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1087화 (1,087/1,559)

제1087화

“자. 이 현상의 이유가 뭘까.”

“그…… 그게…… 마나의 구조가 변형되면서 자기장이…….”

“그게 아니야 이 멍청아!”

내 외침에 튜나가 움찔하며 물러났다.

“아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요!!”

“살다 살다 너같이 멍청한 건 처음 본다! 구조 변형은 무슨 자연스럽게 형태가 고정된 거잖아!”

“마법사도 아닌데 내가 이걸 어떻게 알아!!”

“모르면. 모르면 그냥 눈 뜨고 코 베일 거냐 어?”

“…….”

“그리고, 이건 또 뭐야. 해결방안이 왜 이따구야. 이렇게 큰 카드를 여기서 이렇게 쓴다고? 넌 하인스 영지와의 신뢰도와 네 아버지가 린디스 제국에 지워둔 큰 빛을 이렇게 등가교환 할 거냐?”

“손해를 보더라도 신용이 하락하는 건 막아야 할 거 아니에요! 그리고, 하인스 영지에 필요 물자를 제때에 공급하라고 한 건 당신이잖아!!”

그녀가 바락바락 대들자 나는 그대로 그녀의 이마에 딱밤을 놓았다.

“꺄악!! 아파!”

“그렇게 다 퍼줘라! 다 퍼주고 그냥 알거지 되라 그냥! 그런 회심의 카드를 막 퍼주는 게 잘도 재상 노릇을 하겠다!”

그녀의 머리를 잡아 누르며 내가 으르렁거리고, 튜나는 그런 나의 호통에 지지 않고 바락바락 소리 지르며 내게 대들고 있는 현상은 사실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이럴 수가…… 그 착하고 얌전하던 튜나가…….

‘당신 눈에 저게 착하고 얌전한 거로 보입니까? 내가 보기엔 여우가 틀림없어요, 그것도 꼬리 9개는 달린.’

에이리아와는 조금 다르지만, 지구에 있는 구미호 비연처럼 그녀는 겉과 속이 참 많이도 달랐다.

아마 이게 그녀의 본성일 것이다.

귀족 중에는 제 본 성격을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이래저래 나이나 성별, 혹은 여러 가지 이유로 책임져야 할 게 많은 위치에 있는 이라면 더더욱.

의도하진 않았지만, 그녀가 그동안 꾹꾹 눌러온 스트레스를 단번에 풀어줄 수 있는 역할을 내가 하고 있는 꼴이었다.

그리고, 현재.

나는 치장에 여념이 없는 그녀를 멀리서 보며 혀를 끌끌 차고 있었다.

“좀 더 성숙해 보이게! 그리고, 무시당하면 안 돼. 아버지께서 구해두신 신의 은총은 아직이야?”

“금고에서 꺼내오고 있어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아가씨.”

“아가씨가 아니고 각하! 난 재상이야! 그에 걸맞게 움직여야 돼!”

치장에 여념이 없는 그녀를 멀리서 지켜보며 나는 대뜸 쓴소리를 뱉었다.

“아직 멀었네.”

-후우…… 튜나가 스스로를 너무 다그치는군…….

그녀의 수완은 좋지만 그건 내가 볼 땐 사상누각이나 다름없었다.

일부러 강하게 나가는 것으로 자신이 상처받은 동물이 아니라고 시위하는 듯 보였고, 억지로 자신의 위치를 상기시킴으로써 스스로가 약해지지 않게 다그치고 있었다.

“겉보기엔 문제가 없겠죠. 다만, 조금만 노련한 자가 본다면 저건 자기방어에 급급한 어린애로 밖에 안 보여요.”

파고들 틈이 너무 많다.

선대 재상과 튜나의 재능만 따지면 튜나는 오히려 제 아버지를 능가할 재치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재상은 상인의 일로만 해먹을 수 있는 위치가 아니지.

꼼꼼히 준비를 마치고 나오는 그녀를 바라본 내가 말없이 직시하자 그녀는 조금 떨떠름한지 내게 물어왔다.

“뭔가 이상한가요?”

“이상하지.”

“…….”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이 되는 게 아니야.”

내 비유에 그녀의 표정이 대뜸 찌푸려졌다.

“어디 가서 못생겼다는 말을 들을 정도는 아닌데요.”

