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94화
조직과 관련된 범죄묵인. 각성자 길드의 편의성을 봐주는 행동. 암암리에 저질러진 정적, 혹은 어떤 이들의 살해 행각과 은폐 행위.
파고들지 않았을 뿐,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물을 만난 것처럼 파도 파도 괴담처럼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힘을 가진 인간이 그것을 휘두르고도 문제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인간은 본인도 모르게 더 깊숙이 심연 속으로 기어들어 가게 된다.
박 의원은 초창기엔 정말 경악스러울 정도로 증거를 숨겼다.
하지만 갈수록 그의 그런 행동을 제지할 수 있는 이가 줄어들자 그의 행동은 상당히 대담해졌다.
물론 오 형사가 그동안 모아온 증거자료들의 효과가 컸지만 말이다.
“대체 이걸 어떻게 찾은 건지…….”
“본래 가지고 있었답니다. 다만 언론플레이건 뭐건 크게 효과를 볼 때까지 기다린 모양이지요.”
“이만한 증거가 있습니다. 아직도 그를 두둔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더 볼 것도 없습니다. 각하. 박 의원의 이런 행동은 절대 묵과할 수 없습니다. 공론화시켜서…….”
“어허! 왜 하나만 보고 둘을 못 보십니까. 다들 청렴결백하다 할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박 의원 한 명이 문제가 아니에요. 이 사례를 허용하는 즉시 다음번에도 똑같은 일이 벌어질 겁니다.”
그들의 외침에 조용히 있던 대통령이 짧게 헛기침을 했다.
“크흠.”
동시에 주변이 고요해진다.
이 자리는 비공식적인 자리. 그런 만큼 대통령은 가감 없이 이점을 말했다.
“이상하군요. 마치 범죄를 저지르고도 들키지 않는다는 게 특권인 것처럼.”
“크흠! 큼! 각하 그 뜻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 딱히 반대할 이유가 어딨습니까.”
“그건…….”
“다 들어내세요. 박 의원은 선을 넘었습니다. 이제 그를 구원할 수 없어요. 있는 죄 없는 죄 다 뒤집어쓸 겁니다…… 그리고 그 끝은 저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어둡겠지요.”
“각하…….”
“왜 그렇게 됐는지 아십니까? 단순히 청원이 올라와서요? 아닙니다. 데이비 왕자가 간섭했습니다.”
그 한마디에 의원들의 표정이 굳었다.
그가 갑자기 나타났다는 말에 놀란 것이다.
“그동안 나타나지 않던 자가 왜 또…….”
“그는 박 의원을 철저하게 조사하여 그가 죄를 지었다면 세상에 공표하고 집행유예를 주라고 하더군요.”
단순히 용서를 위해서? 아니었다.
“설마…….”
“그 설마가 맞습니다. 유예는 잠깐의 텀일 뿐. 그는 이 나라, 아니 현대 인간들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너무 잘 알고 있어요.”
“지독하군…….”
여기저기서 탄식이 나온다. 하필 걸려도! 왜 건드려도 하필 그 인간의 지인을 건드린단 말인가.
물론, 박 의원은 다른 의원들 이상으로 속에 구렁이를 담고 있는 쓰레기 같은 작자라는 건 대부분이 아는 사실이었다.
그저 그가 쌓아놓은 것들 때문에 누가 내색하지 않았을 뿐.
실제로 한번 물갈이된 정계 판에서도 그는 자신을 철저히 포장해 살아남은 몇 안 되는 부패 정치인이 아니었던가.
그에게 거스르고 정치생활이 끝장나버린 이들만 손으로 헤아리기가 어려운 수준이다.
“사필귀정…… 모든 것은 본래 자리로 돌아간다라…….”
다른 국가의 인사라면 이렇게 일방적인 관계는 될 수 없겠지만 티오니스 성자는 달랐다.
게다가 과거 한국이 몬스터의 공습에서 살아남을 때. 정부에서는 그와 몇 가지 조약을 맺은 적이 있었다.
