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65화
“시우형. 준비 다 됐어요?”
“어, 안 그래도 다됐다.”
“적당히 해요. 어차피 그냥 얼굴만 비추는 거라. 적당히 놀아주고 오면 되는 거니까.”
그 말과 함께 팀을 관리해주는 이가 팀장이 들어왔다.
“자. 다들 컨디션은 어때.”
“좋죠. 최고예요.”
“대회 열리기 전이니까 다 보여주진 말고, 적당히 놀아주고 와.”
“예이~”
선형이 키득거리며 답했다.
“중요한 건 별거 없어. 그냥 이미지 메이킹이야. 무슨 뜻인지 잘 알지?”
“이미 귀에 딱지 앉을 만큼 들었어요.”
“그리고, 우리랑 경쟁하는 tc 팀에서도 나온다더라. 뭐 다른 건 신경 쓸 거 없고, 마지막에 이벤트 전으로 tc와 친선 경기한다니까. 적당히가 아니고 확실히 밟아버려.”
“어느 정도로요?”
“비장의 카드만 남기고 다 보여줘도 돼. 명심해. 이번에 성적 어떻게 나오냐에 따라서 지원이 더 늘어날 수 있다. 연봉이 늘어나는 거야.”
“알겠어요.”
“그렇다고 아마추어 너무 신경 안 쓰지는 말고, 메인은 아마추어와 프로가 함께 즐기는 테마니까.”
“네.”
그렇게 말하며 그들이 차량에 탑승했다.
본래 세계적인 실력의 팀인 이들에게 이런 프로그램은 굳이 출현할 필요가 없는 부류의 캐스팅이었다.
하지만 출연비가 너무 놀라울 정도라 거절할 수가 없다는 게 이들이었다.
아주 쏟아붓는 호화 캐스팅에 광고도 그렇게 때렸으니 인기가 많을 수밖에.
특히 팀 바시리안은 tc팀과 이래저래 악연이 많은 만큼 사실 다른 이들은 관심 밖의 일이었다.
이윽고 차량이 멈추고 개인시간을 정비받은 박선형은 생각보다 많은 관중을 보고 탄성을 흘렸다.
“오…… 대단하네요.”
“그러게 말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이기 쉽지 않았을 텐데.”
아마추어팀은 총 20팀 정도로 그중에서 저들끼리 토너먼트를 겪고 선발된 네 팀 정도가 나온다.
방식은 간단했다.
이 프로그램의 취지 자체가 아마추어가 프로와 함께 준비된 게임을 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하는 프로였으니까. 실제로 이 프로를 통해 선발된 프로게이머도 있는 편이다.
“근데 여성 유저도 제법 많네.”
“그러게요. 애초에 남녀성비가 남자 쪽으로 치중되는 건 유저 중에 실력 있는 사람이 남자 쪽이 많아서일 텐데.”
“그러니까.”
그때 박선형은 저 멀리서 한눈에 시선을 끄는 한 소녀를 볼 수 있었다.
새하얀 은발에 비녀를 꽂아 포니테일을 늘어뜨린 너무도 아름다운 소녀를 말이다.
바로 페르세르크였다.
물론 페르세르크 또한 인식 장애를 걸어놓은 터라 그녀가 페르세르크와 비슷해도 본인이라 판단하는 이는 없을 테지만 말이다.
코스프레라고 하기엔 너무 자연스러운 머리색과 아름다움이라 그는 한참 동안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뭐하냐. 눈 빠지겠다.”
“아 시우형.”
“이번 아마추어 중엔 진짜 눈 호강 잘되는 사람 많네. 진짜 예쁘다.”
“그러게요.”
“가자. 너무 넋 놓고 있다가 누가 보기라도 하면 괜히 한소리 듣는다.”
“네.”
쉬이 눈을 떼지 못하면서도 그는 대기실로 걸음을 옮겼다.
아마추어 예선은 이미 치러졌고 선발된 4팀이 준비하고 있다.
그렇기에 본방에서 그들이 하는 건 추첨을 통해 선발된 아마추어 개인과 세계적인 1군 프로게이머와의 대결이 전부였다.
슬슬 출현할 때가 되었다며 불려 나간 바시리안 팀은 저 멀리서 다가오는 tc팀에게 가볍게 목례하며 인사해준 후 행사장으로 들어섰다.
와아아아아아아!!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탄성에 그들이 눈을 크게 떴다.