“누가 못생겼다던? 너 예쁜 거 누가 몰라.”

“윽?!”

깜짝 놀라 그녀가 움찔거렸다.

“그런데 여성으로선 만점인데. 재상으로선 30점도 안 돼.”

“당신이 뭘 알고!”

“가서 보면 알아.”

내 미소에 그녀는 이를 악물고 나를 노려보았다.

“들어서 알고 계시겠지만 오늘은 이웃 나라인 바탄 왕국에서 온 외교관과 경제협상이 있는 날이에요. 그동안 당신에게 배운 쓸데없는 것들 때문에 이번 협상이 제대로 될지 모르겠네요.”

“장담하는데 오늘 협상에서 재밌는 일이 벌어질 거다.”

“흥!”

그렇게 외치며 돌아서는 그녀를 멀리서 보던 내가 물었다.

“어떻게 될거 같습니까?”

-자세한 내용은 봐야 알겠지만…… 지금으로선 걱정이 앞서네.

믿음은 즉 신용이다.

현재 튜나는 제 아버지에게도 내게도 신용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상인으로선 평균 이상이지만 재상으로선 말짱 꽝. 치고 나가야 할 때와 빠질 때. 그리고 자신의 어떤 가치와 존재가 상대를 압박할 수 있는지 전혀 모르니까요.”

-왜 돕지 않았나.

“스스로 느껴봐야죠.”

-그럼 자네가 당장 튜나를 바꾸라 한다면?

“당장 저 어울리지 않게 어른스러운 차림이나 보석치장부터 빼버릴 겁니다.”

그래. 겉보기엔 어엿한 재상의 위엄이 살아있다.

하지만. 그녀에겐 맞지 않는다.

“튜나 드 머전트는 당신이 아니니까요.”

그녀는.

자기의 주관은 전혀 없이 자신의 아버지를 흉내 내고 있을 뿐이었다.

복잡하게 틀어 올린 분홍빛 머리카락을 보던 나는 이내 그녀를 호위하기 위해 따라가는 기사 중 하나를 불러세웠다.

“무슨 일이십니까 왕자님.”

“시종 한 명을 불러주겠나? 내가 직접 따라가 봐야겠으니.”

“예? 하면 공동 참석으로…….”

“이봐. 타국의 인사인 내가 아무런 연관도 없으면서 그녀의 옆에 끼면 이 나라에 얼마나 큰 혼란을 줄지 모르나?”

내 말에 기사가 눈을 크게 떴다.

“시…… 실례 했습니다. 곧바로 불러오겠습니다만…… 왕자님의 모습을 알아보는 이는…….”

“그런 건 신경 쓰지 말자고.”

가볍게 몸에 마법을 두르자 그의 얼굴에 놀라움이 서렸다.

“세상에…… 모습 변화 마법……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곳의 마법사들이 알아챌 수도 있을 텐데요.”

“그 인간들 100명이 있어도 절대 모르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무슨 일을 하건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를 알기 전에 나를 알아야 하는 것.

오만도, 겸손도 아닌 냉정한 판단이 최우선 과제일 뿐이다.

* * *

“각하. 머리를 자꾸 만지시면…….”

“알아…… 너무 무거워서 그런 거야…….”

튜나는 알베르타 왕국의 재상이다.

현재 그녀는 알베르타 왕국과 인접한 왕국인 바탄 왕국과의 무역 협상 문제로 인해 공식적으로 협상자리의 대표로서 자리하고 있었다.

자잘한 협약이라면 이렇게 공식적으로 할 것도 없지만 지금 그녀는 알베르타 왕국을 대표하여 귀족파를 이끌고 나와 있는 것이었다.

물론 현재로서 그녀를 따르는 이는 고작해야 두셋 정도, 나머지 다섯 정도는 그녀의 정적인 바르고 후작의 끄나풀이나 다름없었다.

“망할. 교관…… 아니 그 망할 왕자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잤어…….”

“각하. 너무 과격한 말을 쓰시면 안 돼요.”

시종의 모습으로 변해있는 내가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녀는 내가 데이비 올 라운이라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신나게 나를 씹어댔다.

“그 인간은 어쩌고 있어?”

“국내 협약까지 찾아와서 감 놔라. 배추 놔라 할 인사는 아니니까요. 공작저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흐음…….”

