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65화
271. 흉악한 바니
하인스 아카데미의 학생인 크룩타는 대족장 쓰의 아들로 향후 대족장의 후보로서 거론될 재목이었다.
라는 게. 스스로의 평가이고.
“어휴, 저 뇌까지 근육으로 가득 찬 새끼…….”
이것이 타인의 평가였다.
“후우…… 벌써 몇 시간째 저러고 있는 거예요. 회장님?”
“벌써 세시간째지 뭐.”
“고블린! 움직이지 마라! 지금 나는 다시없을 예술 작품을 만들고 있다!!”
눈앞에 선 고블린이 바짝 굳은 채 기괴한 자세를 취하고 있자 오크 크룩타는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종이에 물감을 칠했다.
“흐음? 이게 아닌가?”
“이봐요. 크룩타. 그렇게 마구잡이로 쓰다가 다 쓰기라도 하면 뮤우가 화낼 거에요.”
“기다려봐라! 부학생회장! 나는 뮤우에게 제대로 된 그림을 보여주겠다 약속했다!”
사건의 발단은 이러했다.
예술과는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아온 뇌까지 근육으로 가득 찬 무투파 크룩타는 달의 숲의 수장인 하이 엘프, 유리아 헬리샤나가 보살피고 있는 하프 엘프인 뮤우를 포함해 같은 그림동아리의 일원이 되면서부터였다.
지구산 스케치북과 물감으로 아카데미의 두 번째 시계탑을 열심히 그리고 있던 뮤우를 본 크룩타가 자신도 그려보고 싶다며 흥미를 보인 것이었다.
당연히 하인스 아카데미에서 그림 같은 얌전한 취미와는 담을 쌓고 살기로 유명한 크룩타가 그림을 제대로 그릴 리 만무했고, 그것을 본 학생회 일원이자 같은 그림동아리인 부회장 마리벨이 대놓고 그의 그림을 향해 폭소를 터뜨려버렸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그는 뮤우에게 물감과 스케치북을 빌렸고, 그 결과 하인스 영지에서 꽤 떨어진 이곳까지 와서 야생 고블린 한 마리를 잡아놓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비록 그림실력이 엉성한 크룩타였지만 그의 집념은 대단한 수준이었고, 이내 스케치북의 90퍼센트를 썼을 때 그는 만족할만한 그림을 내놓을 수 있었다.
잘 그린 건 아니지만…….
그럭저럭 그의 실력을 생각하면 괜찮은 정도.
만족한 듯 그가 벌떡 일어나자 마리벨이 한숨을 내쉰다.
“그래서. 만족해요?”
“완벽하다! 뮤우에게 보여준다!”
뒤도 안 보고 뛰어가 버리는 크룩타의 거대한 체격을 바라보며 마리벨이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는 슬금슬금 도망치려던 고블린의 머리통을 꿰뚫어버렸다.
“고생해서 살려주고 싶지만 살려 보내면 당신이 후에 저지를 짓이 두렵네요.”
“푸하하하하! 가차 없네! 우리 부회장님은.”
“당신이 너무 안일한 거예요. 고블린의 해악은 상상 이상이라구요.”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종이들을 스윽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수많은 그림들이 보이지만 막대한 집념으로 그림실력이 늘어난 게 보였다.
그런데…….
“이거, 너무 많이 쓴 거 아니에요?”
뮤우가 분명 마지막 스케치북이라고 아껴 썼던 것 같은데.
* * *
“오오…… 멋져!”
눈을 반짝거리며 그림을 보는 뮤우가 천진난만하게 감탄했다.
“오빠 진짜 멋져! 진짜 잘 그렸어!”
뮤우의 칭찬에 크룩타는 볼을 붉히며 시선을 돌렸다.
“크…… 크릉! 내 손에 걸리면 이 정도는 껌이다!”
“우와아…… 진짜 생동감 넘쳐! 직접 보고 그린 것 같아!”
보고 그린 게 맞으니까.
애써 부회장 마리벨과 그녀를 따라온 회장 듀크가 시선을 피했다.
