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76화
“벌써 아이가 발차기를 하는 거 같구나.”
잘록한 배를 쓸어내리며 페르세르크가 장난스레 말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좀.”
그녀의 기분이야 이해 못 할 것은 아니지만 전날 이후 페르세르크는 유별날 정도로 기분이 좋아져 있었다.
“언니가 많이 기분이 좋은 모양이에요.”
정원의 꽃에 물을 주던 에이리아가 예쁘게 웃으며 귀를 쫑긋거렸다.
괜한 심리가 돋아 그녀의 귀를 만지작거리자 빨개진 얼굴로 어쩔 줄 몰라하는 그녀였다.
“저. 귀는…….”
“아. 미안해.”
“아니에요.”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인 그녀가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그. 좀 예민하니까…… 이런 건 밖에선 좀.”
어렵사리 말한 그녀가 부끄러워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곰곰이 생각해볼 때. 그녀는 다른 수인에 비해 유별나게 귀와 꼬리가 예민한 편이기도 했다.
“좋은 꿈 꾸셨나요?”
“그래.”
피식 웃으며 그녀가 들고 있던 물뿌리기를 받아 내가 뿌리기 시작하자 그녀는 키득거리며 웃어 보였다.
“왜?”
“아뇨. 행복해서요.”
약하게 쥔 주먹의 작고 흰 손등으로 입을 가리며 키득거리는 그녀의 눈꼬리가 예쁘게 휘었다.
“이렇게 함께 나란히 있잖아요.”
그리고, 함께 같은 풍경을 보고. 같이 웃고. 같이 이야기를 나눈다.
황녀였던 그녀치고는 정말로 소박하지만, 어떤 의미로는 황족이기에 가장 바라는 삶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이래서 왕성에서 잽싸게 벗어나길 잘했네.
바리스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이 나라를 이끌 생각이 전혀 없었다.
물론, 지금 나의 위치는 사실 국왕의 명령으로 까라면 까야 하는 위치이긴 하지만 현재 왕성에서는 나와의 접촉을 최대한 피하고 있는 게 현실이기도 했다.
켕기는 게 있으니 무리하게 손을 댔다가 역풍을 맞을까 두려운 것이리라.
그렇다곤 해도 해외 문제에 관해서 전혀 아무런 이야기가 없는건 아마 바리스의 덕분이 아닐까 싶었다.
“언니. 곧 좋은 소식이 들려오는 거 아니에요?”
“쿡쿡. 그랬으면 좋겠구나. 개인적인 마음으로는 사내아이도, 딸아이도 모두 좋다만.”
“어느 쪽이든 귀엽겠네요. 아. 그 아이도 혹시 뿔이…….”
“글쎄. 잘 모르겠지만 본녀의 뿔도 탈부착식인 것으로 봐선 마족의 혈통이 제대로 넘어올는지는…….”
사실 그 부분에 관해선 잘 알 길이 없었다.
“그럼 만약에 아이가 나왔는데 뿔이 있으면…….”
실제로 티오니스는 마족과의 전쟁을 한차례 치른 적이 있었다.
그 때문에 대륙의 정세는 마족에 대해 좋은 소문이 돌 리 없었다.
물론, 그건 마족들도 마찬가지이지만 말이다.
“만약에 뿔이 나오면…….”
“숨겨야겠지.”
괜히 분란을 일으켜서 좋아질 게 없을 테니 말이다.
“숨기는 방법은 많아.”
이를테면 아티펙트 같은 것을 이용한다든지.
물론, 뿔이 있다면 그것을 일부러 없애가면서까지 소란을 피울 생각은 없었다.
다만 한가지는 분명히 할 수 있었다.
뿔이 있건 없건 그건 중요하지 않다고.
* * *
사실 불안한 기분이 확실시되었을 때의 씁쓸함은 쉬이 떨쳐지지 않는다.
페르의 일이 잘 풀려서 기분이 좋은 것도 사실이지만 전날 내 신경을 거슬리게 했던 어떤 힘의 유동은 지금껏 나를 신경 쓰게 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시간이 흘러서야 확인되었다.
사박…… 사박…….
“데이비 님. 명령한 물건, 회수 성공적.”
내 명령을 받고 영주성을 이 잡듯이 뒤진 륀느가 끝내 작은 수첩을 내게 가져왔다.
마음속으론 발견되지 않기를 바랐는데. 결국, 발견된 것이다.
수첩의 정체는 프리아 여신이 의사를 표현할 때 쓰던 물건이었다.
겉보기엔 평범한 수첩에 불과하지만 아주 옅게 신력이 스며들어있는 게 보였다.
“이걸 성국에서 보면 신물이라면서 난리라도 치겠네.”
실제로 특수한 힘은 없지만, 프리아 여신이 사용한 물건이라는 건 변함없었다.
“그렇게 말도 없이 갑니까.”
나는 륀느를 대동한 채 그녀의 수첩이 발견된 장소로 향했다.
내게 프리아 여신은 어떤 의미였는가.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녀는 미워하되 미워하지 못하는 그런 사이였던 것 같았다.