의심스럽다는 듯 그녀가 침음성을 흘렸다.

하지만 내가 이곳에 있다는 걸 눈치채지는 못한 듯 보였다.

실제로 다른 시종과 시녀들도 내가 데이비 올 라운이라는 걸 눈치챈 이는 극소수였으니 말이다. 그나마 튜나를 따라온 집사장이 다른 이들에게 언질을 줘놓은 터라 내게 귀찮은 잡일이 발생하지 않는 것도 있었다.

“두고 봐. 그 인간 없어도 나는 잘 해낼 거야. 아버지께서 하신 일은 전부 의미 없는 기우였다는 걸 내가 증명하겠어.”

기다리고 있을 귀족들과 바탄의 외교관이 기다리고 있는 회의장으로 향하던 그녀가 씩씩거렸다.

그런 그때 그녀의 시야에 어떤 인물이 잡혔다.

“어서 끌어내!”

“뭐 하는 거야!”

몇몇 기사들이 한 아이를 끌어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이지?”

이에 호기심이라도 느꼈는지 그녀는 본래 가던 길을 멈추고 그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녀는 어떤 소년을 볼 수 있었다.

꾀죄죄한 넝마를 걸친 채 바닥에 엎드려 닥치는 대로 꽃과 풀을 입에 밀어 넣고 있는 소년.

그 소년의 행색은 너무도 초라해 보였던 탓에 왕궁에 이런 아이가 있다는 게 오히려 쉬이 믿기지가 않는 모습이었다.

“허…… 헛! 재상 각하!”

“무슨 일이죠?”

“죄송합니다! 당장 끌어내겠…….”

“무슨 일이냐 물었어요.”

“그게…….”

잠시 고민하던 기사는 곧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말입니다. 순찰 중에 갑자기 못 보던 이 소년이 바닥에 풀과 꽃을 마구잡이로 뜯어서 먹어치우고 있어서…….”

기사들의 설명에 튜나는 말없이 소년을 바라보았다.

“배가…… 고픈 거니?”

“…….”

소년의 눈은 공허했다.

하지만 튜나는 그에게 다시 질문했다.

“혹시. 이름을 알려줄 수 있니?”

그 물음에 소년은 조용히 답했다.

“벨가.”

“그래. 벨가. 왜 꽃을 뜯어먹고 있었던 거야?”

그 말에 벨가라 불린 소년은 잠시 침묵하다 대답했다.

“배가…… 배가 너무 고파서…….”

그의 그런 말에 튜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기사를 향해 말했다.

“저 아이를 데려가요. 가서 씻기고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세요.”

“예…… 예? 재상 각하!”

“배고픈 건 정말 슬픈 일이에요. 그에 따른 경비는 공작가에서 모두 지불하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기사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다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알겠습니다…….”

“아참. 이거라도 먹을래?”

이후 돌아서려던 튜나가 손뼉을 치며 공간 주머니 속에서 커다란 육포를 꺼내 내밀었다.

그러자 소년의 공허한 눈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파악!!

그리고,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육포를 낚아채 입에 쑤셔 넣기 시작했다.

“천천히 먹어 체할라.”

소년은 어떤 의욕도 느껴지지 않는 얼굴로 육포를 뜯으면서도 입과 손만큼은 정말로 바삐 움직였다.

마치 수일을 굶은 것처럼 미친 듯이 먹어치우던 소년은 더 없냐는 시선을 보내왔고 튜나는 육포 하나를 더 건네주었다.

“당신…….”

그때 소년의 입에서 약간 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놈! 재상 각하께 무슨 말버릇…….”

“괜찮아요. 아직 아이잖아요.”

“각하……”

“그래.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니?”

“왜 날 도와줘?”

그 물음에 튜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배고파 쓰러져서 꽃을 뜯어먹고 있는 아이를 보고 돕지 않아야 할 이유라도 있니?”

“…….”

“네가 어떻게 왕성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배고픔은 평등해.”

“…….”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소년 벨가의 모습에 튜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돌아섰다.

그리고 다시금 회의장으로 향하는 그녀를 뒤따라가던 나는 조용히 벨가라 불렸던 소년을 바라보았다.

“…….”

이윽고 벨가 또한 나를 바라본다.

그렇게 한참을 서로 바라보았을까.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가 몸을 돌렸다.

