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46화
데이비 올 라운.
라운 왕국의 1왕자이자 크리아네스 올 라운 국왕의 첫 번째 아들이자. 선대 왕비였던 레니 알리샤드의 유일한 아이.
그리고 정말 지겨울 정도로 긴 시간 동안 두 번의 환생을 거쳐 영웅의 회랑이라는 곳까지 내던져졌다가 돌아온 상당한 사디즘이 섞인 괴롭힘을 즐기는 성격 나쁜 인간.
그가 지금 눈앞에 있다.
“여긴 하인스 영지가 아닌데…… 내가 헛것을 봤나?”
“아니야. 대륙의 중부. 확실해.”
데이비의 출현에 두 사람은 경악했다.
이실디는 당장이라도 죽일 것처럼 베르단데를 노려보았지만, 베르단데는 복잡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본다.
“데이비?”
“왜. 문제라도 있어?”
겉보기엔 데이비와 다를 게 없다. 품고 있는 힘도 그랬다.
“이실디. 그의 몸에서 마나가 느껴져?”
“그래. 평소대로 말도 안 되게 방대한 양. 뭔데. 저 자식이 죽었다고 해서 결계까지 찢어발기고 찾아왔는데!”
“풉, 신목에서 여기까지 달려왔다고?”
“조용히 해!”
빼액 소리를 지른 그녀가 거칠게 푸른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멀쩡한 거 알았으면 됐잖아. 돌아가.”
“잠깐.”
짧게 침묵한 베르단데가 데이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차가운 표정으로 물었다.
“넌 데이비 올 라운이 맞아?”
“그럼 내가 다른 이로 보이리?”
“…….”
너무 익숙한 그 모습에 베르단데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네 카드인지 뭔지를 만들 때 힘을 빌려준 것 때문에 네 생명력과 내 힘이 이어져 있을 텐데.”
“그래서?”
“넌 지금 죽었어.”
베르단데의 말에 이실디가 그녀의 어깨를 툭 쳤다.
“야. 장난도 적당히…….”
“너 누구야.”
싸늘한 물음에 데이비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미묘한 공기 속에서 인상을 찡그리고 있던 이실디가 묻는다.
“쟤 정말 데이비 아니야?”
“아니야. 데이비가 살아있다면 절대 내 힘이 그의 죽음을 감지할 수 없어.”
베르단데의 의지는 확고한 듯 몰아붙였다.
하지만 데이비의 반응은 의외였다.
“뭔 개소리야. 그럼 네 앞에 있는 나는 귀신이냐?”
“모르지. 데이비의 탈을 쓴 다른 무언가일지.”
“타나토스까지 뒤져 나자빠진 상황에 잘도 그런 놈이 나오겠다. 그럼…….”
짧게 침묵한 데이비가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그그그그극!!!
동시에 주변이 뒤틀리는 거대한 중력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네가 아는 가짜는 이런 것도 할 수 있나? 그게 아니면, 헤라클래스에 대한 이야기라도 해줘? 그것도 못 믿겠으면, 그날 이클립스가 소멸하던 날의 기억까지 보여주리?!”
짜증 난 데이비의 말에 베르단데의 표정이 창백해진다.
“넌 대체.”
“뭐 문제가 생긴 건 알겠는데 적당히 안 믿어야지. 난 데이비 올 라운이야. 그리고 이곳에 있는 이유는 개인적인 일 때문에 티오니스에서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오니 이 꼴인 거고.”
아무리 봐도 데이비다.
그의 힘. 그의 말투. 그의 얼굴. 그의 영혼.
그 어떤 면을 봐도 데이비라는 건 확실했다.
“됐어, 그만해. 나도 저 자식 짜증 내기 시작하면 못 막아. 너 죽고 싶어서 그래?”
“……미안해. 내가 착각했나 봐.”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대답한 그녀가 시선을 회피했다.
“참. 이실디. 고향은?”
“당장은 안돼. 아직 준비가 안 됐어.”
이실디가 담담하게 답했다.
“아직, 볼 용기가 나질 않네.”
사제들에게 사저가 사실 괴물이었다는 사실이 아직도 걸리는 그녀였다.
