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67화
272. 각자의 움직임
물론 내 말을 한 번에 들을 정도였다면 이렇게 입 아프게 싸울 것도 없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드래곤들은 나를 무시하듯 날아올랐고, 그중 한두 마리가 입에 브레스를 모으기 시작했다.
[어디서 날파리가 짖는군.]
[어서 정리해라. 빨리 합류해야 뭐라도 건지겠지.]
그들은 내 존재를, 드래곤들을 보고 이런 짓을 하는 내 행동거지에 황당해하면서도 익숙하게 나를 지도상에서 지워버리려 했다.
[하하하하하하!! 네놈들은 이제 죽은 목숨이다! 보아하니 은둔하던 장로급 같은데 아무리 장로급이라도 이건 못 이길걸?!]
그때 보팔레빗에게 죽도록 얻어맞고 그 후에 내게 제압당했던 블루드래곤이 오만하게 소리쳤다.
“그래? 그래 보여?”
빙그레 웃으며 나는 가볍게 홍단이와 청단이를 허공에 띄웠다.
동시에 청단이 홍단이의 검 끝이 드래곤들을 향해 겨눠지며 허공에 떠올랐다.
[멍청한 놈들 거기서 뭘 하는 거냐, 어서 합류해라!]
이윽고 바닥에 있던 두 블루드래곤을 눈치챈 이들이 그들을 타박하며 브레스를 한도치까지 끌어모았다.
하나도 아니고 브레스가 둘.
직격하면 일대 지형이 바뀔 위력을 지니고 있으리라.
하지만 그들의 브레스는 방출되지 못했다.
내 주변으로 홍단이 청단이를 필두로 한 새하얀 기검들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냥 기검이야 드래곤에게 위협적일 것도 없기에 무시하면 그만인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게 그냥 기검이 아니라면?
신격까진 아니라도 신력이 뒤섞인 마나로 만들어진 기검이라면?
검선 급을 넘어 검신의 벽을 넘나드는 경지의 검사가 응축시킨 기검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 정체는 모르나 저 기검에 찔리며 절대 몸 성히 빠져나갈 수 없다는 원인 모를 두려움이 그들의 본능에 경종을 두드리게 만들었다.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망설임 없이 기검들을 응축시키고 진동시켰다.
[애…… 앱솔루트 배리어!]
다수의 드래곤 전부가 그 기검의 위험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상위 배리어 마법을 펼쳐냈다.
무지갯빛의 육각형 장막들이 한두 겹도 아닌 수십 겹 중첩되어 펼쳐졌고 곧 핵방공호의 철문 두께는 우스울 정도의 두께를 지닌 장벽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판단은 옳았다.
끝까지 여유를 부렸다면 그 자리에서 모조리 추락했을 테니까.
물론, 그렇게 장벽을 친다고 해서 바뀌는 것도 없겠지만.
“사출.”
내 손끝을 따라 수백 수천의 섬광이 하늘을 향해 비스듬히 쏘아져 올라간다.
그들이 친 배리어 한 장 한 장은 금방 찢어버릴 수 있지만 그게 수십 겹이 쌓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내가 만든 기검이 날카롭다 해도 저들의 방어는 견고했다.
이에 사출된 검들 일부가 장막과 부딪히며 굉음을 일으켜냈고, 일부 드래곤들이 피를 토하게 만들 정도로 강하게 장벽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부서지기 시작하는 장벽을 보며 기겁한 드래곤들이 장벽을 추가로 만들어낸다.
이에 나는 추가로 선물을 그들에게 날려 보냈다.
아직 사출되지 않은 채 내 주변을 부유하고 있는 청적색의 두 자루의 환검.
홍단이와 청단이가 빛에 휩싸이며 한 자루의 장검 초단이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강화에 성공한 초단이의 예기는 고대룡은 물론, 타나토스 같은 신들조차 섬뜩하게 만들 정도의 힘을 품고 있는데 고작 성룡급 드래곤들이 막아낼 리가 있을까.
와장창!!!!
순식간에 그들이 친 엄청난 두께의 장벽이 박살 나며 그들의 육신이 기검에 노출되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아악!!]
[커헉?! 이게 무슨?!]