모여봐야 몇 명 모이겠나 싶었는데 상상을 초월하는 숫자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과거 e스포츠 초창기를 방불케 하는 사람의 숫자에 박선형은 문득 돈으로 밀면 대단하긴 하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라인업이 잘된 것도 사실이지만 말이다.
“자!! 팀 바시리안과 tc가 함께 해주셨습니다! 박선형 선수, 지금 기분이 어떤가요?”
“아, 네. 기분이 어떠냐 물어보신다면 조금 신선하네요. 앞으로 유익하고 즐거운 경기 했으면 좋겠습니다.”
형식적인 답변을 하며 그가 답하자 여기저기서 함성이 들려온다.
이후로도 사회자는 이래저래 프로게이머들과 잡담을 나눈다.
“자! 그럼 토너먼트를 통과하고 진출한 아마추어팀을 소개하겠습니다!”
이윽고 총 20명의 남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복장은 다들 제각각이지만 가슴팍에 자기 팀의 이름이 달린 배지를 차고 있었다.
“무섭게 치고 올라온, 신인 아마추어! 앞으로 리오리의 프로게이머가 될지도 모를 실력과 재능을 겸비한 신흥강자! 박수로 맞이해주세요!”
사방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오며 하나둘 걸어들어와 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단연 압도적인 시선을 끄는 팀이 있었다.
팀 하인스.
여자만 넷에 남자가 하나.
문제는 남녀성비가 아니라 평균적인 외모수준이었다.
“세상에. 요즘 아마추어는 정말 예쁘고 잘생겨야 하나 봅니다!”
사회자의 우스갯소리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하인스?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그러게요. 이상하게 낯이 익긴 한데.”
그냥 기분 탓이기를 넘긴다.
“아아. 팀 하인스의 유일한 남성분이시군요. 리오리 닉네임이 [초단]인가요?”
“네.”
“양손에 꽃이 아니라. 팀이 화려한 꽃밭이네요! 정말 부러울 정도로!”
“고맙습니다.”
“하하하. 고맙긴요. 뭘. 정말 부럽습니다!”
장난스런 질문에 그가 빙그레 웃어 보였다.
“자 그럼 곧바로 진행해볼까요? 중앙에 있는 기계에서 번호가 찍힌 공이 나올 겁니다. 그 공에 적힌 숫자와 같은 아마추어 유저분이 원하는 프로게이머 분과 원하는 챔피언을 선정해서 단판 승부를 펼칠 겁니다. 물론, 프로게이머 측에서는 자잘한 지도를 해주면 더 좋겠지요? 물론 적당히 봐주니까 걱정 말고 하면 됩니다.”
두 대의 컴퓨터가 마주 보듯 자리해 있는 것을 가리키며 말한다.
이후 장치가 가동하기 시작하더니 붉은색의 공 하나가 통! 하고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사회자가 공을 집어 들며 말했다.
“자! 번호가 나왔네요! 7번입니다! 7번! 7번 어느 분이십니까?”
그 외침에 아마추어 중 한 사람이 손을 들었다.
평범한 인상의 남성이었다.
“아아 선택되셨는데 혹시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엄마! 나 유명인 됐어!”
익살스러운 외침에 주변에서 웃음이 터져 나온다.
이윽고 사회자는 장난스러운 어조와 진행을 해나갔고 선택받은 아마추어 유저는 곧이어 tc의 한 프로게이머를 부르고 게임을 진행했다.
하지만 일방적이다 싶을 정도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는 거대했으니까.
이후 힘없이 추욱 늘어져 돌아가는 그를 뒤로하고 또다시 추첨을 진행한다.
동시에 아주 잠깐 미묘한 한기가 감돌았다가 사라진 착각이 들었다.
“12번입니다! 12번! 어떤 분이죠?!”
이에 일리나가 손을 들었다.
“오오, 아리따운 금발의 여성분!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일리나라고 해요.”
“아아 외국 분이셨군요! 이거 참. 그 나라로 당장 이민 가고 싶은 심정인데요?”
“아하하하하!”
장난스런 말투에 주변 분위기가 웃음으로 가득 찼다.
“자. 일리나 양. 원하는 선수와 챔피언이 있습니까?”
일리나를 향한 질문에 그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가 조용히 말했다.
“저, 탑 라인이에요.”
“네?”
“락시아 캐릭터를 했었던 복서 랭, 시우 선수라고 했나요? 저분하고 할게요.”
“아…… 아아아!! 탑라이너의 패황!! 탑의 황제. 시우 선수를 골랐습니다! 역시 탑신병…… 아니! 탑라이너의 자존심인가요! 따로 시우 선수를 지목한 이유가 있나요?”
