상을 모조리 씹어 삼킬 괴물이라는 차이를 지니고 있다.
“왜 그런 비생산적인 짓을 여신이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그걸 내가 알면 이렇게 찾아오지도 않았겠지요.”
“네가 절대보옥을 통해 타나토스를 봉인하려 한다면 당장은 심연이 닫히고 평화가 찾아오겠지. 하지만 말이다. 그후엔 네가 생각하는 미래는 오지 않는다.”
“…….”
“완전한 붕괴. 윤회도, 환생도, 영혼의 소멸이라는 개념조차 사라지는 완벽한 공허. 심연하곤 비교할 수 없는 신조차 태어나기 이전, 그 자체. 어떤 잠재성도, 가능성도 남지 않은 허무 그 자체라 불러도 되겠구나.”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는 공간? 타나토스의 존재가 그렇게 중요했었나? 애초에 그런 상황이면 프리아 여신은 내가 타나토스와 싸우는 것을 막았어야 했다.
복잡한 생각을 하던 나는 머릿속에 개 같은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좀 불안한데 말입니다.”
“당연히 불안해야지. 그만큼 상황이 악화되어있으니.”
“그럼 놈을 격리시키는건 안된다?”
“방금 전 내가 알려준 결과를 피하기 위해서 프리아 여신이 달성해야 하는 조건은 두 가지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흐름이 무너지는 타나토스.
그 타나토스의 격리가 아닌, 완전한 소멸.
그리고.
“너도 이미 들어 알겠지만. 모든 지성체의 죽음, 다른 말로 표현하면 문명을 리셋한다고 하면 되겠지.”
“리셋이요? 뭐 재부팅이라도 한다고?”
“그래. 이미 이 세상은 수억, 수십억 년…… 아니지, 아니야. 시간개념을 넘어선 아득한 기간을 존재해왔다. 연금술사 이바 놈이 그렇게 자랑하던 장비들도 시간이 흐르면 어떻게 되더냐. 멀쩡하더냐?”
“세상이 한계에 달했다라…….”
나는 주먹을 말아쥐었다가 펴며 눈동자의 방향을 돌렸다.
“모든 차원을 이바의 장비로 비교하면 그렇지. 수명이 다 됐다는 뜻이다. 당장 할 수 있는 건 가장 많은 생명력과 감정을 생산하는 지성체의 리셋을 통해 생명력을 순환시키는 것, 그리고 동전의 앞면과 뒷면을 바꾸기 위해 존재하는 이물질인 타나토스의 소멸, 그렇게 하면 당장은 시간을 벌 거다.”
“…… 당장은?”
그러니까 타나토스라는 문제아가 없어져도 리셋하는 것 자체가 원초적인 해결법이 아니다. 이 소리인가.
“당장이라고 말했는데. 그 기간이 얼마나 됩니까?”
“앞으로 1000년 후에 또 한 번 세상을 리셋해야 할 거다. 그 후엔 점점 줄어들겠지.”
점점 줄어드는 주기.
“만약 리셋을 하지 않으면요.”
“무리하게 가동시킨 전자장비가 어찌 되었든?”
보통은 메인 회로가 나가버리던가. 아니면 여기저기 문제를 일으켜서 가동하지 않게 된다.
담담한 목소리였다.
그러니까. 고작 1000년을 연명하기 위해. 신과 같은 힘을 얻어 타나토스와 개싸움을 벌이고.
그를 완전히 소멸시킨 그 후에.
“데이비.”
“그 후에 내 손으로 내 와이프와 내 연인, 내 사랑스러운 동생.”
“…….”
“거기에 처음으로 얻어낸 친구까지 전부 지워버려라?”
내게 친구라는 단어는 전생부터 이어져 온 기억에도 몇 없다고 할 수 있다.
회랑과 복잡한 왕궁생활. 그리고 병실의 생활에 단순히 동등한 입장을 놓고 이야기할 친구가 몇이나 존재했겠는가.
“문명을 리셋시키려면 네가 신에 준하는 초월체가 되어야 가능하겠지.”
그러는 당신은 왜 안 하는데.
그의 담담한 대답에 나는 헛숨을 내뱉으며 그를 쏘아붙였다.
