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09화
227. 검게 물든 용의 절규 (1)
헤라클래스에게 배신감을 느끼는 것일까.
쾅!!!
이오의 은신처에서 돌아온 나는 아무 말도 없이 그대로 병나발을 까기 위해 와인을 들었다가 거칠게 내려놓았다.
독한 술은 현실을 도피시켜준다지만 술을 끊는다고 선언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아무리 상황이 복잡해도 그렇지 내가 한 말을 지키지 않을 순 없다.
병을 치워버리려던 도중 내 손이 멈칫한다.
어차피 이미 갈 때까지 가버린 상황이라면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마실까 말까.
한참을 고민하던 중이었다.
“술을 끊었다더니. 그새를 못 참으시네. 그거 알코올 중독이에요.”
고개를 돌리자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와인잔을 빙글빙글 돌리고 있는 카트린느의 미소가 보인다.
“카트린느 대공. 지금 장소가 이래서 문제지, 삼국 회담 중입니다.”
“아. 미안해요. 미안. 아하하하”
호탕하게 웃으며 그녀가 잔을 내려놓았다.
장난스런 분위기이지만 그게 그녀만의 협상방법이라는 것을 그가 모를 리 없다.
“자. 그럼 그 빌어먹을 놈에 대한 처우를 한번 논의해보죠.”
사실상 놈에 대한 모든 권한을 주장할 수 있는 건 라운 왕국과 린디스 제국이지만 놈의 일지를 보면 평민, 노예 귀족 가릴 것 없이 닥치는 대로 납치한 전례가 존재한다.
그런 만큼 사실상 팔란 제국도 어느정도는 권한이 있었다.
“우선 가장 우선권이 높은 건 라운 왕국과 우리 린디스 제국입니다. 팔란 제국은 이번엔 양보해주시죠.”
“쉽게 물러나진 않을 겁니다. 게다가 그자는 일리나와 국혼을 준비하던 자입니다. 이제 와서 약혼이 박살 났다 해도 그냥 물러날 수 없지요.”
“린디스 제국에서 보상이라도 해주었으면 한다는 겁니까?”
“필요하다면.”
저 양반은 분명히 일리나를 어찌해보려 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저렇게 분노하는 게 훤히 보인다.
가능한 모든 수단을 이용한다.
이건 단순히 공작의 신변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인체실험은 비인도적인 실험이지만 그만큼 평소엔 절대 얻을 수 없는 절대적인 데이터를 지니고 있다.
그런 만큼 각 제국에서도 그가 남긴 실험 성과를 마냥 묵과할 순 없으리라.
물론, 그건 제국의 입장일 뿐이고.
“당장에라도 시신을 부관참시해 효시라도 하지 않는 이상 분이 풀리지 않을 겁니다.”
“이쪽도 마찬가지네요. 황녀저하를 노린 것도 모자라서 왕족의 혈통을 타고난 주제에 폐하의 명성에 먹칠을 한 자입니다.”
카트린느 대공과 살리반의 기 싸움을 보고 있던 내가 물었다.
“두 분.”
“예?”
담담하게 두 사람을 부른 내가 시선을 내리깔고 있다가 천천히 들어 올리며 양손을 깍지끼듯 모으고 엄지로 턱을 받친 채 진지하게 물었다.
“만약에 말입니다. 이 세상이 3년 안에 사라진다고 하면 어쩔 것 같습니까?”
“그건 무슨 소립니까?”
“뭐, 운석이라도 뜬답니까?”
그 질문에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운석이라…… 운석이 아니라…… 재앙의 신이 눈을 뜨는 거겠지.
정확히는 세상을 리셋시키는 것이지만 인간을 포함한 모든 지성체에겐 자신들 모두의 목숨을 거둬가는 신을 두고 과연 균형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냥 해본 소리입니다.”
내 말에 살리반이 인상을 찌푸린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것일 터다.
“황태자님.”
“예.”
“이번 일. 팔란 제국에선 손을 떼주십시오.”
내 말에 그가 인상을 찌푸린다.
“무슨 뜻입니까?”
“말그대로입니다.”
“그건 개인적인 빚입니까?”