묘한 느낌이다. 마치 오랜 가족이었던 것처럼. 미워하려야 절대 미워할 수가 없는 그런 존재처럼.
“…….”
말없이 프리아 여신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는 내 곁으로 륀느가 다가온다.
프리아 여신과 흡사하지만, 그 키부터가 다른 륀느는 말없이 내 등을 두드렸다.
“데이비 님.”
말없이 나를 위로하듯 등을 두드리는 그녀의 행동에도 나는 묘하게 알 수 없는 상실감에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적어도 가면 간다고 말은 하고 가야 할 거 아니야 이 양반아…….”
든 사람 몰라도 난사람 자리는 안다고 했던가.
그녀의 기척이 사라진 이후 그녀가 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걸 확인하고 나니 더욱 씁쓸함이 몰려왔다.
손위아래의 누이나 혹은 어머니의 존재, 어느 쪽이건 프리아 여신은 끝내 내게 너무 큰 빈자리를 남겨놓았다.
“고작 며칠인데.”
고작 며칠에 하는 짓은 너무 뻔뻔할 정도로 독단적이었다.
“데이비 님…….”
“아니야. 그냥, 좀 쉬고 싶네. 륀느. 고생했어.”
천천히 몸을 일으킨 뒤 나는 프리아 여신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다 륀느의 머리를 꾹꾹 눌러 쓰다듬었다.
그러자 불만 어린 기색을 내비치며 녀석이 헝클어진 제 머리를 손질했다.
이후 나는 회랑의 영웅들에게도 프리아 여신이 어디로 갔는지는 듣지 못했다.
결국, 그녀의 아바타는 내게 한마디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런 내 복잡한 심정을 눈치챈 것일까.
내가 돌아오자 페르세르크는 단번에 내 감정을 눈치채고 물어왔다.
“무슨 일이 있는 게야?”
“아니…… 별거 아니야.”
“별거 아닌 게 아니구나. 본녀의 눈에 비치는 그대는 지금 굉장히 슬퍼 보여.”
그녀의 말에 나는 한참을 침묵했다.
“말해봐. 본녀가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
“아냐. 원래 있어야 할 일대로 흘러간 것뿐이니까. 여기서 더 손댈 건 없어.”
내 말에 그녀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섬뜩하리만치 예리하게 짚어냈다.
“프리아 여신이 사라졌구나.”
“어…… 어?”
“그대는 매번 여신에게 분노하고 이를 갈면서도 그토록 여신을 따르지. 마치 부모 자식처럼 말이야.”
사랑하는 감정과는 다른 가족의 사랑 같은 감정이라며 그녀는 키득거렸다.
“이리와.”
말없이 내 머리를 끌어안은 그녀는 조용히 내 등을 토닥였다.
“그녀는 죽은 게 아니야 데이비. 언젠가 다시 깨어날 터.”
“그렇겠지.”
다만, 지금 같은 프리아 여신은 다시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프리아 여신에게 성별은 본래 존재하지 않고 그녀의 존재 자체가 인간성을 지니지 않는다.
거대한 하나의 초월적 의지.
그것이 프리아 여신의 본래 모습이었다.
하지만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본 그녀는 도저히 그 설명이 믿기지 않을 만큼 인간적이었다.
물론 여러 분야에서 속을 알 수 없는 행동을 자주 하긴 했지만 말이다.
“울 것 같으면 마음대로 울어도 될 터인데.”
“내가 애도 아니고 그런 거로 울 리가 있나.”
“부모를 잃은 자식이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는 건 자연스러운 이치가 아닌가.”
말로는 그녀를 이길 자신이 없어진 나는 그냥 입을 다물어버렸다.
말없이 침묵하는 나를 그녀는 조용히 다독일 뿐이었다.
“며칠간 사라졌을 때. 그녀와 함께 있었다고.”
“그랬지.”
“그녀에게 도움을 받았고,”
“그래.”
“고작 며칠인데 그녀의 빈자리가 이상하리만치 크게 느껴졌겠지.”
그녀의 위로를 받으면서도 복잡한 마음이 정리되지 않는다.
그때 그녀가 조용히 입을 맞춰오며 말했다.
“그녀는 만족하고 돌아간 게야. 분명. 아바타라고 했지. 여신의 휴식.”
“아마도 그럴 거야.”
“아직 힘이 남았을 텐데 그대의 곁을 졸졸 따라다니다가 미련 없이 떠난 것이 과연 다른 이유 때문일까? 본녀는 아니라고 봐.”
그녀는 사라졌다.
사실상 그 인격의 죽음이라 봐도 무방했다.
과거에서 만난 인연일 뿐이며, 아마 살아있는 한 앞으로도 그녀를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본래. 왕성에서의 일로 그대와 상의할 게 많았다만. 오늘은 다 잊어.”
그녀가 조용히 보듬어주자 달콤한 향기가 코를 찔렀다.
“그저 오늘만큼은 이렇게 가만히.”
그녀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그래. 언젠가 사라져야 할 아바타였어. 이런 일로 침체되어있을 순 없겠지.”
