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91화
폭거에 가까운 빛의 세례가 쏟아져 내린다. 무표정한 얼굴로 말없이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륀느의 모습은 흡사 죽음의 천사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륀느의 본래 종족인 세피로스, 백익의 존재의의가 처단부대라는 것을 모르는 벨가였지만 그만큼 륀느의 모습은 현재 잔혹하고 신성해 보였다.
저것에 한 번이라도 맞는 순간 치명상이다!
본능적으로 그리 느낀 벨가는 몸을 튕기듯 움직이며 비처럼 쏟아지는 빛의 창을 피해냈다.
그럼에도 륀느는 지치지도 않는지 계속해서 창을 쏟아냈다.
온몸에 오한이 돋는 것을 느끼며 벨가는 몸을 파르르 떨었다.
몸을 날리던 벨가는 점점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빨리 가야 하는데.
자신이 왜 조급해지는지도 모르는 주제에 점점 무리수를 두기 시작하니 당연히 틈이 보일 수밖에 없다.
수차례 빛의 창으로 포격을 가하던 벨가의 한쪽 어깨가 휘리릭 날아든 화염의 창에 꿰뚫렸다.
“크윽?!”
느껴본 적이 없던 끔찍한 고통에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뒤쪽에서 어깨를 관통한 창에 정신이 팔린 그 순간.
6장의 날개를 펄럭인 륀느가 한줄기 섬광이 되어 그에게 날아들었고, 작은 발로 그의 몸을 짓밟듯 지탱한 뒤 반쯤 관통한 창을 한 손으로 뽑아내고는 그를 걷어차 날려버렸다.
“끄윽…… 끄으으으!!!”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그는 어깨에 붙은 화염을 끄기 위해 몸을 버둥거렸다.
왜 꺼지지 않는 거지.
왜 고통이 느껴지는 거지.
이건 말이 안 되는데.
마법은 그에게 제대로 된 타격을 주지 못한다.
하지만 그녀의 공격은 너무 날카롭고 너무 무거웠다.
“크윽!!”
꺼지지 않는 불로 인해 고통받으면서도 벨가는 급히 륀느를 향해 손을 뻗었다.
동시에 보이지 않는 줄기들이 뻗어져 나가며 륀느를 빠르게 휘감는다.
[네 힘은 곧 내 것이다.]
동시에 생명체가 지닌 고유의 에너지가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아니. 빨려 들어가야 했다.
“무슨?!”
하지만 륀느의 몸에선 생명력이 거의 빠져나오지 않았다.
저항하는 힘이 있다고 해도 너무 심할 정도로 나오지 않는 그 생명력에 그가 당황하던 찰나.
자신의 몸에 무언가가 달라붙었다는 것을 깨달은 륀느의 눈이 푸르게 번뜩였다.
양팔을 펼치며 날아오르기 시작한 그녀의 머리 위 원고리가 빠르게 회전하며 거대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세상의 종말을 쏟아내듯 그녀의 주변으로 빛무리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그것을 멍하니 보던 벨가는 자신의 힘이 왜 그녀에게 먹히지 않는지 깨달았다.
“너…… 생명체가 아니구나.”
생명체이되, 생명체가 아닌 것.
벨가는 허탈하게 주저앉아버렸다.
그의 몸 안에는 많은 수의 존재들이 머무르고 있지만, 이제는 지키기 힘들어진 듯 보였다.
이윽고 거대한 빛무리들이 마치 별의 원운동을 그리듯 하늘에 긴 꼬리를 늘어뜨리며 원을 그리기 시작했고 그것을 마지막으로 거대한 빛의 포격이 벨가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어마어마한 진동과 포격 끝에 벨가의 몸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고, 륀느는 말없이 그를 내려다보다 눈을 부릅 떴다.
“후우. 과부하로 인한 성능저하. 륀느가 이것을 낮게 평가.”
살짝 비틀거린 그녀는 곧 벨가가 있을 장소를 바라보았다.
새빨간 열기로 가득한 거대한 크레이터. 그 열기 속에서도 맨발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간 그녀는 곧 벨가가 있어야 할 장소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추적 개시.”