“설욕전이요.”
“설……욕전이요? 아하하 재밌는 농담이네요!”
사회자의 외침에 박선형은 시우를 향해 씨익 웃었다.
“올, 형 선택받았네. 데이트 잘하고 와.”
“데이트는 무슨. 그래도 기분은 좋네. 그런데 복서 랭은 내 부계정인데 이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사실 이름값이 있는 만큼 호명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었던 그였다.
주변의 환호를 받으며 걸어 나간 그는 컴퓨터에 앉기 전 일리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일리나 양. 좋은 개인 친선 경기 잘 부탁드릴게요.”
겉보기와 다르게 상당히 쑥맥의 기질을 보인 그가 말하자 일리나가 환하게 웃으며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저야말로. 오랜만에 잘 부탁해요. 그리고, 봐주지 않았으면 해요.”
오랜만?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지만 일리나는 이미 자리에 앉은 후였다.
“자. 그럼 일리나 양 원하는 챔피언이…….”
“없어요. 그냥 본래 하던 대로 해주세요. 말씀드렸다시피 본래 실력 그대로 해주세요.”
당당한 한마디에 주변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일리나는 자신의 할 일에 집중한다.
“꽤 오래 기다렸거든요.”
그 한마디에 시우가 또 한 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속으로는 괜한 생각도 들었다.
혹시 자신의 팬인가? 혹시 저 소녀와 잘 될 수 있지 않을까.
쓸데없는 생각에 괜히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진다.
조금만 잘해줘도 혹시 자신을 좋아하나 착각하는 건 어디서든 흔한 사례니까.
“아아! 세계 최고의 탑라이너를 상대로 챔피언 선택 없이 오로지 본래 실력으로 해달라는 패기! 대단합니다!”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과 방송을 통해서 시청자가 굉장히 많습니다. 어디 보자. 허업! 엄청나네요!”
물론 그 누가 됐건 일리나가 이길 거라 생각하는 이는 없었다.
다만 시우는 미묘하게 조금 꺼림칙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경기가 시작된다.
일리나의 캐릭터는 무난한 캐릭터였다. 그리고, 시우의 캐릭터는 적당히 견제가 가능한 그런 부류의 캐릭터였다.
“자! 그럼 친선 개인전 두 번째 경기! 시작합니다!”
카운트가 되고 두 캐릭터가 각 라인의 끝에 서서 서로를 발견하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리나 선수가 고른 캐릭터는 박스입니다! 진입을 하는 평타 기반의 캐릭터죠. 실제로 대회에서도 자주 픽이 되곤 합니다. 특징이라면 hp가 줄어들수록 화력이 강해지는 캐릭터죠?”
“그렇죠. 반면 시우 선수의 캐릭터는 손가락에 따라 캐릭터가 천상에도 갔다가 나락으로도 떨어지는 캐릭터입니다.”
게임이 시작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아. 견제 시작했죠? 아마추어라고 해도 실력이 예사롭지 않네요. 일리나 선수는.”
“그러게요. 섣부르게 들어가지 않으면서 상대의 접근도 허용하지 않고 있어요. 마치. 들어가진 않겠지만 아마추어라고 무시하고 들어오면 큰코다칠 거다! 뭐 이런 마음가짐이네요!”
라인을 밀어붙이는 컴퓨터 유닛들이 서로 싸우기 시작하고 그 틈 사이사이에서 서로 간을 보기 시작한다.
시우는 느긋하게 상대를 관찰했다.
일리나의 움직임은 상당히 과감했다.
‘카운터픽은 아니지만, 굳이 따지자면 내 쪽이 유리한데. 설마 내 캐릭터가 스킬 맞추기 힘든 특수범위 캐릭터라 무시하는 건가? 사람을 우습게 보는 것도 정도껏 이지.’
아무리 부끄러워했어도 실력에 대한 자부심이 있는 시우였다.
그의 속에서 화가 치밀어오른다.
그는 일리나의 과감한 행동에 맞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움직임이 변한다.
촤악!!
“아!! 딜 교환 일방적으로 밀렸어요!! 시우 선수! 정말 가차 없죠?!”
“그러네요! 견제형 캐릭터지만 스킬을 맞추기가 쉽지 않아요. 그런데 저렇게 칼같이 움직여 동선을 예측하고 맞추는 건 거의 신기에 가깝습니다! 반면 일리나 선수는 생각지도 못한 움직임에 당황했는지 틈이 계속 나오고 있어요!”