“각하, 하지만 조금만 삐끗해도 이건 엄청난 후폭풍이…….”
“틀린 말 아닙니다. 데이비 왕자. 웃는 얼굴과 다르게 생각 이상으로 잔인하고 이성적이면서, 냉정한 사람이에요. 하지만 비서실장, 우리가 지금 임기가 얼마나 남았지요?”
“예? 그게…….”
“원전의 폐기물 중화 시스템.”
그 말에 모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그 이야기가 왜 나와? 그런 표정들이다.
“동해에 매장된 지하자원 채굴과 개발에 도움이 되는 소재.”
그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교역품으로 내세운 물건입니다. 다들 선거 준비하셔야지요? 이게 잘만 성사되면…….”
그 말에 의원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머릿속에서 저울이 한쪽으로 맹렬하게 기울기 시작한다.
천 대통령의 말에 각 당의 의원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 성공실패 여부 가능성도 검토해야…….”
“설사 불가능하다 할지라도. 티오니스 대륙과 교역에 성공한 유일한 케이스라면 국제적인 가치는 더 올라갑니다. 당연 해외 투자도 늘겠지요. 사람들이 바라는 청년 실업문제 해결도 숨통이 트일 겁니다. 무엇보다.”
그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가 열었다.
“최근 사람 짜증 나게 하던 망할 이웃 정부에게도 한 방 먹일 수 있겠군요. 빌어먹을 각성자 문제와 넬타리드 교단의 일로 얼마나 마찰이 많았습니까.”
이웃 된 국가 중에 사이가 좋은 국가는 없다.
“우리가 언제까지 맞고만 있을 겁니까. 조상의 얼 같은 거 다 때려치우고 맞았으면 패서라도 반격해야지요.”
만장일치는 한순간이었다.
* * *
“으…… 으으으…….”
절규하는 몰골로 사내가 몸을 웅크린 채 눈앞의 청년을 바라보았다.
고작해야 20대 정도 되어 보이는.
갓 소년의 티를 벗어난 듯한 이였지만 박 의원은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방구석에 처박히려고? 어림도 없지. 당신은 이 세상이 얼마나 잔인한지 한번 봐둘 필요가 있어.”
이게 어딜 봐서 타 세계의 사람이란 말인가!
현대의 인간들은 스스로를 갈고 닦기에 각기 개성이 굉장히 강하면서 굉장히 한결같은 전혀 반대되는 모습을 동시에 지닌다.
그리고. 그런 그들에게 주어진 익명성은 그들을 상상 이상으로 일치단결하게 하며.
때로는 극한으로 잔인하게 만든다.
“제발…… 자비를…….”
처음엔 그게 뭐가 문제인가 했다.
하지만 이게 시간이 갈수록 사람을 어떻게 미치게 만드는지. 확연하게 느끼게 만들어준다.
다리를 꼰 채 의자에 앉아 그가 말했다.
“자비? 언제는 힘이 있어서 짓밟는 게 뭐가 잘못됐냐고 하지 않았나?”
“그…… 그건…….”
“직접 당해보니 기분이 참 엿 같지? 당신이 짓밟은 인간들도 다 똑같은 사람이야.”
데이비가 일어난다.
어두운 방 안으로 그의 붉은 눈이 섬뜩하리만치 차갑게 느껴졌다.
“걱정 마. 이것도 결국 오래 못가니까. 아주 잠깐. 당신이 짓밟은 사람들의 심정이라도 느껴보라고. 가해자의 인권? 그건 피해자의 인권을 챙기고 나서 측은지심까지 들 때나 하는 소리지,”
“…….”
“에이리아의 눈에서 눈물이 났으면 네 눈에서는 피눈물을 뽑아내 주지.”
그 말과 함께 그는 사라졌다.
현대는 사람이 많지만.
사람이 많은 이 정글은 때때로 그 어떤 것보다 잔인하게 고요하고, 잔인하게 휘몰아친다.