인간이 아닌 정신체.

다 말살한 줄 알았는데 아직 남아있구나.

하긴, 정신체의 출현은 최근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저것들은 내가 과거에 가서 아르부트 왕국을 소멸시키지 않았기에 생겨난 녀석들. 그렇기에 내가 과거를 개변시킨 이후부터 계속해서 존재해왔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저들은 프리아 여신을 적대하는 존재인 만큼 당장 여기서 치우는 게 맞겠지만.

“운 좋은 줄 알아.”

그에게선 어째서인지 위험한 냄새가 나지 않았다.

간단하게 추적마법과 추가로 제약을 걸어두는 정도로 넘어가야 여기서 내가 정체를 드러내지 않을 수 있으리라.

당장 저놈을 처리하는 것이야 어렵지 않지만 그렇게 되면 본래 하려 했던 일이 꼬이게 될 것이다.

가장 큰 이유는 사실 다른 곳에 있었다.

정신체인데. 그 녀석의 신체 구조는 빛의 용사라 불리는 평행세계의 일리나. 즉, 레이나와 비슷한 구조가 많았다.

그렇다고 유일한 종족인 천족이냐 묻는다면 그건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마냥 정신으로만 이루어진 개체라고 하기엔 하나의 생명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운 좋은 줄 알아라, 그리 말하고 돌아선 나는 앞장서서 걸어가는 튜나가 머리장식을 부여잡고 인상을 쓰는 것을 보며 선대 재상이 훈훈하게 웃는 것을 보았다.

-역시 마음 씀씀이는 착한 아이야. 살아있을 때 이런 칭찬을 해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는지…….

‘저 마음 씀씀이가 언제 한번 크게 발목을 잡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상대를 의심하는 법도 배워야 합니다. 왜 저런 꼬마가 갑자기 이 왕성 안에서 나타났는지 생각도 못 한 시점에서 낙제점이죠.’

-……그냥 배고픈 꼬맹이가 아니다…… 이 말인가?

“편한 대로 생각하세요.”

나는 선대 재상의 영혼이 계속해서 질문을 해와도 대답하지 않았다.

* * *

데이비와 튜나가 떠나고 기사들을 따라가던 소년 벨가는 갑작스레 찾아온 한 귀족으로 인해 그와 단둘이 남게 되었다.

“뭐하는 짓이지, 벨가?”

싸늘한 인상을 지닌 사내 바르고 후작의 물음에 소년 벨가는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칫하면 큰일 날뻔했다. 내 계획이 완성되기도 전에 튜나 그 계집과 접촉하다니. 미친 거냐?”

“그냥…… 배가 고팠어.”

배가 고프다. 벨가는 유별나게 많은 생명력을 원했다. 그래서 바르고 후작이 후원할 때도 항상 엄청난 양의 식량을 먹어치워 왔으니 말이다.

“주변을 돌아보던 중에 배가 고파졌어. 참을 수가 없어서 꽃을 씹어먹었는데.”

배가 차지 않더라.

고통스러운지 벨가가 인상을 찡그렸다.

“배가 고팠는데. 그 여자가 먹을 걸 줬어.”

벨가의 공허한 대답에 바르고 후작이 인상을 찡그렸다.

정신체 벨가.

바르고 후작을 뒤에서 돕고 있는 존재이며, 사실상 바르고 후작의 히든카드나 다름없었다.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라. 일이 틀어지면 그년을 네가 죽여야 한다.”

그 말에 벨가가 눈을 내리깔았다.

“내가 그녀를 죽여?”

“그래. 나는 그녀가 죽는 건 원치 않아. 그녀는 내 손아귀에 들어와야지 죽게 두는 건 아깝거든.”

스산한 미소를 짓는 바르고의 말에 벨가는 조용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녀를 죽여야 한다. 벨가는 문득 자신이 좀 전에 만났던 인간 소녀, 튜나가 했던 말이 기억났다.

‘배고픈 건 평등한 거야.’

벨가에게 있어서 배고픔은 끔찍한 기억일 뿐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생겨나면서 그동안 이 배고픔을 느끼게 만든 원인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존재를 제거함으로써 해결된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네.”

“뭐가 또 이상하다는 거냐.”

“이상하게 배가 안 고파…….”

“뭐?”

