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00화
“폐하. 결단을 내리셔야 하옵니다.”
다수의 대신들이 모여들어 그에게 선택을 종용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알베르타의 짓이다 라며 끝없이 외치던 괴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각 요새와 영지들을 습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이토록 전략적으로 또 이토록 깔끔하게 치고 빠지는 건 몬스터의 습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의지를 지닌 존재가. 그 괴물들을 조종하여 바탄을 공격하고 있다.
그것이 그들의 판단이었다.
말없이 침묵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바탄 국왕이었다.
그는 이번 사태를 기회 삼아 알베르타와 전쟁하기만을 학수고대해왔다.
하지만, 고작 며칠 정도, 용사 레이나와의 약조가 있었기에 쉽게 나서기가 어려웠다.
만에 하나라도 잘못되었다가 모조리 덮어쓸 가능성이 있으니 말이다.
“그대들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네. 이미 전쟁준비는 끝난 마당에 가증스러운 알베르타를 공격하지 않는 건 말이 되지 않지. 암. 하지만…….”
“용사 따위가 무에 신경 쓰이시는 겁니까! 폐하! 폐하는 이 나라의 국왕이시옵니다! 또한, 이곳은 바탄입니다! 바탄에서 폐하께서 하지 못하실 것은 없사옵니다!”
눈치 보지 마라. 이곳은 바탄이다.
대신들이 입을 모아 외치자 바탄의 국왕은 인상을 찌푸리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안됩니다! 아무리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곤 하나 그렇게 대륙연합과 맺은 조약의 절차를 무시했다간 후에 어떤 비난을 받을지 알 수 없습니다!”
그때 바탄의 막내 왕자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폐하! 고작 며칠입니다! 또한, 지금 괴물들에게 공격받는 요새와 영지들을 무시하고 알베르타로 진군하는 건 백성들을 버리는 결단이라 판단됩니다!”
막내 왕자의 주장은 그러했다. 일단 알베르타에게 응징을 가하는 한이 있어도 지금처럼 무차별적으로 대규모 공격을 받는 상황에선 우선 막아낸 뒤 움직이는 게 옳다!
하지만 그는 정치적으로 발언권이 낮은 인물이었다.
“허어…… 그것은 걱정하실 거 업습니다. 왕자 저하. 알베르타를 공격하면 비교적 군사력이 약한 그들은 반드시 그 괴물들을 회군시키려 들 겁니다. 자연스레 저희가 주도권을 지니게 되겠지요.”
“하지만…….”
“하지만이고 뭐고 네놈은 닥치고 있어라!”
바탄의 왕세자가 막내 왕자를 향해 소리쳤다.
“폐하! 결단을 내리시옵소서!”
“결단을 내리시옵소서!!”
입을 모아 외치는 왕족과 귀족들을 보며 국왕이 피식 웃었다.
“그렇겠지. 짐은 이만큼 참아준 것이다. 아니 그러한가.”
눈을 번뜩이며 동조를 요구하듯 쳐다보자 그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장군들은 들어라.”
“예! 폐하!”
“현 시간부로 모든 병력을 알베르타로 진군시켜라.”
“폐하!! 그리되면 용사 레이나는!!”
“용사 레이나는 알베르타와 몰래 작당하였고, 이번 사태를 일으켰다! 따라서 우리 바탄 왕실은 용사 레이나를 수배하고 그녀를 구금하라!”
말 같지도 않은 억지였다.
하지만 그녀가 며칠간 유예를 만든 것 때문에 바탄이 피해를 보게 되어버리자 바탄은 그것을 빌미 삼아 그녀까지 싸잡아서 처리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복잡한 일은 린디스 제국의 알카 후작이 알아서 처리해줄 것이옵니다.”
막내 왕자는 결국 제 아비의 결단을 막지 못했다.
막내 왕자는 세상이 돌아가는 흐름을 보며 탄식했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로 전쟁이 벌어질 것이다. 문제는 린디스의 알카 후작이 고작 두 국가의 전쟁으로 만족할만한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는…… 분명 이번 기회에 대륙전쟁을 유도하려 할 텐데…… 안 되겠다. 용사 레이나를 직접 만나야겠어.”
