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90화
이잉…….
빛과 함께 페르세르크가 꺼낸 영상석에서 어떤 영상이 흘러나온다.
“그곳에서 발견한 거야.”
그녀의 말에 영상에 집중한다.
“생각보다 큰 걸 건졌으니 다행인 게지.”
그녀가 보여준 영상은 누군가의 회의 장면이었다.
수는 약 일곱.
“하나같이 무게 잡는 꼴 하고는…….”
“뭐, 일단 보기나 해.”
[성과는 어찌 되었습니까.]
[착착 진행 중입니다. 벌써 C급 양산에 성공했고 B급도 벌써 셋이나 모였습니다.]
[그놈은 어찌 되었습니까. S급 마신은.]
[베헤모스와 연동된 탓에 아직 제어가 쉽지 않지만 최근 태평양 해저기지에서 베헤모스의 혈청을 이용해 제어할 수 있는 초안을 완성했다고 합니다. S급 마신만 제어할 수 있다면, 진화의 돌을 사용해 더욱더 많은 양의 마신을 제어할 수 있을 겁니다.]
그들의 대화에 나는 각기 다른 색으로 타오르던 인간의 형체들을 떠올렸다.
S급 마신이라면…….
“S급 마신은 붉은 화염을 띠고 있다고 하던데.”
“그거, 보긴 했지. 베헤모스와 공명한 것 때문에 베헤모스의 공격이 거의 상쇄되는 건 봤지?”
“강했어?”
“솔직히 베헤모스의 힘으로 거기까지 만들어낸 게 놀라울 정도긴 하더라.”
저들이 자랑하는 상위 마신은 이미 죽어 파편이 되었으니 저들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그런데 이게 보여주는 거야?‘
“잠자코 지켜보아.”
[하면, 티오니스 성자에 관해선 어찌 할겁니까.]
[섣불리 건드리면 이쪽이 위험한 건 사실이오. 그러니 그가 이쪽을 눈치채기 전에 그에게 대적할 힘을 축적해야겠지.]
[방법이 있소?]
[티오니스에서 넘어온 이들. 데이비 성자의 부인들 중에 적합한 이가 둘이나 있소, 특수한 마나를 품은 이와 S급을 넘어선 진짜 마신의 모체가 되어줄 이가.]
모체라…….
콰드득!!
내 발밑의 바닥이 무거운 투기에 짓눌려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 소녀를 미행하시오. 절대 들켜선 아니 되고, 티오니스 성자가 시선을 완전히 다른 쪽으로 돌렸을 때. 실수 없이 탈취해와야 할거요.]
[인간은 아니군요.]
[수인이라 하였소. 그것도 아주 특수한 수인. 그러니까 실수 없어야 할 겁니다. 명심하시오. 우리는 비록 국적은 다르지만, 모두가 하나의 결의 아래 모였소.]
[몬스터가 창궐한 이 세상이 준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절대적인 지배권을 얻기 위해서.
그들의 결의에 나는 눈을 감았다.
“지들 밥그릇 키우는데 남의 와이프를 노렸다고? 거기다 뭐? 모체?”
“인간 여성의 난자를 마신이 될 수 있는 몬스터의 씨와 강제 수정시켜서 그대로 뱃속에 품게 한 뒤 낳는 것. 그것이 그들의 목적 중 하나야. 다만 단순히 세계의 정세를 잡기 위해 모였다고 하기엔…….”
“너무 맹목적이지. 단순히 정세를 잡겠다는 이유였으면 이렇게 다국적으로 제 나라를 속여가면서 일을 벌이지는 않을 테니까.”
한국, 일본, 중국, 러시아. 프랑스. 영국 미국. 그 외에도 수많은 국가.
그렇게 많은 다국적 인간들이 모여서 저토록 일념이 강하게 움직인다?
“적어도 사람은 그렇게 맹목적일 수 없는 게야.”
“뭐 그게 중요하겠어?”
“그렇긴 하지. 자. 마지막 영상분이야.”
