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851화 (850/1,559)

제 851화

일리나가 찢어발긴 틈을 통해 빠져나왔다.

그녀는 그 과정에서 일어난 막대한 과부하. 그리고 그녀를 거부하는 붉은 공허의 최후 저항에도 불구하고 내게 닿았고, 끝내 나를 빼내는 데 성공했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너무 큰 부하를 받았고 그대로 눈을 감았지만, 순식간에 잔불의 힘을 얻어 부활하는 데 성공했다.

본래라면 잔불을 쓸 것도 없이 내가 치료해야 했지만 놀랍게도 일리나의 도움을 받아 차원을 넘기가 무섭게 내가 도착한 곳은 잔잔한 호수 위. 찬란한 별이 비치고 수백 수천의 별들이 꼬리를 물며 아름다운 절경을 뿜어내고 있는 신의 영역이었다.

“시련은 잘 됐습니까?”

내 물음에 그녀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다가와 내 손을 잡아끌고는 품에 끌어안을 뿐이었다.

“질기게도 길었죠. 솔직히 시간 개념이 얼마나 됐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수백 년까지는 기억하지만, 그 이후로부터는 시간을 완전히 떼어놓았으니까.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헤라클래스보다는 빨라도 결코 적은 시간은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부탁이 있습니다.”

내 말에 프리아 여신은 조용히 내게서 떨어졌다.

“붉은 공허에서의 그 무수한 시간에 대한 기억.”

그것을…….

“소중한 일부와 경험만 남기고 지워주세요.”

자신을 희생한 가짜 데이비 올 라운과. 나를 따라 주었던 너무도 오래 살았던 고대룡 아비트에 관해서.

프리아 여신은 묻지 않았다.

대신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옅은 빛이 내게 스며들었고, 이내 나를 완전히 감싼다.

완전 기억능력으로 인해 지워지지 않던, 나를 실시간으로 지쳐가게 만들던 기억이 지워진다.

하나하나 내게는 소중한 기억이 변질되며 지워진다.

너무 오랜 시간을 살아온 내 정신이 다시 본래대로 되돌아온다.

그렇게 신의 기적이 끝이 났다.

“생명력이 충만하네.”

이곳에서 본 세상은 확실히 이전과 달랐다.

붉은 공허에 가득하던 생명력이 다시금 전 차원에 돌기 시작하며 달과 연동되어 흩어지고 뿌려진다.

서서히 붕괴하여 허무로 돌아갈 뻔했던 세상은 그렇게 다시 재활의 불씨를 피워올렸다.

“이제 다 된 겁니까?”

내 물음에 그녀는 다시 한번 손바닥 위로 새하얀 깃털을 꺼내 보였다.

그리고는 내게 내밀었다.

[전능의 힘. 단 한 번.]

단 한마디에 내 표정이 굳었다.

“이걸 내게 주는 이유가 뭡니까.”

[동면의 때.]

신께서 세상을 만들고 하루를 쉰다고 하는 말은 지구의 성경에도 나오는 말이다.

프리아 여신은 지금 너무 많은 위계 추락을 당한 탓에 태초 신으로서의 힘이 너무 많이 소모되었다.

그녀가 온전할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태초 신을 대신할 대리자로서.]

그녀의 제안에 나는 이미 정해진 답변을 내놓았다.

“이제 와서? 내가 그걸 할 거 같습니까?”

미쳤다고 이걸 받아들이나. 프리아 여신이 추락한 위계와 자신의 존재를 다시 갈무리하기 위해 잠들어야 한다는 건 알겠는데. 그 대리자로서 내가 선택되는 건 사양이었다.

“애초에. 당신이 해야 할 일을 나 혼자서 해결 못 합니다.”

그녀처럼 나는 전지전능한 것이 아니니까. 그녀가 주는 전능의 힘은 그저 힘일 뿐이다.

휘두르는 이가 완성되지 않고서야 그것은 전능이라 부를 수 없다.

[모든 것은 대리자가 원하는 대로.]

그 말과 함께 내게 다가온 그녀는.

