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99화
갑작스레 찾아간 레이나는 국왕과 독대를 하고 있었다.
“전쟁을 멈춰주세요.”
“뭐라? 전쟁을 멈추라니. 짐이 잘 못 들었는가.”
“잘 들으신 게 맞습니다. 전쟁을 멈…….”
쾅!!!
레이나의 말에 바탄의 국왕이 격분하며 테이블을 내리쳤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알베르타 그 가증스러운 놈들이 트릭 백작을 죽이고 누명을 덮어씌웠다! 거기에 국경에 있던 우리 요새의 자랑스러운 병사들과 백성들을 모조리 학살했다! 그 사실을 알고 전쟁을 멈추라 하는가!!”
아무리 국제연합이 전쟁을 억제하고 있다고 해도 이 정도 분쟁이면 전쟁이 터져도 누구 하나 뭐라 할 수 없다.
물론, 그게 정상적인 상황인 경우.
지금 같은 경우는 알베르타와 바탄 모두 확실한 증거가 없어서 누가 잘못을 했는지 따지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언제부터 용사라는 직책이 이 나라 저 나라 들쑤시면서 내정간섭을 하게 되었나! 나는 그런 것에 동의한 바 없네!”
“예. 국가 간의 분쟁을 하건 말건 폐하께서 마음대로 하시면 됩니다.”
“뭐라?”
“하지만, 그전에 아주 잠깐만 기다려 달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요새를 습격한 괴물에 대한 보고를 받으셨을 겁니다.”
레이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 그걸…….”
“성국에 계시가 내려왔더군요. 때문에 저는 용사라는 과분한 명찰을 달고 있는 이상 무슨 일이 있어도 그 괴물을 조사하고 막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녀가 차갑게 그를 쏘아보았다.
“며칠. 며칠이면 됩니다. 만약 알베르타가 정말로 저지른 짓이 맞다면. 그땐 저 또한 바탄에 손을 거들죠.”
“그렇지 않다면?”
“글쎄요. 그 괴물의 출처가 인위적인 게 아니라면 제가 나설 일이 아니긴 하죠. 알아서 하세요. 복잡한 정치는 제 관심 밖이니.”
그녀가 나서는 것은 문제가 되는 것과 그것을 만들어내거나 유도하는 것들이다.
“…….”
바탄의 국왕은 레이나를 쏘아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바탄 국왕의 입장에서는 조금 껄끄럽긴 해도 레이나에게 생색을 내면서 실리를 챙기는 법을 택했다.
사실상 그 괴물을 국왕이 지시하여 만들어낸 게 아닌 만큼 그로서는 어차피 쫄릴 것도 없는 제안이었다.
며칠을 투자하여 레이나를 내세우고 실리를 챙기는 것도 좋은 방법이리라.
이를테면 그 습격이 알베르타와 관련되어있다는 거짓 정보를 흘려놓는다든지.
“사흘 주지.”
“참. 폐하. 제가 이런 일을 지금까지 처리한 횟수가 제법 됩니다.”
“하고 싶은 말이 뭔가.”
“폐하를 믿는 것입니다.”
레이나의 아름다운 미소에 잠시 국왕이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두고 보지.”
* * *
“사흘 정도 받았어요.”
“충분해.”
“그리고 미리 전하라 한 것도 다 전했고요.”
선 넘지 말라던 레이나의 경고는 사실 내가 국왕에게 한 말이었다.
“그 말을 하신 이유는 뻔하죠. 바탄 국왕이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제 수사에 혼선을 줄 수 있으니.”
“네가 알베르타와 관련되어있다고 한마디 하는 순간 알베르타는 대륙에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게 돼.”
물론, 도와주려는 이들도 있겠지만 그 과정만으로도 국제연합에 금이 갈 것이다.
사이야 언제든 틀어지겠지만 이런 말 같지도 않은 일로 틀어지는 건 절대 사절이었다.
“남은 건 그가 눈치 빠르게 손을 떼고 기다릴지 보는 것뿐이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자 레이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알베르타가 한 게 아닌 게 맞아요?”
“알베르타가 그런 짓을 할 가능성은 낮으니까. 뭐가 됐건 전쟁은 막는 게 좋지. 안 그래?”
“당신은 그 전쟁을 좋을 대로 이용해먹고 막으려는 거잖아요.”
