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21화
“그러니까. 그 씹어먹을 자식들이 그런 말을 했다는 거야?”
씩씩거리며 분노하는 일리나는 당장이라도 칼디라스를 들고 쫓아가 놈들의 시신이라도 부관참시할 기세였다.
“젠장…… 에반젤린이…….”
반면 나는 아직도 에반젤린이 말했던 아빠 미워! 라는 외침의 굴레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페르…… 나 어떻게 하냐…… 에반젤린이…….”
“후우…… 좀 닥쳐봐 데이비.”
복잡한 표정으로 그녀가 이마를 짚었다.
“이게 단순한 문제가 아닌 게야.”
“…….”
“에반젤린의 부모인 이클립스와 헤라클래스를 그대가 죽였다는 사실은 거짓이 아니야.”
“……에반젤린은 그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아 하는 듯하지만. 만약 그게 사실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때 그 아이가 그대를 용서할 수 있을까.”
페르세르크의 물음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소중한 아이지만 그건 내 기준이지 에반젤린과는 다르다.
내 기준을 그 아이에게 들이대는 건 부모로서 교육 실패로 이어질 것이다.
“그래서? 에반젤린은?”
“륀느가 몰래 따라붙고 있어. 당장 데려올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하…….”
골치 아프다며 일리나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때 다리안을 품에 안고 있던 에이리아가 귀를 쫑긋거렸다.
“에반젤린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나.”
에반젤린은 현재 내가 거짓말을 했다며 화를 내고 있지만, 그녀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때 거헤궁의 피조물이 했던 말을 말이다.
에반젤린을 딸처럼 사랑하고 지금껏 그래왔듯 키우고 싶지만, 만약 에반젤린이 그 사실을 빌미로 내게 거리감을 느낀다면.
그땐 어찌해야 하는가.
황도 12궁 중 깨어있는 건 유일하게 금우궁이 유일하기에 당장 놈들을 어찌할 수단은 내게 없었다.
놈들이 태동하는 순간이 아니면 나도 놈들을 처리할 수 없거니와 같은 황도12궁이라 하여 아무 죄도 없는 놈을 소멸시키는 건 이쪽도 내키는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에반젤린의 화를 어떻게 풀어주냐는 것인데.
“벌써 그리워? 아빠 아빠 하면서 매달리던 에반젤린이?”
“든 사람은 몰라도 난 사람은 안다고 며칠 없는 거로 이렇게 그립네.”
내 실소에 일리나가 빙그레 웃어보였다.
역시 조언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조언을 해줄 인간을 찾아야 하는데.
나는 우선순위에 있는 후보를 손에 꼽았다.
자식을 키워봤으며, 이런 일에 능숙할 것 같은 사람을.
* * *
“그래서. 짐을 찾아왔다?”
“조언 가능할까요.”
그 말에 옥좌에 비스듬히 걸터앉은 오만한 표정의 사내가 피식 웃어보였다.
“이봐 데이비 왕자. 지금 여기가 어떤 자리인지는 알고 있나?”
“잘 압니다. 삼제국 연합 회의실이지요.”
눈앞에 있는 이는 총 세 명.
한 명은 린디스 제국의 데오르트 알 린디스 황제.
또 한 명은 서부의 대제국 콘타스의 대제.
마지막으로.
“그 전에 황제가 되신 걸 경하드립니다. 직접 뵌 건 1년 만이네요. 살리반 폐하.”
“감사합니다. 데이비 왕자. 솔직히 좀 많이 늦었지만, 아바마마의 혼이 평온히 윤회에 들게 해주신 은혜는 잊지 않고 있습니다.”
1년 전 팔란 제국에서는 결국 정권 교체가 일어났다.
본래 팔란 제국의 지존이자 살리반 황태자. 그리고 일리나의 친부였던 황제가 숨을 거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수명을 모두 누리고 떠났고, 그렇게 떠나기 전 엉엉 울던 일리나의 손을 꼭 잡아주고 미련 없이 환한 웃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살리반에게 제국을 부탁한다는 말을 했다.
