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66화
정령들의 소식을 듣기가 무섭게 용의 둥지를 빠져나온 내가 도력을 발현한다.
“불닭이.”
-끼이이이이이익!!!
동시에 하늘에서 거대한 화염 덩어리들이 모이며 이내 거대한 불새의 모습을 취했고 맹렬한 속도로 내 앞에 날아와 착지했다.
그 모습을 벙찐 표정으로 보는 이들을 뒤로한 채 내가 그 위에 올라타자 루델이 급히 손을 뻗었다.
“저하!”
“메가로드리아가 남아있으니 그놈에게 도움받아. 잠시 갔다 올 데가 있으니.”
조용한 내 목소리에 움찔한 그가 물러났다.
두려움을 느낀 표정이었다.
“아빠 화났어…….”
뒤에 있던 에반젤린이 륀느를 꼭 끌어안고 말하자 륀느가 품 안에서 사탕을 꺼내 입에 쏙 넣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 이보게! 이대로 떠나면 어찌하는가! 카이스 장로는…….”
그 물음에 불닭이에 올라탄 내가 중얼거렸다.
“샨드라미네아.”
그그그그그극!!
동시에 대지가 뒤틀리며 거대한 지룡이 모습을 드러낸다.
[또 뭐냐.]
“메가로드리아를 도와서 도망친 놈 잡아 와. 팔다리 잘근잘근 씹어먹어도 좋으니 숨만 붙여서 데려다 놔.”
[……알았다.]
드래곤들을 전율하게 만들 정도의 엄청난 기세를 내뿜으며 지룡이 움직인다.
녀석의 몸이 한 차례 빛나더니 이내 마치 허상 같은 형체들이 나타나며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머리가 가장 좋은 건 메가로드리아지만. 머리가 나쁘다고 해서 적을 잡는 요령이 떨어지는 건 아니니까.
“가자.”
이윽고 나는 정령들이 알려준 방향을 향해 맹렬하게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 * *
창공을 불태우며 빠르게 날아드는 불닭이를 타고 정령이 말한 숲에 도달했을 때.
나는 조금 황당한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뻐억!! 뻑!!!
새하얀 피부를 가진 근육이 터질듯한 토끼에 의해 일방적으로 구타를 당하고 있는 두 마리의 도마뱀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으……으아아앙!”
내게 달려들어 안기는 뮤우의 모습에 혹여 상처는 없는지 확인했다.
다행이라면 다행인지 눈에 띄는 외상은 없어 보였다.
“학장님…….”
“다친 사람은?”
“그게…… 크룩타가 좀 다친 것 같습니다! 나머지는 괜찮습니다!”
학생회장 듀크의 말에 아는 그가 가리킨 곳에 늘어진 한 오크를 발견했다.
천천히 다가가 녀석의 상태를 살펴보니 갑작스런 충격에 기절한 것일 뿐 운이 좋은 건지 큰 부상은 아니었다.
“어떻게 된 거야.”
내 물음에 부학생회장인 마리벨이 무언가 설명하려다가 움찔거렸다.
그리고는 몸을 웅크린 채 양손으로 제 머리를 감싸며 와들와들 떨기 시작한다.
“토끼. 싫어…… 토끼 싫어…….”
“…….”
극심한 트라우마가 느껴지는 중얼거림을 보니 그녀에게서 제대로 된 답변을 듣긴 힘들어 보였다.
이전 시험을 치를 때 보팔레빗에게 잡혔던 마리벨이 트라우마를 얻었던 게 기억이 난다.
“확실히…… 지금 내가 봐도 저건 좀…….”
터질듯한 근육을 과시하며 드래곤들을 묵사발로 만들고 있는 보팔레빗의 움직임은 흡사 광기가 물든 느낌이다.
“근육 도핑에 미친 기사들은 많이 봤지만…….”
근손실 난다면서 식습관도 바꾸는 그들도 광기에 절어있다곤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장면을 보면 결단코 그들은 가짜 광기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진짜 광기는…….