일방적인 게임이 시작된다.
승리조건은 상대 캐릭터를 먼저 죽이거나 상대의 보루인 포탑을 먼저 파괴하는 것.
본래라면 서로 눈치를 봐야 하겠지만 일리나의 도발 아닌 도발에 화가 난 시우가 일방적으로 유린하는 모양새로 흘러갔다.
“아!! 일리나 선수의 캐릭터인 박스가 벌써 피가 3분의 1까지 내려갔어요!”
“괜히 세계 최고의 탑라이너라 불리는 게 아니죠! 견제로 버티는 캐릭터로 일방적인 압살!!”
“아아! 들어가고 있어요! 여기서 들어가면 큰일 나요!!”
“아아!! 들어갔어요! 일리나 선수의 박스가 일방적으로 맞고 있어요! 피하려고 해도 소용이 없죠!”
“피해? 그럼 이쪽으로 쏠 테니 피해 봐라! 식의 일방적인 폭력이 가해지고 있어요!”
“아아!! 망했어요! 여기서 더 들어가면!!”
계속되는 실추 속에서도 일리나는 담담하게 게임을 진행했다.
시우는 그런 그녀의 멈추지 않는 과감한 플레이에 더욱 열이 끓어올랐다.
마치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플레이였으니까.
‘잡았다!’
순식간에 킬각을 잡고 그의 캐릭터가 움직인다.
“아 블링크!! 순간적으로 이동하는 블링크 들어갔어요! 킬각이 보인 건가요! 이렇게 일리나 선수 쉽게 무너지나요!!”
“역시 프로게이머는 달라도 다르다! 이런 건가요!!”
모두가 탄성을 흘린다.
실제로 시우의 거리 계산과 딜 계산은 놀라울 정도로 완벽했으니까.
이제 스킬이 들어가면.
챙!!!
그때였다.
일방적으로 맞기만 하던 일리나의 캐릭터가 순식간에 스킬을 사용했다.
상대의 공격에 칼같이 방어하는 카운터 스킬이 들어간다.
동시에 시우의 캐릭터가 스턴을 먹었다.
“방금 뭔가요!! 플레이어 스킬인 블링크를 이용해 타게팅 스킬의 타점을 뒤로 돌립니다!! 그리고 스터어언!! 박스의 카운터 넉 백 효과로 시우 선수의 캐릭터!! 상대의 포탑의 공격 라인까지 튕겨 들어갑니다!! 이거 우연인가요?!"
"경악스러운 반응과 함정! 하지만 시우 선수 빠르게 빠져나오며 스킬을 사용합니다! 이대로 끝내겠다는 입장이에요!!"
"세상에. 방금 반응은 세계급 선수들에게서도 잘 보기 힘든 엄청난 플레이죠!!"
그대로 맞으면 죽을 각이다. 도망치려 해도 각을 주지 않는 행동이었지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마치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일리나의 캐릭터, 박스가 칼 같은 움직임과 거리 계산으로 시우의 공격을 흘려버렸다.
그녀의 입가에 스산한 미소가 걸렸다.
차앙!!
그리고, 순식간에 돌진 스킬을 사용해 공격 범위를 빗겨내고 최소한의 딜로 버텨낸다.
작은 무빙으로 아슬아슬하게 평타 범위를 벗어나거나 스킬의 취약 부분을 노리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계속해서.
마치 핵 프로그램을 쓴 것처럼 말이다.
“아아! 우연인가요?! 피했어요! 스킬 전부 피했어요! 시우 선수의 캐릭터는 스킬 화력은 강하지만 평타가 약해요! 반면 박스 캐릭터는 평타가 정말로 강력하죠! 아아 피가 빠지고 있어요!”
비명과도 같은 해설 속에서 갑작스레 변해버린 일리나의 움직임에 시우가 눈을 크게 떴다.
한번 두 번은 우연으로 넘길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일리나가 보여주는 움직임은 우연의 문제가 아니었다.
스킬이 날아올 때쯤엔 그대로 움직여 스킬을 흘려버리거나 피해버린다.
전혀 예상치 못한. 다른 프로게이머들조차 무심코 몸을 벌떡 일으킬 만큼의 명백한 실력의 압도였다.
인간의 반응속도라고 하기엔 너무 칼 같은 움직임이었다. 마치 홀로 몇 배나 되는 시간을 유영하는 것처럼.
‘이…… 이런?!’