그가 죽은 이후 나는 영혼의 안식을 위해 의식을 직접 치러주었고 그의 혼은 그렇게 편안하게 윤회의 고리에 올랐다.
그 후 장례식이 끝나고 그가 정식으로 황제가 되었지만 그를 직접 만난 건 황제 서거 이후 1년 만에 보는 것이다.
당당한 위세를 뽐내는 살리반은 이전과 다르게 황태자가 아닌 젊은 황제이기에 남은 두 황제도 그를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는 모양새였다.
태평성대.
전쟁이 마르지 않았던 대륙을 평화로 뭉친 삼제국의 위용은 그런 것이었다.
물론, 세간에선 삼 제국이 서로 힘겨루기를 하고 있기에 사이가 마냥 좋다곤 하지 않지만, 비밀리에 이렇게 삼제국의 수장이 모여 앞으로의 일을 논하는 것만 봐도 평화의 의미가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실상 가장 큰 쐐기 역할을 했던 것은 다름 아닌 나라는 존재였다.
절대적인 무력억제제.
보통 전쟁은 오해로 번지거나 국익을 위해 펼쳐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나라는 존재가 그것을 강제로 억눌러버리고 있는 것이다.
물론, 불만이 쌓이면 언젠가 터지겠지만 분위기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크게 이득이 된 건 사실이었다.
“잘됐습니다. 마침 이야기가 빙빙 돌고 있던 참이니 잠시 휴식이라도 취하시지요.”
“찬성하지요.”
“그러지. 하지만 다음부터는 정식 절차를 밟게 데이비 왕자. 이곳은 삼제국 황제가 모이는 장소네. 당연 그에 따라 엄청나게 엄중한 방어마법이 설치되어있건만…….”
“그런 게 있었습니까?”
미안. 무심코 지나쳤는데 있는 줄도 몰랐네요.
“대현자도 못 할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자네는 정말 인간인가 싶군.”
데오르트 황제의 엄한 꾸중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념하겠습니다. 장인어른.”
“커흠! 큼!”
그 한마디에 그가 떨떠름한 헛기침을 흘렸다.
그리고는 주변의 눈치를 살피더니 조용히 물었다.
“한데. 다리안은 같이 오지 않았나?”
그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며 물었다.
“손자가 보고 싶으십니까?”
액면가만 보면 종손자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크흠! 지…… 짐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노라!”
“아쉽네요. 다리안도 같이 오긴 했습니다.”
“어서 데려오라!”
“뻥입니다.”
벌떡 일어나는 그의 외침에 주변이 조용해진다.
팔란의 황제 살리반은 쿡쿡 웃어 보였고 대제는 대놓고 대소를 터뜨렸다.
“푸하하하하하! 영감탱이! 무게 잡더니 꼴좋구만!!”
“닥쳐라. 이놈!”
당장이라도 싸울 것처럼 으르렁거리는 데오르트 황제와 대제를 보며 나는 물었다.
“적어도 따님을 키워본 입장이신 두 분이라면 제게 조언을 해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번지수를 잘못 잡았군.”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
“그런 일이라면, 그 누구보다 대현자를 찾아가는 게 맞았겠지.”
대 현자. 헬리슨 발레스티아.
적탑의 절대적인 신임을 입고 있는 존재였다.
제법 너그러운 성품의 할아버지였던 걸로 기억한다.
실제로 그와 만난 건 하인스 영지에서였으니까.
“그 영감탱이가 제격이긴 하지. 세상 별의별 잡다한 지식은 다 알고 있으니까.”
그들의 말에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뜨며 물었다.
“실례지만 대현자께서는 자식이 아들 하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네. 보기 드물게 마음에 드는 사내였지. 지금은 혼인을 하고 아이를 하나 두고 있다더군.”
“그렇다면 저는 두 분 폐하의 조언을 듣는 게 맞습니다.”
내 말에 데오르트 황제와 콘타스 대제가 서로 눈을 마주쳤다.
