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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849화 (848/1,559)

제 849화

238. 영역에 드리운 찬란한 별

“역시, 좀 힘들겠지?”

그가 씨익 웃어 보인다. 그 모습에 페르세르크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무리 데이비와 같다고 해도 결국은 다른 존재니까.

하지만 그가 정말로 데이비와 다른가.

그 의문은 끝내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 그녀의 눈앞에 있는 가짜 데이비가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깨달은 그녀가 그를 말리기 위해 한걸음 내디뎠다.

“오지 마.”

하지만 이번엔 가짜 데이비 쪽에서 그녀를 말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건 아닌 거지. 원본이나 나나 그런 상황이 달갑진 않을 테니.”

그 한마디에 페르세르크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 * *

극한의 생존환경. 그곳에서 만들어진 사념체의 저항.

나는 계속해서 지배력을 넓혀나갔다.

시간의 개념이 아득해지고 벌써 정신력은 바닥을 치기 시작했다.

헤라클래스는 이런 것을 해온 거구나.

마치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이끌고 천천히 걸어 나갔다.

무한한 가능성.

아비트가 말했던 무한한 가능성이 무엇인지 이제는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

이곳에선 예상이라는 게 불가능했고 언제든 오로지 내 판단하에서 움직여야 했다.

예를 들어 뜨거운 화염이 있다고 했을 때 처음엔 그저 고온의 화염일 뿐이지만 다른 화염은 초저온의 냉기를 품거나 화염 자체가 다른 위험성을 내포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극한의 상황 자체가 내 생명에 큰 영향을 주진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한번 두 번을 넘어 수십 수백 수천 수만 번이 된다면?

지칠 수밖에.

게다가 무한한 가능성은 나를 지대한 위협으로 판단 나의 지배에서 저항하기 위해 온갖 저항을 다 해왔다.

붉은 공허는 끝이 없는 세계라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방대한 우주 그 자체라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계속해서 새로운 세상이 만들어지고 파괴되기를 반복하는 생지옥.

그곳에서 나는 시간의 개념조차 잊는다 싶을 정도로 오랜 시간을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것도 점차 한계에 부딪히기 시작했다.

한번 밀려나면 그것으로 끝이다.

물러나면 안 된다.

이제, 이제 거의 다 왔는데.

끝은 보이지 않지만, 본능적으로 그런 생각은 들었다.

헤라클래스가 지배해둔 공간과 내가 지배한 공간을 합치면 붉은 공허의 끝이 보일 것이라고.

당연히 궁지에 몰린 공허 그 자체는 나를 거부하며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탓에 그 생존 난이도가 극도로 올라가 있었다.

카아아아앙!!!

복제된 홍단이와 청단이가 나를 막아선다.

거대한 세상 자체가 나를 복사한다.

인격이나 특성까지 복사하진 못하지만, 그 존재와 힘을 복사하는 데엔 문제가 없었다.

열화판이라 해도 나라는 존재다.

“역시…… 누굴 복사해서 만들었는지 더럽게 거슬리네!!”

쿠웅!!

왼발을 강하게 들었다가 내리찍으며 진각을 밟는다. 동시에 막대한 힘이 지상 전체에 원형으로 퍼져나가며 지반을 뒤틀었다.

[중검 최종장]

[노네임드 킹]

콰작!!

아무리 비슷하게 복사해도 한계는 존재한다.

내가 신격이 없었다면, 포식의 특성이 없었다면 비슷하게라도 했겠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붉은 공허조차 함부로 표절할 수 없는 영역에 발을 담근 지 오래였다.

벌써 수십 수백을 베어 넘겼다.

“겉모습만 복사한다고 전부 똑같이 되는 줄 아나.”

계속된 무리로 인해 피를 울컥 토하면서도 나는 멈추지 않고 공간을 지배해나갔다.

끝도 없이 몰려드는 열화판 데이비 올 라운들은 끝도 없어 보인다.

“니들은 폐기처분이다.”

그 말과 함께 내 전신에서 막대한 힘이 쏟아져 나왔고.