“정말 방법이 없습니까?”
“있다고 한들 나는 선택을 내릴 거다. 이게 가장 깔끔한 방법이니까.”
“이 양반이?”
“솔직히 무섭다. 나는 이 세상이 완전히 사라지는 게 무서워. 그래서 다른 이들을 희생시켜서라도 살아남아야겠다.”
콰앙!!
그 말과 동시에 바닥을 박차고 날아오른 내가 헤라클래스를 향해 신창 롱기누스를 찔러넣었다.
카아앙!!!
하지만 오러 블레이드가 둘러진 창날에도 그의 몸은 상처하나 나지 않았다.
“거 말이 좀 x같습니다?”
“여전히 무르구나. 쓸데없이 정도 많고. 그런데 말이다. 데이비.”
“…….”
“네가 본 회랑의 영웅들이 아무 이유 없이 제 영혼 다 불태워가면서 널 지킨 것 같으냐?”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그를 올려 노려보자 그가 쓰게 웃었다.
“영웅도 결국은 지성체다. 사람도, 영웅도 태어나고 죽는 기간 사이에 수많은 선택을 하지. 난 생존이라는 점에 내 모든 것을 걸었다.”
태어남(Born)과 죽음(Death) 사이엔 치킨…… 아니 선택(Choice)이 있다.
그게 방법이라면 이해는 한다만. 왜 벌써부터 체념을 하는가.
아니 애초에 한번 리셋해본 경험이 있는 그였으니 당연한 결과인가.
“하, 그래서 아비트도 포기하셨나?”
콰앙!!!!
그 빈정거림에 그는 망설임 없이 내 목을 틀어잡아 처박아버렸다.
숲의 지면이 순식간에 박살 난다.
압도적인 충격에 영혼이 저릿해지는 기분이지만 내 시선은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 입 다물어라. 데이비.”
“비겁한 새끼네 완전히.”
페르세르크를 포함한 모두가 결국은 다 죽어야 한다는 사실에 제대로 판단이 되지 않고 있다.
“너는 당장 나오지도 않는 해결책을 낼 자신이 있느냐? 나는 없다. 나로선 불가능하다.”
“지금 그게 종족 영웅이라 불리던 당신이 할 말……!”
콰앙!!!
그가 거칠게 내 몸을 다시 한 번 내리찍었다.
그리고는 내 어깨를 잡아당겨 일으켜 세웠다.
우악스러운 근력은 단순한 물리력을 초월한 힘이었다.
아직 그에게 닿기엔 너무나도 멀다.
그의 붉어진 눈동자가 나를 직시하며 맹렬하게 타박해왔다.
“말해봐라. 데이비. 넌 이 상황에서 대체 어떻게 할 수 있나. 당장이라도 살 방법이 하나밖에 없다면 그걸 선택하는 게 틀린 건가?! 나는 내가 살고 싶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거냐?!”
“그래서 다른 영웅들 전부 소멸시켰습니까?!”
“그렇다!! 그들은 처음부터 내가 그럴 목적으로 영혼을 거둬들였다! 수천 년 더 살아있게 해주었으면 그걸로 약속은 다 한 것이다!”
그의 절박한 외침에 침묵으로 대답했다.
가장 속을 알 수 없으면서 가장 든든했던 영웅이. 너무도 비참하게 느껴졌다.
“당장 전부 소멸하던지, 아니면 가능성을 붙잡고 실낱같은 시간이라도 벌어 목숨을 연명하던지.”
조금의 생존 가능성이 있다면 그걸 붙잡고. 현실적으로, 냉정하게 파악해야 하는 건 또 그리한다.
“…….”
허탈함이 몸을 지배하자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왜 프리아 여신이 타나토스를 도왔는지 이해가 되었느냐?”
그의 말에 나는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이유? 너무 뻔하지 않은가, 파멸을 원하는 타나토스가 진실을 알고 숨어버리면 골치가 아파진다.
현재 유일한 집행자나 다름없는 프리아 여신은 그를 처리할 수 없다.
그렇기에 프리아 여신은 몇 가지 사실을 역이용했고.
타나토스가 숨지 못하게 그를 끌어냈다. 내 손에 소멸하게 만들기 위해.