먹은 것이라곤 작은 육포밖에 없었는데.

벨가의 이상한 대답에 바르고는 인상을 찡그린 채 그를 노려보았다.

묘한 불안감이 들었다.

“너도 네 목적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네가 만들어지게 된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어. 그냥…….”

태생부터 알고 있던 어떤 사실. 그 사실에 벨가는 말없이 손을 오므렸다가 폈다.

“그나저나. 그 육체는 언제까지 뒤집어쓰고 있을 거냐.”

“…….”

순식간에 벨가의 몸이 스르륵 흩어지며 희끄무리한 형체로 변했다.

동시에 다시 알 수 없는 배고픔이 그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괴로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바르고가 스산하게 웃었다.

“협상에서 [말린 밤버섯 꽃]만 수입하게 되면 공작가는 입지를 완전히 잃고 튜나 그 계집은 내 손에 떨어진다. 그거면 돼.”

바르고 후작의 얼굴에 차가울 정도로 사이한 미소가 걸렸다.

* * *

같은 시각. 튜나는 긴장감을 억지로 숨긴 채 협상을 진행하고 있었다.

“하면, 저희 측에서 제공할 무역품은 이것으로 됩니까?”

“좋아요. 하나같이 문제는 없어 보이는군요.”

“칼 같으시군요. 튜나 재상. 아직 어리다 하여 얕본 감이 없잖아 있었는데. 사죄드리겠소.”

“저도 당신을 너무 쉽게 생각했네요. 사과드리겠습니다.”

도발엔 도발로 받아친 그녀가 말없이 무역 품목을 훑었다.

그런 그녀의 협상을 다른 귀족들과 그녀를 호위하는 시종들은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때였다.

말없이 서류를 바라보던 튜나의 눈이 꿈틀거렸다.

“왜 그러십니까 재상?”

“……잠시. 발로란 백작.”

“예? 각하 말씀하십시오.”

“여기 [말린 밤버섯 꽃]이라는 품목.”

튜나가 인상을 찡그렸다.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알고 있는걸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관련 서류를 좀 꺼내주시겠어요?”

“예? 아아. 여기 있습니다.”

발로란 백작이 바탄 왕국에서 제공한 물품에 대한 서류들 중에서 [말린 밤버섯 꽃]에 대한 서류를 건네주었다.

이에 튜나는 말없이 그것을 살피기 시작했다.

“왜……왜 그러십니까?”

그때 튜나가 인상을 찡그렸다.

분명 데이비 올 라운이 가르쳐준 건 다 쓸모없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가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쑤셔 박은 지식 중에. 이게 있었다.

“트릭 백작, 말린 밤버섯 꽃의 사용처가 마법으로 정체하여 사용하는 의약이라 하였습니까?”

“예? 아, 예…… 아 설마 마법을 사용한 물품이라 그러십니까? 알베르타 왕국이 마법을 배척하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도 이런 중요한 물품까지 거부하는 것은…….”

“말린 밤 버섯 꽃을 정제하는 과정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튜나의 눈이 번뜩였다.

아니라고, 절대 데이비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그가 가르쳐준 쓸데없는 잡지식은 아무 의미 없다고 말했지만.

어째서일까. 그가 한 말이 마치 시험문제를 콕 짚어준 것처럼 놀랍게 적중하고 있었다.

“그 외에 사카라트 줄기 잎이나, 파울로 메탈. 그리고 여기. 나이트 필드에서 제작한 사료들.”

튜나의 말에 그녀를 따라온 귀족들의 표정에 의아함과 놀라움이 서린다.

그리고 바탄 왕국에서 온 트릭 백작의 표정이 점점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다시 물을게요. 말린 밤 버섯 꽃을 정제하는 데에 마나석 가루를 사용했나요?”

“…….”

“사카라트 줄기를 따서 얼마만큼의 기간 동안 숙성을 시켰습니까. 숙성기간이 2주도 안 되어 나온 물품은 자칫 사용하기에 따라 마약으로 성질이 변모할 수 있는 건 알고 있습니까?”

“자…… 잠깐만요 튜나 재상! 저희는 그럴 의도가…….”

“몇몇 물품은 아주 가관이네요. 이건 뭐죠? 불량품인 최하급 물건을 마법으로 겉모습만 바꿔서 비싸게 팔려고 했습니까? 저도 잘못 보면 모르고 넘어갈 뻔했군요.”