그녀가 나를 흘겨보았다.
“막으려고 작정했으면 당장에라도 막을 수 있는 분이.”
“가장 상책은 전쟁이 벌어질 일을 모조리 예방하는 거야. 단순히 막기만 하다간 언젠가 뚫려.”
알베르타도 당장 종전을 해선 곤란했다.
튜나가 문제 되는 자들을 모조리 솎아내고 차후에 이런 문제가 또 발생하지 않게 예방하기 전까지는 시간을 벌어야 했으니까.
바탄과 알베르타의 국경선. 습격자는 사라졌지만, 그들에 대한 흔적은 분명 이곳에 남아있다.
사실 나도 그놈들이 왜 이곳을 습격했는지에 대해선 알 길이 없었다.
습격 흔적을 보면 인간의 습격이라기보다는 거대한 무언가가 휩쓸고 지나간 몰골이다.
그것들이 온 방향은 알베르타 쪽. 의심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긴 했다.
레이나와 나는 말 없이 폐허가 된 이곳을 둘러보았다.
“그동안 잘 지냈어?”
“여기서 할 질문인가요?”
“최근엔 거의 활동을 안 했잖아.”
“그렇죠. 애초에 이걸 한다고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녀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행복한가요?”
“직접 물어보지그래?”
나는 저 멀리 보이는 몇몇 인물들을 가리켰다.
나를 따라온 일리나와 륀느.
그리고 레이나를 따라온 그녀의 단원인 친구, 막시모스 반 테라리아.
콘타스 대제의 여동생인 음유시인 모르지아나.
그리고.
전대 성녀이자 리치인 이오.
“직접 물어보라…… 제가 가지지 못한 미래를 가진 또 다른 제 자신인데 꽤 잔인한 말을 하시네요.”
“넌 이제 일리나가 아니야. 다른 사람이라 생각해 그냥.”
“……그게 쉽진 않아요.”
“그나저나 이오는 언제 합류한 거야.”
머리에 난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날아갈까 조심스레 움직이며 이리저리 신성력을 쏟아붓고 있는 리치라니.
“얼마 전 성국의 리나 성녀님께서 추천해주셨어요. 그녀는 당신의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더군요.”
“넌 마족을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적어도 마족 중에도 안 그런 이들이 있는 건 알았으니까요. 그리고 그녀는 마족이라고 할 순 없죠.”
초대 리치 닉스와는 다르다.
사실 레이나라는 인물에게 있어서 리치라는 존재는 트라우마이며 공포의 대상이었다.
평행 세계선에서 닉스로 인해 세계가 파멸했을 때 그녀는 포로로 잡혀 궂은일을 당했으니까.
“언제까지 겁먹을 순 없으니까요.”
“그나저나. 한 명 더 있다고 하지 않았나?”
“유시르는 이곳에 없어요. 사실 그녀가 진짜 마족이죠.”
“유시르라…… 유시르? 아. 그 몽마.”
유시르.
몽마 출신의 마족이며 내가 몽마 여제를 처리할 때 보았던. 유일하게 강대한 힘을 품고 있던 존재였다.
누군가를 찾기 위해서 몽마 여제의 손을 거들고 있었다고 들었던 인물이기도 했다.
그녀가 찾는 이가 누구인지는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녀는 따로 조사할 게 있어서 서부 대륙에 가 있어요.”
레이나의 말에 나는 요새의 근처를 빙 둘러보았다.
그때였다.
“데이비!! 여기 흔적 찾았다!”
나를 향해 소리치는 자칭 친우인 막시모스 반 테라리아의 외침이 들려오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한다.
이후 그는 단단한 건틀릿으로 거대한 바위를 그대로 집어 들어 던져버린 뒤 바위 아래 깔려있던 어떤 흔적들을 보여주었다.
보랏빛의 체액 같은 것이 눌러붙어있는 마룻바닥이었다.
폐허가 되기 전엔 건물이었던 모양인데.
“이게…… 뭐야?”
알 수 없는 냄새에 모르지아나가 코를 움켜쥐었다.
“체액 같은데요?”
“체액이라…… 그런데 이거 말이야. 생긴 지 얼마 안 된 거 맞지?”
막시모스가 손을 뻗으려 하자 모르지아나가 슬쩍 물러났다.