알베르타의 억제력이나 다름없는 튜나 재상이 살아있으면 싶었지만, 그녀는 현재 죽은 상황. 알베르타 쪽에서도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의 고심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 * *
끝도 없이 몰려나올 거라 예상한 것과 달리 개체 수가 그리 많지는 않았는지 더 이상의 출현은 없었다.
물론, 보이는 족족 레바테인으로 태워버렸으니 그 수가 적게 느껴질 수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후우…… 냄새…….”
퀴퀴한 탄내가 코를 찌르자 일리나가 몸을 파르르 떨며 내게 달라붙었다.
“이거…… 또 살아나거나 그러진 않겠지?”
“벌레를 박멸하는 데엔 불만한 게 없어.”
일일이 베어봐야 이미 품고 있는 알에서 더 나올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가설은 충분히 있으니까.
잿더미가 되어버린 벌레들 사이에서 몇몇 개체는 그래도 형태라도 유지하고 있었다.
일리나는 혹여라도 저것들이 살아나는 게 아닐까 두려운 표정을 지으며 그 형체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파스스…….
“꺅!!
그때 바싹 타버린 괴물의 시체가 파스스 소리를 내며 움직이자 그녀는 비명을 내지르며 그대로 내 품에 달려와 안겼다.
파르르 떠는 것이 어지간히도 거부감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살아난 거 아니야. 왜 이렇게 겁을 먹어.”
“바, 방금 움직였잖아! 너도 봤지?! 움직이는 거!”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소리친 그녀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물론, 그녀의 말대로 움직인 것은 사실이었지만. 결코 놈이 살아난 것은 아니었다.
“타면서 수축한 것 뿐이야. 겁도 참 많네.”
킥킥 웃으며 그녀를 놀리는 게 왜 이리 즐거워진 것인지.
일리나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나를 노려보면서도 내 옷자락을 잡고 있는 손은 절대 놓지 않았다.
“이제 주변에 없는 거 같으니 그만 좀 놔.”
“시…… 싫어!”
평소답지 않게 상당히 응석을 부리는 모습에 나는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다리에 힘이 좀 풀려서…….”
“대륙 최고의 검사가 바퀴벌레 하나에 이렇게 겁먹을지 누가 알았나.”
“너, 진짜 못됐다…….”
“됐으니까 이리와.”
“어…… 어어?”
그녀가 시선을 피했다.
나름대로 사정이 있는 모양인데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이에 나는 말 없이 그녀를 등에 업었고, 살짝 놀란 듯 경직된 그녀가 이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따뜻하다…….”
“조금 흔들릴 수 있으니 조심해.”
“방금 그 괴물들이 요새를 습격한 거겠지?”
“일단은 그게 맞겠지.”
“저게 전부는 아닐 텐데…… 앞으로 저것들이랑 싸워야 하는 거야?”
내 어깨를 붙잡고 있던 그녀의 손에 옅은 떨림이 느껴졌다.
“유전자를 먹어치우고 변하는 놈들이니까. 다른 모습으로 변할 수도 있을 거야.”
일리나는 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를 등에 업은 채 천천히 숲을 거닐고 있자 그녀의 짧고 간지러운 숨결이 느껴졌다.
곤히 잠들기라도 한 것인지 말없이 침묵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경계가 이리 없을까.”
그런 점에서 참 귀여운 맛이 있는 그녀였다.
-치지직…… 이봐요.
그때였다.
레이나에게 건네준 수정구에서 레이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뭐 하는 짓이죠?
명백히 내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폐하의 명이십니다. 저희도 검을 들이밀긴 싫으니 얌전히 따라와 주십시오.-
-어이, 이봐! 지금 장난쳐?! 우리가 뭘 했다고 이러는데!
-그건 저희가 알아서 조사할 일입니다.
-하…… 대충 알겠군요. 저희가 이곳에서 조사를 하는 게 달갑지 않은 거겠죠. 국제연합 조사단의 출입도 틀어막고 버티더니 끝내 레이나 씨가 나서니까 그녀를 억압해서라도 전쟁을 벌이고 싶었나요?