그나마 기검에는 버텨내던 장벽이 일순간에 박살 나며 흩어지자 드래곤들 내부에서 경악 어린 비명이 터져 나왔다.
순식간에 날개를 관통당하고, 몸체를 관통당한 드래곤들이 마나의 제어 권한마저 잃은 채 추락하기 시작했다.
그들 중 일부는 드래곤 하트나 다른 급소들을 당해 절명해버린 놈들도 있었다.
“어이쿠 아까워라.”
비록 성룡급이라 초월의 종언이나 트와일라잇에 사용한 드래곤 하트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재료들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하나같이 귀한 재료들이다.
그들을 그냥 둘 내가 아니었다.
이제는 임퍼펙션을 넘어 두 번째 존재가 된 이름을 읊는다.
몸도 풀고, 스트레스도 풀고, 귀한 소재도 파밍하고. 이거 완전 개 혜자잖아.
[데스 로드의 이름으로 명한다.]
[일어나라.]
스산한 내 목소리와 함께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진 드래곤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며 검은 화염에 타오르는 용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보팔레빗이 흥미롭다는 듯 중얼거렸다.
[오오. 멋진걸.]
검은 화염을 피워올리며 떠오른 드래곤들이 일렁이는 안광을 번뜩이며 내 곁에 두 줄로 도열하기 시작했다.
그 위세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에 이르러 주변 공간을 무겁게 짓눌렀다.
드래곤의 색이 어떻든 이들은 하나같이 검은 화염을 몸에 두르고 있다. 그 모습은 마치…….
“니들은 흑염룡 분대로 하자.”
아주 잠깐 굴릴 녀석들이지만 그래도 이름 정도는 줘야지.
어디 팔뚝에 봉인해야만 할 것 같은 이름이지만 어차피 부끄러움은 내 몫이 아닌 죽은 저 드래곤 시체들의 몫이다.
절도있게 도열한 채 내 명령만을 기다리는 절반 이상의 드래곤들의 모습에 살아남은 동족들은 아연실색한 기색을 보였다.
이에 나는 조용히 내 것이 되어버린 언데드 드래곤들에게 첫 명령을 하달했다.
“가서 물어.”
엄청 아프게.
콰아앙!!
동시에 검은 화염을 피워올린 언데드 드래곤 군단이 맹렬한 적의를 보이며 살아남은 드래곤들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언데드 드래곤인 만큼 내가 강화시켜도 한계는 명확하지만, 치명상을 입고 살아남은 드래곤들을 처리하는 데엔 오히려 넘치는 전력이다.
[…….]
“방금 아까 내게 뭐라고 했더라? 장로급이라도 저것들은 못 이긴다고?”
내 말에 처음 보팔레빗에게 제압당해있던 두 마리의 블루드래곤은 서로를 멍하니 바라보았고, 이내 내게 고개를 처박았다.
[살려주세요!!]
[뭐든 하겠습니다!]
아무리 잘난 드래곤이라도 목숨은 중요한 모양이다.
이에 나는 언데드 드래곤에게 둘러싸여 추락하는 2차 선발대들을 느긋하게 관망하며 물었다.
“니들 레어에 돈 많냐?”
내 물음에 그들이 움찔거렸다.
[그…… 그게…….]
“돈 많냐고.”
[드…… 드리겠습니다!]
겁에 질려 소리치는 그들을 보며 내가 빙그레 웃다가 미소를 지웠다.
“아니 주는 건 당연하고.”
[예?]
“많냐고 물었잖아. 이 새끼들아.”
내가 뒤편에 있는 언데드 드래곤들을 가리키며 말하자 그들의 표정이 파랗게 질렸다.
“정확하게 대답해. 만약 내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다음엔 니들이 저렇게 될거야.”
내 말에 그들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참고로 적다고 해도 니들은 저렇게 된다.”
[그게 무슨?!]
“말뜻을 이해를 못 하는 모양인데.”
적으면 만들어서라도 준비해놓으라고
가지러 갈 테니.
내 말에 두 드래곤의 표정이 넋이 나간 듯 공허하게 변해버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협박을 마친 나는 확인 차원에서 천천히 성흔에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공명하기 시작한다.