이내 나를 지탱하고 있던 지반부터 일순간 붕괴한다.

지반이 사라져버린 무의 공간이 나를 덮친다.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요소가 모조리 사라졌음에도 나는 멈추지 않고 공간을 지배한다.

“적당히 좀 반항해라!!”

쩌저저저적!!

공간이 갈라지며 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막대한 충격파와 빛이 수차례 쏟아지는 그 끔찍한 환경 속에서도 나는 독하게 버텨냈다.

고작 여기서 무너지려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다.

지독한 독기를 품은 채 일대 공간을 완전히 지배한 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기침을 내뱉으면서도 다시금 움직였다.

[맹주! 이 이상은 위험합니다!]

“닥쳐 아비트.”

[몸을 생각하십시오! 당신이 죽게 둘 수 없습니다!]

“닥치라고 했어.”

싸늘하게 일갈하며 비틀비틀 걸어 나갔다.

그리고, 아직 지배되지 않은 공간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나는 나를 포위하듯 감싸고 있는 수백 수천의 존재를 볼 수 있었다.

“하…… x병. 끝이 없네, 진짜.”

눈은 반쯤 감겨 몽롱해진 지 오래였다.

폐는 찢어질 것처럼 아팠고 몸은 내 의지대로 쉽게 움직여주지도 않았다.

근육이 비명을 지른다.

이대로 무너지는가.

물러나면 끝이다.

아비트는 내 몸을 챙기라 했지만 나는 이곳에 와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여기서 내가 물러나면 다시는 기회가 없다는 것을.

고작 살아남는 것인데 이토록 어렵다.

이윽고 복제된 데이비 올 라운들이 몰아치고 공기 속에 맹독이 퍼져나가기 시작한다.

대지는 마치 비명을 지르듯 일렁였고, 단단한 바위는 늪처럼 변해 주변을 집어삼켰다.

또 한 번 지독한 시간이 흘렀다.

초단이로 몸을 지탱하며 주저앉아있던 내 곁으로 거대한 무언가가 모여들기 시작한다.

그것은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양이었다.

“하…… 쉴 시간은 좀 줘라.”

이를 악물고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이미 홍단이와 청단이는 너무 오랜 시간의 활동으로 인해 자아가 잠들었다.

지금 그녀들의 권능을 움직이는 건 오로지 내 힘이 전부였으니까.

“조금만 더 힘내자. 얘들아.”

지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딘다.

동시에 반대편의 공간이 일그러지며 나타난 검은 데이비 올 라운은 말없이 초단이를 들어내 내게 겨누었다.

이전과는 다른 위협이 내 전신을 찌른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싸움 끝에.

나는 그를 죽이지 못한 채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치졸한 새끼.”

지금까지의 복사판과는 격이 다른 수준. 본래의 멀쩡한 모습이었다면 승산은 충분하지만, 지금처럼 극한의 상황 속에선 그것조차 힘들었다.

움직이지 않으려 악을 쓰는 몸을 채찍질하듯 다시 움직인다.

놈의 상태도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니지만, 상황은 그런 나를 그냥 두지 않았다.

하나 둘. 셋.

한 명으로 나를 견제했던 데이비 올 라운 강화판이 추가적으로 등장한다.

세상을 구성하는 막대한 생명력과 무한한 가능성이 만들어낸 괴물.

그제야 확실할 수 있었다.

헤라클래스가 실패한 이유.

너무 한길로만 강해서 오히려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나는 방대한 방향의 힘을 모두 강화시켜 나를 강하게 만들었기에 아무리 공허가 가능성을 품어도 한계가 존재한다.

이 빌어먹을 공간은 내게 있어서 가장 위협적인 무언가로 변한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다름 아닌 본인 그 자신.

그래서 나라는 존재가 나오는 것이다.

“하다못해 조금만 쉬었더라도.”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초단이를 들어 올리며 싸늘하게 일갈한다.

“걱정 마라. 니들 전부 제압하고 이 빌어먹을 공간을 완전히 지배하기 전까지는 죽을 생각이 없으니.”

말은 그리 하지만 상황은 최악이다.

