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62화
그녀가 기이한 행동을 할수록 속이 타는 건 이쪽이었다.
아직 그녀의 행동, 목적에 대해선 파악할 수 있는 게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녀가 모종의 목적을 이루었을 때. 그때 그녀가 건 신력을 통한 봉인 마법의 초기 구조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
조금 기다려야겠지만 일단은 믿는 수밖에 없었다.
“자. 다음은 뭘 하면 됩니까?”
뭔가 새로운 경험을 한 것처럼 조용히 찐 감자를 오물거리던 그녀는 그것을 천천히 삼킨 뒤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은 없지만 제법 만족한 느낌이다.
“신기하네요. 당신이 이렇게 의사소통을 할 줄은 몰랐는데.”
[이동.]
그녀의 말에 나는 더는 묻지 않고 이동했다.
그저 말없이 그녀를 따라다니며 그녀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을 해주는 게 전부였다.
[저것.]
이번에 그녀가 가리킨 것은 다름 아닌 연극이었다.
저런 연극을 본다고 어떤 감흥도 없을 거라는 것에 내 손모가지를 걸지.
내용 자체는 아르부트 왕가를 찬양하는 듯한 내용이었다.
다만 각본 자체가 상당한 싸구려였던 터라 쉽게 말해 세뇌에 가까운 연극이라고밖에 볼 수가 없었다.
물론 그런 싸구려라 해도 프리아 여신에겐 다를 수 있을까 싶어 연극 내내 그녀의 얼굴만 지켜본 결과.
그녀의 표정은 한 치의 변화도 없었다. 아니. 무표정인데. 어째서 가엽다는 느낌을 풍기는 것일까.
“프리아 여신님. 이런 말 하기 뭣하지만, 당신의 뜻을 나는 전혀 모르겠습니다. 애초에 과거의 신인 당신이 나를 어떻게 이렇게 잘 알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는데. 이러시는 이유가 뭡니까.”
[아리아.]
“아니. 그건 위장…….”
내 말을 끊고 다시 한 번 수첩을 들이민 그녀가 아리아라는 이름을 강조한다.
지금 페르세르크의 일을 누구보다 가장 잘 알고 있을 그녀일 텐데.
내 물음에 걸음을 멈춰선 그녀가 내게 말했다.
사각사각
[24시간.]
“하루?”
[믿음 끝에 은총을. 성자가 원하는 바를.]
저 말투는 내가 매번 기도할 때 쓰던 기도였다.
그녀의 대답은 간단했다.
하루 동안 군말하지 않고 따라오면 해결책을 제시해주겠다는 뜻이었다.
하루 정도라면야. 조금 투자할 가치가 없잖아 있지만 거부한다 하여도 내게 방법이 있기나 할까.
그녀의 힘은 고작해야 5서클 마법사에 약간의 신력 정도. 5서클 마법사가 제법 흔한 이 세상에선 평범한 수준이었다.
도저히 창세의 신이며 그 어떤 존재도 해칠 수 없는 영겁의 초월자라고는 볼 수 없었다.
“후우…….”
결국, 포기해버린 나는 그녀가 만족할 때까지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주자는 결정에 이르렀다.
스윽.
“뭡니까?”
이윽고 어디선가 간식거리를 구해온 그녀가 내게 내밀었다.
마치 입을 벌리라고 말하는 듯한 그 모습에 내가 입을 벌리자 그녀는 어색하게 그것을 내 입에 쑤셔 넣었다.
“웁…… 웁!”
내 비명에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계속해서 간식을 쑤셔 넣었고 꾸역꾸역 삼키고 나서야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그동안 제가 뭐 건방지게 굴어서 복수하는 겁니까?”
내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으로 대답했다.
[미숙한 생명의 합일.]
남녀 간의 데이트.
[양 생명 간의 교감이 필요.]
그러니까. 데이트를 하고 있으니 서로 먹여주는 건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뭐 이런 뜻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 말해 뭣하리.
그녀는 초월자이지만 어째서인지 지금의 행동은 상당히 백치 같은 느낌을 전해주었다.
애초에 세상을 창조한 창세신의 의지가 한낮 생명체와 교감을 할 일이 있겠는가.
그녀의 알 수 없는 행동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묵묵히 나를 끌고 가 길거리 공연을 본다든지. 무표정한 얼굴로 같은 자리에 앉아 식사를 한다든지 하는 행동을 보였다.
