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08화
하인스 아카데미의 소문이 널리 퍼져나가는 건 생각보다 빨랐다.
[오오…… 내가 이겼구나!]
“제법 잘하는데? 그럼 이렇게 해볼까?”
[으악!! 어어어어?!]
보드게임을 즐기면서 비명을 지르는 인드라와 그런 인드라를 놀려먹는 일리나는 제법 즐거워 보였다.
“그래서. 결정은 내리셨나요? 아니. 이젠 의미가 없나?”
키득거리며 모르지아나가 투덜거렸다.
“세상에 이런 식으로 여론을 뒤집어버릴 줄은 몰랐네요. 새삼 존경스러울 정도예요.”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은 다 써야겠죠. 남들 못쓴다고 나도 안 쓰는 건 멍청한 짓이고요.”
“콘타스 제국의 힘은 필요 없었네요.”
“굳이 빚을 만들 필요는 없다는 판단이 내려졌을 뿐입니다. 당장은요.”
콘타스 대제는 제법 호탕한 사람으로 과거 일루미나티 관련 일로 그와 협약을 한 바 있다.
그는 국혼 관계로 나와의 관계를 보다 명확하게 확립하고 싶어 하는 듯하지만.
그 어떤 상황이 되었건 나는 이 이상 부인을 늘릴 생각이 없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그것을 제하고도 당신. 정말 매력적이네요. 솔직히 왕자비 분들이 좀 부러울 정도예요.”
“거짓말은 하지 마세요.”
“쿡……”
내 말에 그녀가 킥킥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맞아요. 나는 너무 완벽한 사람은 취향이 아니라서. 부족한 것을 제가 채워줘야지 처음부터 곽 찬 사람에겐 내가 비집고 들어갈 틈도 없지 않겠어요?”
“셋을 만나서 꽉 차게 된 겁니다.”
“왕자님의 앞길에 행운이 함께 하길 기도할게요.”
그녀는 미련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완벽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제가 린디스 제국에 들렸을 때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자자! 저는 일이 좀 바빠서 그만! 일리나! 인드라 데려갈 테니 모르지아나 황녀와 말 상대 좀 해줘.”
“뭐…… 뭐?!”
놀란 그녀가 움찔거린다.
“어머나 황녀님. 황녀님과도 꼭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답니다.”
“그…… 그러니까…….”
이미 페르세르크로부터 그녀의 무지막지한 수다에 대해 들은 일리나였기에 표정이 핼쑥하게 질렸지만 나는 잽싸게 도망쳐버렸다.
그녀의 수다는 반신이고 일반인이고 견뎌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레이나 이년…… 감히 날 물 먹이려 들어?”
그렇다면 이쪽은 너와 한 몸이나 다름없던 일리나를 팔아넘기고 내 차례를 넘기마.“
아무리 아름다운 여성이라도 내게는 의미 없는 요소일 뿐이다.
“그러고 보니…… 대륙 6대 미녀 중 다섯과 만나봤는데. 나머지 한 명은 누구야.”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인간 계약자. 다 이긴 게임을 너 때문에 포기했다고!]
“너 그거 절대 못 이겨.”
아무리 정령왕이라 해도 경험이 부족한 어린아이다.
일리나가 한 보드게임을 그녀가 지금 이길 가능성은 현저히 낮았다.
* * *
[인간 계약자.]
고요한 복도. 나를 발견하고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이고 지나가는 수인족 시녀들을 지나치기가 무섭게 인드라가 나를 향해 말했다.
[실은 대정령께서 인간에게 한 말을 알고 있어.]
“그래서?”
[정령계를 그냥 둘 거야?]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건 당장 결정할 사안이 아니야.”
[어째선데? 그 달을 다시 부수면 본래대로…….]
“빠른 시일 안에 다시 태초 정령이 폭주하겠지. 생명력 부족 현상으로.”
그땐 두 번 다시 돌이킬 수 없다.
대정령이 내게 건넨 정령계의 현 상황은 간단했다.
과유불급.
생명력이 너무 넘쳐서 문제가 되고 있다.
세 번째 달 타나토스의 힘을 완전히 제어하는 건 이쪽도 쉬운 일은 아니었으니까.
“그건 일단 보류해. 지금은 나도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당장은 상황을 좀 더 지켜보는 수밖에.
제일 좋은 방법은 생명력의 소모를 조금 더 늘리는 방법을 찾는 것이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으니까.