이윽고 강화판 데이비 올 라운들이 나를 향해 쇄도하는 그 순간.

검을 들고 움직이려던 내 몸이 비틀거렸다.

“아…… 망할.”

드디어 육체가 방전되어버렸다.

이 공간은 생존에 위협적인 요소가 가득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은 나의 약화였다.

완전한 신격도 아니고 반쪽짜리이니 당연한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이대로 죽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

그 속에서 나는 나를 향해 달려들던 데이비 올 라운들이 갑작스레 느려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실화세요?

투우우웅!!!

내 것과는 다른 막대한 신력이 내 몸 안에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내게 감사해라 원본.]

익숙한 내 목소리와 함께 내 가슴팍에서 새하얀 깃털이 빠져나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깃털은 공간 너머 무언가와 연결되고 공명했다.

마치 세상이 느려진 듯한 그 흐름 속에서 나는 이곳에선 볼 수 없는 무언가를 볼 수 있었다.

하인스 영지. 그 개인 정원에서 거대한 마법진을 펼친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청년.

데이비 올 라운이 보였다.

그의 곁에는 그토록 보고 싶었던 페르세르크가 눈물을 흘리며 그를 말리고 있었다.

이건 무슨 상황이냐.

인상을 찡그리며 내게 말을 걸어온 또 다른 데이비 올 라운을 보며 내가 중얼거렸다.

“설마 복사판이 티오니스까지 흘러나간 건 아니겠지.”

변이체가 공허에서 빠져나간 전례가 없었던 건 아니다.

파괴만을 일삼는 복사 열화판이 하나라도 빠져나가면 티오니스는 대번에 멸망해버릴 만큼 위험하다.

하지만 그런 내 걱정과는 다르게 마법진을 발현한 그는 시간을 더디게 만든 후 내게 검을 겨누었다.

그 또한 초단이였다.

안 그래도 힘들어 죽겠는데.

눈앞의 이놈은 지금 내가 상대하는 수많은 강화판 데이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다.

“네가 뭐 최종보스라도 되냐? 붉은 공허가 그런 공간은 아닐 텐데.”

내 물음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검을 겨눈 채 기세를 끌어올렸다.

“덤벼. 새끼야.”

그리고 그가 이죽거리며 내게 도발을 가해왔고 나는 숨을 천천히 고르며 몸을 일으켰다.

“누가 됐건 무슨 상관이야. 나는 돌아간다. 반드시 돌아간다.”

내 대답에 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그래. 그래야지.”

그는 달랐다. 강화판 데이비보다 강한 힘을 내뿜는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다른 것.

이 붉은 공허의 무한한 가능성으로도 만들지 못한 나의 인격이 깃들어있다.

식은땀이 흐른다. 멀쩡한 상태도 아니고 지금 상황에서 저런 것과 충돌한다면 나도 자신할 수 없다.

하지만 집념으로 다시 몸을 일으키며 검을 충돌했다.

두 자루의 초단이는 서로 밀리는 것 없이 서로를 압박해나갔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또 어떤 변초나 허초도없이 그저 정직하게 내게 검을 휘둘러왔다.

이건 마치.

힘겨루기를 해보자고 말하는 느낌이었다.

카가가각!! 카각!!

눈이 반쯤 감긴 나와 그런 나를 무표정한 얼굴로 공격하는 데이비 올 라운.

둘 사이에 더는 대화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셀 수없이 많은 시간 동안 몸을 굴려온 내 손에 힘이 빠지며 그대로 튕겨 나갔다.

“실망이네.”

그는 담담하게 말하며 초단이로 내 심장을 찌르려 했다.

“네가 이딴 식이면 내가 진짜가 되는 수밖에.”

그의 말에 내 표정이 서서히 사라졌다.

다시 대화는 끊어졌다.

몸을 일으킨 내가 그를 직시한다.

“개소리 하지 마라. 나는 반드시 돌아간다. 여길 전부 먹어치우고 망할 티오니스에 부족한 생명력을 가득 채워버릴 거다.”

내 말에 그가 씨익 웃어 보였다.