* * *
“아이고 박상철 교수님 아닙니까. 정말 오랜만입니다. 얼마 전에 학회 때 참석을 못 하셨다던데 한국대 교수 일은 할 만합니까?”
“반갑습니다. 윤회상 교수님. 고려대 쪽으로 이직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하하. 뭐 그렇게 됐습니다.”
포항공대의 한 건물 회의실에서 다수의 인원이 모였다.
한국대 신소재 공학과 박상철 교수.
고려대 공학 교수 윤회상.
서울대 공학 교수 엄지연.
그 외에도 숭실대. 건국대, 카이스트, 포항공대 쪽까지.
쟁쟁한 교수들이 모두 거대한 회의실에 모였다.
“그래서. 대체 우리를 이렇게 모은 게 누구랍니까.”
“저야 모르지요. 학장님이 꼭 좀 참석해줬으면 한다 해서 찾아온 겁니다.”
“어? 박 교수님도? 우리도 그런데.”
“예…… 저희도 그랬습니다.”
“엄 교수님도요? 대체 무슨 일이길래…….”
“가서 절대 놀라지 말고 쓸데없이 사고 치지 말라고 하더군요.”
“하하하. 엄 교수님이 이래저래 사고 많이 치셨지요.”
껄껄껄 웃는 교수들을 웃음소리가 커진다.
“그런데 어째…… 우리를 이곳에 모이게 한 사람은 코빼기도 안 비치네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하나같이 바쁜 양반들인데. 곧 학회도 있고…….”
“아니. 이 교수님. 이 교수님은 이 학교 교수님이시지 않습니까. 뭐 들은 거 없어요?”
“저도 뭐…… 갑자기 출근하는데 수업 전부 재끼고 이쪽으로 오라는 말만 들어서 말입니다. 덕분에 대학원생 애들 시켜서 휴강 공지하느라 진땀뺐습니다.”
그때였다.
덜컥-
회의실의 문이 열리며 작은 금발의 귀여운 소녀와. 정말 아름다우면서도 장난기가 가득한 인상의 소녀가 들어왔다.
금발소녀는 고작해야 열둘에서 열 셋 정도로 되어 보이고.
붉은 머리의 아름다운 소녀는 열아홉 정도 되어 보였다.
“꼬마 아가씨들. 여긴 무슨 일이니?”
가족을 만나러 왔나? 외국인 같은데 닮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냥 친구 사이인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지만 결론적으로 이 아이들이 이곳을 잘못 찾아왔다는 것을 느낀 그들이었다.
이에 가장 친근한 미소를 지어 보인 서울대의 엄 교수가 그녀들에게 다가가 묻자 금발의 소녀가 겁을 먹은 듯 움찔하며 붉은 머리 소녀의 뒤로 숨었다.
“어머나 귀여워라. 꼬마 아가씨는 몇 살?”
파르르 떨리는 눈동자로 올려다보던 금발의 꼬마 소녀가 입을 뻐끔거린다.
“왕녀님. 언제까지 겁먹을 거예요.”
“응?”
뜻밖의 호칭에 교수들이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동시에 적발 소녀의 뒤로 숨었던 금발의 꼬마 아가씨가 나선다.
“바, 반갑스니다! 에오니…… 샤 올 라운이라고 해요! 하, 하인스 영지 연구공방의 관리장을 맡고 있어요!”
혀가 꼬인듯한 발음과 함께 그녀가 빨개진 얼굴로 소리쳤다.
“여러분들을 모시게 된 건 다름 아닌 제 요청이었어요.”
에오니샤의 말에 교수들은 한참 동안 벙찐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 아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었다.
외국인같이 자연스러운 머릿결과 눈썹 색을 보면 분명 한국 아이는 아닌데. 놀라울 정도로 한국어에 유창하다.
단순히 장난이라고 하기엔 아이의 표정은 한없이 진지했다.
무엇보다.
“방금…… 올 라운이라고…….”
“마…… 맞아요. 라운 왕국 제 3왕녀에요!”
