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33화
233. 그의 정체
주변이 짓눌리는 공기에 모두가 얼어붙은 것처럼 침묵한다.
“쿨럭…… 케륵…….”
몸이 반토막이 난 채 허우적거리던 여성이 필사적으로 내게서 벗어나려 든다.
“요즘 포식자는 피포식자에게 먹히기도 하나 보네.”
콰앙!!
내 빈정거림과 동시에 포식자의 왕 중 한 명이 내게 덤벼들었다.
가볍게 홍단이를 휘둘러 그의 검을 베어내고 육체까지 베어 버리려던 그 순간.
그의 육신이 안개처럼 변하며 홍단이를 통과했다.
그리고, 내 검을 통과한 그의 무기가 다시 형체를 되찾으며 공격한다.
서걱!!!
허공이 갈라지며 그가 마른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의 무기가 닿기 직전 내 신형이 흩어지듯 변하며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하…… 아깝게 되었군.”
아주 잠깐 내게서 틈을 만들어낸 결과 그들은 내가 베어 버렸던 여성을 회수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냥 콱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만. 일단 약속은 약속이니까.”
심드렁하게 말한 한 추락자가 반토막 난 여성에게 손을 뻗자 그녀의 육신이 본래대로 되돌아간다.
“죽여…… 죽여 버리겠어!!”
전신의 피부가 보랏빛으로 변한 그녀가 표독스러운 얼굴로 노려보며 소리 질렀다.
격하게 소리치며 달려든 그녀가 두 가닥의 촉수를 이용해 쉴 새 없이 공격해 온다.
그런 그녀의 공격을 슬쩍슬쩍 피해내고 그녀가 지근거리까지 다가왔을 때.
가볍게 휘두른 홍단이를 막아낸 그녀가 스산하게 웃어 보였다.
“난 육체가 단단하기로는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다고, 알아? 조금 예리한 칼이긴 하지만 그래 봐야 장난감일 뿐이지!”
비웃음을 던지며 그녀가 내 허리를 휘감았다.
“마법사님!!”
쓰러진 채 경악성을 내뱉는 홀리곤의 외침에도 나는 크게 움직이지 않았다.
“이대로 널 이등분해서 찢어 삼켜 주…….”
푸욱!!
“어?”
자신의 단단함에 자신이 있다는 듯 소리치던 그녀가 멈칫하며 멍청한 소리를 냈다.
서걱!!
그리고.
그녀의 육신이 또 한 번 홍단이에 의해 잘려 나간다.
“커헉…… 크륵…… 이게…… 무슨…….”
순식간에 허물어지는 그녀의 머리를 맨손으로 낚아채 던져 버린 내가 그들을 바라본다.
“살려 두면 두고두고 방해되겠네.”
마치 그들의 명줄을 가늠하듯 중얼거리자 그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감히…….”
기세를 내뿜으며 나를 압박하는 그들을 향해 나는 거둬들였던 힘을 그대로 내뿜었다.
쿠웅!!!
신격이 머무른 힘.
[절대용언]
[멈춰라.]
내 한마디에 주변이 굳어 버린다.
숨을 쉬고 눈동자를 굴리는 것을 제외하곤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 그들을 향해 천천히 다가간다.
그리고는 좀 전에 몸을 안개처럼 바꿔 나를 공격했던 추락자에게 다가간 내가 물었다.
“이제 도망 못 가겠네?”
“크륵…… 큭…… 대체 왜 몸이!!”
다만 그들은 곧 죽어도 자존심을 쉬이 버리진 않을 모양이었다.
“흥! 네놈이 무슨 수로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네 검으론 나를 죽일 순 없다.”
그의 도발에 나는 홍단이를 가볍게 휘둘러 그를 베어 넘겼다.
하지만 여전히 안개처럼 변하는 몸이 홍단이를 통과한다.
“흐음…… 신기한 몸이네. 생명력이 육신을 이렇게 바꿀 수도 있구나.”
고개를 주억거린 내가 다시 검을 든다.
“아무리 검술이 예리해도 내 몸은 검으로 베어낼 수 있는 몸이 아니다!”