“그렇군…… 딸을 키워본 입장에서라.”
“네.”
“그래. 여흥이니 어디 한번 이야기해보라.”
그 말에 나는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말했다.
“에반젤린이…… 제가 밉답니다.”
…….
아주 짧은 침묵 끝에 데오르트 황제가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거 큰일이군.”
“저런. 사고를 제대로 친 모양인데.”
진지하게 고민하는 대제와 황제를 보며 나는 진실 중 일부를 털어놓았다.
에반젤린이 내게 단단히 삐진 것과. 그 아이가 지금 하고 있는 일. 그리고, 그 아이의 친부모에 대해서 말이다.
제대로 된 조언을 얻기 위해서 숨기지 말아야 할 것도 존재한다.
그래서 나는 그나마 믿을 수 있는 이들에게 이것을 털어놓았다.
* * *
대륙을 좌지우지하는 절대권력의 존재들.
그런 인간들이 단 하나의 의제를 놓고 갑론을박을 놓고 있다.
“활발한 사내가 아니라 소중한 공주다. 사내처럼 길러서는 안되는 법! 대제. 아직 어리니 경험이 부족한가 보군.”
“웃기는군. 과보호는 아이를 망치는 지름길이오. 황제.”
콘타스 대제가 젊어 보이는 외형을 지니긴 했지만 이미 그 또한 상당한 나이의 딸이 있다.
다만 두 절대자의 입장은 명확한 차이가 있었다.
과보호 끼가 보이는 데오르트 황제와. 상당한 방임주의의 대제.
솔직히 말하자면…….
“그러니까 가서 당장 달래주고, 거짓말이라도 해서 아이를 안심시키는 것이 좋다는 뜻이다. 멍청한 애송이 놈.”
“그러다가 나중에 들키면 잘도 파국을 피하겠군! 하!”
이 인간들, 도움이 전혀 안 된다.
이 양반들이 안 되면 다음은 누가 있을까.
고민하던 찰나 살리반이 내게 작은 상자를 건네주었다.
“데이비 왕자. 이걸 그 아이에게 전해주시겠습니까?”
“이건 뭡니까?”
“머리핀입니다. 요즘 귀족 영애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다고 하더군요. 황후와 함께 고민해서 마련했습니다.”
그 아이. 아마 일리나를 말하는 것일 터다.
“직접 건네…… 아니지 그건 의미가 없겠네요.”
살리반은 지금까지도 일리나에게 문제가 될 여지를 남기지 않기 위해 일부러 사이가 나쁜 척을 했으니 말이다.
“뭐, 알겠습니다.”
“그런데 소식은 없습니까?”
“네. 쉽지 않네요.”
내 말에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아직도 설전을 펼치고 있는 두 황제를 바라보았다.
“뭐, 제가 딸을 키워본 건 아닙니다만.”
“네.”
“굳이 거기에 정답이 있을까 싶습니다.”
“무슨 뜻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그냥 찾아가서 자주 이야기해주고, 자주 고민을 들어주고, 투정을 들어주고.”
그의 말에 나는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그렇구나.
이 인간.
전 황태자와 다르게 일리나를 제 딸처럼 보호해왔던 인간이었다.
그녀가 어긋나지 않도록 정의로운 성정을 지닐 수 있도록.
뒤에서 도운 인물.
“그러네요. 감사합니다. 덕분에 큰 조언이 됐습니다.”
내 말에 그가 피식 웃어보였다.
“고마우면 다음에 무역 항목을…….”
“아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죠. 공사구분 확실히 하시는 분이 이러시면 안 되지.”
“쯧. 아쉽군요.”
이 와중에도 싸움은 계속되고 있다.
당장이라도 검을 빼 들 듯한 데오르트 황제와 권강을 피워 올릴법한 대제를 흘끗 본 내가 마나를 일으켰다.
“슬슬 가봐야겠습니다.”
“아참. 빛의 용사 레이나 양에게서 온 이야기입니다만.”