[작전은 그대로 시행합니다. 도쿄 공습 준비는 확실히 되고 있겠지요.]
[그렇습니다. 한국 쪽 인물들만 뽑아놓았으니 두 나라 간에 제법 크게 불똥이 튈 겁니다.]
“코오나가 말했던 예언이 이걸 말하는 모양이네.”
나는 조용히 영상 속의 인물들을 스윽 훑었다.
얼굴들은 대강 봐놨지만, 이들이 어떤 인물인지는 알 길이 없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
그렇게 말한 그녀가 뒤꿈치를 든다.
그리고는 팔로 내 목을 감으며 그대로 짧게 입을 맞췄다가 목덜미를 아주 살짝 깨물고는 물러났다.
“니가 뱀파이어냐?”
“흔적은 남겨 둬야 하는 게야. 그대는 이 본녀 페르세르크의 것이라고.”
장난스러우면서도 굉장히 고혹적인 미소와는 별개로 살짝 붉어진 얼굴이다.
일리나와는 다른 방향으로 브레이크가 상당히 고장 난 그녀였다.
“오늘 한번 밖에 못 했으니 횟수는 마저 채워야 하는 게야.”
그리 말하며 뒷짐을 지고 사뿐사뿐 걸어 멀어지는 그녀를 나는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때 사뿐사뿐 걸어가던 그녀가 빙그르르 몸을 돌리며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감히 에이리아와 일리나를 노리려 했던 놈들이니 자비를 베풀 필요는 없을 터. 그대도 생각이 있겠지?”
“어, 안 그래도 삼총사 놈 중 하나가 꿍쳐놓은 외장 하드에 다음 타깃이 있더라. 탈탈 털어서 그 아다만티움인지 나발인지 하는 곳을 싹 치워버리자.”
바스타드 소드를 들고 기괴하게 웃으며 기괴한 짓을 하지만 놈은 영혼의 힘을 반영해 만들어진 녀석이다.
내가 강해질수록 강해진다.
물론 놈은 그것을 외설적인 것을 담아놓은 보물이라 생각하고 챙긴 모양이지만 그 안에 어떤 인간의 정보가 담겨있는 것을 보곤 좌절하며 역소환된 것도 해프닝 같은 일이다.
생긴 건 회색 미라처럼 생긴 놈이 밝히기는.
* * *
균열의 조사 이후 독자적으로 장기 휴가를 따내고 움직이기 시작한 서윤은 미리 준비한 PPT 자료를 이용해 브리핑을 하고 있었다.
“명칭 보르바 다카예프. 러시아군 소속 인물이었으나 불미스러운 사건 이후 군 법정에서 징역을 살고 강제 퇴출당한 뒤 용병으로 전락한 인물이에요.”
“이놈이 균열 사건과 관련이 있다?”
“오빠도 균열 속에서 본 마크 기억하시죠?”
독특한 형태의 머리가 세 개인 불독의 형상.
“저, 알고 있어요. 그거, 국제 범죄 조직 중 하나인 FI의 문양인걸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잊으셨어요? 제 아버지가 누군지.”
“그러네, 네 아버지는 대테러 부대장이셨지, 그럼 일단 저 보르바 다카예프인지 뭔지 하는 놈부터 잡아 오면…….”
덜컹!!
그때 굳게 닫힌 세미나실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온다.
털썩!!
그리고, 그렇게 들어온 인물은 망설임 없이 둘러매고 있던 자루를 던져놓았다.
“당신은?!”
“우선은 고맙다고 해둘게. 네가 알려준 정보와 여러 정보를 종합해서 털어먹은 기지에서 꽤 중요한 이를 보호했거든.”
“데이비…… 올 라운.”
윤석이 긴장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때 데이비가 던진 자루가 꿈틀거렸다.
“히익!!”
“사람이 늘었네?”
어두운 세미나실이 밝혀지면서 약 4명의 인원이 추가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새 말했냐? 입 한번 싸네.”