이에 속이 점점 답답해진 나는 그녀의 눈치를 살피다 물었다.
“당신의 힘이 아니면 페르의 기억과 트라우마를 완전히 제어할 수 없었던 겁니까?”
내 말에 케이크를 오물거리던 그녀가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는 귀엽게 입안에 든 것을 삼키고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아니라면 페르는 과거에 이미 사라졌을 거라는 소리였다.
물론 그녀를 마왕으로서 유지시키려 했던 만큼 기적의 이유는 그런 것에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때, 그녀가 어딘가를 가리킨다.
“저건…….”
내 시야에 비친 것은 어떤 허름한 복장을 한 남녀들이 양손을 구속당한 채 병사들에게 끌려가고 있는 모습이었다.
“병사들? 저들은 뭡니까?”
내 물음에 그녀는 답하지 않았다.
말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으로 그녀의 힘이 새어 나가지 않게 막고 있는 것일까.
“왜 말을 안 해요. 처음 만났을 때처럼 말하면 될 텐데.”
내 말에 그녀는 결국 수첩에서 무언가를 적었다.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대가.]
“대가? 대화를 하기 위해 대가가 필요하다는 겁니까?”
[아바타. 강신의 형태. 진실을 모르는 껍질.]
아…….
말을 잘할 수 있는 형태이긴 하지만 그 형태가 되면 그녀가 나를 도와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참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저들은 뭔데요.”
그녀는 정확히 그들을 가리켰다. 마치 스스로 알아보라고 말하는 것처럼.
이에 나는 노점주에게 하레스에게 받은 통화 하나를 던져주며 물었다.
“저들은 뭡니까?”
“응? 모르나?”
“예 여행자라 이번에 처음 와서요.”
“흐음…… 그렇군. 쯧…… 반역자들이네. 이 나라의 범죄자 집단이지.”
범죄자 집단? 다만 그런 것 치고 그들의 행색이나 눈빛은 전혀 기가 죽은 느낌이 아니었다.
“그런데 반역자들이라니 반란이라도 꿈꾼 겁니까?”
“본인들을 저항군이라 말하며 이 나라에 해를 끼쳤다더군. 수많은 높으신 양반들을 죽였다고 하는데…… 나는 잘 모르네. 아. 그래도 저기 중앙에 있는 붉은 머리.”
노점주인의 말에 내가 시선을 옮기자 그곳에 보이는 한 청년이 보였다.
붉은 머리에 다부진 근육이 인상적인 사내는 전신에 상처가 가득했고 머리가 부스스했으나 눈빛은 강렬하기 그지없었다.
“유명하지 붉은 전갈이라고. 저자의 손에 죽은 이들의 수가 무려 수십을 넘었다더군. 나머지는 저자의 잔당들이고, 뭐, 사흘 뒤에 광장에서 공개 처형한다는 말은 들었네.”
“공개처형이라…… 사실 그리 달가운 짓은 아니네요.”
“쉿! 어디 가서 엄한 소리 하지 말게. 괜한 소리 했다가 나랏님들 귀에라도 들어갔다간 경을 칠걸세.”
그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주변의 시선을 살피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아르부트 도시국가의 반역자. 이명은 붉은 전갈이라고 하는데 겉보기엔 그 실력이 마스터 수준. 그런 그가 저렇게 무력한 모습을 보니 손목에 채워진 저 구속구가 원인이렷다.
“실력이 제법이긴 하네.”
말없이 그들의 뒷모습을 보던 나는 프리아 여신에게 다시 물었다.
“저들은 왜 부른 겁니까.”
지금의 나로선 심연의 권능 같은 게 없기에 상대가 어떤 사정을 지니고 있고, 어떤 심정인지 알 길이 없다. 그저 눈빛이나 행동거지 등을 보고 유추할 뿐이니까.
내 물음에 그녀는 한참 동안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들을 구하고 싶니?]
어렵사리 한 문장을 만들어내 내게 묻는 걸 보니 단순한 질문은 아니었다.
“아뇨. 굳이 내가 일국의 반역자를 구해야 할 이유라도 있습니까? 게다가 간단한 행동 하나하나가 엄청난 나비효과를 일으키게 될 텐데.”
모든 인간의 행동에 따라 미래가 바뀐다.