그래. 굳이 언급할 필요 없으면 입을 다무는 것도 방법이지. 잘 그렸으면 된 것이다.
그때였다.
“응? 그런데…….”
뮤우가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마치 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한 손으로 스케치북을 들어 탈탈 흔들었다.
“이상하네? 왜 이거뿐이지?”
그 말에 그림 동아리원들의 몸이 움찔거렸다.
“이상하네? 엄청 많았는데?”
그녀가 파르르 떨었다.
그녀가 팔랑팔랑 흔드는 스케치북은 아무리 많이 봐도 3~4장이 전부였다.
그 말에 크룩타의 표정이 순식간에 파랗게 질렸다.
“아…… 그, 그게 그림을 그리다 보니 많이 써버렸다.”
“괘…… 괜찮아…… 일리나 언니가 다 쓰면 또 사준다고 했어.”
어색하게 답하며 뮤우가 흐느적거렸다.
그러던 중 그녀는 크룩타가 쥐고 있던 물감 상자를 보고 눈을 부릅떴다.
“이…… 이건.”
“컥?!”
“이건 왜 다들 말랐어?”
“…….”
분명 빌려줄 땐 물감이 가득했다.
하지만 지금 물감 팩들은 하나같이 홀쭉하기 그지없었다.
“하…… 하하하하 그것도 어쩌다 보니…….”
“어쩌다 보니?”
뮤우의 눈이 공허하게 변한다.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어…… 어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뮤, 뮤우! 물감은 제가 따로 사드릴…….”
“이건 멀리 갔었던 페르 언니가 엄청 귀한 거라면서 준건데…….”
페르.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흑…… 흐흑…….”
급기야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하는 뮤우를 보며 크룩타의 표정은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다가 소리쳤다.
“내…… 내가 구해온다! 기다려라! 물감과 스케치북! 내가 구해온다!”
“흑…… 흐흑!”
“울지마라! 대 전사인 나 크룩타는 약속은 지킨다!!”
그렇게 외치며 크룩타가 후다닥 뛰어나가 버리자 마리벨은 한숨을 내쉬며 품 안에 있던 토끼를 뮤우의 손에 건네주었다.
붉은 눈동자에 새하얀 눈같은 털을 지닌 작은 토끼였다.
“응? 이건 뭐야?”
“오는 길에 언니가 데려온 아이야. 언니를 따라와서 말이야. 하지만 언니보다 뮤우가 더 잘 키워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새하얀 토끼…….”
그 말에 마리벨은 문득 일전에 만났던 끔찍한 근육 토끼들을 떠올리며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건 트라우마다. 귀여운 토끼를 보고 그 괴물 근육 토끼를 떠올리는 건 좋지 않다.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토끼를 뮤우에게 건네주자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쾅!!
“뮤우! 내가 대신할 물감과 스케치북을 구해주겠다! 따라와라!”
당당하게 외치는 그를 보며 마리벨이 한숨을 내쉬었다.
“언니랑 같이 가볼까?”
귀를 갸웃거리며 올려다보는 뮤우의 귀여운 모습에 마리벨은 그녀를 꼭 껴안고 싶은 충동에 한차례 휘말렸다.
* * *
“이봐. 크룩타. 어디까지 가는 거야.”
크룩타를 따라온 이들은 총 넷이었다.
그림동아리의 일원인 뮤우와 뮤우가 가장 많이 따르는 타디아. 그리고, 마리벨. 그리고 마리벨을 따라 놀러 온 학생회장 듀크까지.
“크룩타 오빠. 어디까지 가는 거야?”
품에 새하얀 토끼를 안은 채 숲 깊숙한 곳까지 따라 들어온 뮤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
그런 것 치고는 굉장히 깊숙한 곳까지 들어오지 않았는가.
“이봐. 크룩타. 이 근방은 요즘 흉흉한 소문이 도는 곳이야. 적당히 하고 돌아가는 게 좋을걸.”
학생회장 듀크의 말에 크룩타가 콧김을 내뿜었다.
“강인한 전사는 그깟 소문에 휘둘리지 않는다! 다 왔다!”