“전부 믿을만한 이들이에요. 실제로 이분들 덕분에 정보를 종합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래. 뭐 전후 사정 따윈 알아서 하고. 혹시 칼 있나?”
칼을 찾는 데이비의 말에 서윤이 의아한 듯 자루를 바라보았다.
“여기 있다.”
윤석이 단검 하나를 꺼내 그에게 던져주자 데이비는 망설임 없이 자루를 북북 찢은 뒤 그 안에 있는 한 인간을 끄집어냈다.
“저자는?!”
경악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도 그럴 것이 자루에서 나온 이는 다름 아닌 서윤과 윤석이 신병을 확보할 계획을 세우고 있던 국제 범죄 FI의 일원인 보르바 다카예프였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잡아야 하나. 잡을 때 생길 마찰은 어찌해야 하나 산더미 같은 과제가 있었건만.
그새 데이비의 손에 잡혀 나타난 것이다.
“끄으으윽…… 끄윽…….”
“그나저나 제법 괜찮은 곳에 숨어서 작당하고 있었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능숙하게 보르바를 의자에 앉힌 뒤 데이비가 손짓하자 빛으로 된 끈이 그를 의자에 완전히 포박했다.
“끄으윽……”
“물어볼 거 많지?”
“……네.”
그렇게 말한 서윤이 굳은 얼굴로 그에게 다가간다.
“보르바 다카예프. 혁명 조직인 [아다만티움]에 대해 아는 대로 말하세요.”
어차피 잡으면 그에게서 정보를 캐야 했다.
균열 속에서 얻은 정보로 유일하게 찾아낼 수 있는 이는 그뿐이었으니까.
“끄으으…… 끄윽…… 아다만티움? 끌끌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는데.”
“곱게 말하지 않으면 거친 수단을 쓸 수밖에 없어요.”
“거친 수단? 크흐흐흐흐 꼬마 아가씨. 몬스터랑 소꿉장난이나 칠 줄 아는 주제에 고문한다는 말을 너무 쉽게 내뱉는 거 아닌가? 사람을 죽이는 것과 몬스터를 죽이는 건 엄연히 다를 텐데?”
보르바의 도발에 서윤이 인상을 찡그렸다.
실제로 그녀가 싸워온 것은 사람이 아니라 괴물이었다.
같은 사람을 찌르는 건 보통 사람으로서 익숙할 수가 없는 분야였다.
“그건…….”
“그러지 말고 풀어달라고. 내가 아무리 인터폴에 쫓기는 신세라지만 이렇게 막무가내로 잡혀 올 입장도 아니…….”
핑!! 휘리리리릮! 푸콱!!
그때였다.
저벅저벅 다가간 데이비가 윤석에게 받은 단검을 빙그르르 돌리며 다가오더니 망설임 없이 그의 새끼손가락을 찍어 잘라버린 것이다.
[리인포스 더 마인드]
“끄아아아악!!!!!”
갑작스레 손가락 하나가 날아가 버리자 그가 눈을 부릅뜬 채 비명을 질렀다.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리고 주변에서 경악한 표정을 짓는다.
“그래. 애들에게 심문을 맡긴 내가 멍청했네.”
빙그레 웃으며 몸을 숙여 의자에 포박된 보르바와 눈을 마주친 데이비가 빙그레 웃어보였다.
“보르바 다카예프.”
치이이익…….
“끄아아아아악!!!!”
손가락이 잘려나간 환부에 검은 화염을 일으켜 지지기 시작한 데이비가 조용히 말한다.
“쟤들은 똑바로 못할지도 모르지. 근데 나는 아니야.”
“커헉…… 흐어어억…… 하아…… 하아……”
“말해줘야겠는데.”
그의 미소에 보르바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데이비를 노려보다 그대로 침을 뱉었다.
하지만. 그의 침은 데이비가 가볍게 움직인 단검에 막혔다.
“어디서 영화는 많이 봐가지고.”
푸콱!!!
“끄아아아악!!!”
이번엔 약지가 잘려나간다.