누군가와의 설전이 계속되었다.
-당신들이 괴물들을 자극한 탓에 바탄의 수많은 요새와 영지들이 습격을 받았습니다. 이에 따른 철저한 조사를 받으셔야 할 겁니다.
-거부한다면?
-저희가 당신들을 어떻게 막겠습니까. 하지만 이 일은 세상에 알려지겠지요.
-그건 저희가 판단합니다.
-좋아요. 이 일은 내가 처리할게요. 당신은 근본적인 문제를 계속 조사해주세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무얼요. 그냥 혼잣말입니다. 가시죠. 저도 마침 바탄 왕실에 볼일이 있으니.
씹어뱉는 듯한 레이나의 차가운 목소리가 퍼져나갔다.
수정구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내 어깨에 얼굴을 기대어 잠들어있던 일리나가 눈을 살짝 뜨며 침을 삼켰다.
“쓰읍…… 미안해, 네 등이 너무 따뜻해서 히히…… 응? 무슨 일이야?”
“조용히.”
등에서 내려온 일리나는 끊어진 연락을 곱씹으며 중얼거렸다.
“다급했던 모양인데? 용사 일행을 이렇게 구금할 줄이야. 이렇게 되면 전쟁이 벌어지는…….”
“아니. 전쟁 문제는 레이나에게 맡겨보자. 본인이 맡겨달라 하니 한번 시험은 해보고 싶어졌으니.”
그녀가 힘들어한다면, 그땐 나설 것이다. 다만 그녀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면, 까짓거 잠깐은 맡겨도 상관은 없으리라.
지금 내가 신경을 써야 할 건 미리 대비를 해둔 전쟁보다 이 뜬금없이 튀어나온 고대 생명체였다.
지직…… 지지직!!
“여기 있었네.”
그때였다.
내 주변 공간이 일그러지며 두 명의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머리칼을 지니고 품에 가죽으로 된 책을 안고 있는 이와 검을 허리에 찬 푸른 머리칼의 소녀였다.
“이실디. 베르단데.”
“토트리아스가 발견됐어.”
베르단데가 앞장서서 허공을 찢었고, 그 사이에서 추욱 늘어진 반투명한 보랏빛 지렁이 한 마리가 툭 하고 떨어져 내렸다.
수십 갈래로 검흔이 남은 것으로 보아 이실디가 베어버린 것이리라.
검 하나만 쥐고 보면 일리나와는 다른 계열로 괴물 같은 생명체.
그게 그녀였다.
“안 그래도 이 숲에도 튀어나와서 태워버린 참이다.”
“불로 태운 건 정말 잘한 선택이야. 토트리아스의 유일한 약점은 불이니까.”
그런 불이 약점인 괴물을 단순히 베어서 증식도 못 하게 죽여버린 그녀가 할 말은 아니지만.
“전쟁이 터질 거 같으면 내가 힘으로라도 막으라고 했잖아. 니들이 여길 오면 누가 전쟁을 막냐.”
“스쿨드가 대신 움직였어.”
그 망할 꼬맹이. 울드와 베르단데의 동생이자. 지금까지 살아있는 주제에 나와는 극도로 사이가 좋지 않은 심연의 공주였다.
“그녀는 그런 단체전투에 굉장히 특화된 힘을 지니고 있으니까.
강제 해킹.
비슷한 맥락이었다.
본래는 전쟁이 터질 것 같으면 두 공주의 힘으로 찍어눌러 버리라고 말하려 했었다.
하지만 그녀들은 내 앞에 나타났다.
“그딴 게 중요한 게 아니야.”
“사태가 제법 귀찮아졌으니까. 인간들이 전쟁을 하건 말건 신경 쓸 때는 아니지.”
베르단데가 말을 끊고 이실디가 심드렁하게 쏘아붙였다.
“바탄이 연구하던 고대 연구시설에서 튀어나온 거로 보이는데. 얼마나 튀어나왔는지는 모르겠다.”