그녀의 플레이 방식은 처음의 엉성함 따윈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제야 시우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눈앞의 금발 소녀가 단순 아마추어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아아!! 이게 어떻게 된 거죠!! 피가 빠지고 있어요! 설마 시우 선수!! 역전당하나요!!”
침을 튀기며 해설하는 해설자들 말대로 시우는 당황한 채 캐릭터를 빼려 했다.
이대로 싸우면 역전당한다! 그 생각이 든 그가 필사적으로 캐릭터를 빼려 할 때였다.
“어?”
어느새 퇴로까지 차단당한 채 역으로 밀어붙이는 일리나의 공격이 그의 캐릭터를 후려쳤다.
퍼스트 블러드.
“…….”
할 말을 잃어버린 그가 눈을 부릅 뜬 채 굳어버렸다.
마치 처음부터 예상했다는 듯한 움직임에 시우는 물론 그 경기를 보던 프로게이머 두 팀 모두 할 말을 잃은 표정이었다.
-세상에…… 방금 뭐임?
-딜교하는 데 10초 남짓에 무슨 일이 벌어진겨.
-미친 아마추어가 시우를 이겼다고?
전혀 생각지도 못한 전개에 시우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이윽고 게임이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난 일리나가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온다.
시우는 그런 그녀를 보며 문득 한가지 생각이 들었다.
하인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는 번뜩이듯 기억해낼 수 있었다.
며칠 전 심해에서 만난 독특한 플레이를 하며 수없이 께름칙한 기분을 전해주었던 어떤 플레이어를 말이다.
“설마!”
그가 눈을 크게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지고는 그냥 못 넘어가는 성격이라서요. 고마워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내려가는 일리나를 보며 시우는 허탈한 표정으로 다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미친 시우 개굴욕 ㅋㅋㅋㅋㅋ
-저건 굴욕 문제가 아닌데? 느린 재생 보셈. 무빙 진짜 소름 돋는다.
-헬퍼 쓴 거 아님?
-이런 방송 내에서 헬퍼를 어떻게 쓰냐 미친놈아.
-그럼 일부러 져준 건가?
-일부러 진 건 아닌 거 같은데.
-컨디션이 안 좋았겠지. 세계 최고 탑라이너가 그냥 아마추어한테 질까.
-졌잖아.
-솔직히 챔피언십에서도 저런 라인전 잘 보기 힘듦. 탑신병자로써 진짜 저건 리얼이다. 일부러 처음에 불안정하게 움직여서 방심 유도하고 틈 보이는 순간 킬 따는 거 오우야. 누나 나 죽어요.
-잠만, 그러면 지금 저게 다 설계라고? 미쳤나 진짜 ㅋㅋㅋ
-잠깐만, 하인스? 하인스 클랜?
-아는 클랜임?
-왜 몰라. 하인스 클랜 칼디라스. 최근에 그마쪽에서 난리 난 유저잖아. 아 나 저 아이디 기억함. 칼디라스! 진짜 카운터 신경 안 쓰고 탑에 고속도로 뚫어버리는 미친 유저. 첼린져 락이 부계 돌리다가 만나서 멘탈 가루 되도록 털렸던 그…… 미친, 근데 칼디라스가 여자였어?
-미친 패드립 했었는데. 누나 미안해요.
-개 예쁘네 근데 진짜.
-리오리 실력에 외모까지 다 가진 여자. 하지만 전주 박 씨 38대손인 나 박철홍은 가지지 못해찌!
-세상에 미쳤따리.
시작부터 아주 화끈하게 어그로가 끌리고 시작한 방송이었다.
알하자드는 그런 경기를 지켜보며 일리나를 향해 빙그레 웃어 보였다. 데이비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지만 일리나는 상상 이상으로 승부욕이 강했던 모양이었다.
실제로 별로 관심 없는 데이비를 설득해 대회를 경험해보게 만든 것도 그녀가 아니었던가. 그녀는 십 년 동안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너무 아름다운 웃음을 띠고 있었다. 듣기로는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그녀는 굉장히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에게서 차가움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침묵 속에서 알하자드는 데이비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보고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가 자신을 도와주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알하자드가 e스포츠 시장을 키우기 위해 자극적이고 시선을 끌 만한 무언가를 원한다는 걸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눈치였다.
'이 정도면 충분히 즐겼네요. 이제 나머지는 기권해도 상관없겠죠?'
애초에 데이비에게 이 대회는 단순히 잠깐 즐기는 이벤트에 불과했던 모양이다.
"이런. 나중에 비싼 술이라도 따야겠군요."
그가 키득거리며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