뀨?
저놈이고.
“그런 것치고는 힘이 상당한데. 그새 이라도 갈았나?”
아무리 고대 마수라도 무수히 분열하고 있으면 상대적으로 힘이 약해질 수밖에 없건만 현재 보팔레빗의 힘은 내가 알고 있는 놈의 힘의 절반 이상을 품고 있었다.
즉 절반 이상의 분열체를 저 육신 안에 흡수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아무리 잘난 드래곤이라도 고작 성룡급. 그것도 펠리우스 같은 놈보다 약한 놈들이 무슨 수로 이길까.
굳이 녀석에게 진실을 캐낼 필요는 없어 보였다.
그나저나 저놈과 금우궁이 만나면 누가 우세할지 조금 궁금해지기도 하던 참이다.
본래 힘을 생각하면 고대 마수 이상으로 강한 것이 별자리라지만…… 타우르스같이 현신을 한 놈들은 대개 본래 품고 있던 힘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니까.
“학생회장.”
“넵!”
“상황설명.”
짧게 일축하자 그가 조심스레 다가오며 근육 토끼 보팔레빗을 조심스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내게 상황에 대해서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뮤우의 물감과 스케치북을 모조리 써버린 크룩타와 울어버린 뮤우. 그리고 뮤우의 물감을 새로 구해주기 위해 숲까지 찾아왔다가 드래곤의 습격을 받은 것까지.
자잘한 내용이라 굳이 신경 쓸 것은 없지만, 학생회장 듀크의 말 중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었다.
“여기가 2차 선발대 집결지라고?”
“예, 분명 드래곤들이 그런 말을 하긴 했었습니다만.”
“뮤우. 이리 오렴.”
조용히 녀석을 끌어안고 토닥여주자 뮤우는 다시 서러워졌는지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괜찮아. 괜찮아. 내가 왔잖아. 나쁜 도마뱀들 내가 다 혼내줄게.”
“흐끅…… 흐윽…… 혼내줄 거예요?”
“그래. 아주 무섭게 혼내줄게.”
“네!”
눈을 슥슥 비비며 그녀가 보팔레빗을 흘끗 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핼쑥해진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리 익숙해도 저 새하얀 피부에 새빨간 삼각팬티 한 장은 너무하다 싶을 정도의 안구테러였다.
“토끼가…… 토끼가 커졌어…….”
“애들 교육에 안 좋겠네.”
나는 곧바로 기절한 크룩타와 타디아. 그리고 트라우마에 휩싸인 마리벨과 듀크 등등 모두를 한자리에 모았다.
상태가 심해 보이는 그림 동아리원이자 부학생회장인 마리벨이 유별난 수준이지만 나머지도 보팔레빗으로 인한 PTSD가 상당한지 표정들이 좋아 보이진 않았다.
“고생 많았다. 이번 일은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해.”
“저…….”
“음?”
“저건 드래곤인가요?”
듀크가 가리킨 곳에는 보팔레빗에게 일방적으로 구타를 당하고 있는 드래곤 두 마리가 보인다.
앞으로 보나 뒤로 보나 그들의 모습은 와이번 같은 아룡이 아닌 진짜배기 드래곤의 모습 그 자체였다.
하지만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드래곤이 그렇게 쉽게 보이는 줄 아냐?”
“예? 그럼…….”
“그냥 드래곤 흉내를 내는 아룡이야 요즘 대륙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고 하는데. 기밀이니까 어디 가서 떠벌리고 다니지는 마.”
내 말에 타디아가 침을 꼴깍 삼키며 물어왔다.
“저…… 저하 떠벌리면 어떻게 됩니까?”
“너희 자유이긴 하지만 아마 두 가지일 거다. 미친놈 취급받거나…….”
기밀유출을 빌미로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당해서 입을 틀어막히거나.
“어느 쪽이건 너희에게 이득은 없지?”
“흡…….”