“포함은 됩니다만 그리 추천할만한 일은 아니네요.”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선 듯 어렵습니다만.”
그가 고심하듯 나를 바라보았다.
“일리나의 파혼문제로 안 그래도 제국이 시끄러울 텐데 하필이면 그 대상이 팔란 제국과 더 얽히는 게 좋진 않을 테지요.”
내 말에 그가 피식 웃어 보였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말해보세요.”
“일리나와의 혼담. 국혼제의를 받아주십시오.”
아무래도 그 또한 제국을 위해 공작의 실험 성과를 반드시 얻으려고 작정한 모양이었다.
내가 다른 모든 문제를 제쳐놓고 절대 받아주지 않던 문제까지 거론했으니 말이다.
다만.
“그렇게 합시다. 그럼 팔란 제국과의 국혼 문제는 차후 다루도록 하고. 린디스 제국의 의견은 변함없습니까?”
“예?”
내 대답에 벙찐 두 사람의 시선이 내게 향한다.
“데…… 데이비 왕자님? 방금 뭐라…….”
살리반 황태자가 드물게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합시다. 국혼, 안 그래도 그 이야기를 하려던 참이었는데.”
“저…… 데이비 왕자님?”
“대공. 죄송하지만 놈이 만들어낸 연구성과는 엄연히 생체실험이 아니라 그가 가진 특수한 힘에 기반을 둔 겁니다. 그 정보를 보유하는 게 나중에 어떤 문제가 될지 한번 고려해보고 요구해도 좋겠네요.”
“단순 생체 실험 데이터가 아니었다는 말인가요?”
“예. 대신 놈에게 희생된 이들의 인적사항 정도는 찾는 대로 넘겨드리겠습니다. 그럼 되었습니까?”
“…… 실질적인 득이 없다면 의미가 없겠지요. 다만 그래도 일단은 제국의 황족 출신이니…….”
살리반 황태자와 카트린느 대공은 나의 이런 심경변화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 * *
하인스 영지는 땅이 넓은 편이기에 완전히 개발된 적이 없다. 대부분이 황무지라 못 쓰는 땅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작정하면 충분히 발전시킬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흠…….”
내 앞에 나타난 거대한 흙의 거인이 나를 노려본다.
당장이라도 공격을 준비하는 것처럼 그가 주먹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긴장하기라도 한 듯 한참을 노려보다 주먹을 뻗었다.
콰아아앙!!!
어마어마한 폭음과 함께 내가 서 있던 폐허 전체가 뒤틀린다.
동시에 지면이 모조리 뒤틀리며 일어나기 시작했고,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대며 형태를 바꾸기 시작했다.
“왼쪽에 좀 더.”
흙의 거인, 땅의 정령왕 노아스의 거대한 정령 에너지가 한 차례 요동치며 바닥에 있던 흙과 거대한 돌무더기들이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제비. 차곡차곡 옮겨라.”
[여……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잔뜩 쫄아있는 어조로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 즉 제비가 떠오른 흙더미를 모아 한곳에 모았다.
그 뒤를 이어 어디서 온 건지 모를 물줄기들이 마치 수로를 파듯 파여진 노아스의 작품 위로 물길을 만들어냈다.
도시의 토대를 건설하는 데에 있어서 세 정령왕의 힘이 가해지면 시간은 유명무실해지는 법이다.
물론, 이들이 만들고 있는 건 복잡한 도시 기반이 아니었다.
수로로 만들어진 거대한 마법진.
아직 활성화는 하지 않았지만 거대한 지형지물을 이용한 고대 마법의 일종이다.
“나와라. 샨드라미네아.”
이윽고 마법진의 중앙 거대한 콜로세움처럼 타원형으로 존재하는 공간 위에서 선 나는 맞은편 지면을 향해 카드 한 장을 던졌다.
카드가 순식간에 거대해지면서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고, 이내 거대한 지룡을 내 앞에 소환해냈다.
그르르르르르…….
낮게 울음을 터뜨리며 방대한 존재감을 흩뿌리는 존재.
세 마리의 환수왕 중 하나이며 지폭룡.