고개를 돌려보니 공격이 적중하기 직전 상당한 리스크를 동반한 채로 도망친 모양이었다.
다만 녀석이 자신도 모르게 흩뿌리는 어떤 에너지는 확실히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 에너지는 숲 안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파앙!!
몸을 튕겨 숲 안쪽으로 빠르게 진입하기 시작한 그녀는 곧 흔적을 쫓아 계속해서 움직였고.
이내 어딘가에 다다랐다.
그녀의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인다. 표정의 변화가 없음에도 상당히 놀란 모양새였다.
그녀의 앞에 나타난 것은 거대한 유적지였다.
하지만 버려진 폐 유적지가 아닌 기괴하기 짝이 없는 힘이 흘러나오고 있는 유적지였다.
“새로운 정보 갱신. 륀느의 육체를 개조한 시설과 흡사. 데이비 님께 보고해야겠다 판…….”
콰아아앙!!!!
그때였다.
갑작스레 바닥이 박살 나며 그 안에서 어마어마한 수의 촉수 더미들이 쏟아져 나왔고, 륀느가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를 휘감아 끌어당겨 삼켜버렸다.
저항할 새도 없이 끌려들어 간 그녀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본 뒤 급히 자신의 힘을 이용해 어떤 입자를 만들어냈고, 이내 커다란 크로우바를 만들어낸 뒤 지상으로 집어 던졌다.
파장을 내뿜는 그녀의 물건이라면 데이비가 알아볼 테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끈적거리는 촉수 더미는 그녀를 끌고 완전히 지하로 내려갔다.
퍼엉!!!
주변의 바위 조각이 박살 나며 계속해서 끌려들어 가던 륀느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마나 게이트를 넘을 때와 비슷한 무언가의 경계를 넘었음을 직감했다.
마나 게이트가 지하에 있을 리가 없는데.
그럼에도 그녀는 그 감각을 정확하게 기억해냈다.
지하에 있는 것. 그것은 수많은 실험 용기와 그 안에 담긴 어떤 인간들의 모습이었다.
* * *
암살자들의 싸움은 누가 먼저 발견하고, 누가 더 은밀하게 뒤를 잡아 치명상을 가하는가에 있다.
그런 점에서 도나의 실력은 바탄 왕국의 특수 처단부대 내에서도 정평이 나 있는 편이었다.
그들은 바탄 왕국이 숨겨온 전력이며, 어떠한 기술을 도입한 일종의 개조 인간이었다.
스릉!! 카앙!!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부딪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둠 속에 스며들 듯 도나는 상황을 지켜보았다.
자신을 포함한 바탄 왕국의 비밀병기들과. 데이비 올 라운을 호위하는 그림자라 불린 족속들.
그들의 싸움은 시끄럽지 않고 고요하며 치명적이었다.
‘이 와중에도 틈을 보여? 자기 수족을 믿는다는 거겠지?’
그는 느긋하게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로 트릭 백작과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렇게 둘 생각 따윈 없다.
자신들은 바탄 왕국의 특수부대. 이 특수부대에 소속되는 이들은 고작 며칠 만에 상급 암살자 수준의 실력을 지니게 된다.
그런데 몇 년 이상 그곳에 몸담아온 이라면?
도나가 바탄 왕국의 특수처단부대에 소속된 건 무려 7년도 더 된 이야기였다.
그동안 그녀는 철저히 튜나의 곁에서 오랜 친구 역할 겸 시녀를 수행하며 비밀리에 바탄 왕국을 도왔다.
애초에 이야기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임무를 위해 정이 들었던 튜나까지 이 손으로 직접 죽였다.
그녀에게 물러날 길 따윈 없었다.
쌔애앵!! 카아앙!!
마치 몸이 늘어나는 것처럼 파고든 그녀가 정확히 데이비의 뒷목을 노리고 대거를 내리찍었다.
검이 닿기만 하면 그가 어떤 인물이건 죽을 수밖에 없으리라.
하지만 도나의 검은 어둠 속에서 스르륵 나타난 한 검은 인물에 의해 차단당했다.