“그럼 돌아가. 곧바로 고르네오 교수님과 앨리스 교수님께 진단받고. 저기 저 크룩타 녀석부터.”
기절한 오크 크룩타를 가리키며 말한 내가 손뼉을 친다.
짝짝!!
동시에 빛이 일어나며 그들의 모습이 일순간 사라져버렸다.
갑작스런 공간 전이 마법에 그들이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지만 이내 이해한 듯 체념의 눈길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못 들은 걸 마저 들어보자고. 보팔레빗. 그놈들 이리 데려와.”
내 말에 제 체격보다 수십 수백 배는 큰 드래곤의 꼬리를 잡아 빨랫방망이 질을 하고 있던 보팔레빗이 나를 본다.
[어머나 오빠. 오랜만이다.]
“두드러기 돋으니까 그만 좀 하라고, 그래서, 네가 왜 여기 있는지부터 말해봐.”
[그냥, 단순 우연이야. 근육 도핑에 도움이 되는 열매를 찾다가 우연히 주워졌고, 우연히 휘말린 것뿐이야.]
하필 산에서 마리벨이 데려온 토끼가 보팔레빗일 확률이 몇이나 될까.
참…… 운이 더럽게 나쁘면서도 더럽게 운이 좋은 케이스였다.
“이제 제법 운신이 가능한 모양이네.”
[조금 의외긴 했지.]
뿌드득!!
[끄아아아악!! 내 목 부러진다! 이거 놔라!! 제발 놔라!!]
비명을 지르는 드래곤이 워낙에 시끄러워서 손가락을 튕겨 주변의 소리를 차단시켰다.
그리고는 물었다.
“듣자 하니 드래곤들이 이곳에 집결하는 모양이던데.”
[나도 자세히 듣긴 들었지만, 관심은 없는걸.]
“그래? 그럼 비켜봐.”
그렇게 말하며 내가 드래곤들을 향해 다가간다.
그리고는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쓰러진 블루드래곤 하나의 콧잔등 위에 올라탄 채 몸을 숙이며 놈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이봐. 퍼런 도마뱀.”
[그르르르…….]
나의 이런 태도에 놈이 분개한 듯 눈을 부릅뜬다.
하지만.
[눈깔아. 새끼야.]
내 붉은 눈동자에 서린 이클립스가 가지고 있던 용언의 힘이 놈을 짓누르기 시작하자 녀석은 본능적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드…… 드래곤…… 혹 장로님이십니까?]
용언 마법을 드래곤 이외에 사용할 거라곤 생각지 못했는지 놈들은 내가 인간이 아닌 드래곤이라 착각한 듯 보였다.
“우선 너희들은 개혁파 드래곤이지?”
[그, 그건…….]
[심문의 불]
콰득!! 화르르륵…….
[크아아아아아!!]
녀석의 비늘 하나를 잡아 뜯어낸 뒤 정보를 얻어낼 때 최고의 마법인 심문의 불을 붙이자 녀석들이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두번 물을 때마다 비늘을 하나씩 뜯는다. 이번엔 하나, 다음엔 두 개. 그다음엔 네 개를 뜯어낼 거다. 그리고 전부 이 화염으로 지질 거다. 알아들었나?”
섬뜩한 발언에 그의 용안이 파르르 떨렸다.
[맞습니다!! 맞아요! 개혁파!]
“그래. 이곳에 온 이유는?”
[…….]
스으으윽…….
[며…… 명령을 받았습니다!!]
내가 다시 비늘을 잡아 뜯을 것처럼 굴자 녀석이 비명을 지르며 버둥거렸다.
[맞습니다! 군주의 명령으로 선발대로 향한 이들을 지원하기 위한 2차 선발대! 그게 저희입니다!]
“고작 너희 둘?”
[그게…….]
“대답이 늦다? 이봐. 보팔레빗.”
내 말에 보팔레빗이 근육을 뿌득 소리 내며 비틀자 드래곤들의 표정이 창백하게 질린다.