이내 내 뺨에 입을 맞추고는 천천히 물러났다.

그리고는 사라진다.

그녀의 힘은 그대로 존재할 터나 그녀는 앞으로 최소 수백 년 이상은 잠들어야 한다.

그런 그녀는 처음 내게 건네주었던 깃털을 보여주었다.

[그대가 원하는 대로.]

그 한마디에 나는 조용히 깃털을 응시한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최후의 시련은 예정되지 않은 흐름.]

유일하게 프리아 여신의 모든 예상을 뒤엎은 것.

그것이 바로 지금의 결과다.

[자격은 충분.]

그 말과 함께 서서히 떠오르며 나를 끌어안은 그녀가 흩어지듯 사라진다.

거대한 날개 끝부터 파스스 흩어지는 그녀는 죽는 것처럼 보이지만 알 수 있었다.

그저 그녀가 이 세상 전체에 녹아들어 세상을 조율함과 동시에 그녀의 힘을 회복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도.

“한번 얻은 감정, 막 버리면 좀 아깝지 않습니까?”

내 물음에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 가지.]

한 가지만 남긴다는 뜻일는지.

그렇게 이 신의 영역에서 태초부터 존재해온 절대신은 수면기에 들었다.

현재 나는 프리아 여신이 건네준 단발성 전능의 힘과 붉은 공허의 지배력으로 끌어낸 생명력을 조절하는 힘이 전부다.

“난 여기 갇혀 사는 거 절대 사절입니다.”

미안하지만 나는 내 방식대로 할거에요.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프리아 여신이 주었던 깃털을 허공에 들어 올렸다.

그리고, 처음이자 마지막인 전능의 힘이 내 손에서 발현되었다.

모든 규칙과 규율. 그런 것들을 거부하는 절대적인 신의 간섭. 그것이 펼쳐진 것이다.

* * *

아들과의 불화는 일평생의 한으로 남았다.

그리고, 그 한을 오롯이 검에 담아냈다.

오랜 시간 살아왔고, 아주 잠깐이지만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내리며 소멸했다.

“끄응……머리야 뭐야.”

드넓은 초원에서 눈을 뜬 산발의 사내는 눈을 게슴츠레 뜨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뭐시여. 뭐가 어떻게 된 거여.”

그가 중얼거림에 곁에 있던 누군가가 다가왔다.

“우리가 호랑이를 키웠어.”

그 한마디에 산발의 사내가 침묵했다.

“오딘?”

“…….”

커다란 챙이 달린 모자를 깊게 눌러쓰며 그녀가 중얼거렸다.

“데이비 이 자식. 만나면 태워버릴 거야.”

뭔가를 알고 있는 것일까.

그녀가 이를 부득부득 갈며 중얼거렸다.

“뭐야. 난 분명 소멸을 택했을 텐데?”

“그러니까. 당신도 그렇지만 나도 그래.”

“그럼…….”

“그 자식이 우리를 다시 불러냈어.”

가장 먼저 든 의문은 그것이었다.

어떻게?

의아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허리춤에 있는 호리병을 꺼내 벌컥벌컥 들이킨 뒤 시원한 소리를 냈다.

“크으…… 역시 이 맛은 잊을 수가 없구만. 그래. 꼬맹이 무슨 일인지 말해보시게.”

“뭐, 내가 땅딸막하다고?! 너 태워버리는 수가 있어!!”

“누가 땅딸막하댔나. 대답이나 하쇼.”

“소멸한 우리의 혼이 사라진 게 아니었어. 프리아 여신이 거둬들인 것뿐이지.”

이어지는 오딘의 말에 그의 표정이 착 가라앉았다.

그러니까. 이 망할 놈의 회랑 막내 녀석이 프리아 여신이 깃털에 남겨놓은 그들의 영혼을 복구시켜버렸다는 소리였다.

솔직히 이제 삶에 미련이 없는 이들을 다시 불러온 꼴이다.

“그 자식이 한 말이 뭔지 알아? 미안한데 조금만 더 일해달라더라.”

뒤이어 한 사내가 다가왔다.

뒤늦게 소멸했던 검신 하레스였다.