[오딘. 오딘. 듣고 있으면 은총이라도 내려줘요.]
프리아 여신과 다르게 직접적으로 나와 연결된 그들인 만큼 내 목소리가 닿지 않을 리 없다.
하지만.
“…….”
차원의 벽을 관리하는 일로 인해 신의 영역에서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오딘은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가 침묵한다.
* * *
별의 움직임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중앙 별 조디악을 기준으로 움직이는 별자리들이 하나둘 깨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아니. 정확히는 깨어났으나 잠든 것처럼 조용히 움직이던 별들이 일제히 태동하기 시작했다.
“절반 정도라…… 제법 아쉽군요. 조디악을 제외하고 대부분을 손에 넣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고작 셋이라니…….”
어두운 공간의 중앙에는 작은 제단과 그 제단 위로 펼쳐진 구체가 보였다.
마치 밤하늘의 별을 담아놓은 것 같은 구체를 올려다보던 외눈의 작은 소녀가 침묵한 채 그녀에게 말을 걸어온 한 젊은 남성을 무시했다.
“아아. 대답을 해준다면 더 좋았을 텐데…….”
그렇게 말하며 한 손으로 외눈 소녀의 뺨을 쓸어내린 사내가 싸늘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 덕분에 우리는 힘을 얻었습니다. 당신 덕분에 본래의 규정을 부수고 새로운 세상을 개척했습니다.”
그렇게 말한 사내가 소녀의 귓가에 다가갔고, 마치 연인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그러니 영원히 내 곁에 남아 당신의 힘을 나를 위해 사용해주세요. 지금까지 한 것처럼.”
사내는 조용히 소녀의 뺨을 쓸어내리다가 어깨를 감쌌고 이내 그녀를 희롱하듯 뺨을 쓰다듬었다.
금발 외눈의 귀여운 소녀는 그런 사내의 행동에도 끝내 반응하지 않았다.
싫은 기색도, 좋은 기색도 내비치지 않는 완벽한 무표정.
“이럴 게 아니군요. 당신의 힘이 또 필요합니다. 부디 저희를 해치려는 반란 세력을 멸절해야 합니다.”
그렇게 말한 그가 지도를 펼쳤다.
“하지만 아직 제게 반하는 세력이 있더군요. 바라옵건대 겁도 없이 제게 검을 들이미는 존재를 죽여주세요. 전쟁을 선포하고, 일방적으로 유린하여 부숴주십시오.”
사내의 말에 오딘이 처음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육신은 순식간에 고차원 다중 마법진에 휩싸였고 수백의 고위마법사들이 필사적으로 만들어놓은 공간 전이 방해 마법 장막을 우습게 뚫어버리며 사라졌다.
그녀는 압도적이다.
그녀는 비교할 수 없는 대상이다.
감히 칭하기도 두려운 존재.
사실상 이 아트렐리아의 전설이며, 이곳 마법사들이 닿고 싶어 하는 잃어버린 시대의 영원한 목표.
이윽고 마탑과 연결된 마석중 하나가 빛을 꺼뜨리기 시작했다.
바로 금발의 소녀를 보낸 마탑이며 현재 사내와 냉전 중인 마탑이기도 했다.
전쟁이 벌어지면 서로 치명상에 가까운 피해를 입게 되기에 두 마탑은 싸움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존재를 얻은 뒤로 그런 복잡한 문제는 필요 없어졌다.
그녀는 최고의 마법사이며, 최고의 도구가 아닌가!
사내의 표정이 황홀하게 변했다.
“이 일이 끝나면 당신과 저는 혼인을 치를 겁니다. 아아 걱정 마세요. 비록 당신의 몸이 작다곤 하지만 나는 그것도 나쁘지 않으니.”
그의 눈동자에 번들거리는 감정은 뒤틀린 애정과 집착이었다.
“아아…… 나의 마신이시여.”
그가 천천히 손끝으로 소녀의 초상화에 있는 입술을 훑었다…….
“오딘이시여.”
스산한 목소리. 오딘을 기다리는 사내는 알지 못했다.
그가 포획하려 했다가 실패한 몇몇 존재들이 필사적으로 어떤 인물을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