그리고, 그러거나 말거나 데이비는 그녀에게 한치의 관심조차 주지 않고 자신의 할 일에 열중했다.
믿는 건지, 멍청한 건지. 그도 아니라면 겁이 없는 건지.
순식간에 금속음이 울려 퍼지며 수차례 공방이 펼쳐진다.
인간을 아득히 뛰어넘는 반사신경과 신체능력, 그리고 특수한 힘에 적응하는 체질을 이용한 도나는 쉬지 않고 상대를 몰아붙였다.
데이비 올 라운의 직속 부대가 제법이긴 하지만 도나의 입장에선 우스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저들이 시간을 끌면서 소모전으로 가면 이쪽도 그리 유리할 순 없었다.
“비켜. 죽기 싫으면.”
“물러나라. 목숨만은 살려주지.”
도나의 이죽거림에 묵묵히 대거를 휘두르던 갈색빛 피부의 사내가 짧게 답했다. 이에 도나는 신경질적으로 대거를 휘둘러 쳐내고는 상황을 판단했다.
이렇게 시간을 끌면 좋지 않다.
제압당한 트릭 백작은 고작 꼬리 자르기용일 뿐이지만 자신들은 사실상 바탄의 비밀병기.
그 존재가 드러나는 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만약 여기서 데이비 왕자가 가세한다면…….
속으로 빠르게 계산을 굴린 그녀가 날아드는 대거를 쳐내고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일일이 귀찮게 하네.”
“숨기는 것도 없지 이젠?”
데이비의 물음에 도나는 차갑게 피식 웃었다.
“숨길 게 있나.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그렇게 말한 그녀는 단검을 하나 꺼내 그대로 던졌다.
그리고, 그 대상은…….
“커억…… 끄륵…….”
다름 아닌 트릭 백작이었다.
도나는 어디서든 평범하게 볼 수 있는 비수를 이용해 그의 목숨줄을 끊어버렸다.
“뭐하는 짓?”
“저자는 어차피 꼬리 자르기일 뿐이니까. 여기서 우리가 사라지면 결국 저자의 살인 혐의는 당신이 쓰게 되겠지?”
“누가 보면 도망갈 수 있는 것처럼 보이네.”
그 물음에 도나가 차갑게 비웃었다.
“작정하고 도망치면 저들로는 우릴 못 잡아.”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우리가 저런 경험도 부족한 애송이들에게 질 거 같아? 손에 묻혀온 피의 농도부터가 달라.”
누구를 타박하는 건지 모를 씁쓸한 어조로 그녀가 중얼거렸다.
“우리는 만들어질 때부터 살인 기계로 만들어졌어. 고작 정보원 노릇에 호위나 하며 암살자 흉내나 내는 저들과는 경험부터가 다르다는 뜻이야.”
“흐음…….”
“계획은 파투났지만 어쩔 수 없지 이렇게 된 이상 최후의 수단을 쓰는 수밖에.”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품 안에서 펜과 같은 크기의 어떤 마법장치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그것을 가동시켰다.
삐익!
아주 짧은 굉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이봐 왕자님. 내가 뭘 했는지 궁금하지 않아?”
“…….”
“혹시나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을 때 사용할 히든카드가 그곳에 잠들어 있거든. 지금 난 그걸 깨운 거야.”
쿠웅!!!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엄청난 힘의 파장이 수도에서 멀지 않은 숲에서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후우…… 피부가 저릿저릿하지? 저건 우리도 제어 못 해. 하지만 그냥 두면 이 알베르타의 수도는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되어버릴 거야.”
알베르타는 군대 대부분이 바탄과의 국경선에 있다.
수도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테니 만약 무언가 재앙이 펼쳐지면 수도가 잿더미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
말없이 힘의 파장이 느껴지는 쪽을 바라보던 데이비가 침묵하자 도나는 급히 몸을 튕겼다.
“처단 부대. 지금부터 최우선 목표로 흔적을 지우고 퇴각한다.”
그녀의 명령에 따라 그림자 속에서 그녀와 같은 개조 인간들이 빠르게 모습을 드러냈다.