지금처럼 최대한 큰 틀의 흐름에 변화가 없다면 그 영향은 덜하겠지만 조금이라도 잘못 건드렸다가 어떤 미래가 될지 나로선 도저히 짐작하기 어렵다.
내 대답에 그녀는 조용히 침묵하다 무언가를 써 내려갔다.
[선택을 존중해.]
그리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후 그녀는 단어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거리만 거닐었다.
그런 그녀의 옆을 따라 걷기를 한참. 그녀는 급기야 내 손을 조용히 잡아끌었다.
정말 겉보기엔 어리숙한 커플이 데이트를 하는 모습이지만 프리아 여신이 인간에게 연정을 품는다는 건 사실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나였다.
그때였다.
묵묵히 걸어가던 중 갑자기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거리를 거닐던 사람들이 일제히 양쪽으로 갈라지며 엎드리기 시작한 것이다.
조금 과격한 왕국의 왕족들은 자신들의 행차에 이런 퍼포먼스를 원하는 이들도 제법 있다.
사실 그리 희귀한 광경도 아니기도 했다.
그렇다고 생판 처음 보는 인간에게 몸을 조아릴 순 없는 노릇이라 나는 적당히 몸을 숨기듯 골목 안으로 스르륵 빠져들어 갔다.
하지만 프리아 여신은 천천히 그 자리에서 다른 이들과 같이 몸을 숙인다.
마치 평범한 사람이 된 것처럼 말이다.
태초의 창세신이며, 그 존재부터가 고귀한 존재.
왕족이건 그 잘난 반신들이건 발치를 보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는 만큼 당장에라도 뛰쳐나가 그녀를 일으켜 세우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일었다.
마치 눈앞에서 가족을 모욕당한 것처럼.
이거, 성흔 때문은 아니겠지라고 믿고 싶지만 나 스스로도 확신이 서진 않았다.
이윽고 사람들이 연 길 사이로 커다란 오픈형 마차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마차에 탄 이는 덩치가 산만 한 어떤 남성 귀족이었다.
그는 느긋한 표정으로 천천히 대로를 지나갔고 나는 그 몰골을 보며 그의 머리에 모근을 지워버리려다 멈췄다.
아. 이런 것도 함부로 하면 안 되지 참. 속 터지네.
그때였다.
“악!”
말이 지나가면서 걷어찬 돌멩이 하나가 작은 아이의 머리를 때린 것이다.
그 아이의 비명에 모두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아이에게 몰려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
“흐음?”
“죄송합니다. 재상 어르신!”
이윽고 벌떡 일어난 한 여인이 후다닥 달려 나와 아이를 감싸고는 머리를 조아렸다.
“철이 없는 아이의 행동입니다. 부디 자비를…….”
겁에 잔뜩 질린듯한 여인의 말에 재상이라 불린 사내는 허허 웃어 보였다.
“허허허, 괜찮네. 괜찮아. 다치지 않았나.”
“그…… 그것이…….”
여인이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대답을 회피하자 기사 중 하나가 엄하게 소리쳤다.
“어허! 재상께서 하문하고 계시지 않느냐! 냉큼 답하거라!”
“그…… 그렇습니다. 정말 괜찮사옵니다! 부디 자비를…….”
“자비라니. 내 못난 말이 아이를 다치게 했는데 용서를 빌게 무에 있는가. 안 그러느냐?”
마차에서 내린 그가 눈을 반짝였다.
“그…… 그것이…….”
“허어…… 상당히 크게 상처가 벌어지지 않았느냐. 여봐라. 이 모녀를 마차에 태우거라. 내 미련한 말이 사고를 쳤으니 저 모녀에게는 배상을 해야겠다.”
“예?”
“태우라면 태우래도.”
재상의 말에 기사가 반문하려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이해한 듯 대답한 기사는 이내 두 모녀를 마차에 태웠다.
그러던 중 재상의 시선이 바로 근처에 있던 프리아 여신에게로 향했다.
“흐음?”
“…….”
여신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거기 자네, 고개를 들어보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했던가, 재상이 부른 것은 다름 아닌 프리아 여신이었다.
그녀에게 다가온 재상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은 채 재차 말했고, 그제야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흐음…….”
“재상님 왜 그러십니까.”
“아닐세. 아니야. 내 닮은 이를 본 듯하여 그랬네.”
