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49화
블루 드래곤 카르마가 일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이 정체 모를 용언 마법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크윽!! 하찮은 인간 따위가!]
“내 말 안 들렸나?”
그렇게 말하며 에반젤린에게서 용신검 트와일라잇을 받아 든 데이비가 조용히 물었다.
“네 심장.”
[…….]
섬뜩한 투기가 주변을 더욱 짓눌렀다.
“몇 그램 나가냐고.”
[무슨 헛소리를!]
“헛소리라니. 아직 사태파악이 안 되나 본데. 니들 심장이 내가 원하는 양만큼 나오면 남은 놈은 살려준다는 소리다.”
그렇게 말하며 데이비는 허리춤에서 꺼낸 두 자루의 환검을 합쳐 하나의 장검으로 바꿔냈다.
“그런데 니들 심장 다 합쳐도, 그 양은 안 되겠다.”
청적색의 기이한 빛이 검신에 머금어진 검은 이내 그와 공명하듯 울었고, 이내 허공에서 초단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버지.”
“에반젤린 곁에 있어 줘. 많이 놀랐을 거야.”
그 말에 초단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초단이 언니?”
“괜찮아. 아버지가 왔으니까.”
초단이가 청적색의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그녀를 꼬옥 안아준다.
그러자 초단이의 검신에서 대량의 신성력이 흩어져 나오더니 이내 초단이의 등 뒤로 새하얗고 거대한 날개가 되어 솟아났다.
날개는 곧이어 에반젤린을 감쌌고 완벽하다시피 한 방어 장막을 펼쳤다.
“미안한데. 니들.”
지금만 살자.
콰아앙!!
그 말과 함께 몸을 비틀거리던 블랙 드래곤 카르엘라가 입에 브레스를 보아 그대로 데이비를 향해 방출했다.
새까만 브레스는 닥치는 대로 잠식시키며 지워나갔고 이내 데이비의 지근거리에 닿았을 때.
쩌억!!
갈라져서 흩어져 버렸다.
[무슨?!]
드래곤 브레스는 에너지체 검으로 벤다고 베어지는 게 아니었다.
물론, 오러 블레이드의 힘이 강하면 갈라내는 것도 가능하긴 하지만 그건 엄연히 브레스가 약할 경우에 해당한다.
드래곤의 브레스는 오러 블레이드로 갈라낼 수 있는 부류가 아니라는 소리였다.
[이런!]
어째서 브레스가 갈라졌는지 이해하기도 전에 데이비와 눈이 마주친 그녀가 알 수 없는 섬뜩함을 느끼며 힘겹게 용언에서 벗어나려 했다.
서걱!!
하지만, 그보다 빠르게 날아든 새빨간 검기가 그녀의 날개를 날라버렸다.
[어?]
쿠우웅!!
날개를 잃어버리고 다시 추락한 카르엘라의 동공이 쉴 새 없이 떨렸다.
그녀를 제외한 다른 드래곤들은 하나같이 일어서지도 못하고 현신조차 못 한 채 제압당해있었다.
이건 이상하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감히 하찮은 인간 따위가 어떻게 드래곤을 이리 가지고 놀 수 있단 말인가.
[으…… 아아아아악!!]
처참한 비명을 내지르며 버둥거리던 카르엘라는 순식간에 그녀의 지근거리까지 다가온 인간을 보며 눈을 부릅뜨고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
뭔가 잘못되었다.
인간은 하찮은 존재. 그렇기에 성룡급 드래곤이 힘에서 밀릴 리 없다.
주로 드래곤 슬레이어에게 당하는 이들은 대부분이 방심한 멍청이들이 대부분.
하지만. 지금 눈앞의 인간은 방심이고 뭐가 할 대상이 아니었다.
‘강해…… 너무 강하잖아. 이거!!’
자신들이 모시는 장로, 그리고 두 명의 드래곤 로드 중 한 명인 군주와 비교해도 감히 어찌할 수 없는 존재감이었다.
물론, 이 정도 드래곤의 수라면 장로급도 어찌할 수 있다.
하지만 본능이 장로급이나 로드 급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대…… 대체…… 당신 같은 존재가 왜…….]
이제 와서 하찮은 미물 같은 판단을 할 때가 아니었다.
그가 마음먹으면 자신들은 그 자리에서 죽을 것이며, 어떤 저항도 소용이 없으리라.
[핫! 설마!!]
그제야 카르엘라는 이곳이 보통 인간의 마을과는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설마 이 인간…….
[설마…… 고룡이십니까?]
장로급 드래곤, 그것도 온건파 드래곤들이 숨겨온 비밀병기 같은 존재.
그렇게 설명하면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그의 용언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느긋하게 걸어 그녀의 머리 위로 걸어 올라간 그가 초단이를 그녀의 미간에 가져다 대었다.
“인간이야 이년아.”
콰득!!
이곳에 있는 드래곤 중 가장 나이가 많으며 사실상 가장 강한 존재.