서걱!!
“어?”
그의 몸은 푸른 궤적을 남기는 검, 청단이의 검날에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안개는 몰라도 안개를 뭉치는 네 생명력이 버젓이 있는데 그걸 그냥 둘까.”
두 명의 추락자 왕이 순식간에 살해당했다.
그제야 진짜 일이 심상찮다는 것을 느낀 듯 다른 이들이 주춤거리며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절대용언으로 인해 그들의 몸이 굳어서 움직이지 않는다.
“도망치고 싶어?”
“…….”
그들의 표정에서 두려움이 읽힌다.
천천히 그들을 향해 다가간다.
굳은 얼굴로 악을 쓰며 위압에서 벗어나려 드는 그들은 확실히 지금 이 대륙의 기준으론 강자가 맞겠지만.
상대가 나빠도 너무 나빴다.
“그으아아아아아아아!!!!”
그때. 절대용언에 굳어 있던 한 추락자의 왕이 악을 쓰며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
그리고는 이내 핏발이 선 눈으로 위압을 이겨내며 내게 손을 뻗었다.
오…… 극도의 고통 마법으로 스스로를 움직이게 만들어?
그뿐만 아니었다.
사령마나를 일으킨 추락자의 왕은 내게 반격이라도 하듯 그대로 사령마나를 쏘아 보냈다.
“죽어!!!”
그의 손끝을 타고 검은 기류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변형된 사령마법.
그 공격이 나를 잠식한다.
그가 하고자 하는 행동은 뻔했다.
사령마나를 원초적인 방법으로 제어하여 대상의 생명력을 갈취하고 육신을 비트는 응용법.
제법 머리를 굴렸다.
“네 몸 안의 생명력을 모조리 흡수하고 터뜨려 주마!”
순식간에 마나가 역류하려는지 몸 안에서 들끓기 시작한다.
제법 실력은 있는지 상당히 빠른 시간 안에 그것들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저리 꺼져.]
사령마나는 위계 서열이 확실한 힘이다.
“컥?!”
고작 보통의 사령마나로, 데스로드의 사령마나를 어찌 해 보려 한 것부터 틀려먹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마법이 아닌 단순한 사령마나의 움직임으로 나를 제어하려 했을 때.
반대로 나 또한 놈과 이어진다.
“컥?!”
나를 몰아붙이던 추락자의 왕이 비틀거리며 핏발이 선 눈으로 쓰러진 채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무래도 본 모양이었다.
내 안에 있는 데스로드급의 마나가 정확히 무엇인지. 또 어떤 것인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그가 파르르 떨었다.
“너…… 너 대체 뭐야…… 대체 뭔데!!”
절규, 혹은 경악하며 소리 지른 그가 바들바들 떨며 물러난다.
“오…… 오지 마…… 오지 마!!”
전의는커녕 완전히 두려움에 사로잡혀 버린 그는 패닉에 빠진 채 뒷걸음질 치며 도망치려 했다.
“컥!! 커헉!”
하지만 곧 내가 역으로 놈의 생명력을 흡수하고 육신을 비틀어 버리자 그는 곧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또 한 명이 당했다.
내가 사령마나를 이용해 한 명을 찍어누르는 동안 위압의 해결 방법을 알아낸 그들은 필사적인 정신력으로 움직여 몸에 큰 상처를 내고 내게서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소리 질렀다.
“놈을 가둬!! 그 후에 내가 죽인다!!”
치잉!!!
순식간에 나를 중심으로 오망성의 결계가 만들어진다.
퉁!! 퉁!!
벽을 가볍게 두드려 보자 제법 견고하다.
“산으로 짓눌러도 깨지지 않는 견고함을 지닌 벽이다! 네놈이 빠져나올…….”
으직…….
“나왔네?”
“비…… 빌어먹을!”
결계를 양손으로 잡아 찢어 버린 내가 빙그레 웃어 보였다.
[디스펠]
와장창!!!
복잡한 결계의 구성식을 순식간에 분석하고 역으로 해제한다.
순식간에 마법이 박살나 버렸다.
저항이 소용없는 진짜 포식자.