그렇게 말하며 미련 없이 물러가는 그였다.
그렇게 재상이 떠나가고 사람들이 일어났을 즈음이었다.
“역시 재상님은 인복이 많은 분이셔.”
“누가 아니라나.”
떠들기 시작하는 이들을 뒤로한 채 프리아 여신은 다시 내게 물었다.
[나를 구할테니?]
그 물음에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 * *
프리아 여신은 밤이 늦자마자 모든 구경을 멈추고 숙소를 잡으라 내게 요구했다.
이에 나는 적당한 숙소에 자리를 잡았다.
검신 하레스가 준 돈은 거의 다 사용해버렸으니 적당히 아껴 쓸 필요가 있었다.
“여기 누워서 쉬세요. 저는 찬물이라도 좀 뒤집어쓰고 오겠습니다.”
침대에 앉은 채 말없이 나를 올려다보는 그녀가 내 팔을 잡는다.
“왜요?”
내 부름에 그녀는 천천히 손을 뻗어 바닥을 가리켰다.
“여기서 하라고요?”
클린 마법을 쓰면야 문제가 없지만, 물이 그녀에게 튀길까 괜히 빠지려 했던 게 의미가 무색해져 버렸다.
김이 새버린 나는 그녀가 다소곳이 앉은 침대의 맞은편 의자에 앉아 물었다.
“이제 하루 지났어요. 보여줄 때도 됐잖아요.”
그녀가 과거의 프리아 여신이건 미래의 여신이건 이제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약속은 약속이고 나는 오늘 하루 그녀의 고집에 어울려주었으니까.
“솔직히 나는 지금 당신이 뭘 원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아바타라고 해도 당신이 이렇게 내려와 있는 것도 본래 불가능해요. 알고 계시죠?”
내 물음에 그녀는 조용히 나를 보다 천천히 움직였다.
그리고는 침대의 끝에 앉아 등을 기대고는 천천히 눈을 감는다.
“아니 잠깐만요. 이건 이야기가 다르잖아.”
내 외침에 그녀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는 수첩을 꺼내더니 이내 뭐라 적어 보여주었다.
[24시간.]
“아…… 설마 정확히 24시간?”
고개를 끄덕여 보이는 그녀의 행동이…… 묘하게 귀여워 보인 것은 기분 탓일까.
말없이 나를 바라보던 그녀는 이내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내 팔을 잡아 당긴 뒤 자신의 다리에 내 머리를 대고는 어색하게 이마 부분을 쓸어내렸다.
“이거 불륜입니다.”
내 말에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한참을 침묵하다 이내 허공에 손을 뻗었다.
갑작스런 그녀의 행동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을 때 즈음.
그녀의 손끝으로 푸른 빛의 무리들이 모여들며 어떤 마법진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단순한 원소 마나와 신력이 섞인 어떤 정교하고도 복잡한 마법진을 보며 나는 이것이 페르에게 걸린 기억 봉인의 초기 형태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에 나는 조금이라도 놓칠세라 시시각각 변하는 그것들을 모조리 시야에 담아 넣었다.
이것만 있으면 페르가 트라우마에 시달려 정신이 붕괴되지 않고 그녀의 상태를 호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좀 전만 해도 24시간을 채워달라고 하시더니.
왜 갑자기 마음이 변한 것일까.
[보여주고 싶어.]
내 생각을 읽은 듯한 그녀의 행동에 나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심연의 힘 같은 것이 뒤섞이며 내가 알고 있는 현재의 기억 봉인 마법 형태로 변한다.
그 구조를 완전히 머릿속에 기억해놓은 나는 상상을 초월하는 복잡함에 혀를 내둘렀다.
“기가 막히네. 이러니 오딘도 풀지를 못하지.”
이건 단순히 구조상의 문제가 아니었다. 어떤 특정 조건을 해소하지 못하면 그 어떤 방법을 사용해도 구조해석이 불가능한 난공불락의 요새 그 자체가 아닐 수 없었다.
빛을 보여준 그녀는 이내 내게 손을 뻗은 뒤 내 뺨을 쓸어내렸다.
묘한 공기 속에서 나를 한참이고 바라보던 그녀는 천천히 다가왔고, 이내 내 뺨에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을 맞춘 뒤 천천히 떨어졌다.
순간. 그녀의 얼굴이 처음으로 변화가 생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붉어진 얼굴.