“그럼 이겨봐 새끼야.”

그의 말에 다시 검이 충돌한다.

그리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지만, 서로의 합은 놀라울 정도로 맞아들어갔다.

카아아앙!! 캉! 캉!

섬광처럼 움직이며 공격을 가하던 찰나. 그의 초단이가 내 전신을 베어 넘기듯 훑었다.

“그런데 지금 그 꼴로는 어림도 없겠는데.”

“좀 그 아x리 좀 닥치고 하면 안 되나?”

“참. 내 본인이라 말하긴 뭣하지만, 성격 x랄 맞네 진짜.”

“불만이면 때려치우던가. 남의 몸을 빌린 주제에 개소리는.”

카아앙!!

“두 번은 없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그렇게 말하며 가짜가 검을 들어 올린다. 막대한 중량이 서리기 시작한다.

최종 검기인 [노네임드킹] 일명 무명왕이다.

그런 그를 보며 비틀거리듯 몸을 일으킨 나는 눈을 감은 채 숨을 짧게 골랐다.

“후웁…….”

내 전신에 검은 뱀 같은 것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둘이서 검술 대련하면 누가 이기는데요?]

[끅! 이 불경한 새끼 그딴 건 묻는 게 아니야.]

[아니 그래서 누가이기냐고요.]

[콱 씨 죽기 전에 꺼져! 끅!]

[검술에 대한 조예는 나보다 그가 한 수 위다. 데이비.]

[검신 할배가 진다고?]

[그와 나는 방향성이 다르니까.]

대인전 검술과 대괴전 검술.

그 방향성이 다르다.

[괴수전 전용검술인 중검을 휘두르는 주제에 나도 이기지 못하는 놈이 말은 잘하는구나.]

압도적인 중량으로 적을 짓누르는 노네임드킹의 막대한 중량 앞에서 나는 숨을 고르며 발을 내디뎠다.

[마령검 88초]

[최종장]

[49계]

마령검의 최오의나 다름없는 마령검 80번대 검술 중 가장 수수한 이름을 지녔지만.

그 깨달음이 닿는 최종의 방향은 극한에 이른다.

멈추지 않고 검을 횡 베기로 휘둘러 들어오며 자세를 낮추는 그를 보며 나는 오른손으로 초단이의 그립을 잡고 왼손을 쫙 편 채 검 그립의 아랫부분을 지지했다.

그리고.

쩍!

아주 한순간 검이 충돌했다.

고요한 침묵 속에서 나는 비틀거리며 물었다.

“야. 너 대체 뭐냐.”

몸이 거의 빛의 입자처럼 흩어지는 가짜 데이비를 보며 내가 물었다.

저놈, 마지막에 검을 휘두르지 않았다. 정확히는 진짜 나를 죽일 것처럼 검을 휘두르다가 나를 보고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멈췄다.

“약속 하나만 해주라. 원본.”

그의 말에 나는 멈칫했다.

“말해.”

“아주 잠깐이다. 아주 잠깐인데, 나는 하인스 영지에서 정말 내가 데이비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소중한 사람. 사랑하는 이. 그래서 아주 잠깐 내가 진짜 원본이 되고 싶기도 했고.”

그가 돌아선다. 담담한 얼굴이었다.

“근데 그게 내 자리는 아니더라. 너와 같은 기억, 경험 인격 전부 같은데.”

그가 쓰게 웃어 보였다.

“고작 1퍼센트의 작은 차이가 나를 진짜로 만들지 못하게 하더라. 그리고, 나는 어차피 오래 못가. 그러니까 내가 일찍 사라져서 페르세르크를 힘들게 할 거라면.”

차라리 그 방향을 버린다.

“…….”

“부탁한다. 죽지 마라. 끝까지 살아남아서.”

그의 육신이 흩어지며 그의 몸 안에 있던 막대한 힘이 내게 스며든다.

그 힘의 근원은. 이 붉은 공허의 막대한 생명력이었다.

대체 저놈, 뭐야.

“끝까지 살아남아서. 페르세르크와 일리나.”

“…….”