적이 아닌데도 사람을 창백하게 질리게 만드는데 적을 상대로 얼마나 트라우마를 심어줄지는 굳이 생각할 것도 없다.
어휴 저 징그러운 놈.
아무리 봐도 이놈은 극도의 흉악한 토끼임이 틀림없다.
그러니 고대 마수 소리 들었겠지만.
지금까지 본 고대 마수들과 비교해도 단연 이놈만큼 흉악한 존재는 본적이 없다.
[곧 나머지도 도착할 겁니다! 골드 드래곤 카이나가 좌표를 찍어준 대로 오는 것인데 저희가 먼저 온 겁니다!]
“그 수는.”
[성룡급 드래곤 열 정도에 장로급 한 분 정도…….]
“전해지진 않았나 보네.”
이렇게 준비도, 대책도 없이 수로 밀어붙인다는 점을 볼 때 타락용 쪽은 내 존재를 아직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으로 봐도 무방했다.
“본대도 합류하나?”
[예, 예. 그렇습니다.]
“몇 명인데.”
[그게…….]
“대답 안 해?”
[저희도 잘 모릅니다! 본래 지금의 숫자도 저희 생각 이상으로 많으니까요!]
“많다고?”
[예, 구…… 군주께서 데려오신 드래곤들인데 사실 저희도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는…….]
그냥 드래곤의 내전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 강하게 든다.
뭐가 됐건, 그들의 말을 해석하면 이렇게 해석이 된다.
“그러니까. 니들 여기서 잡아놓고 기다리면, 여기로 타락용들이 무더기로 넘어올 거란 말 아냐.”
귀찮게 복잡하게 굴 것 없이 싹 다 여기서 묻어버리면 된다는 뜻이다.
치지지지직!!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고개를 들어 본 하늘 위로 수많은 균열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수는 이놈들이 말한 것 이상으로 수가 많았다.
각각 색의 드래곤들의 등장에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듣기로는 타락용 쪽도 드래곤의 수가 이렇게 많다곤 들은 적이 없는데.”
눈에 보이는 드래곤만 무려 20마리.
그중 나는 묘하게 기시감이 드는 드래곤들을 볼 수 있었다.
[오빠. 저거 몇몇은 조금 다른데?]
보팔레빗이 근육을 튕기며 내게 말해왔다.
그리고.
그 드래곤의 존재를 본 내가 담담하게 말했다.
“저건 티오니스 드래곤이 아닌데?”
왜 딴 대륙 드래곤이 여기 있냐.
지금까지 본 드래곤은 거대한 체격에 한 쌍에서 두 쌍, 혹은 세 쌍의 날개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보인 드래곤 중 일부는 흡사하지만 조금 다른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마치 인종이 다른 것처럼 말이다.
문제는 그 인종이 다른 드래곤의 형태를 내가 본 적이 있다는 점.
“요쉬 대륙.”
직접 내게 어떤 전투기술을 가르친 적은 없으나 자잘한 전투경험을 제공했던 요쉬 대륙 출신의 어떤 모험가 영웅이 구현했던 드래곤과 정확히 일치한다.
내가 알기로는 요쉬 대륙은 과거 심연의 공주 사태에 한차례 몰락했다고 들은 바 있다.
스르르륵…….
천천히 손을 뻗어 올린 나는 손을 뻗어 중얼거렸다.
“홍단이, 청단이.”
내 말과 함께 붉은색과 푸른색의 얇은 환검이 손에 쥐어졌고 이내 빛을 내뿜기 시작한다.
이에 하늘에서 나타난 약 스무 마리가량의 드래곤들이 놀란 듯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일단 공격전엔 경고라도 해야 할 터.
“아아, 드래곤들, 잘 들리나? 여긴 라운 왕국 영공이다. 너희들이 무슨 생각으로 침범했는지는 별로 관심 없다만. 당장 내려오지 않으면 요격하겠다 오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