“네?”
“이단 심문회로 보이는 존재들이 대륙 여기저기서 목격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의 말에 내가 움찔거렸다.
“뭐. 문제가 되는 이단을 찾지 않을 순 없으니까요,”
과거처럼 과격한 단체가 되지는 않은 듯하지만.
“그게 무슨 문제가 됩니까?”
“그게…… 그들의 상태가 좀 이상했다고 하더군요.”
“네?”
“사이러스와 크리아스를 모시는 신도들을 처단했다고 합니다.”
“…….”
태양신 사이러스와 달의 크리아스는 엄연히 프리아 교단 내에서도 인정하는 소규모 교단학파라 할 수 있다.
실존하는 신이 아니지만 두 신적인 존재는 엄연히 프리아 여신의 손에 태어났으니까.
가만. 별자리도 있다면 사이러스도 사실 실존하는 놈일지도 모르겠다.
“그건 교단의 교리에도 정식으로 위배되는…….”
“네. 그래서 그것을 조사하고 있던 도중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고 하더군요.”
“이상한 것?”
“네. 기이한 천칭을 들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곳에 손을 올리게 한 뒤 특정 인물을 무자비하게 도륙했다고 합니다.”
천칭이라…….
“또한, 그들은 자신들을 프리아 여신을 모시는 심판자라고 하였더군요. 기괴한 것은 그들 중 한 명에 대한 신변이 드러났는데. 알고 보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농사일만 하던 평민 소녀였다고 합니다.”
“그게 문제가 됩니까?”
“되지요. 추적을 한 기사 수십 명을 상대로 일방적인 학살을 벌였으니까요. 그 때문에 성국 교단의 리나 성녀님과도 이미 이야기가 오가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회의도 사실 그 이유 때문이었지요.”
심판자라…… 지금의 이단심문회는 스스로를 심판자라 하지 않는다.
신의 뜻을 집행한다 하여 집행자라 부를 뿐.
아무래도 그 천칭이라는 것과 아무런 힘도 없던 평민 소녀가 도끼 하나 들고 기사 수십을 도륙했다는 건 좀 거슬리기 짝이 없다.
“알겠습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숙여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이 이야기를 하는 건 직접 조사해보라는 뜻이군요.”
“뭐, 본 뜻은 아닙니다만 오는 게 있어야 가는 게 있지요.”
“일단 조사는 해보겠습니다만. 처리는 알아서 하십시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 * *
어두운 밤. 고요한 숲속.
촤아아악!!!
피가 허공에 흩뿌려지며 한 소녀가 바닥에 쓰러졌다.
“…….”
“신을 부정하는 자. 죽어 마땅하다. 마녀.”
“대체…… 왜. 나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쓰러진 소녀를 둘러싼 수많은 이들은 일정한 패턴을 지닌 갑옷을 입고 있었다.
“프리아 여신을 제외한 다른 존재를 따르는 자 모두가 이단이다. 천칭이 기울기 시작했다.”
“이단심문회는 분명…….”
“우리는 심판자.”
“…….”
그 말에 피를 뚝뚝 흘리며 소녀가 고개를 들었다.
“너희들…… 성국의 인간이 아니구나. 인간이 아니었어.”
그 말과 함께 선두에 나선 검은 머리의 여성이 도끼를 들어 올렸다.
“신의 뜻대로. 심판을…….”
“니들…… 후회할 짓 하는 거야.”
그 말에도 소녀를 둘러싼 이들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마치 인형 같은 모습이었다.
“아…… 에반젤린 아가씨에게 가져다줘야 하는 선물이 있는데…….”
“집행한다.”
콰직!!
하인스 영지 영주집무실로 한 통의 보고가 올라왔다.
샤쿤탈라의 마법 학생이었으나 조기 졸업을 하고 하인스 아카데미의 교수과정을 밟고 있는 교직원 요시아 프랑소스가.
대륙 북쪽으로 향하던 중 정체 모를 괴한의 피습을 당해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