이윽고 크룩타가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형형색색의 꽃들이 가득한 거대한 꽃밭이 존재했다,
“와아…….”
“어머나 예뻐라.”
뮤우와 마리벨은 눈을 크게 뜨고 감탄했다.
“색감이 있는 안료의 재료로 이곳의 염색화들을 쓴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렇지.”
“그러니 이것들로 새로운 물감을 만들어주겠다!”
물론, 지구의 기술력을 생각하면 이곳의 물감은 상당히 낙후된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곳의 염색화들은 굉장히 질이 좋았다.
“와아. 크룩타! 대체 이런 장소를 어떻게 발견한 건가요?”
“그게. 몬스터를 잡다가 우연히 발견했다!”
가슴을 펴며 당당하게 소리친 그의 모습에 뮤우는 신이나 꽃밭에 뛰어들었다.
그리고는 눈을 반짝이며 꽃들을 정성스레 꺾어 가죽 주머니에 담기 시작했다.
“염색화는 꽃 하나로 상당한 양의 물감을 만들어낼 수 있지. 이 정도라면 당분간 고급 물감을 사용할 수 있을 거야. 제법인데?”
“흐, 흥! 나 크룩타는 대족장의 아들로서 약속은 지킨다!!”
그때였다.
가만히 있던 타디아가 묻는다.
“이봐. 그런데 이곳에 몬스터를 쫓아왔다고 했었나?”
“아. 그렇다! 커다란 트롤이었다.”
“트롤이 이곳에 서식한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나도 모른다!”
당당한 대답에 타디아가 눈을 꿈틀거렸다.
“이 숲. 요즘 소문이 안 좋아. 안 그래도 이 일로 학장님이 데이비 저하께 보고한다는 말이 있었는데.”
“흥! 몬스터가 나타나면, 내가 혼내준다! 그거면 된다!”
그렇게 말하며 크룩타가 허리춤에 있는 손도끼를 보여주었다.
“나 크룩타는 몬스터 따위에게 두려움을 품지 않는다.
그의 그런 말에 타디아는 불안한 기색을 내비쳤다.
하지만 그의 불안함도 기우였다고 말하듯 뮤우와 마리벨이 원하는 만큼 염색화들을 채집하고 돌아올 때까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엄청 많이 땄어! 이 정도면 원하는 만큼 그림을 그릴 수 있어!”
“크음. 스케치북은 대신할 종이를 내가 사주겠다!”
“고마워! 오빠!”
해맑게 웃는 뮤우의 미소에 크룩타가 쑥스러워하다 힘차게 소리쳤다.
“자! 돌아가자! 나만 따라와라! 내가 안전하게 데려다준다!”
“흠…… 뇌가 근육이라도 제법 쓸만하네요.”
마리벨이 새침거리자 듀크가 낄낄 웃어대기 시작했고 결국 마리벨에게 한 대 맞는 결과를 일으켰다.
평소에 마리벨이 듀크로 인해 속이 터진다는 말은 자주 하지만 두 사람만큼 서로 잘 투덕거리면서도 잘 어울려 다니는 케이스도 드물었다.
“벌써 날이 저물려고 하네요. 어둑어둑한 게.”
뀨우~
귀엽게 우는 토끼를 품에 안은 채 신이나 총총 걸어 나가던 뮤우를 따라 산을 내려가던 중이었다.
“우웅? 무슨 소리가 들리는데.”
가장 청각이 예민한 뮤우가 멈춰 서며 고개를 돌리자 토끼도 고개를 들어 두리번거렸다.
“뮤우?”
“큰소리…….”
그녀의 말에 타디아가 뒤따라 멈췄다.
“느낌이 조금 싸한…….”
그때였다.
거대한 바람과 함께 하늘이 검게 변한다.
아직 어두워질 때가 아니다. 산의 밤은 일찍 온다고 하지만 그래도 이건 과할 정도로 어두웠다.
이에 본능적으로 듀크가 마리벨을 감싸고 몸을 날렸고, 타디아 또한 뮤우를 끌어안고 몸을 날렸다.