“맞네. 마른 지 얼마 안 됐어.”
겁도 없이 흔적을 손에 묻혀 비벼본 그가 일어나자 모르지아나와 리치 이오가 한발 물러났다.
“가까이 오지 말아요.”
“어흠! 아무리 프리아 여신님의 어린양인 저라도 그건 좀…….”
“왜 그러는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막시모스는 느긋하게 제 옷에 그것을 닦아버렸다.
“고생이 많다. 레이나.”
“데이비. 이게 뭔지 알겠냐?”
그의 물음에 나는 말 없이 다가가 그것을 스윽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심드렁하게 답해주었다.
“습격자가 싸질러놓은 배설물…… 같은데?”
내 중얼거림에 이오와 모르지아나의 표정이 그대로 일그러졌고 막시모스는 멍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야. 뭔 헛소리야. 지금…….”
“가까이 오지 마라. 막시모스. 한발만 더 다가오면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
내 말에 막시모스는 당황한 듯 주춤거리다가 흠칫 놀랐다.
“X, 나 놀리는 거지?! 그렇지?!”
“맞아. 놀리는 거.”
“야 이 새끼야!”
저렇게 입이 험한 놈이 왕자라니.
격분하는 그의 외침을 가볍게 무시한 채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레이나는 말없이 일리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이 얻지 못한 삶을 얻은 평행세계의 자신의 모습에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을까.
그것은 일리나가 행복해하는 현시점 레이나를 더욱더 혼란스럽게 했을 것이다.
그녀의 의견을 물으려던 나는 하던 것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찢어지자.”
“굳이?”
“다른 곳을 좀 확인하고 싶어서. 이상하다 싶으면 알아서 처리해.”
“빈말로라도 돕는다는 말은 안 하네. 아 참 데이비.”
“음?”
“내 동생…… 잘 지내냐?”
그의 물음에 나는 얼마 전 그녀를 만났던 일을 떠올렸다.
계기 자체는 간단했다. 어떤 설계도를 보여주기 위해서 찾아갔는데 다섯 사람이 모여있었으니 말이다.
-와…… 이건 정말 신기한데요. 오라버니?!
막냇동생 에오니샤와 에디손 기술고문의 손녀 티아라. 그리고 의원인 고르네오 남작의 대학원생으로 들어가 있는 막시모스의 동생 테라리아 왕녀, 그리고, 달의 숲에서 거주 중인 마리아 공주와 타냐까지.
-그래서. 이건 어떤 원리인가요?
-그건 지금부터 너희들이 생각해야지.
그 한마디에 테라리아 왕녀가 그대로 굳어버렸고 에오니샤와 티아라의 표정이 어두워졌던 것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잘…… 지내더라.”
“그래. 다행이네. 다음에 선물 사 들고 한번 찾아갈게.”
“편한 대로 해라.”
그래 잘 지내는 게 맞겠지.
인원을 나누고 폐허가 된 요새를 마저 조사하기 시작한 레이나 일행과 다르게 나는 일리나와 륀느를 데리고 폐허가 된 요새에서 국경선으로 이어지는 숲으로 향했다.
“여기에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 그냥 확인 차원에서 온 거야.”
그리고, 레이나와 일리나는 역시 장시간 같이 붙여놔서 좋을 게 없다는 것도 다시 깨달았다.
일리나가 기뻐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레이나는 알 수 없는 씁쓸함이 들 것이다.
그게 아물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그건 아닌 듯 보였다.
“데이비 님. 이곳에서도 흔적을 발견.”
“여기도 있어. 데이비.”
숲은 역시 내 예상대로 보랏빛의 체액 더미가 여기저기 묻어있었다.
“이건…….”
“데이비 님. 체액 조사 결과. 상당히 복잡한 구조.”
“복잡한 구조라고? 이게 뭔데?”
일리나가 이해할 수 없다며 중얼거렸다.
이에 나는 숲 저편을 가리키며 중얼거렸다.
“저놈 같은데.”
[5서클]
[윈드캐논]
투쾅!!!
어마어마한 바람과 함께 숲 저편에서 위장색으로 은신하고 있던 무언가가 터져나가자 일리나가 후다닥 달려가 그 대상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얼굴이 파랗게 질린 채로 중얼거렸다.
“이거…… 바, 바퀴벌레야?! 크기는 왜 이런데?!”