심리장악과 분신체, 그리고 어마어마한 방어력을 지닌 괴물 같은 존재라 할 수 있다.
물론, 지금껏 만난 대상이 강해서였지 절대 샨드라미네아라는 존재가 약할 순 없다.
이놈 하나라도 대륙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데엔 충분하니 말이다.
[인간.]
나를 노려보는 샨드라미네아는 아직 메가로드리아 같은 확실한 이해관계를 일치시키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번 과정은 반드시 필요했다.
“샨드라미네아.”
[말해라. 하찮은 인간.]
저놈의 오만한 말투는 익숙하다. 애초에 왜 이 무식한 삼룡 녀석들 중에서 메가로드리아가 현왕으로 불렸겠는가.
나머지 두 놈이…….
과도할 정도로 머리가 단순한 놈이기 때문이다.
상대적 선녀행이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나는 혹시나 하는 상황을 대비해 하늘에 떠 있는 거대한 흑룡을 바라보았다.
아, 다시 보니 선녀네.
“별건 없고, 계약까지 한 입장에서 기왕이면 친하게 지내자고. 상황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야. 심각하니까 말도 좀 잘 들어줬으면 한다.”
단호하게 내 입장을 건네자 녀석의 입에서 헛웃음이 화염이 되어 강렬하고 짧게 터져 나왔다.
[크흐! 웃기는 소리를 하는군. 인간, 네놈이 착각하는 게 있다.]
“그래. 말이나 해봐라. 내가 뭘 착각했는지.”
내 물음에 놈의 눈동자가 정확히 나를 직시했다.
[나는 원해서 계약자가 된 것이 아니다. 나의 계약자는 오로지 셰인 그놈을 제외하곤 없다.]
“그리고?”
제발 중요한 이유가 있기를 바라마. 내가 시간이 촉박해서 이런 곳에 시간을 투자할 여력이 없으니.
[또한, 나는 나보다 약한 자의 명령 따윈 따르지 않는다!]
그의 단호한 외침에 내가 인상을 찌푸리고 메가로드리아를 올려다보자 그는 자신의 앞다리를 이용해 제 머리를 검지로 가리키고 빙글빙글 돌렸다.
돌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는 일이다.
“그래도 넌 베헤모스보다는 말이 통하…….”
콰앙!!!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놈이 휘두른 거대한 앞발이 대지를 내리찍었고, 이내 지진을 일으켰다.
[인간. 선을 넘지 마라. 네놈이 베헤모스에 대해 왈가왈부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좋아. 너보다 강한 놈이 아니면 말을 듣지 않겠다고 했지.”
[크르르릉……]
“그럼 여기서 내가 널 죽도록 패고 한 대 더 때려서 죽여도 할 말이 없겠네.”
[흥! 네깟놈은 힘을 전부 되찾아가고 있는 내게 한 끼 식사도 되지 않는다. 어디, 식사에 초대 되어볼 테냐.]
그의 거대한 머리가 내게 가까이 오며 깔보듯 나를 내려다보았다.
이에 침묵하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자. 식사.”
[흥! 건방진 인간.]
그가 심드렁하게 나를 노려보았다.
“노아스.”
내 부름에 노아스의 거대한 거체가 파스스 부서지며 내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정령 마나.
순식간에 포식의 특성이 정령 마나를 먹어치우고 구조를 분해, 분석한다. 그리고, 빠르게 휘몰아치며 원소 마나와 뒤섞였고, 이내 방대한 자연에너지를 내 몸에 스며들게 만들었다.
막대한 힘이 스며든다.
한번 힘을 포식할 때마다 어마어마한 힘의 증폭이 된다는 것은 의외로 중독성을 불러일으켰다.
“식사라…… 식사. 식사 좋지. 그래. 이번 기회에 식사 한번 하자.”
내 말에 놈의 전신에서 투기가 쏟아져 나온다.
[건방진 인간 놈!]
이윽고 그의 입에서 용암과도 같은 붉은 힘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놈을 보며 노아스를 완전히 내 몸에 스며들게 한 내가 한 발 내디뎠다.