“아직 손가락 8개에 이빨 다수, 그 외에도 많아.”
“이…… 이 악마…… 대체 넌…….”
공포에 질린 얼굴로 중얼거리는 그를 보며 데이비는 미소 지었다.
“날 몰라?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설마.”
그제야 데이비의 정체를 깨달았는지 그의 눈이 부릅 뜨여졌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그러잖아. 고문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입을 다무는 인간들.”
“흐…… 흐으…… 끄윽!”
“현실에 그딴 건 없어. 픽션같은 거야.”
휘리릭 콰작!!!
“끄아아아악!!!!”
중지가 잘려나간 그가 의자 채로 버둥거리며 비틀거렸다.
“이 악마 새끼…… 차라리 날 죽여라…….”
“걱정 마. 사람 쉽게 안 죽어. 그리고 설사 죽어도…….”
빙그레 웃어 보인 데이비의 눈에 붉은빛의 꼬리가 일렁이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그게 끝이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지?”
“아…… 아아…… 아아아…….”
“편히 죽느냐. 영겁을 고통받느냐. 선택은 네 자유야.”
그 모습을 보며 서윤과 윤석은 침을 꿀꺽 삼켰다.
“지독하네…….”
“저희 목이 붙어있는 게 행운이 아니었을까요…….”
불순분자의 목소리가 들리지만 무시하는 데이비였다.
“우선 이야기나 좀 해보자고. 너희들 다국적 x신들이지? 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데?”
그 물음에 손가락을 잃고 끙끙대던 그가 고개를 불쑥 들었다.
그리고는 증오스러운 눈으로 말했다.
“이 세상은 몬스터로 인해 힘의 균형이 흔들리고 있다.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평화가 깨지고 있지. 이때 힘을 축적한다면…….”
“거짓말하지 말고.”
콰직!!!
검지가 잘려나간다.
끔찍한 고통에도 그는 정신강화 마법으로 인해 기절조차 할 수 없었다.
“끄으으으윽!!!”
끙끙대며 한참을 신음하던 그가 이를 악물었다.
“말살하기 위해서다.”
“뭐?”
“몬스터를…… 이 세상에서 완전히 말살해버리고, 몬스터를 통해 국익을 챙기는 인류의 배반자 놈들을 모조리 척살하기 위해서다!!”
독립투사같이 외치는 그의 외침에 서윤과 윤석은 제법 놀란 표정이었다.
반면.
“흐음……어쩐지. 너무 맹목적이다 싶었지. 정세가 아니라. 몬스터에게 가족을 잃거나 원한이 깊은 이들이 모였다면 국가를 초월해서 이딴 미친 짓을 저질러도 이상하진 않네.”
데이비는 대강 예상했다는 듯 흥미롭다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너희 제어를 따르는 몬스터를 만들었냐? 윤리의식까지 버려가면서?”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인류는 몬스터의 완전 말살에 한 발짝 더 나아갔다는 것은 부정할…….”
“아니지, 아니지. 그건 아니지.”
담담하게 말한 데이비가 빙그레 웃었다.
“니들이 하는 건 말이다.”
빙그레 웃은 데이비가 나이프를 빙그르르 돌리며 들어 올렸다.
“살쾡이를 쫓아내겠다고 호랑이를 불러들이는 거다.”
콰직!!
피와 함께 손가락이 허공으로 튀었다.
“너 제법 높은 자리에 있더라. 니들 은신처. 중요 인물, 남김없이 다 말해. 시간은 많아.”
“내가…… 내가 말할 것 같은…….”
콰직!
“으그아아아아!! 하아!! 하아…… 으으으아아악!!”
“네가 말하지 않아도 너희 아다만티움은 세 가지나 선을 넘었어. 가장 가벼운 것부터 알려주마, 첫째가. 금기를 어긴 것이고.”
콰직!!
“둘째가. 베헤모스를 그 지경으로 만든 것이고.”
콰직!!!
“셋째가 감히 에이리아와 일리나를 노렸다는 거다.”