“우선 네가 알아낸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핀포인트만 짚어주도록 할게. 그놈들은 유전자를 먹어치워서 자신의 몸을 변형시켜. 네 포식의 힘처럼 말이야.”
“그건 륀느에게 들었어.”
륀느 또한 고대의 기억이 어느 정도 각성해있으니 토트리아스에 대해 내게 알려준 것이었다.
반면 이실디는 토트리아스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역겨움이 느껴지는지 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 징그러운 벌레 새끼들. 슬리지아는 좋아했을지 몰라도 난 딱 질색이야.”
정작 심연의 공주들을 죽일 때 그들의 본체가 토트리아스 이상으로 징그러웠던 것 같은데.
이실디는 조금 독특한 케이스인 듯 싶었다.
확실히 슬리지아나 저주의 공주인 베르샤 등등과 다르게 그녀는 괴물보단 인간에 가까운 형태를 지니고 있었으니까.
“결론만 놓고 말해줄게. 이놈들. 하이브를 만들었어.”
“하이브?”
“그래. 토트리아스는 군집생명체야. 그리고, 그 군집생명체의 두뇌라 할 수 있는 오버브레인이 모든 군집을 조종하지. 개개인은 지능도 없고 본능만 남은 짐승이니까.”
하이브.
즉 이놈들이 마치 전략을 행하듯 움직이는 건 그 하이브라는 존재가 생겨났기 때문이라는 소리였다.
“솔직히 말해서 토트리아스는 오래 못가서 모조리 박멸됐어. 위험성을 아니까. 세피로스 저 녀석과 고대룡이 손을 잡고 하이브를 죄다 말살했거든.”
그 하이브가 하나만 있어도 재앙에 가까운 증식을 보인다.
그것이 토트리아스였다.
“그러니까. 지금 전쟁 같은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하이브를 빨리 쳐내야 한다? 그래서? 니들이 아는 그놈은 어떻게 찾아낼 건데?”
“하이브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아.”
이실디가 어깨를 으쓱이며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였다.
“그럼 찾아.”
“어?”
“찾아서 제거해. 못하는 거 아니잖아.”
“너…… 넌 뭐하는데?!”
“넌 내가 무슨 일만 터지면 나서서 다 처리하는 벌레 청소업체인 줄 알아? 바탄의 전쟁은 레이나가 막아주기로 한 거 같고, 이일은 너희가 전문가니까 알아서 처리해 그냥.”
“…….”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는 그녀였다.
확실히 이실디의 힘이라면 하이브를 처리하는 데에 어려울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키지 않는 듯 보였다.
“야!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잘못하면 이 대륙 전체에 저 끔찍한 벌레 새끼들이 득시글거릴…….”
“그만해. 그렇게 말해봐야 의미 없어.”
베르단데가 그녀를 진정시키자 이실디가 씩씩거렸다.
“데이비. 미안하지만 이번일, 네가 좀 도와줘야 해.”
이실디를 진정시킨 뒤 그녀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네 힘이 아니면 못 막아.”
“너희들도?”
“잡는 거야 쉽지. 그런데 말이야. 벌레를 잡을 때 눈에 보이는 걸 잡는다고 박멸되는 거 봤어?”
5마리의 벌레가 발견되면 이미 그곳에는 수천 마리의 벌레가 있다는 뜻이다.
“그렇게 되지 않게 근본부터 날려버리려면 용언이 필요해. 그것도, 내 어머니 정도 되는 강대한 격을 지닌.”
베르단데가 어머니라 말하는 이는 단 한 명뿐이었다.
에반젤린의 친모이자 헤라클래스와 함께 사라진 고대룡 이클립스.
그녀만이 사용할 수 있는 그녀의 용언이 아니면 하이브의 정신이 도망치지 못하게 묶어둘 수가 없었다.
“이야 데이비 너 외통수 걸렸네? 안 할 수도 없을 거 아니야.”
“안 할 건데?”
“안 하면 그 바퀴벌레들이 세상에 득실거릴 거 아냐…….”
“언제까지 내게 맡길 거야. 막말로 내가 없어지면 그땐 그냥 개판 나게?”