콰아아앙!!
거대한 폭음이 숲 전체에 울려 퍼진 건 한순간이었다.
“크룩타!!!”
운이 좋아 피한 네 사람과 다르게 크룩타는 피하지 않았고 거대한 무언가에 맞아 튕겨 나가버렸다.
너무 일순간이었다.
다급히 소리쳐 그를 불러보지만, 대답은 그에게서 들려오지 않았다.
[여기가 아닌가?]
[이곳보다 북쪽이다. 인간의 국가인 린디스 제국이라는 곳으로 가야 해.]
[그르르…… 망할. 또 실수했군.]
“어…… 어어어어…….”
바닥에 쓰러진 채 나타난 거대한 두 존재를 본 마리벨이 어버버 거렸다.
그럴 수밖에.
그들의 앞에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동화책에서나 존재하는 이들이었으니까.
푸른 비늘을 지닌 두 쌍의 날개를 지닌 거대한 드래곤.
언데드 드래곤 같은 게 아닌 진짜배기 드래곤이 나타난 것이다.
고작해야 생도들이 어찌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조용히 해. 마리벨. 드래곤은 현명한 존재니까. 우리가 그들을 자극하지 않으면 갈 거다.’
그 말에 마리벨은 조용히 타디아와 뮤우에게 시선을 보낸 뒤 몸을 웅크렸다.
[음? 인간에 하프 엘프인가?]
[인간의 영역이니까.]
[귀찮네. 무시하고 가자. 시간이 촉박하다. 늦으면 카이스 장로께서 한바탕 난리를 치실 거다.]
[카이나는 먼저 떠난다더니 더 늦으면 그년이 이죽대는 꼴을 보겠군.]
저들끼리 대화하며 떠나려던 그 순간이었다.
드래곤 중 하나가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진 크룩타를 밟고 지나가려 하자 뮤우가 눈을 부릅떴다.
“안돼!!”
이에 멈칫한 드래곤이 고개를 돌렸다.
[뭐냐. 하프 엘프.]
“크룩타 오빠를 밟지 마!”
소리치는 뮤우의 입을 타디아가 황급히 틀어막았지만 이미 드래곤들의 관심을 끈 후였다.
[뭐야 이건. 오크?]
[가지가지 하는구먼. 이봐. 심심풀이나 할 겸 이것들이나 좀 가지고 놀다 갈까?]
[무슨 헛소리냐. 시간도 없는데.]
[이미 늦은 거 기왕이면 놀다 가자는 뜻이다.]
그렇게 말하며 드래곤 중 하나가 천천히 팔을 뮤우에게 뻗었다.
이에 뮤우가 겁에 질린 듯 움찔거리자 타디아가 급히 움직여 드래곤에게 검을 빼 들었다.
[호오…….]
이에 드래곤의 눈에 이채가 돋았다.
그리고…….
콰앙!!
무형의 힘이 타디아의 육신을 후려치며 날려버렸다.
“타디아!!”
뒤늦게 비명을 지른 마리벨과 듀크가 일어났다.
“위대한 존재이시여. 미천한 저희들이 감히 당신들의 앞길을 막았나이다! 한 번만 자비를 베푸소서!”
겁에 질렸지만, 듀크는 침착하게 드래곤들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예의를 아는 인간이군.]
“감사합니다! 저희들이 감히 미련하여 당신들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한 점, 용서하시고 한 번만 자비를 베푸소서!”
평소의 장난기는 벗어던져 버린 듀크였지만 그의 행동은 가장 냉철했다.
드래곤의 심기를 거스르면 결과는 죽음뿐이니 말이다.
[그럼 자비를 베풀도록 할까?]
“감사합…….”
[다만 그 하프 엘프는 조금 흥미가 동하는군. 몸 안에 기이한 정령 에너지가 있어.]
그 말에 마리벨과 듀크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드래곤이시여?! 그게 무슨…….”
[그 하프 엘프만 데려가고 너희들은 살려주겠다는 소리다. 알겠나?]
그 말에 듀크가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건 크룩타의 잘못이 아니었다. 엄연히 갑작스레 찾아온 사고이며 재앙이다.