도망친다는 선택조차 잊고 두려움에 빠져 버린 그들의 몸이 파르르 떨린다.
“대체…… 대체 당신…… 정체가 뭐야…… 정체가 뭐냐고!”
처음 느낀 위압이 단순히 착각이 아님을 입증하듯.
한때 대륙의 절대 포식자로 존재해 온 그들조차 망연자실할 위계의 격차에 그들이 억울한 듯 소리 질렀다.
그리고, 그렇게 도망치지도 못하고 살아남은 그들을 보며 내가 빙그레 웃어 보였다.
“왜. 너희들이 하는 짓과 다른 게 있나?”
“뭐?”
“너희도 강자고 포식자니까 먹어 치워 왔잖아.”
왜 이제 와서.
“예수 가라사대.”
약육강식이라 하셨다.
콰득.
바닥을 가볍게 구르자 어마어마한 충격파가 터져나가며 주변을 완전 장악했다.
* * *
분대장 홀리곤은 지금 눈앞에서 펼쳐진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았다.
추락자, 그들은 이 대륙에서 현재 포식자로서 인간(변이체)의 적이다. 간단한 육체 능력의 상승 정도만 효과가 있는 변이체와 달리 추락자들은 변이 직후부터 비교할 수 없는 강대한 힘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에 추락자를 제압하기 위해선 준비된 전투원 다수가 기습적으로 공격하거나 함정을 설치하는 게 대부분이다.
물론 그 또한 일반적인 추락자를 상대로 가능한 짓이지 왕을 상대로 한 공략법은 아니었다.
사파이어 마탑에서 내려진 매뉴얼에 따르면 왕급 추락자를 만날 경우 위치를 알린 후 장렬하게 전사, 혹은 무조건 후퇴를 하라 말한다.
추락자들이야 워낙에 제멋대로고 사이도 좋지 않은 탓에 지금까지 사파이어 마탑이 탑주의 보호 아래에 돌아가고 있지만 그들은 그만큼 위험하고 무시무시한 존재라 할 수 있다.
그런 그들이 무려 8명.
추락자 왕 전원이 나타난 것도 모자라서. 모두가 협력하고 있다.
사실상 죽음이 확실시된 상황.
성품이 잔혹하기 그지없는 그들은 이 대륙 최고의 위험 요소였으니까.
그런데.
“야. 자꾸 반항하지 마.”
거대한 마법진을 그려 놓고 그 어마무시한 공포의 존재.
추락자의 왕의 뒷덜미를 잡아 마법진에 처박아 넣고 있는 저 인간은…….
대체 무엇이라 표현해야 할까.
“가만히 있어. 생명력만 뽑아내고 놔준다니까?”
“읍!! 으으읍!! 으으으으으읍!!!”
무언 마법인 침묵마법에 당해 악을 쓰는 저 불쌍할 정도로 볼썽사나운 사내가.
추락자의 왕이 맞는 것인가.
아니 그건 분명히 맞을 터였다.
“저…… 마법사님.”
홀리곤은 자신이 보고 있는 현실이 정말 사실인지 거짓인지 쉬이 믿기가 힘들어 물었다.
“당신은 정말…… 뭐하는 사람입니까…….”
처음엔 회복 능력을 지니고 륀느라는 그 강한 힘을 지닌 소녀의 보호를 받는 존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그의 착각이었다.
그는 이런 위험한 장소에서도 망설임 없이 륀느를 파견 보내도 괜찮을 정도로…….
강자.
그러니 호위가 필요가 없지.
그의 질문에 마법진을 가동하며 이래저래 허공에 떠오른 마나 술식 구체를 조율하던 데이비가 대답했다.
“아 혹시 이놈들이 필요한 겁니까?”
데이비의 물음에 홀리곤은 고개를 대뜸 저었다.
꿈에서 볼까 두려운 존재가 저렇게 처참하게 무너지는 꼴을 보니 측은지심까지 들 지경이다.
“오오…… 된다. 돼! 야 네가 세상을 구했다 인마!”
곤죽이 된 추락자의 왕을 향해 대소하는 데이비를 보며 홀리곤은 이해를 포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