“그!”

“이대로 계약을 성립했다면 반드시 이 일로 생긴 문제에 대한 책임을 제가 져야 했겠지요.”

“……그게…….”

“협상은 없던 거로 하겠습니다. 이 이상 진행하고 싶으시다면 다른 품목을 가져오세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녀를 바탄 후작이 손을 뻗어 막으려 했다.

“잠깐만요! 단순한 억측일 뿐입니다! 증거도 없구요! 이렇게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하면 그 뒷감당을…….”

그때 튜나는 또 한 번, 노이로제가 걸릴 정도로 머릿속에 각인되다시피 한 한 인간의 말이 떠올랐다.

-넌 네 아버지가 아니야. 실제로 선대재상은 다시없을 명 재상이었다. 그래서 네가 네 아버지가 일궈놓은 것들을 지키고 지켜나가며 그에 따라 매뉴얼 보듯 움직이는 건 알겠다.

-다만 너 또한 재상이다. 명심해. 네가 네 아버지를 뛰어넘고 싶다면 네 아버지와 네가 다른 점이 뭔지부터 알고, 네가 할 수 있는 게 뭔지부터 생각해라.

“뒷감당?”

튜나는 그동안 보여주지 않았던 차갑고 굉장히 과격한 모습을 보였다.

“하…….”

탱그랑!!

머리에 장식을 하고 있던 튜나가 한 손으로 그것을 풀어 던져버렸다.

동시에 돌돌 말린 분홍빛 머리칼이 스르륵 풀리며 흩날리듯 흘러내렸다.

어린아이가 억지로 어른 흉내를 내는 것 같은 모습에서 제 또래의 아가씨 같은 모습으로 돌아온다.

게다가 미모만으론 대륙 6대 미녀와 비교해도 전혀 밀리지 않을 정도의 아름다움이 서린 얼굴인 터라 몇몇 젊은 귀족들은 넋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지금껏 봐온 것 중 가장 날카로웠다.

“재……재상 각하?!”

정말 원치 않았고 믿기 싫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칼같이 들어맞는 것일까.

그는 예언가라도 되는 것일까.

아니. 정확히는 자신이 어리숙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짧은 시간에 데이비 올 라운은 바탄 왕국과 알베르타 왕국의 거래에 대해 파악했고. 이게 어떤 방식으로 장난질을 칠 수 있는지에 대해 모조리 파악했다.

이건 단순히 수완이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세상의 이치를 가지고 놀고 있는 듯한 모습.

쓸모없다 여긴 잡지식들이 합쳐지면서 너무 큰 변화를 일으킨다. 그에게 자신이 배운 잡지식이 쓸모없는 걸 인정하게 만들겠다 했지만.

정작 그녀는 자신이 고작 며칠 사이에 배운 게 너무도 섬뜩하게 유익하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튜나가 단순히 물건의 가격과 국가 간의 사이,

흔히 알려진 물건의 사용처를 이용해 왕국에 도움이 되는 부분만 생각했을 때.

데이비, 그는 평소 인간들이 잘 모르는 지식까지 이용해 모든 변수를 차단한 것이다.

족집게도 이런 섬뜩한 족집게가 없었다.

본래대로라면 여기서 협상은 끝이었다.

마약이 될 수 있는 물건을 국가 내부로 반입할 순 없으니까.

하지만, 여기서 멈추면 튜나 또한 엄청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그녀는 재상이기에 거부해야 한다.

그래야 하는데.

‘이런 방법까지 알게 됐는데 안 쓸 순 없지.’

데이비가 쑤셔 박은 잡지식 중에. 이 상황을 아주 신나게 엿먹일 수 있는 방법까지 있었다.

괴물 같은 인간. 아니 성자. 그러니 고작 몇 년만에 황무지에 불과하던 영지를 대륙 최대 부유 영지로 만들었고. 제국조차 함부로 손을 못 대게 만들었지.

“뭐, 좋아요. 거래를 지속하고 싶으시다고?”

튜나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걸렸다.

경직되고 위엄있는 모습이 아닌. 본연의 모습이 드러난 것 같았다.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나. 마치 무거운 굴레를 벗어던진 것 같은 가벼움이 느껴지는 그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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