“일을 해? 이건 또 뭔 귀신 씨나락 까먹는…….”

그렇게 말하던 그는 자신의 몸에 서린 힘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막대한 신력이 느껴진다. 물론 데이비 녀석이 싸웠던 이들 정도의 신력은 아니지만, 천마 독고준은 얻지 않았던 상위 신격이었다.

“내 생각이 아니길 바라는데.”

“그게 맞을걸? 프리아 여신이 동면에 들고 세상을 조율해야 할 존재가 사라졌지.”

“…….”

“본래라면 데이비 녀석이 해야 하는 일인데.”

“그 자식. 자기 인생 살겠다고 우리를 팔아넘겼어.”

그렇게 말하며 오딘은 작은 손으로 저 멀리서 다가오는 한 청년을 가리켰다.

“죽긴 누구 마음대로 죽습니까. 나는 허락 못 합니다. 전능의 힘으로 명하는데. 프리아 여신이 깨어날 때까지. 세상 조율 좀 해주세요.”

영웅 하나로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모든 영웅들이 전부 같은 의무를 지게 된다면?

“허…… 이 빌어먹을 놈 보게?”

그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벌떡 일어난 그가 순식간에 달려간다.

그리고는 데이비를 향해 거침없이 드롭킥을 갈겨 넣었지만, 데이비는 그런 그의 공격을 그대로 받아내며 튕겨 나가면서도 낄낄 웃어 보였다.

“미안한데 전능의 힘으로 내가 보험도 안 들어놓았을까요.”

“이놈 자식이…….”

“죽지 말아요.”

화가 난 얼굴로 다가가 데이비의 멱살을 틀어잡으려던 그가 멈칫했다.

“아직…… 아직 죽지 말아요. 나 때문에 죽지 말아요.”

바닥에 쓰러진 채 그렇게 말하는 데이비를 보며 독고준은 침묵했다.

“나는 당신들이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으니까.”

그 한마디에 오딘은 짧게 혀를 찼고 검신은 한숨을 내쉬었으며, 독고준은 허탈한 듯 손을 놓아버렸다.

“그러니까. 우리보고 프리아 여신의 뒤치다꺼리나 해라?”

“거 말년에 할 일도 생기고 좋네요.”

“이 개놈의 자식이!”

퍽퍽!!

거침없이 그를 걷어차지만, 데이비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깔깔 웃어댔다.

그 모습이 배알 꼴려버린 것인지 다른 영웅들도 데이비를 한껏 짓밟았지만 결국은 그들도 포기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더니…….”

“부모는 아니지.”

“군사부일체라는 말이 있다.”

임금과 사부, 아버지는 하나다.

웃긴 말이지만 그들도 알고는 있었다.

그들이 그 어린 소년을 회랑에서 가르칠 때 무슨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를 말이다.

누구는 손자를 보듯, 누군 아들을 보듯 그렇게 키워온 건 사실이었으니까.

“당신들이 정말 원하는 때에 죽으세요. 괜히 희생하려 들지 말고. 누가 영웅들 아니랄까 봐 희생에 아주 도가 텄어. 그냥.”

“이놈아! 이제 쉬려는데 그걸 끄집어내?!”

“아 거 수천 년 살아온 양반들이 고작 몇백 년도 못 기다려?! 죽고 싶으면 나 죽고 죽으시던가!”

“에잉!!”

혀를 끌끌 차며 그가 돌아선다.

이미 그곳에는 소멸을 택했던 영웅들을 포함한 살아남은 영웅들까지 모여있었다.

“우리가 호랑이를 키웠어. 망할.”

이를 부득부득 가는 다프네부터.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태도를 취하는 아폴론과 무왕 유르그. 그 외에도 여럿.

하지만 한 명만큼은 보이지 않았다.

“그 양반은?”

“그 양반?”

“거 미치광이 생존전문가.”

독고준의 물음에 오딘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쓰러져서 낄낄대던 데이비가 천천히 일어났다.

“그 양반. 보내달랍니다.”

“…….”