콰직!!
“으아아아아아아!!”
* * *
“수호자님!!”
거대한 바다 위로 모습을 드러낸 베헤모스를 보며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그러한 꼬리를 살랑거리며 다가간 인어, 소야가 반색한다.
퍼어엉!!!
그런 그녀의 부름에 따라 형태의 크기를 줄인 베헤모스가 모습을 드러낸다.
지구에 온 이후로 자신의 몸 크기를 줄이거나 인간으로 의태할 수 있는 힘을 얻은 베헤모스였다.
눈에 띄지 않게 나타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수호…… 자님?”
그런데.
베헤모스를 발견하기가 무섭게 반색하며 다가간 인어, 소야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수호자님?”
-뭐냐.
“저…… 그건 뭔가요.”
-흥! 닥쳐라!
놀랍게도 베헤모스 거체의 머리 위엔 거대한 혹이 자라있었다.
“별거 아냐. 그냥 난동을 부리는 과정에서 한 대 맞은 거다. 몇 달 정도는 갈걸?”
“풉…….”
베헤모스의 우스운 꼴에 일리나가 풉 웃음을 터뜨리자 베헤모스의 기세가 날카로워진다.
-감히 죽고 싶은가 미물!!
“뭐라고요? 뒤지고 싶어요?”
그 말에 일리나가 칼디라스를 뽑아 들고 차갑게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다른 이라면 몰라도…….
일리나의 현재 무력은 환수왕 하나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니 말이다.
사기 같으니라고.
으르렁대는 일리나와 베헤모스를 진정시켜야 할 듯했다.
“자자. 진정하고.”
그그그그귺!!!
동시에 내 뒤로 남빛의 거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흡?!
“한대 더 처맞고 싶은 모양인데 그렇게 해줄게.”
-나…… 나는 괜찮은 것 같다!!
순식간에 물러나는 베헤모스였다.
“아하하하하핫!!”
-크으! 망할 꼬맹이가!
그런 꼴을 보며 인어 소야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쾌활하게 웃어대다가 베헤모스가 일으킨 파도에 한차례 휩쓸려버렸다.
극도로 호전적이던 녀석이 저렇게 변했다.
그 과정엔 역시 저 흉포한 베헤모스를 꼼짝도 못 하게 만드는 인어가 있으리라.
“하이 머메이드를 직접 본건 나도 처음인데.”
내 중얼거림에 베헤모스의 곁에 달라붙어 꺄르륵 웃고 있는 그녀가 나를 바라본다.
“이런, 가장 중요한 걸 잊었네요.”
그녀가 물속으로 잠시 사라졌다.
그리고는 내 바로 앞의 바다에서 다시 고개를 내밀고는 조용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감사합니다. 수호자님과 저를 구해주셔서. 이건 제가 가지고 있던 진주에요. 그냥 진주와 다르게 인어의 축복이 서려 있답니다.”
그녀가 내민 진주는 무지갯빛으로 반짝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불사의 존재. 하이 머메이드, 즉 눈앞의 소야라는 이름의 인어에 대해선 알고 있다.
자연의 수호자이며, 생명의 어머니라 불리는 바다의 딸이다.
일반 인어와는 다르게 상체는 완전한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고 하체만이 인어 특유의 꼬리와 지느러미를 지니고 있다.
내가 아는 하이 머메이드는 의지에 따라 인간으로 위태할 수도 있다고 들었는데 그녀는 그렇게까지 나이가 많은 인어는 아닌 듯 보였다.
애초에 그녀도 균열을 타고 지구로 온 것인가 싶은 생각이 든다.
그 인어가 건네주는 오색의 진주에 대해선 들은 바 있다.
인어의 축복.
소유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바닷길을 나설 때 순풍의 축복이 함께한다.
폭풍이 빗겨나가는 행운이 깃들어있다.
그만큼 대단한 물건이라 본래 쉽게 건네는 물건이 아님에도 소야는 내게 인어의 축복을 건넨 것이다.