일리나가 눈물을 글썽인다.
“아…… 안돼?”
“……망할!”
답지 않은 애교는 사람의 심장에 좋지 않다는 걸 그녀는 아직 모르는 듯 했다.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 일리나가 환하게 웃어 보였고, 지고는 못사는 성격인 나는 그녀를 품 안에 가두듯 끌어안아 버렸다.
“아…… 아앗!”
그러자 그녀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타나토스 이 개 x식. 이 일 끝나고 진짜 달을 반으로 쪼갠다. 내가 진짜.”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
“대체 이 자식은 뭘 만들어놓은 거야.”
짜증을 토로하면서도 나는 어느 정도는 받아들여야 했다.
프리아 여신의 힘을 몇 번이고 빌려 내 좋을 대로 미래를 바꿔왔으니. 그 의무에서 자유롭지는 못할 것이라고.
무엇을 만들었냐는 내 짜증에 베르단데는 짧고 간결하게 정답을 내놓았다.
“괴물.”
* * *
고대에 타나토스가 만들어낸 문제 덩어리.
그것을 제거할 수 있는 건 이클립스가 가진 용언 급 이상의 힘을 지닌 무언가였다.
영웅들을 현신시키는 건 그 본인에게도, 세상 자체에도 엄청난 부담이 되기도 하거니와 이제 와서 그들의 도움을 받아야 할 만큼 내가 어리숙한 것도 아니었다.
“자. 세x코가 왔어요. 누가 벌레 아니랄까 봐 아주 깊숙이도 숨겨놨네.”
하이브의 위치가 어디일까.
끝없이 고민해보지만,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처음부터 놈들이 나온 장소.
알베르타의 수도에서 멀지 않은 대 숲에 숨겨진 고대 유적.
그곳이었다.
벨가를 먹어치운 그 거대한 문어 같은 괴물이 있던 곳. 이 사태의 방아쇠는 어쩌면 그 괴물의 죽음과 맞물린 결과가 아닐까 싶었다.
괴물을 처리하느라 그 아래를 살피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벨가 놈이 먹히게 두지 말았어야 했나.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결과적으로 벨가는 적이니 어떻게든 죽여야 했다.
“……냄새가 너무 고약해.”
거대한 살점으로 가득 찬 지하를 보며 이실디가 짜증스레 중얼거렸다.
“그런데 이곳을 지키는 놈이 없나? 개미나 벌도 제 여왕을 지키는 놈들은 있는데.”
내 중얼거림에 이실디가 어깨를 으쓱였다.
“나야 모르지. 그나저나 그 둘은 그냥 보내도 돼?”
“사태가 심각한 걸 알았으니 알베르타 쪽도 어느 정도 전력을 보내놔야겠다 싶어서.”
바탄 쪽엔 레이나와 베르단데를, 알베르타엔 일리나와 륀느를 보냈다.
어차피 이곳에서 이클립스의 힘이 필요할 정도라면 굳이 복잡하게 굴 필요는 없으니까.
현재 이곳엔 이실디와 내가 전부라는 소리였다.
“이실디.”
“응?”
“토트리아스, 먹어치운 유전자를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나?”
“그래. 그놈들은 완전히 박멸되기 전까지 정보를 기억해.”
“그럼 고대 생명체로도 변할 수 있다는 거네?”
“축적된 힘만 많다면야 얼마든지 그럴 수 있겠지만…… 상식적으론 불가능하지.”
“그럼 저건 뭐냐.”
내가 어두운 복도 너머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흐흐…… 흐흐흐흐흐…….”
섬뜩한 웃음을 짓고 있는 한 여인 보였다.
“베르단데가 없기를 잘했네.”
“마음에 들진 않지만. 같은 생각이야.”
스릉…….
홍단이를 뽑아 들고 복도 저편에서 나를 향해 다가오는 여성을 향해 한 발 내디뎠다.
“있지, 너 이름이 뭐야? 난…….”
그녀가 비틀거리며 섬뜩하게 웃어 보였다.
“울드라고 하는데.”
아하하하하하하!!!
어디선가 광기 어린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