“적어도 당신이 어떤 작자인지는 잘 알았습니다.”
입맛이 쓰고 비통한 심정이 들었다.
“티오니스, 지구, 그 외에 마법 대륙 아트렐리아, 로 아이아스의 고향 페스리사. 이바 놈의 유르기안, 독고준의 천중원, 유르그의 베르델, 셰인의 룩스 대륙 등등, 모든 차원의 수명이 얼마나 남았을 것 같더냐.”
“별로 남지 않았겠죠.”
“길어야 3년. 그 안에 리셋 시켜서 모든 생명력을 순환시키지 못하면 모든 게 끝난다.”
그것이 신부라는 존재로서 프리아 여신과 하나가 되는 것을 거부한 내게 내려진 의무 이리라.
처음부터. 내가 이 대륙에서 태어나고. 회랑에 가고, 그곳에서 돌아와서 해온 모든 짓이…….
“전부 흐름대로.”
“흐름 거부의 저주는 만능이 아니다. 데이비.”
“…….”
여신이 내게 속은 척하는 것도, 그로 인해 용서하듯 무언가를 내어준 것도, 넬타리드에 의해 힘을 못 쓰는 척하는 것도, 그 외 다수 모든 것들이 전부…… 태초의 의지에겐 이미 보이는 결과였다.
충혈된 눈으로 내가 그를 노려보았다.
다른 이도 아니고 정말 당신이 이런 사람이었냐고.
정말 이게 전부냐고 그리 외치고 싶지만. 나 또한 결국 그와 다를 바가 없다.
아니, 오히려 내 개인의 생사를 위해 움직이는 나보다, 세상 전체를 보고 있는 그가 더 고결한 영웅이 아닌가.
하지만 이해는 해도 납득은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오기가 생겼다.
“타나토스고 리셋이고 전부 내가 해결할 겁니다. 안 되면 되게 하지요.”
“…….”
“미쳐가면서도 당신을 믿고 있는 이클립스가 불쌍해질 지경이네요.”
“이클립스라…… 후, 그 멍청이가 아직도 살아있었지.”
그 말을 끝으로 나는 그에게 롱기누스 창을 겨누었다.
“다시 덤비겠다면 오라.”
“아니, 지금 당신은 솔직히 아는 척하는 것도 역겨워.”
“언젠가 너도 날 이해하는 날이 올 거다.”
“그럴 일이 부디 오면 좋겠네요.”
씹어뱉듯 말하며 창을 거두었다. 이제, 다시는 그에게 창을 겨눌 일은 없을 것이다.
눈시울이 시큰해지는 기분이었다.
* * *
데이비는 신벌을 받기 위해 회수된 공작의 영혼을 가지고 공간을 떠났다.
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지만, 사실상 방법은 없다.
최악의 결과는 신은 물론 세상을 유지하는 규칙조차 남지 않는 허무가 되는 것이고.
최고의 해피 엔딩은 타나토스의 영원한 휴식과 리셋을 통한 천년의 시간 벌이.
안 그래도 거대한 짐을 지고있는 그에게 더 무거운 짐을 지게 해버린 꼴이다.
오래된 영웅의 혼, 헤라클래스의 혼이 신의 영역에 닿은 지도 꽤 되었다.
창공의 하늘에 뜬 채로 만물을 굽어살피던 여신은 푸른 눈동자에 천천히 데이비의 모습을 머금었다.
한참 동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표정을 고수한 채 데이비를 바라보던 프리아 여신의 일부가 흩어진다.
그리고 그녀의 앞으로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검은 어둠으로 가득한 지하창고에 준비된 수많은 괴생명체들. 네토 라 리리 공작이 광기에 휩싸여 만들어낸 금기 그 자체의 존재들.
그 존재들이 검은 안개 같은 것에 서서히 잠식당하기 시작하는 모습이었다.
심연의 신, 타나토스. 그 존재가. 최후의 발악을 위해 리리 공작이 만들어낸 금기와 원혼이 쌓인 변이체들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티오니스와의 균열을 열기 시작했다.
단단한 차원의 벽은 이미 거의 허물어졌기에 그것을 방어할 힘 따윈 없었다.