[네놈의 팔다리를 잘근잘근 씹어먹어서 한 끼 식사로…….]
“그래. 식사하자고.”
질식사, 개자식아.
[정령동화.]
[정령왕 융합.]
[거체화.]
구구구구구구구!!!!
대지가 뒤흔들리고 거대한 힘이 터져 나온다.
정령과 계약자의 힘의 동기화.
다른 힘과 동화해서 사용 가능한 현재 나의 경우, 단순히 정령 마나와 정령의 힘뿐만 아니라.
[그라비톤]
[병합 마법]
[리인 포스 스피릿 로드.]
마법 또한 가용범위가 남다르게 늘어난다.
[무슨?!]
경악한 샨드라미네아의 눈이 크게 뜨여지기가 무섭게 놈보다 더 거대해진 인간의 형체가 된 내가 양손을 뻗었다.
저항하듯 놈이 초고열의 브레스를 쏘아 보내지만.
놈의 브레스는 순식간에 내 앞에 나타난 투명한 장막에 모조리 씹어 먹혀버렸다.
사실상 내가 어지간한 배리어 마법을 쓰지 않게 된 이유가 된 포식의 특성 때문이다.
먹어치우고 그것을 내면에 보관하면 그것이 공복의 광기로 번지겠지만, 버린다면 그 또한 이야기는 달라진다.
콰직!!!
이윽고 내가 놈의 목을 감싸 쥔다. 얇고 투명하며 어마어마하게 견고한 녀석의 힘. 에너지 실드가 내 공격을 저항하지만 그래 본들…….
“저항하지 마 x새야.”
[자…… 잠깐?!]
당황한 그가 버둥거리며 내게서 벗어나려 든다.
하지만 수백 미터에 달하는 거체로 변해버린 나는 무릎으로 놈의 등을 찍어누르고 양손으로 놈의 목을 조르듯 잡았다.
스산한 시선에 놈이 당황한 듯 버둥거리지만, 그것도 잠시뿐이다.
[메…… 메가로드리아! 나…… 나를 도와라!]
당황한 샨드라미네아가 자신의 동족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그의 예상과는 달랐다.
[무덤을 파는 수준도 실력급이군. 스스로 땅을 팠으니 스스로 덮을 줄도 알아야지.]
꽈득!
[그아아아아악!!]
상상을 초월하는 힘의 격차에 놀라 비명을 지르는 그를 보며, 섬뜩한 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미…… 미친놈…… 그…… 그만둬라! 내 목의 비늘이 뒤틀린다!]
“난, 나보다 약한 놈의 명령 따윈 듣지 않는다!”
근엄하고 진지하게 받아치자 놈의 눈에 경악이 서린다.
[그…… 그만!! 협상! 협상을 요구한다!]
“협상 결렬!”
순식간에 몸을 비틀어 녀석의 팔다리를 감아 걸었다.
흔히 말하는 암바 자세.
샨드라미네아의 육신도 거대하지만, 정령왕과 동화한 내 체격은 사실상 녀석보다 더 거대하다.
“이게 암바라는 거다 이 x끼야!”
[끄아아아아아악!!!]
처절한 비명을 지르는 샨드라미네아.
놈에겐 미안하지만, 타나토스를 상대하기 위해서 놈의 힘이 꼭 필요했다.
절대보옥을 통하든 내가 그전에 신으로 각성해버리던 결과적으로 놈과 싸우기 위해서 청단이와 홍단이, 그리고 초단이의 힘은 필수요소.
3천 도에 달하는 자연 화염인 드워프의 대화만으로는 어림도 없다.
완성된 두 아이는 이미 보통의 온도로는 가공시도조차 할 수 없으니 말이다.
수만 도에 달하는 화이트 노바조차 아무렇지도 않게 버텨내는 무기에 고작 3천 도의 대화로?
어림도 없지.
순수 자연 화염을 내뿜는 놈은 정령왕 이프리트 녀석과 녀석이 가진 레바테인까지 모조리 끌어다 사용해 청단이 홍단이를 강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
“야. 화염이 아직 미적지근하다. 좀 더 데워봐. 그래야 써먹지.”
[이…… 이 미친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