대체 드래곤이 왜 이곳에 있단 말인가.
그는 머릿속을 빠르게 굴렸다.
하지만 해결책이 보이지 않았다.
“마리벨.”
이윽고 그는 생각을 굳힌 듯 조용히 말했다.
“회장……님?”
“내가 신호하면 뮤우와 타디아를 데리고 뛰어. 알았어?”
그 말에 마리벨이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천천히 겁에 질린 뮤우에게 손을 뻗는 드래곤이 다가왔을 즈음.
순간적으로 눈을 번뜩인 학생회장 듀크가 검을 뽑아 들었다.
“그 누구도. 내 허락 없이 아카데미 학생을 헤치지 못한다!!”
콰아앙!!
일순간 검기를 일으킨 그가 드래곤을 공격한다.
그야말로 일순간. 그 나잇대 소년의 기술이라 볼 수 없는 엄청난 속도였다.
하지만.
철푸덕…….
피를 뿌리며 쓰러진 건 드래곤이 아니라 듀크였다.
그는 심각한 부상을 입은 채 몇 번을 굴러 쓰러졌고. 모두가 파랗게 질린 채 그 광경을 지켜봐야만 했다.
[건방진 인간. 감히 내 손에 상처를 내려 들어?]
스산한 피어와 함께 주변 모두가 짓눌리고 억지로 몸을 일으켰던 이들이 바들바들 떨며 주저앉았다.
[곧 이곳으로 2차 선발대가 올 텐데 방해꾼이 있으면 곤란하지. 전부 죽일까?]
[죽이자.]
이윽고 드래곤의 입에 브레스가 모여드는 그 순간이었다.
겁에질린 뮤우가 눈을 꼭 감고 웅크린 순간. 그녀의 품 안에 있던 토끼가 버둥거리더니 그녀의 품에서 빠져나갔다.
위험을 느끼고 도망치려는 것일까.
순식간에 뮤우와 거리를 벌린 토끼가 작은 고개를 들어 드래곤을 본다.
[뭐냐 이건.]
이에 드래곤들의 시선이 토끼로 향했을 때.
피어에 짓눌려있던 이들이 모두 토끼에게 시선을 돌린 그 순간.
갑자기 팔뚝보다 작던 토끼가 움찔거리며 늘어나기 시작한다.
모두가 할 말을 잃어버렸다.
작디작은 토끼는 갑자기 거대해지더니 인간보다 훨씬 큰 2족 보행형의 형태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모습은. 모두가 알고 있는 어떤 존재의 모습이었다.
“흐끅…….”
마리벨이 딸꾹질을 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새하얀 거구에 터질 것 같은 근육. 어디서 구한 건지 모를 붉은 팬티 한 장만 입은 토끼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작은 콩 같은 붉은 눈이 일렁인다.
뚜둑. 뿌드득.
이윽고 핏줄이 무수히 돋은 토끼의 팔이 접히며 뿌드득 소리를 냈다.
이두가 부풀어 오른 토끼의 팔뚝은 뮤우의, 아니 마리벨의 머리보다 거대한 근육으로 우락부락했고 핏줄이 터질 것처럼 돋아났다.
가볍게 몸을 푼 토끼가 천천히 걸어 나간다.
뀨?
귀여운 목소리.
하지만.
이어지는 토끼의 행동에 모두가 입을 쩍 벌릴 수밖에 없었다.
주먹을 말아쥔 토끼가 섬광처럼 움직이더니 순식간에 드래곤 하나의 복부가 휠 정도로 강한 일격을 박아넣어 버린 것이다.
뀨.
조용한 토끼의 목소리만 숲에 울려 퍼졌다.
같은 시각.
용의 둥지를 정리하고 있던 데이비의 곁으로 푸른 빛이 모여든다.
[인간! 인간! 큰일 났어!]
[친구가! 뮤우 친구가 위험해! 큰 도마뱀들이 공격하고 있어!!]
그 말에 데이비의 표정이 섬뜩한 살기를 품었다.
“어디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