고요하게 침묵하는 그녀가 천천히 몸을 웅크렸다.
동시에 그녀의 시야에 비친 장면으로 틈이 벌어지고 그 안에서 거대한 용의 형상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을 끝으로 프리아 여신의 전신이 마치 가루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최후의 열쇠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데이비는 선택을 내릴 것이고, 그 결과에 따라 모든 것이 변하리라.
“정말 괜찮은 겁니까.”
헤라클래스의 물음이 들려왔다.
프리아 여신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뭐, 나야 오래 살 만큼 살았으니 사실 죽어도 상관없다만.”
[거짓, 대화.]
“데이비는 회랑의 영웅들이 현신했을 때부터 과하게 나를 맹신했습니다. 그래선 곤란하지요. 나는 이미 죽은 자고, 그렇기에 나에 대한 믿음을 박살 내야지.”
애초에 헤라클래스는 데이비에게 말했던 것과 별개로 자신의 영혼에 어떤 미련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가 데이비를 자극하고 그의 열정에 불을 붙인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묻고 싶은 건 내 안위 같은 게 아닙니다. 녀석이 나를 미워하면 어떻소. 내 누이가 이번 생만큼은 행복하게 살면 된 것이지.”
누이.
헤라클래스는 이미 데이비와 비슷한 경험을 거쳤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괴로운지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하지만 그는 괴로워하는 티를 내지 않는다.
껄껄 웃으며 그가 천천히 다가와 가죽 부대에 담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황혼이 지는 신의 공간은 너무도 조용했다. 마치 죽음을 앞두고 준비하는 노인과 같이.
그 침묵 속에서, 프리아 여신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경고하는데. 데이비만큼은 부수지 마시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이번엔 타나토스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적을 보게 될 테니.”
경고성 짙은 발언을 하던 그가 멈칫했다.
놀라운 일이, 그의 앞에서 벌어졌다.
“이보시오. 여신님.”
투명한 물방울이다.
절대 있어선 안 되고.
절대로 존재할 수 없는 것.
흔히 말하는 신의 눈물방울이라 불리는 엘릭서는 표현이 그럴 뿐 진짜 신의 눈물은 아니다.
초월적인 존재에게 기쁨이나, 슬픔 같은 건 사실상 존재할 수가 없으니까.
하지만 지금 눈앞에서 그녀가 감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데이비가 사라진 곳을 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지 않은가.
‘이런!’
그렇게 생각한 그는 급히 품에서 작은 병을 꺼내 그녀가 떨어뜨린 물방울을 병에 담았다.
그녀의 시선이 헤라클래스에게 닿는다.
“아…… 아니 뭐, 솔직히 어디 쓸 일이 있을지 모르지 않소. 내가 이클립스를 사랑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지만 이클립스를 사랑한 것이지, 여신님과 같은 쥐방울은 취향이 아니야.”
횡설수설 말하지만 애초에 프리아 여신도 그도 이런 해프닝을 신경 쓰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보다 놀랍군…… 신이 눈물을 보이다니.”
고대 문헌을 보면 인간이 가여워 눈물을 흘린 신의 눈물방울이 땅에 떨어졌고 거기서 거대한 나무가 자란 게 세계수라는 말이 있다.
물론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거 전부 뻥이라는 걸 헤라클래스는 잘 알고 있었다.
그만큼 놀라운 일이었다.
그리고,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던 그녀의 입에서 처음으로 감정이 내비쳐졌다.
[불…… 가.]
“그가 가여우시오? 아니면, 그가 죽지 않기를 바라시오?”
[…….]
이것이 그녀가 지금 이렇게 존재하는 이유였던가. 데이비가 생각한 것과 다르게 진실은 좀 더 잔인했다.
눈물을 흘리는 프리아 여신이 고개를 천천히 숙였다가 입을 열었다.
“감정을 터득하면 안 되는 존재. 그것이 초월적인 의지라…….”
[호기심,]
그녀의 의념에 헤라클래스는 침묵했다. 호기심. 그게 그녀가 위계를 추락시키며 처음 얻어버린 감정이다.
신의 사랑이 아닌 언제고 버릴 수 있는 거래자. 그것이 데이비 올 라운이었고.
[분노,]
그녀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흘러나온다.