“마침 하인스 영지로 가고 있던 중이었는데. 같이 가자.”
데이비의 말에 두 여성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메가로드리아.”
이윽고 데이비가 손을 휘저어 메가로드리아를 불러냈다.
그러자 허공이 찢어지며 거대한 폭풍과 함께 압도적으로 거대한 흑룡이 모습을 드러낸다.
[계약자? 돌아온 것인가?]
“그래. 돌아왔어.”
데이비를 보며 천천히 착지한 메가로드리아의 눈이 가늘게 뜨여진다.
[비장하게 떠난 것 치고는 한순간이군.]
“시간의 정령 알타이르에게 이곳의 시간을 고정시켜달라고 했거든.”
그 말에 메가로드리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데 이상하군, 계약의 인이 약해져 있다.]
“그 공간에서 조금 이상이 있었던 거 같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하던 일은 잘된 건가?]
“뭐, 어떻게든 된 거 같긴 한데. 별문제는 없어.”
담담하게 말하며 데이비가 메가로드리아의 목덜미에 올라탔다.
“너희도 가는 거 아니냐? 갈 거면 따라와.”
이에 이실디는 관심 없다는 듯 손사래를 치려 했다.
하지만 곧 베르단데가 그녀를 제지한다.
“알았어, 따라갈게.”
베르단데의 눈치에 이실디가 인상을 썼지만,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
메가로드리아를 타고 날아오른다.
“이 흑룡은 울드가 잠식했던 그 환수왕 아니야? 계약되어있으면 데이비가 맞는 거지 뭘 의심하고 그래.”
“그게 기우였다면 좋겠지만.”
베르단데는 오로지 데이비에게 시선을 꽂은 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오라버니!!”
윈리 올 라운이 제 녹발을 흩날리며 데이비에게 빠르게 달려들려 하자 적탑의 중앙장로가 된 율리스가 그녀를 제지했다.
“윈리, 격하게 움직이면 아이의 몸에 좋지 않습니다.”
“아 참. 미안해요.”
“하하.”
부드럽게 웃는 율리스를 보며 데이비가 눈을 가늘게 떴다.
“거, 미묘하게 배알이 틀리네.”
“오라버니. 어딜 다녀오신 거예요. 두 달 동안 또 말도 없이.”
“미안하게 됐다. 이제 사라질 일은 없을 거야.”
“그래도 더 늦기 전에 오셔서 다행이에요.”
윈리는 율리스와 함께 상당한 속도위반을 저지른 전례가 있었다.
그 덕분에 이미 그녀의 배는 임산부라는 것을 확연히 알 정도로 상당히 불러있었다.
“데이비 님은 늘 바쁘시네요.”
“나도 별로 좋진 않아요 하하.”
킥킥 웃는 그를 향해 율리스가 고개를 까딱였다.
“들어가 보세요. 아름다운 부인들이 당신이 돌아올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으니.”
“예.”
데이비가 그들을 뒤로한 채 영주성으로 들어간다.
“윈리라고 했지?”
“음? 당신은…….”
“네 오라버니. 이상한 점은 없었어?”
“이상한 점이요? 딱히 이상한 점은 없었는데.”
베르단데의 표정이 굳자 이실디가 그녀에게 짜증을 부렸다.
“언제까지 의심할 거야. 척 봐도 그 자식이잖아!”
“느낌이 조금 이상해서 그래.”
헛소리로 치부하는 이실디였다.
“오라버니!!”
데이비를 본 에이리아가 눈을 크게 뜨며 데이비에게 달려왔다.
두 달이다.
그가 떠난 이후 두 달이 지났다.
아이가 처음 생기고부터 약 넉 달 정도가 더 흐른 것이다.
그대로 데이비의 품에 안기려던 에이리아는 그대로 팔을 벌려 그녀를 안아주는 데이비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라버니?”
“잘 지냈어? 건강했고?”
“오, 오라버니세요?”
“음? 그럼, 내가 그럼 다른 사람일까.”
“이상하네…… 잘못 느낀 건가.”
의아해하는 에이리아는 곧 데이비에게서 천천히 떨어졌다.