“이제라도 떨어질 수 없다고 보내달라고 하네요. 복구하기엔 영혼이 너무 헤져있었던 것도 사실이고, 막을 수가 없었어요.”

다른 영웅과 다르게 헤라클래스는 너무 오래 살았다.

그래서 그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하면 이놈아! 나는!”

“아 거 몇 년 살았다고!”

“이놈이?!”

“내가 말입니다?! 그 망할 공허에서 보낸 시간이 몇 년인지 기억도 안 나요. 그런 나도 살아있는데 당신들이 그러면 안 되지!”

장난스레 외치며 데이비가 벌떡 일어난다.

영웅들의 집단 린치를 당했으면서도 그는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아. 참고로 여기서 나 못 죽입니다. 절대로.”

그러니까 기대해도 좋아요.

사악하게 웃는 데이비를 보며 독고준도 결국 인정하고 말았다.

“우리가 범 새끼를 키웠구만.”

“부탁할게요. 적어도 희생하지만 말아요. 살고 싶은 만큼 살고 떠나도 좋으니까.”

그 한마디에 영웅들에게 채워진 족쇄들이 풀어진다.

프리아 여신과 영웅의 회랑이 만들어낸 그들을 묶어두었던 족쇄가 풀어진 것이다.

“적어도 당신들이 애써 키워낸 막내가 살아가는 건 보고 가라고.”

그 말에 독고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런! 시간이 이렇게 됐네!”

이윽고 데이비가 화들짝 놀라 소리치며 움직인다.

“어디 가는 거냐.”

독고준의 물음에 그가 씨익 웃어 보였다.

“사랑하는 와이프가 먹고 싶은 게 있답니다. 조금만 지나면 저도 진짜 아빠가 되거든요!”

“…….”

“아 여유도 넘칠 텐데. 제 자식 어느 정도 크면 가끔 데리고 놀러 오겠습니다.”

고작 인간이 프리아 여신이 존재하던 신의 영역에 드나드는 것부터가 웃긴 일이지만.

놀랍게도 그는 이미 인간이면서 신도 아닌 무언가로 변한 지는 오래였다.

실제로 이 세상을 구원해버린 방대한 생명력은 데이비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으니까.

* * *

“괜찮으니까 말해봐.”

“하샨 열매가 먹고 싶은데, 지금은…….”

하샨 열매. 엘프의 성지인 신목에서만 자라는 열매로 그 맛이 일품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열매가 자라는 시즌은 이미 지났고 따로 보관하기도 힘든 게 사실이다.

에이리아는 자신이 투정을 부리는 걸 알면서도 얼굴이 빨개진 채 눈물기 어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죄송해요. 자꾸 우울해져서.”

“아이를 가지면 그렇게 우울해진대. 걱정 마. 언니가 한번 찾아볼게.”

“고마워요, 그리고 죄송해요. 언니.”

“아냐.”

시간이 흘렀다. 이제는 어느 정도 배가 불러온 에이리아였다.

당연히 숨기려야 숨길 수가 없는 만큼 속도위반을 눈치챈 데오르트 황제와 알버스 황태자가 길길이 날뛰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결혼식을 치를 사이인 만큼 카트린느가 필사적으로 말려서 일단락되었다는 모양이었다.

문제는 그 소식을 들은 팔란 제국 쪽이었다.

살리반은 가만히 있지만, 그녀를 이용해 무언가를 해보려는 건지 팔란 귀족들이 일리나에게 넌지시 더 늦기 전에 어서 기정사실을 만들라는 독촉을 보내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이 자식은 잠깐 어디 간다더니 어딜 사라진 거야.”

정작 있어 줘야 할 데이비가 사라졌다는 사실에 일리나가 씩씩거렸다.

“나도 아이 가지고 싶은데…….”

“조금만 참아보렴.”

그렇게 말하며 뜨개질을 하던 페르세르크가 고개를 든다.

그리고, 창문이 벌컥 열리며 청년이 휙 하고 들어왔다.

“하샨 열매 시키신 분?”

느긋한 얼굴로 말하는 그를 보며 일리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걸 또 알고 가져왔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