성룡급이면서 장로급으로 강하다는 평가를 받는 블랙 드래곤 카르엘라가…….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숨을 거둬버렸다.
너무 허무할 정도로 한 마리의 드래곤이 사라져버리자 나머지 드래곤들은 패닉에 빠졌다.
이런 이야기는 없었잖아. 그 강한 카르엘라가 이렇게 쉽게 인간에게 당해버린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 아닌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일단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서 그에 대한 정보를 장로와 군주에게 전해야 한다.
루델라이트가 왜 이곳에 있는지 그제야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이만한 곳에 있었으니 안전하다 판단한 것이겠지.
물론, 착각이다.
만약 온건파와 저 인간이 손을 잡는 날엔…… 과격파. 온건파 쪽에서 타락용이라 부르는 자신들은…….
전멸을 피할 수 없으리라.
[아…… 아아 위대한 강자여…… 부디 자비를…….]
사태판단을 마친 레드 드래곤 하나가 조심스레 고개를 조아렸다.
자존심이 상하지만 지금은 살아나가는 게 우선이었다.
장로들에게 숨기고 몰래 온 것이라 이들을 도울 존재가 없는 것도 사실이니까.
“자비…… 자비라. 그래. 나는 용서하마.”
두려움에 빠진 네 마리의 드래곤들을 향해 데이비가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청적색의 검, 초단이를 내리 세웠다.
그리고는 검 끝을 그들에게 겨누며 말했다.
“그런데 저놈이 용서할까?”
데이비가 엄지손가락으로 뒤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루델을 한 손으로 찍어눌러 제압하고 있던 거대한 흑룡이 보였다.
드래곤과 흡사하지만 다른 무언가.
본능적으로 종의 공포를 느끼게 하는 붉은 눈까지.
그런 존재를 인간이 사육하고 있다는 게 말도 되지 않았다.
저 용은 장로급 용과는 격이 달랐다.
아찔함이 전신을 지배한다.
저 괴물이 움직이면 자신들은 그대로 죽은 목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섬뜩함에 드래곤들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처리해 메가로드리아. 시체는 최대한 온전하게. 그리고, 여기저기 부수지 마라.”
[흥! 마음에 드는군! 계약자!]
[아…… 아아아…… 아아아아아!!!]
공포에 물든 성룡급 드래곤들의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 * *
루델라이트가 눈을 뜬 건 밤이 늦은 시각이 되어서였다.
“아…… 나는 죽었나…….”
그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천장을 보며 자신의 몸을 살폈다.
치명상을 입은 상태에서 카르엘라를 상대로 이기는 건 어려운 일이다.
기억을 되짚어보면 그러했다.
이상하리만치 유희를 끝내기 싫었던 그는 필사적으로 폴리모프를 풀지 않은 채 버텼다.
애초에 드래곤이 유희 중이라는 걸 들킨 시점에서 끝난 것이지만 말이다.
그래도 현신까지는 하지 않으려 버텼다.
그 결과 치명상을 입었고,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때 타락용 소속의 블랙 드래곤 카르엘라가 자신을 극도로 도발했고, 순간적으로 이성이 날아가며 현신했다.
딱 거기까지가 기억이었다.
치명상을 입은 상태로는 다섯 마리의 드래곤을 상대로 현신해도 이길 수 없다. 즉. 자신은 죽었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앗! 루델!”
그때 문이 열리며 루델이 지키려고 했던 아가씨가 후다닥 뛰어왔다.
그리고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루델 괜찮아? 아프진 않아?”
“아……가씨?”
그가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죽지 않기를 바랐다.
인간이고 아니고, 만난 지 얼마 안 되고를 떠나 이상하리만치 루델은 그녀에게서 기원의 포근함을 느꼈다.
그런데.
그런 그녀도 결국 죽었단 말인가.
세상 참 얄궂은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이를 악문 그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당신을 지키지 못했네요.”
“으으응. 괜찮아. 아빠가 와줬으니까.”
“…….”
“아픈 곳은?”
이에 그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아프다?
온몸이 아픈 건 아니지만 자잘한 통증이 남아있다. 죽고 나서도 아프다는 게 말이 되는가?
아니 애초에 죽고 나서 이렇게 만나서 대화하는 게 가능하긴 한가?
그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가씨…… 여긴…….”
“손님용 객실이야. 루델이 많이 아프다고 내가 아빠를 졸랐으니까. 헤헤 대신 겁도 없이 돌아다닌다고 혼났다?”
헤실거리는 에반젤린을 보며 그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대체 어떻게…….”
자신은 죽은 게 아니란 말인가.
그렇다면…….
“살아있구나. 도마뱀.”
“…….”
이윽고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저하?”
“유희가 박살 났는데도 저하라고 불러주네?”
그 물음에 루델이 움찔거렸다.
“괜찮아. 어차피 니가 드래곤인 거 모르는 놈이 없었으니까.”
그 말에 루델이 벙찐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처음 볼 때부터 알았다고. 에반젤린도 륀느도 하다못해 하프 뱀파이어까지 네 정체를 뚫어봤는데 정작 넌 잘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더라. 우스워서 그냥 놔두긴 했는데.”