“…….”
무언가가 있다고는 생각했다만. 생각 이상으로 끔찍한 것이 튀어나온 것이다.
그때였다.
이게 그냥 벌레가 아니라고 말하듯
박살 난 바퀴벌레 형체가 꾸물거리며 녹아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형체는 마치 찰흙처럼 꿀렁거렸고 이내 다시 본래의 형태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유전자 조작…… 토트리아스…….”
그 형태를 고스란히 본 내가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파스스스스!!!
놈의 등껍질이 열리며 날개가 펼쳐진다.
“나…… 날개는 선 넘었잖아!!”
비명을 지르며 내 뒤에 숨어 파르르 떠는 일리나의 모습은 퍽 우습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무서워하지 않는 거 같더니.”
“바퀴벌레는 진짜 싫어…….”
울먹거리는 그녀의 모습이 새삼스럽게 귀엽다고 느껴진다.
쾅!! 쾅!!
-치이익!! 데이비! 여기 도와줘! 으아아악!! 도망가!!
그때 막시모스로부터 다급한 연락이 몰려왔다.
동시에 사방에서 엄청난 수의 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샤아아아아아!!
얼마나 부활하려는 것인지.
나는 이번엔 8서클 프로메테우스 마법을 그대로 놈에게 쏟아 부어버렸다.
그러자 온몸을 버둥거리며 비틀거리던 녀석이 서서히 죽어간다.
“…….”
그리고, 그렇게 죽어버린 놈은 본래의 형태로 돌아오듯 반투명한 보랏빛 지렁이의 형태로 추욱 늘어져 버렸다.
“토트리아스. 바탄 왕국이 범인이네.”
고대유적에서 괴물을 처단한 것까진 좋았는데.
아무래도 그곳에 내가 확인하지 못한 무언가가 더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왜 토트리아스들이 가까운 알베르타를 내버려 두고 이곳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일까.
놈들의 행동은 미심쩍은 구석이 많았다.
“꺄아아아악!! 데이비!!”
그때 저 멀리서 어마어마한 수의 바퀴벌레 형태를 지닌 토트리아스들이 몰려오기 시작하자 일리나는 눈물까지 보이며 내 품에 안겨 엉엉 울기 시작했다.
바퀴벌레에 대한 그녀의 거부감이 상상 이상이자 나는 그녀를 안아 들고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여기서 널 놓으면 어떻게 돼?”
내 물음에 그녀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안…… 그럴 거지?”
“놓을 거야.”
휙!
그리고는 그녀를 놓아버렸다.
“꺄아아아아악!!!”
물론, 그녀가 일대로 모여드는 바퀴벌레들 사이로 떨어지진 않았다.
허공에서 멈춰버렸기 때문이었다.
기겁한 듯 그녀가 허공에서 나를 붙잡는다.
“놓지마아아!! 놓지 말란 말이야!”
기겁하는 그녀의 모습은 제법 흥미로운 광경이었다.
장난스레 웃으며 그녀를 다시 안아 들자 기다렸다는 듯 놈들이 일제히 날개를 펼치며 나를 향해 날아들기 시작했다.
직접 처리하기엔 좀 찝찝한데.
대신할 놈을 부르는 수밖에.
“이프리트. 레바테인.”
정령 마나가 움직인다.
동시에 새카맣게 몰려오던 거대 바퀴벌레들을 휘감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화염 폭풍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화염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일렁거리며 나를 향해 몰려들던 토트리아스, 즉 벌레들을 모조리 불태워버렸다.
각 객체의 힘은 내가 아는 토트리아스보다 약해져 있다.
처음 만난 개체는 조금 특수개체였나 싶을 정도로 형편없는 방어력이었다.
“벌레 박멸은 역시 불이지.”
그래. 차라리 이 정도였으면 다행이지. 이놈들이 토트리아스라는 걸 안 이상 그냥 있을 수 없었다.
“데이비 님. 토트리아스는 유전자를 흡수, 적용시키는 진화생물체…….”
“알아.”
“따라서 바퀴벌레의 특성을 흡수했다 판단. 놈들의 번식력은…….”
제발 아니길 바라지만…….
바탄 왕국 도시 곳곳에 이런 토트리아스들의 습격이 시작된걸 알게 된 건 그 후의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