말을 듣지 않고 멋대로 행동하며 이기적이게 구는 거래자의 행동에 태초 신은 분노를 느꼈다.
[연민.]
필사적으로 살아가는 그의 모습을 보며 연민을 느껴 자신의 위계를 조금씩 희생시키기 시작했다.
이 감정으로 인해 생명의 감정에 공감하기 시작하며 더 빨리 무너져 내린다.
[자애.]
“자애라…… 사실 당신에게 잘 맞지 않는 단어였지. 당신은 그토록 잔혹한 규칙 그 자체였으니.”
그리고, 데이비로 인해 깨어난 그 자애가. 네토 라 리리 공작을 그렇게 만들었다. 그는 본능이 싸이코패스같은 작자라 할지라도 제 부인만큼은 끔찍이도 사랑했으니까.
프리아 여신의 부작용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연민을 느낀 데이비를 저도 모르게 편애하며 급기야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위계를 버리고 그를 돕고 그가 모르게 그를 살려냈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
[연정.]
마지막으로, 데이비를 단순히 버리기 아까운 말이 아닌, 버릴 수 없는, 감정을 깨달은 신이 포기할 수 없게 만든 마지막 감정.
한 대상을 향한 애착.
데이비로 인해 그녀가 위계를 버리고 서서히 추락하면서 얻어낸 감정들. 그것은 상상 이상의 속도로 그녀를 변화시켰다.
타나토스의 힘이 티오니스로 이미 다수 넘어오기 시작했다.
그것도 모자라 타나토스는 프리아 여신의 의도대로 자신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심연에서 끌어내어 데이비를 끝장내기 위해 움직였다.
[첫 번째 사도에게 이르고자 함이니.]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거래는 거래니 말해보시오. 지키지도 못하고 리셋을 택해버린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라면.”
[태초에 존재한 초월적 의지로써 바랄 수 없는 그것을…… 무어라 일컫는가.]
프리아 여신의 명령은 무언가를 시키는 게 아니었다.
단순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 단어를 언급하는 프리아 여신의 모습에 헤라클래스는 웃음이 나왔다.
“보통 그런 걸 두고 신을 모시는 모든 존재들이 말하더이다.”
기적이라는 웃긴 단어로.
그가 유쾌하게 웃어 보였다.
“그 기적을 바라시오?”
1만 년도 더 된 고대 시대. 그 시대에 만났던 프리아 여신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럼 우선은 방해되는 타나토스부터 처리해야겠지.”
그렇게 말한 그가 고개를 돌렸다.
“데이비를 잘 부탁한다.”
그 목소리와 함께 프리아 여신과 헤라클래스가 있는 창공의 뒤편에서 누군가가 천천히 공간을 열며 걸어 나왔다.
백색과 연보랏빛이 서린 소매가 큰 커다란 드레스를 입은 연보랏빛의 미녀.
눈을 감은 채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지 않은 채 헤라클래스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미련을 가지고 죽은 모든 영웅들에게 기회를 준 건 잊지 않아요. 이제는 우리가 나설 차례겠죠.”
미녀는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부디. 평안하세요. 아저씨.”
“미안하다. 로 아이아스.”
“당신은 우리의 미련을 풀어준 분이잖아요. 데이비를 지키는 건 우리 전부의 선택이에요.”
그 대화와 동시에. 프리아 여신이 만들어놓은 모든 세계를 보는 거울 속에서 거대한 존재가 티오니스 대륙 동남쪽 최하단에서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일이 빨리 진행되는군.”
그렇게 말하는 헤라클래스의 몸이 바스러진다.
“아저씨?”
“뒷정리를 할 시간이다.”
“심연으로 가시나요?”
“싸그리. 지워버려야지.”
데이비에게 전하지 않은 진실, 그것이 헤라클래스에게 남은 과업이다.
“제가 가도…….”
“적어도 네 영혼만큼은 더 이상 부서지지 말아라.”
“아저씨…….”
“잘 부탁한다. 꼬마 아가씨.”
수천 년 된 영웅에게 꼬마라 부를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주인이 비어버린 검은 공간으로 걸음을 옮기며 손마디를 꺾는다.
“자. 어디 생존해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