그 말에 루델이 우물쭈물하며 물었다.
“그게 무슨……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고요?”
“그래. 네가 처음부터 그 레어의 주인인 것도 알았고.”
알면서 턴 거냐?!
속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럼…… 드래곤을 만나면 죽인다고 하던 건…….”
“니가 유희가 박살 났다고 쓸데없이 현신해서 깽판 치지 말라고 경고한 거다.”
그 말에 그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그, 그럴리가요. 드래곤의 유희가…….”
“유희가 발각되면 드래곤은 약속에 따라 그 관련된 것들을 모두 지워야 하지. 본래대로라면 넌 본체로 현신해서 하인스 영지를 쓸어버려야 해. 틀려?”
“맞……습니다.”
이런 상황이 될 줄 알았다면 유희가 아니라 드래곤 루델라이트로써 여기에 머물렀을 것이다.
자잘한 판단 미스 때문에 모두를 죽여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기도 하고.
그런데 왜 자신은 멀쩡한가.
그걸 해내지 못하면 두 가지밖에 없다.
자신이 죽던가. 저들이 죽던가. 그게 안 되면 그는 광룡이 되어 이성을 잃게 된다.
그게 바로 드래곤의 언약이며 약속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멀쩡했다. 아니 멀쩡해도 너무 멀쩡했다.
“그거 말이다. 언약 아닐걸?”
그 말에 루델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유희 문제로 광룡이 된 케이스가 있나?”
그 말에 루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분명 선대에…….”
“직접 봤고?”
그건 아니었다. 실제로 들키는 드래곤은 거의 없었고 들켰다 하더라도 괜히 무리수를 두다가 죽은 어리석은 놈들이 몇몇이었다.
“그거 구라야. 그냥 고룡들이 너희가 중간계에서 사고 칠까 봐 금제를 걸어놓은 거겠지. 실질적으로 언약은 아니니까.”
그 말에 루델이 벙찐 표정을 지어 보였다.
“뭐 들켰으니 어쩔 수 없네. 걱정 마라. 드래곤 하트는 필요한 만큼 챙겼으니 네 것까지 빼앗지는 않으마. 그리고.”
그가 빙그레 웃었다.
“유희라곤 해도 에반젤린을 지켜주려 한 시점에서 보답은 해야지.”
그렇게 말하며 다가온 데이비가 루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운 좋은 줄 알아. 단 한 번에 한해서 내 도움을 받을 권리를 얻었으니.”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루델은 이해하지 못한 듯 보였다.
“자…… 잠깐만요! 아가씨께서도 저를 알아보셨다는 건…….”
그 말에 데이비가 침묵했다.
“아가씨는 인간과 다릅니다. 뭐라고 할까. 이상하리만치 아가씨의 곁에선 제어가 잘되지 않습니다.”
“그거 신기하네.”
데이비가 빙그레 웃었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담담하게 돌아서는 그를 보며 루델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당신은 정체가 뭡니까. 그 다섯 드래곤을 처리할 정도면…….”
“네가 보기에 내가 다른 무언가인 거 같나?”
“인간 같습니다만…… 인간이라고 하기엔…….”
“인간, 아니지 홀른의 장점이 뭐라 생각해?”
그 물음에 루델은 침묵했다.
“진화다.”
다른 말로 성장이라는 소리였다. 이쯤 되면 용족이라서 미물이라 말하기도 참 애매할 정도로 이들의 존재는 가벼이 대할 것이 아니었다.
인간이 단신으로 드래곤들을 찍어누른 시점부터 말이다.
“저어…… 루델. 혹시 내가 있어서 아팠어?”
“……아, 아뇨! 아가씨 그런 건 아닙니다만…….”
“헤헤. 다행이야.”
에반젤린이 그를 끌어안고 토닥거렸다.
“미안해. 내가 고집부려서 열매를 따러 왔다가…….”
그 말에 루델은 피식 웃음을 흘려버렸다.
내 동생도 이랬지. 그래. 그녀의 정체가 뭐고, 그녀에게서 왜 이런 느낌을 받는 건지 그런 게 뭐가 중요한가. 유희도 박살 난 마당에 아무 문제 없으면 드래곤의 입장에서 눌러앉으면 그만인 것을.
“괜찮습니다. 다만 다음부터는 인간 용병 루델이 아닌 드래곤 루델라이트로써 아가씨의 곁을 지키겠습니다.”
“정말?”
“네. 솔직히…… 그냥 떠나기엔 좀 많이 아쉬웠거든요. 아가씨께서 늙어 죽는 그 날까지…….”
그 말에 에반젤린이 입을 오물거렸다.
“으응…… 아마 그건 안 될거래.”
“네?”
“나는 인간이 아닌걸? 아빠의 딸이지만 나는 고대룡의 자식이니까아…… 수명이 엄청 길다고 했어. 드래곤 이상으로.”
그 말에 루델라이트가 좁쌀만 해진 눈으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