“가려고?”
그때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데이비가 물어왔다.
“저들은 약해빠졌거든. 놀아주는 것도 지겹고. 슬슬 빠지기도 해야 하고.”
“내가 너희를 잡을 거라곤 생각 안 했나?”
“뭐. 당신에 대해선 들어서 잘 알아. 하지만, 안티 배리어를 가진 우리가 사방으로 퍼져나가면 잡을 수 있어?”
“정체를 숨겨야 하는 너희들은 하나라도 잡히는 순간 이쪽이 이기는 거 아닌가?”
“뭐 그렇게 생각하면 해봐.”
그 말과 함께 그녀가 산개하여 흩어지려던 그 순간이었다.
“그림자. 명령을 하달한다.”
그 말에 어둠 속에서 안광을 번뜩이는 이들이 스르륵 나타나 데이비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명을.”
“절반 정도는 죽여도 상관없다. 정령 억제 아티펙트 해제해.”
데이비의 명령에 도나가 비웃음을 던졌다.
“하. 경험도 부족한 흉내쟁이들로 무슨…….”
엇비슷한 실력으로 보이지만 작정하고 움직이는 개조 인간들에게 그림자는 그저 그런 수준이었다.
저들은 절대 자신들을 죽일 수 없다.
그렇게 굳게 믿었다.
하지만 곧 이어지는 말에 도나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3분 준다.”
그 한마디에 그림자들이 일제히 귀걸이나 팔찌, 혹은 반지들을 빼기 시작했다.
동시에.
섬뜩한 기류가 그들을 감돌기 시작했다.
다크엘프의 전유물이라 불리는 어둠의 정령들이었다.
“무슨…….”
갑작스런 그들의 변화에 도나가 중얼거렸다.
콰앙!!
하지만 곧 그녀가 반응하기도 전에 주변에 있던 그녀의 동지들이 일제히 제압당하듯 바닥에 처박혔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팔을 꺾어 제압하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데이비의 부하들이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대인전의 경험도 부족해 보이고 실력도 생명체의 한계를 넘지는 못했다.
그들이 못난 게 아니라 그들의 힘으론 도나 같은 개조 인간을 어찌할 수 없다는 소리였다.
그랬는데.
좀 전과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는 게 확연히 느껴졌다.
“어둠 정령은 좀 성질이 더럽거든.”
데이비의 비웃음이 담긴 중얼거림에 도나가 이를 악물었다.
뭔가 잘못됐다!
동체 시력과 반사신경이 인간을 초월한 개조 인간인 그녀가 반응도 못 할 속도로 움직이는 그들은 절대 비웃음을 살만한 이가 아니었다.
스팡!!
반사적으로 위기를 느낀 그녀가 급히 대사관의 옥상으로 빠져나가 이탈하려던 그 순간.
서걱!!
알 수 없는 파육음과 함께 그녀의 신형이 무너져 내렸다.
바닥에 쓰러진 그녀가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을 때 그곳에는 갈색 피부를 지닌 늘씬한 다크엘프 한 명이 그녀를 차갑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복면까지 모두 날아간 그녀의 얼굴을 본 도나의 표정이 파랗게 질렸다.
착각하고 우습게 보고 있던 건 그들이 아니라 자신이었다.
개조 인간의 우월한 신체능력을 우습게 따라잡아 버린 그들.
그것은 마치 인간의 탈을 쓴 괴물 그 자체였다.
힘줄이 끊어져 무릎을 꿇은 채 움직이지 못하는 그녀를 포위하듯 그림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떻게 할까요.”
그리고 언제 올라왔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수도 저편을 보고 있던 데이비가 대답했다.
“제압해놔.”
심드렁하게 말한 그가 지나치는 순간 도나는 온몸이 짓눌리는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데이비 올 라운 그의 일신 능력에 대해선 들은 바 있다.
하지만 세력 하나 없던 그의 주변에 포진한 이 괴물 같은 이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단 한 명만으로도 엄청난 이름을 날릴 실력자들. 그런 실력자들을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규모로 부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