“오라버니. 다친 곳은 없으신 거죠?”
“어디 가서 다치고 올 일은 없으니까.”
“다행이에요.”
해맑게 웃는 그녀를 뒤로한 채 데이비는 뒤이어온 일리나와 페르세르크에게도 미소를 지어주었다.
“페르세르크. 다녀왔어.”
“잘 온 게야.”
나긋나긋한 미소를 지어주는 페르세르크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흘겨보는 일리나까지.
겉보기엔 정말로 평화 그 자체였다.
“저하! 저하!”
이에 페르세르크가 그에게 다가가 입을 맞춰주려던 그 순간. 에이리아가 갑작스레 손을 뻗어 페르세르크를 제지한다.
“에이리아?”
“어?”
그녀는 자신의 행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 그래?”
“아…… 아무것도 아니네요. 제가 왜 이러는 건지…….”
눈꼬리를 찡그리며 그녀가 물러났다.
“죄, 죄송해요. 오라버니. 아무래도 몸이 좀 안 좋은 모양이에요.”
“푹 쉬어. 페르, 일리나 에이리아를 좀 보살펴줘.”
“괜찮은 게야?”
“뭐 당장 아니라고 못 보는 것도 아니잖아. 아무래도 조금 놀란 거 같으니까 푹 쉬게 해줘. 아니다. 진료해줄게. 가자.”
“괘…… 괜찮아요!”
에이리아의 대답에 데이비는 내심 섭섭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가 화나게 한 게 있어?”
“그건 아니지만…….”
“그래. 푹 쉬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데이비가 걸음을 옮겼다.
“그럼 그동안 에이미에게 짬 시켜놓은 영지 문제부터 해결하자고.”
그의 목소리엔 의욕이 가득해 보였다.
이후 에이미에게 전권을 돌려받은 데이비는 놀라울 정도로 공정하며 놀라울 정도로 완벽하다 싶을 정도로 영지의 대소사를 해결했다.
“다음 안건입니다만, 영지의 식량에 관해서…….”
“이건 이쪽, 그리고, 이거, 이거 이거, 전부 시행해.”
“저…… 정말요?”
“그래.”
에이미가 탄성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난다.
“그동안 고생 많이 했어. 정말 고맙다. 에이미.”
“아, 아니에요. 저하! 제가 해야 하는 일이고 제가 즐거워서 하는 일인걸요.”
에이미가 배시시 웃으며 대답하자 데이비는 턱을 괴고는 피식 웃어 보였다.
“그리고, 그동안 일하느라 다들 지쳤을 텐데 영지의 자금을 조금 융통해서 축제를 벌이는 쪽으로 가자.”
“명을 받잡겠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떠나는 에이미를 보며 에이리아는 계속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에이리아.”
그런 그녀의 곁으로 일리나와 페르세르크가 다가와 물었다.
“아. 언니.”
잠시 침묵한 그녀의 표정이 흐려졌다.
“죄송해요. 이러면 안 되는데 자꾸…….”
“자꾸?”
“데이비 오라버니가 조금 다른 느낌이라.”
“다르다니 어떤 게? 내가 보기엔 똑같은데?”
“그게, 저도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에이리아의 말에 일리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잘 봐. 데이비의 버릇은 내가 잘 아니까.”
슬금슬금 다가가 데이비의 옆구리에 손을 가져다 댄 그녀가 그대로 부드럽게 쓸 듯 그의 옆구리를 자극한다.
“흡?!”
기겁한 데이비가 눈을 부릅뜬다.
“뭐 하는 짓이야. 놀랐잖아.”
“넌 언제봐도 참 신기하네.”
“네가 이상한 거야. 에이리아는 괜찮아?”
“응. 아무래도 그냥 조금 놀란 모양이야.”
그렇게 대답하는 데이비를 두고 일리나가 느긋하게 다가왔다.
“거봐. 데이비 맞지?”
“그렇긴 한데…….”
“그냥 아이를 가진 것 때문에 조금 우울해서 그런 걸게야. 푹 쉬면 괜찮아질 테지.”
“죄송해요. 페르 언니.”