이후 나는 하인스 아카데미에 다시 들렸다.
대부분의 생도들이 빠져나가고 고요한 곳이지만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생도들은 아직 이곳에 남아있다.
저 멀리 뮤우와 타디아가 서로 웃으면서 공놀이를 하고 있는 게 보였다.
친구와 논다는 사실이 그토록 즐거운지 뮤우의 얼굴엔 너무 행복한 미소가 서려 있었다.
“삼천 명이라…… 전부 수용은 불가능하고.”
“자금 사정이나 여러 문제를 생각하면 많아도 600명 정도가 한계에요.”
대부분이 귀족자제다.
귀족자제가 평민보다 많아지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하인스 영지는 평민 생도와 귀족 생도의 수를 어느 정도 밸런싱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600명이라 해도 5분의 1 정도죠. 사실상 저 많은 인원을 전부 받을 순 없어요.”
갑자기 이렇게 늘어날 줄 누가 알았을까.
“평민 측은 큰 변동이 없네.”
그들이야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 바쁜 입장이니 말이다.
단순히 시험을 치르는 식으로 해볼 거냐던 베르닐 시종장의 질문에 나는 방식을 바꾸었다.
재능은 이미 꽃핀 자가 있고 꽃피지 않은 자가 있다. 그리고 그 재능이 피었는가 피지 않았는가의 여부만으로 생도들을 받게 되면 후에 반드시 후회하게 되리라.
그렇다면 이들을 어찌 받아야 하는가.
비록 산 왕국과 이번 성적 조작사건에 연루된 국가들의 입학을 금지시켰지만 대륙엔 이미 수많은 학교가 있으니까.
기부금을 보고 받는 케이스. 시험을 치는 케이스. 직접 면접을 보는 케이스.
어느 쪽이건 손이 많이 가고 복잡하기 그지없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
“거짓말 판별.”
거짓말을 잘 잡아내는 엘프가 몇몇 있지 않던가.
“유리아, 일거리가 생겼다.”
끌끌 웃는 나를 향한 유리아의 빡침이 서린 미소가 언 듯 보이는 듯했지만 그녀는 이곳에 없다.
“질문은 두 가지. 그 의도는 정말로 배우고 싶은 생각이 있는 이들만, 또 한 가지는 인성 부분을 봅시다.”
내 제안에 앨리스 대주교는 그게 되냐는 질문을 던졌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도 상당히 걸러낼 수 있겠죠. 단순히 정령의 축복만을 노리고 오는 놈까지 받을 자비가 어딨습니까.”
물론 상대적인 비율이기에 절대적인 최대수치인 600명에 달하진 않는다.
그러니.
“그러니까 시작부터 아예 테스트를 받는 인원을 300명으로 고정하죠. 거기서 탈락하는 이가 나오면 그다음 순번이 시험을 치르게 하는 겁니다. 총 300명을 채우는 겁니다.”
하인스 아카데미는 그렇게 많은 학생을 유치할 생각이 없다.
그런 만큼 이 이상 규모를 늘릴 생각도 없었다.
* * *
하인스 아카데미의 입학 희망 서류가 급속도로 늘어났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타 아카데미에서는 상당히 발등에 불이 떨어진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당연 입학을 희망하는 학생이 줄어들면서 자연스레 이 사태의 원흉인 하인스 아카데미를 향해 이를 부득부득 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소속 국가의 도움을 받아 해당국가의 귀족이나 동맹국의 귀족은 무조건 자신들의 아카데미에 입학시키게 한다는 로비를 할 수도 있지만, 효과 자체는 미미했다.
아니 그렇게 해서 학생들의 입학을 따낸들 상처뿐인 영광일 뿐이다.
이러나저러나 우리는 학생 수에 목을 매지 않으니 말이다.
갑작스레 늘어버린 학생들의 입학 희망서에 비명을 지르거나 말거나.
나는 정령계로 돌아다니지 않고 세상 구경을 하겠다며 고집을 부리는 인드라를 데리고 잠들어있는 에반젤린의 곁으로 왔다.
성장통이 지속적이진 않지만 지금도 간간이 열이 올라 아이가 아파할 때가 많다.
큰 고비를 넘겨도 아직 자잘한 성장통이 남은 것이다.
어떻게 하면 그녀를 덜 아프게 할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을 하던 찰나 나는 에반젤린의 목덜미 쪽에서 기묘한 빛이 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신기하네. 인간은 아닌데.]