내 말에 그녀는 그저 내 등을 쓸어내릴 뿐이었다.
“오늘만 슬퍼하고, 다 잊자.”
비록 인격은 사라졌지만, 프리아 여신은 남아있으니 말이다.
언젠가 그녀의 아바타가 다시 세상에 내려올 날도 올지 누가 알겠는가.
“오늘은 홍단이와 청단이도 오지 않을 게야.”
“일리나는?”
“실은 영지 내에서 묘한 자금의 흐름이 보인다는 제보가 있어서 말이야. 에이리아와 함께 베르닐 시종장에게 보고를 받고 있을 게야.”
본래 그 일은 내가 해야 할 일이지만 일리나도 에이리아도 황녀 출신인 만큼 어느 쪽이건 이런 일에 상당히 익숙할 수밖에 없었다.
보통 왕실에서 내정을 담당하는 건 왕비의 몫이니 말이다.
황녀 출신인 그녀들은 어릴 때부터 그런 교육을 받아왔을 터였다.
“자금의 흐름이라.”
“비리의 낌새가 난다고 하던데.”
“내일 손대봐야겠네.”
내 대답에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 다 잊어.”
그렇게 말하며 페르세르크가 나를 밀어 넘어뜨리려던 그 순간이었다.
삐릭. 자~ 찍어요~ 찰칵!
갑작스런 소리에 놀란 나와 페르세르크가 흠칫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이게 뭔…….”
갑작스런 소리. 그것도 티오니스에서 들릴 리 없는 스마트폰 카메라 찍는 소리였다.
이 근방엔 아무도 없었는데?
놀란 내가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을 때.
“어?”
“…….”
나와 페르세르크는 멍한 표정으로 범인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뭐…… 하는 겁니까?”
내 물음에 범인은 뻔뻔하게도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내게 새하얀 패드를 다시 들이밀었다.
자 찍어요~ 찰칵!
또 한차례 플래시가 터진다.
내 눈앞에 있는 건 다름 아닌 프리아 여신이었다.
사라진 줄 알았던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 의자에 기대듯 앉아 스마트 패드로 사진을 찍어대고 있었다.
어떻게? 그녀는 분명 사라졌었다. 그녀의 기척은 모두 사라졌고, 그녀가 가지고 다니던 수첩도 홀로 덩그러니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녀가 이곳에 있는 것인가.
혼란한 생각이 들어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능숙하게 패드의 아랫부분에서 펜을 꺼내 슥슥 무언가를 써 내렸고 이내 내게 패드의 전면부를 보여주었다.
커다란 메모장엔 이렇게 적혀있었다.
[더 좋은 것.]
“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가자 그녀는 말없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니. 사라진 거 아니었어요?”
[새로운 것.]
그녀는 마치 자랑하듯 스마트 패드를 이리저리 보여주며 메모장에 글귀를 적어 주었다.
그래 그거 지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자 패드인 건 알겠는데.
그게…….
“설마…… 사라진 게 그걸 구하러 간 거였습니까?”
주신의 아바타가 지구까지 가서 그걸 구매했을 리는 없고.
내 중얼거림에 그녀는 패드를 스윽 넘기더니 나와 페르세르크가 찍힌 사진을 보여주었다.
[기록 기능.]
“…….”
그녀는 남의 심정이 어떻건 관심 없다는 듯 패드를 휙휙 넘기며 그녀가 찍은 적 없던 내 과거의 사진도 보이기 시작했다.
멍한 얼굴로 잠에서 깨어난 모습은 자주 있지만, 사진에 보이는 건 내가 회랑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후의 사진이었다.
휘릭.
또 사진이 넘어간다.
몽환 세계에서 현아를 이용한 빌어먹을 심판자로 인해 극도로 분노하고 프리아 여신에게 격노를 토해낼 때의 내 표정이 담긴 사진도 있었다.
그때 그녀는 일리나에게 잠시 강신해있었으니까.
저런 모습은 찍은 적이 없을 텐데.
그녀가 보여주는 사진은 엄연히 내가 찍은 적이 없는 사진투성이였다.
마치 그녀는 세계의 기록을 읽어서 나에 대한 모든 개인정보를 탈취한 것처럼 굴었다.
“아니 개인정보 어디 갔습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내게 패드를 보여주며 작고 흰 손가락으로 그것을 휙휙 넘겼고, 그 모습을 보던 페르세르크는 눈을 반짝거리며 바라보았다.
좀 전까지 그녀가 사라졌다고 슬퍼하던 기분이 무색해질 정도로 뻔뻔한 행각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계속해서 사진을 돌렸을 때.
프리아 여신이 손을 멈추며 사진을 내게 보여주었다.
아무것도 입지 않고 기저귀 하나만 달랑 찬 채 꺄르륵 웃고 있는 아기의 모습에 프리아 여신이 엄지를 척하고 올렸다.
동시에 사진의 위쪽에 글자가 멋대로 슥슥 쓰여진다.
[아주 좋아.]
저 빌어먹을 패드를 당장 부숴버리리라.
내가 그녀에게 달려드는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