양손을 꼭 모은 채 대답하는 귀여운 모습에 교수들은 저도 모르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그래. 에오니샤 양. 라운 왕국 3왕녀라면 공주님이네요?”
“아…… 그, 그건.”
“그래. 공주님께서 무슨 일로 우리들을 이곳에 불렀는지 물어도 될까요?”
마치 아이를 어르고 달래듯 말하는 교수들의 모습에 에오니샤가 눈을 꼭 감았다.
그리고는 이내 심호흡을 하며 눈을 크게 떴다.
“제가 지구의 과학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게 많아요! 게다가 적용시키지 못하는 것도 있구요.”
뭘 적용시키지 못한다는 것일까.
교수들은 이 앙큼한 공주님이 뭐 자신들에게 공부라도 배우고 싶어서 이러는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곧 에오니샤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들을 놀라게 했다.
“지…… 지금부터 이곳의 연구소를 빌려서 여러분들과 프, 프로젝트를 진행하려고 해요!”
“프로……젝트?”
“네! 우선은 원전에서 나오는 방사능 폐기물들을 중화시키는 연구에 관해서…….”
교수들의 머릿속이 멍해진다.
“다만, 기존의 방법으론 불가능하기에 유르기안 대륙에서 수입해온 블루스크린 금속의 화학식을 이곳의 시약으로 중화시킨 뒤 먼저 조율하는 쪽으로…… 아! 화학에 관한 정보는 이곳에 와서 공부하고 있어요! 비록 제가 아는 건 티오니스 화학과 금속학의 일부지만 여기 있는 티아라 영애는 그 점에 관해선 사실상 대륙 최고의 기술자이기도 하고…….”
손짓해가며 설명하는 에오니샤의 말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교수들은…….
그녀를 보면서 극한의 괴리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빨개진 얼굴로 허둥지둥 설명하는 에오니샤를 보며 티아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리고는 에오니샤의 머리를 푹 누르며 말했다.
“교수님들. 우리 왕녀님이 지금 긴장해서 말이 잘 안 나오시는 거 같네요.”
“아…… 네.”
“반가워요. 티아라라고 해요. 그냥 이름 그대로 불러주시면 감사드립니다.”
“반가워요. 티아라 양. 그런데…… 방금 왕녀님이 하신 말씀은…….”
“복잡한 건 내버려 두고 본론부터 말할게요. 저희가 여러분들을 이곳에 모은 이유는 여러분들이 관련 분야의 최고 교수님들이라는 말을 들어서예요.”
그 말에 교수들이 서로의 시선을 교환했다.
“지금부터 여러분들의 지식과 저희 지식을 잘 병합해서 어떤 프로젝트를 진행하려고 해요.”
“프로젝트? 아까 원전 폐기물 어쩌고 하는 그건가?”
“네. 조금 뜬금없긴 하지만 완전히 관련이 없지도 않을 거예요.”
그녀가 예쁘게 웃었다. 그리고는 손에 들고 있는 두랄루민 케이스를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동시에 케이스가 개봉되며 푸른빛이 서늘하게 감도는 금속이 나타난다.
척 봐도.
이건 지구에 없는 금속이다!
“여기 이게 블루스크린 금속이라는 거에요. 유르기안이라는 대륙에서 온 거죠.”
그 말에 교수들은 처음 듣는 대륙의 이름에 눈을 부릅떴다.
신소재 학과 교수들의 눈이 번뜩인다.
저걸 잘만 연구하면 학회에서 수많은 논문을 찍어낼 수 있다!
그런 생각이 순식간에 닿은 그들이 손을 뻗으려던 찰나. 에오니샤가 제 키만 한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부자연스럽게 탕탕 내리쳤다.
마치 투정을 부리는 아이처럼 말이다.
“아…… 안 돼요! 오라버니께서 아직 샘플을 많이 보내줄 수 없다 하셨어요. 아껴서 써야 해요!”
“아……아아…….”