“내 딸이야.”
[넌 인간이잖아?]
“그래도 내 딸이야.”
에반젤린은 이클립스가 내게 남긴 흔적이며, 헤라클래스의 딸이다.
그리고, 그녀를 내가 지켜주겠다 약속한 이상 내 딸과 다를 바 없다.
다리안과 차별 없이 소중한 딸아이로 키울 생각이었다.
[그런데 저 목에 있는 빛은…….]
“알고 있어.”
무언가가 뭉쳤다.
그녀의 힘을 활발하게 움직여줄 힘의 흐름이 목 부분에서 막혀 잘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좀 전까진 없었는데.
나는 바깥을 스윽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딱히 이상한 것도 없…… 아 있구나.”
노을이 지는 시각.
가장 달에서 생명력이 많이 내려오는 시간이다.
어쩌면 저 현상이 그녀의 성장을 방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처리하긴 해야겠네…….”
세상의 흐름 근간 자체에 문제가 되지 않게 하면서 적절한 비율로 생명력을 발산할 수 있게끔 바꿀 필요가 있어 보였다.
이윽고 해가 지고 늦은 시각.
나는 다시 지하감옥을 찾았고 이내 바닥에 쓰러진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사내를 볼 수 있었다.
외상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나를 발견하기가 무섭게 눈을 부릅뜨며 필사적으로 엉금엉금 기어와 매달렸다.
“말할게!! 말할 테니까 제발 저 미친 토끼 새끼들 좀 치워줘!!”
“굳이 안 들어도 되는데.”
“제발 말할게! 말하게 해줘! 제발! 제발 나를 이 지옥에서 꺼내줘!!”
필사적으로 외치는 그를 보며 나는 만족스레 손뼉을 쳤다.
[인간은 정말 잔인하구나…… 나도 조심해야겠다.]
인드라의 중얼거림을 무시하며 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 그럼 대답해봐. 너희를 보낸 건?”
“사…… 산 왕국의 샤렌 공작!”
“너희 목적은?”
“그…… 그건…….”
“보팔레빗. 아직 이놈이 부족한 모양이다.”
뀨!
그 말과 함께 어둠 속에서 새하얀 토끼들이 붉은 눈을 번뜩인다.
어둠 속에서 근육 도핑을 하고 있는 그가 다가와 그의 앞에서 스쿼트를 하는 시늉을 하자 암살자의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
“으아아악!! 저리 가!! 저리 가라고! 이제 더는 못해! 차라리 날 죽여!!”
비명을 지르는 그의 모습에 내가 다시 토끼를 물린다.
“말해봐.”
“그게…….”
“보…….”
“말할게! 말할게!! 암살이야! 생도의 암살!”
“타디아를?”
“어떻게…….”
“답이야 뻔하지. 날 못 건드리니까 자기 아들을 작살낸 원흉인 타디아라도 죽이려 했겠지.”
그렇게 말한 내가 빙그레 웃어보였다.
증거는 없지만, 범인이 확실해진 이상 더 이상 신경 쓸 것은 없었다.
“그놈은 어떻게 하고 있는데?”
내 물음에 보팔레빗 한 마리가 눈을 반짝였다.
[근육 트레이닝시키는 맛이 나는 인간이던걸. 상당히 왜소한 체격이라 근육만 붙으면 볼만해질 거야.]
[히아악! 마…… 말을 하잖아!]
흉물스러운 무언가를 본 것마냥 인드라가 기겁하자 보팔레빗이 그녀에게 고개를 돌리려 했다.
이에 나는 녀석의 관심을 제지한다.
“내가 물은 건 그게 아니고.”
[응? 아아 좀 전에 도망쳤어. 타국으로 뜬다는 말을 했는데 나는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는걸.]
느끼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보팔레빗을 보며 내가 눈을 가늘게 떴다.
“눈치는 빠른 양반이네. 이봐 보팔레빗.”
[응?]
“어떻게 해주면 좋을까. 그놈을.”
[응징해야 하는 인간이야? 시간만 주면 내게 맡겨줘. 내가 일주일 안에 갱생시켜볼 테니.]
그 갱생에 근육 트레이닝이 포함되는 게 문제다.
“다른 방법은 없어?”
내 물음에 보팔레빗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있긴 한데…… 이미 본적이 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