물론, 확실히 할 것은 해야 한다.
“그래 잘 쓸게. 근데 말이야, 이제 저놈 내 꺼야.”
“네?”
“베헤모스는 환수니까. 환수 소환사인 내가 계약했다고.”
내 말에 그녀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베헤모스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거대한 혹을 달고 있던 베헤모스가 시선을 휙 하고 피해버렸다.
-흥!
“들었어요. 저 때문에 수호자님께서 갖은 고초를 겪으셨다고.”
“그랬지.”
“죄송해요…….”
“그건 저놈한테 할 이야기고. 하나 물어봐도 되나?”
내 물음에 그녀가 양 갈래로 늘어뜨린 소야가 말끔한 눈동자를 끔뻑거렸다.
“네. 말씀하세요.”
“대체 뭔 짓을 했길래. 저놈이 저렇게 널 끔찍이도 아끼는 건데.”
-계약자!! 헛소리하지 마라! 내가 왜 저 멍청한 어류를 끔찍이 아낀다는 것이냐!!
베헤모스가 반론을 하든 하지 않든 소야가 발그레해진 얼굴로 답한다.
“그게 말이죠…… 수호자님도 처음엔 정말로 저를 싫어하셨거든요.”
“그런데?”
“제 개그를 마음에 들어 하셨어요.”
그녀의 말에 의문이 선다.
“개그? 듣는 이를 웃기는 그 개그?”
“네! 한번 들어보실래요?”
그 말에 나는 보르바 다카예프에게서 얻어냈던 정보로 아다만티움의 비밀 시설들을 박살 내기 전 시간을 조금 투자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오. 본녀도 흥미가 이는구나.”
무려 저 흉포한 베헤모스를 마음에 들게 한 개그라니. 인어가 개그를 한다는 점에서 굉장히 쉽게 상상이 가지 않지만, 소야는 오랜 시간 이 지구에서 살아온 존재라는 모양이었다.
시간을 헛으로 먹은 건 아닐 테니까.
“엣헴! 데이비 님, 그거 아나?”
“응?”
“이구아나.”
“…….”
일리나와 나 그리고 페르세르크의 표정이 멈췄다.
“새로운 욕이 뭔지 아세요? 뉴욕~”
“…….”
싸늘하다. 가슴속에 언어폭력이 날아와 꽂힌다.
-풉!
그때였다.
일리나와 페르세르크. 그리고 내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돌려 범인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흰수염 고래가.
지금…….
“웃어?”
굳은 얼굴로 내가 심문하듯 물었다.
-크…… 크흠!!
“꽃이 병원에 갔어요. 왠지 알아요? 수술이 있어서.”
-풉!!
“천하대장군.”
내 중얼거림과 동시에 거대한 남빛의 거신이 몽둥이를 꺼내 들며 소환된다.
주변을 밝힐 정도로 일렁이는 붉은 안광은 극렬한 분노를 품고 있었다.
“일리나.”
“응.”
“회 뜨자. 회칼로 쓰게 칼디라스 좀 빌려줘.”
평소라면 헛소리 말라며 화를 낼 그녀였지만.
맹렬하게 진동하며 분노를 토해내는 칼디라스를 망설임 없이 건넨다.
그러거나 말거나 저 발칙한 인어 소야와 베헤모스는 우리 셋의 분위기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풉…… 푸훕…… 크하하하하하핫!!!
“웃기죠? 웃기죠?! 제가 인간 문명을 많이 봐서 재밌는 개그를 많이 알아요! 그러다가 잡혀버렸지만…….”
“살면서 이토록 격렬하게 후회를 해본 것은 처음이다.”
“네? 후회가 싫으시면 전회를…….”
한자까지 쓰는 인어라…….
“널 구하지 말았어야 했어.”
후우우웅!!!
참지 못하고 폭주한 괴신 천하대장군의 도깨비방망이가 허공을 가른다.
“아…… 안 돼요!! 이곳 일대 전체를 박살 내버릴 생각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