“이…… 일단 저희는 이쪽 금속에 관한 지식과 화학식을 해석하여 제…… 제공할 거에요. 교수님들은 지구의 기술과 지식을 구분하여 제공해주세요.”
티오니스 대륙의 연금술사와 지구의 교수들의 연구 협약.
이제야 무슨 뜻인지 이해한 이들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티오니스 최고의 과학자라는 이들이 이토록 어린 소녀들이라는 것에 조금 의아함이 들었다.
사람 사는 곳은 아무리 그래도 다 똑같은 법.
“저기 티아라 양? 그런데 두 사람뿐인가요? 다른 어른들은 없거나…….”
그 말에 티아라가 빙그레 웃었다.
“그 말은 저희로선 부족하단 말씀이신가요?”
“아…… 그건…….”
어떻게 해야 아이들이 상처를 받지 않을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새로운 소재는 흥미가 동하지만 아무리 봐도 이제 초등학생 중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들에게서 느끼는 괴리감은 상당했다.
이에 티아라는 잠시 고민하다가 손뼉을 쳤다.
“왕녀님. 왕녀님. 그거 해봐요.”
“네?”
“그거 얼른!”
그 말에 에오니샤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주변을 둘러본다. 그리고는 떨떠름한 얼굴로 보드마카를 화이트 보드에 탁! 하고 가져다 댔다.
물론, 뚜껑을 열지 않은 보드마카가 칠해질 리가 없다.
“어라? 이거 왜 이러지…….”
“풉…….”
교수들 중 일부에게서 귀엽다는 듯 웃음소리가 나오자 티아라는 조용히 그녀의 손에 있던 보드마카의 뚜껑을 풀었다.
“자. 됐죠?”
그 말에 에오니샤가 불안하게 묻는다.
“그런데 이번엔 어떤 주제로…….”
“복잡하게 생각할 거 있어요? 저거, 블루스크린 금속 그걸 지구의 과학과 병행해서 해석했던 증명.”
그 말에 에오니샤는 잠시 고민하더니 티아라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요?”
“너무 높아서 팔이 닿질 않아요…….”
풉!
다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후우…… 자!”
이에 티아라는 그녀의 양 겨드랑이에 팔을 끼워 안아 들었고 에오니샤는 잠시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빠르게 무언가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 저건 한국어?”
티오니스 소속이면 티오니스 문자를 써야 할 텐데. 에오니샤는 엄연히 한국어로 무언가를 써 내려가고 있었다.
동시에…… 도저히 초등학생 소녀가 가진 것이라고 볼 수 없는 기하학적인 수식들이 화이트보드에 그림 그려지듯 쓰인다.
그것은 도저히 초등학생 소녀가 해낼 것 같은 게 아닌 극도로 복잡하면서도 극도로 정교한 해석들이었다.
그런 그녀를 안아 든 채 티아라가 조용히 말한다.
“에오니샤 왕녀님 본인은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요, 라운 왕국 왕가에는 왕실의 피가 짙으면 특성이 나오곤 해요.”
현 왕족 중 이 특성을 가진 이는 단둘뿐이다.
“특성?”
“완전기억능력. 다만 에오니샤 왕녀님은 데이비 왕자님처럼 완전기억능력 수준까지는 아니지만요. 다만 본인의 특유 재능과 일반인의 수십 배에 달하는 기억능력이 모여서 악마 같은 재능을 지니고 있다고 대륙에서 평가되고 있죠.”
아는걸 발견하는 건 쉽다.
하지만.
모르는 것에 대한 길을 개척하는 건 어렵다.
고작 10대 초반의 소녀가 시계의 왕녀라 불리는 게 우연일 리가 없었다.
“저 또한 연금학파 기술고문의 수제자죠. 적어도 교수님들을 실망시킬 파트너는 아닐 거라 생각해요.”
이후 세계 각국 잡지에 한국의 한 대학교에서 티오니스와 한국 연구진들이 힘을 합쳐 원전 폐기물을 중화시키고 재활용하는 연구에 돌입했다는 소식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퍼져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