부끄러움의 상징.
물론 한순간의 변화였지만 나를 놀라게 하기엔 충분했고. 그녀는 이내 수첩에 무언가를 적었다.
[고마워.]
“……거참…….”
[이 이상 관여하지 않겠다고 선택했다면.]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덜컹!!!
나무로 된 숙소의 문이 박살 나며 그 안으로 연기 같은 것이 쏟아져 들어온다.
동시에 이것이 마취 가스라는 것을 깨달은 내가 인상을 찡그리고 모조리 날려버리려던 찰나.
그녀가 내 팔을 잡아 제지한 뒤 수첩을 보여주었다.
좀 전의 글귀가 천천히 사라지고, 무언가가 쓰여진다.
[여기서 그만 돌아가.]
그 말과 함께 그녀의 신력이 순간적으로 나를 이탈시켰고, 그 찰나의 순간 그곳에서 빠져나온 나는 프리아 여신님이 숙소에서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
그녀는 대체 무엇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 그건 직접 물어봐야겠다.
“사람 참는 것도 정도가 있지.”
그렇게 말하고 사라지면 내가 얼씨구나 할 줄 아셨나.
그녀가 나를 공간에서 이탈시킨 찰나의 순간은 이곳에선 꽤 상당한 시간이 흘렀던 모양이었다.
누군가가 침입해 그녀를 납치해간 상황. 그녀는 그런 상황에서도 마치 운명대로 라고 말하듯 거부하지 않고 이동한 모습이었다.
그녀가 마법의 초기구조를 보여준 이상 이곳에 남을 이유는 없다. 순간적으로 이탈되었을 때 그녀는 내게 본래 세계로 돌아갈 힘을 건네주었다.
실제로 누가 여신님을 납치했건 그녀를 어찌할 수 있을 리는 없다.
하지만.
왜 짜증이 나는 거지.
“이것들이 사람을 너무 우습게 보네.”
여기서 내가 무언가를 하면 당장 미래에 큰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돌아가는 게 맞다.
하지만 결국 나는…… 그러지 못했다.
벌컥!!!! 터어엉!!!
창문을 박살 내듯 튀어 오른 나는 순식간에 지붕 위로 이동했고 이내 멀지 않은 곳에 빠르게 사라져가는 몇몇의 인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은 사람의 형상을 한 마대를 둘러메고 달리고 있었는데. 그게 누구인지는 생각할 것도 없었다.
세상을 창조한 창조신 주제에. 고작 피조물인 인간의 손에 저렇게 들쳐져 납치되는 여신님이라니.
넬타리드나 타나토스가 봤다면 기겁할 모습이지만.
그녀는 도저히 내 상식으로 생각할 수 없는 존재였다.
다만, 중요한 것은 한 가지 확실했다.
지금 여기서 그녀를 저대로 보내선 안 된다.
신력도 마나 같은 것도 사용하지 않은 단순히 데이비 올 라운이라는 인간으로서의 감이 외쳤다.
반드시 지금 돌아가는 꼴을 막아야 한다고.
하지만, 과연 내가 어떻게 변할지 모를 미래를 함부로 조작해도 괜찮은 것인가.
그런 생각이 내 발목을 붙잡았다.
찰나의 고민 끝에 나는 한 발 내디뎠다.
[믿는 자에게 은총을.]
그녀가 초기에 했던 말이었다. 그 믿음의 범위는…… 과연 페르의 마법에 대한 거래 하나뿐이었던가.
스릉…….
마치 기다렸다는 듯 나를 막아서는 다수의 인영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돌아가라. 목숨만은 살려주마.”
“하나 묻겠는데. 지금 저분을 납치해가는 그놈이 내가 생각하는 그놈이냐?”
답을 알면서도 물었다.
이에 암살자 중 하나가 검날을 보이며 말한다.
“입을 조심히 놀려라. 네까짓 게 평생을 바쳐도 감히 올려다볼 수 없는 고귀한 분이시다. 지금 돌아가면 목숨은 살려주지.”
나를 향해 아량을 베풀 듯 말하는 그들을 보며 내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중지 손가락을 올렸다.
“x까.”
동시에 내 등 뒤로 시꺼먼 악마의 형상 같은 것이 일렁이기 시작했고. 그것을 본 이들의 표정이 굳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