“죄송할 게 무에 있을까. 건강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해.”
아무런 문제가 없다. 데이비는 그동안 사라져있었던 이유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건 페르세르크도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이상하죠? 데이비 오라버니는 오라버니인데…… 이상하게 자꾸 뭔가 다른 느낌이 들어서.”
“자세히 말해볼래?”
세 소녀의 대화에 끼어든 것은 베르단데였다.
베르단데의 출현에 세 소녀의 표정이 제각각 변했다.
“신목에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맞아. 신목에서…….”
“갑자기 데이비가 죽었다면서 찾아온 거야. 그런데 멀쩡하잖아.”
대답은 베르단데 대신 이실디가 했다.
그녀는 베르단데의 곁으로 다가오며 페르세르크를 향해 물었다.
“이해해줘, 이 녀석 처음부터 계속해서 자꾸 가짜라면서 의심을 해서 말이야. 그 흑룡과 계약도 되어있는 걸 보면 확실한데 자꾸 아니라고 우기네.”
“가짜라고?”
의아한 얼굴로 일리나와 페르세르크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수인족 시녀에게 말장난을 치며 괴롭히고 있는 데이비의 평소 모습이 고스란히 보였다.
너무도 평화로운데.
아무런 이상이 없다.
“자세하게 이야기 좀 해주겠어?”
페르세르크의 말에 베르단데는 잠시동안 데이비를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는…… 데이비가 아니거나. 뭔가 그에게 큰 변화가 생긴 것 같아.”
“변화?”
“그래. 설명하긴 힘든데. 직감이라는 게 있으니까.”
“웃긴 소리. 지난번에 데이비를 배신했던 전례가 있어서 쉽게 믿기 힘들지 않아? 우리도.”
“그는 이제 내 은인이야. 그에게 해가 될 짓을 할 생각은 없어.”
데이비는 데이비다.
그런데. 계속해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오라버니! 왕실에서 바리스 그 멍청이가 서신을 보내왔어요!”
윈리가 깡충깡충 뛰며 데이비에게 다가왔다.
“급보로 온 것 같은데 무슨 일이 있나 봐요.”
그 말에 데이비가 의아한 표정으로 서신을 뜯었다.
그리고는 표정이 굳었다.
“…….”
“오라버니?”
“왕성으로 가자. 윈리 너도 준비해.”
싸늘하게 일갈한 그가 걸음을 옮긴다.
그의 얼굴에 분노가 서려 있었다.
“무슨 일이야?”
“역대 왕족의 묘지에 도굴꾼이 들었다네.”
그 말에 주변에서 숨을 삼킨다.
데이비가 역대 왕족들의 묘에 애착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유일하게 단 하나, 그의 생모의 묘만큼은 이야기가 달랐다.
그런 데이비를 보며 페르세르크는 한참 동안 고민하다 에이리아에게 물었다.
“에이리아. 데이비가 이질적이야?”
“분명 오라버니가 맞아요. 말투도, 따스함도, 냄새도. 그런데 이상하게…… 조금 다른 것 같기도 하고. 제 착각이겠죠?”
그 말에 페르세르크는 자신의 손에 끼워진 반지를 바라보았다.
“…….”
미약하게 빛나던 반지가. 서서히 꺼진다.
생명을 드러내는 빛이 미약하게 반짝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데이비의 생명에 문제가 발생했다.
말없이 반지를 바라보던 그녀는 곧 데이비의 손에 끼워진 반지를 볼 수 있었다.
그가 낀 반지는 그녀와 결혼할 때 나눠 낀 반지가 분명했다.
옅은 빛을 내뿜는 반지를 보며 페르세르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어쩌면, 정말 데이비가 아닐 수도 있겠어.”
직감이라는 건 참 무서운 법이다.
“언니? 그게 무슨…….”
“확인해보면 되는 게지. 차라리 그가 정말이고 본녀가 쓸데없는 착각을 한 것이라면 좋겠다만.”
그렇게 말한 그녀가 데이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의 팔을 잡으며 물었다.
“데이비.”
“음?”
“그대가 떠나기 전에 본녀와 한 약속을 기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