“그리고 에이리아의 곁을 지켜줘라.”

낯간지럽게 헛소리를 지껄이기는.

“그건 내가 판단해 새끼야.”

“가짜지만.”

“…….”

“내 목적은 결국 너랑 다를 게 하나도 없다.”

그 말과 함께 그는 사라졌다.

그리고.

그가 남긴 막대한 생명력은 곧이어 나를 완전히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느리게 가던 시간이 다시 움직인다.

강화판 데이비들의 공격이 쏟아지는 와중에 나는 초단이를 고쳐 쥐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촤아아악!!

자세조차 잡지 못한 나를 죽일 듯 공격이 날아들었지만 놀랍게도 검에 베여 사라진 건 강화판 데이비 올 라운이었다.

“후우…….”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묻지 않았다.

하지만 기분이 참 거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안 남았지.”

그 말과 함께 내 눈이 번뜩인다.

“미안한데, 내가 지금 좀 기분이 많이 나쁘거든.”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초단이를 쥔 채 내가 강화판 데이비들을 보며 한걸음 내디뎠다.

“빨리 끝내자. 다 끝내고 할 일이 있다.”

가짜라고, 방금 전 그가 내게 스며들면서 보여준 내가 떠난 직후 그가 하인스 영지에서 보여준 기억들이 내게 스며든다.

미안한데 넌 가짜지만 반대로 가짜가 아니다.

이제 네가 나와 하나일 테니.

* * *

가짜 데이비가 사라졌다.

그는 끝내 사라지면서 페르세르크를 향해 사랑한다는 말과 미소를 남기고 사라졌다.

페르세르크는 모를 수가 없었다.

그가 한 말은 진실이며, 그가 어떤 심정으로 사라졌는지를 말이다.

눈을 감은 채 공명하던 그는 이내 완전히 사라지며 한마디를 남겼다.

기다리라고, 진짜 데이비 올 라운, 아직 안 죽었고. 반드시 돌아올 거라고.

그렇게 말하며 사라진 데이비가 없어진 곳에는 요시아가 말했던 가짜 맹약의 반지만이 떨어져 있었다.

“아…… 아아아아…….”

천천히 다가가 그 반지를 품에 안은 그녀가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진짜 데이비에게 미안하지만 슬픔이 가시질 않았다.

가짜라곤 해도 결국, 그 또한 데이비였으니까.

“언니! 무슨 일이에요?! 방금 전에 그건 또 뭔!”

양손으로 반지를 꼭 쥔 채 품에 끌어안고 엉엉 우는 그녀를 발견한 일리나가 급히 달려오지만, 페르세르크는 한참 동안 울 수밖에 없었다.

너무도 서럽게 우는 그녀의 모습에 일리나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는 기분을 느끼며 그녀를 끌어안고 그저 달래주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같은 시각.

신의 영역에선 폭우처럼 쏟아지는 빗속에서 거대한 날개를 펼친 작은 소녀가 몸을 웅크린 채 소리 없는 절규를 흘렸다.

거세지는 빗방울 속에서.

그녀는 신으로서 느껴선 안 될 감정들을 느끼며 오열했다.

연민, 죄악감. 슬픔. 그리고 애정.

이 모든 것을 안배해 두었으면서도, 그녀는 쏟아지는 슬픔을 견딜 수가 없었다.

거칠게 쏟아지는 빗방울은 곧 허공에 잔잔한 수면을 만들어낸다.

그때.

극도의 슬픔 속에서 눈물을 흘리던 그녀가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는 오열을 멈추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녀가 바라본 먹구름이 가득한 어두운 하늘이 변하기 시작했다.

검은 구름이 흩어지기 시작했고.

거대한 푸른 별을 시작으로 수천수만 수백만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양의 별들이 밤하늘을 가득 메운다.

아주 강렬한 바람이 일순간 그녀를 훑듯 지나가며 그녀의 푸르게 빛나는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황홀함 슬픔, 그리고 놀라움이 서린 얼굴로 그녀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성공률이 극도로 희박한 시련.

그 기적이.

눈을 뜨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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