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05화
회담 도중에 갑자기 난입한 데이비로 인해 잠시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튜나는 온몸을 버둥거리며 소리 질렀다.
“이봐요! 지금 장난해요?! 이게 뭐하자는 거죠?!”
“회담은 잠시만 멈춰. 그거 멈춘다고 전쟁 안 터지니까.”
“당신이 뭘 안다고!”
“지금 네가 도와주지 않으면 이 짧은 시간 안에 몇 명이 더 죽어 나갈지 모른다.”
슬리지아는 이실디가 충돌하며 막아내고 있지만, 그녀는 역시나 만들어진 개체일 뿐 진짜 본체. 하이브 마인드는 아니었다.
이에 나는 튜나를 포박한 채 허공에 들어 올린 뒤 손가락을 튕겼다.
짜드드드드득…….
동시에 수십 개의 아이스 스피어들이 일제히 그녀를 포위하듯 감쌌고 그것을 본 튜나의 표정이 파랗게 질린다.
본능적으로 목숨의 위협을 느낀 것이다.
두려운 기색을 내비치며 주변을 지키던 병사들도 내가 갑자기 튜나를 잡아 인질 삼자 당황한 기색들이 역력했다.
당연 알베르타 쪽이 가장 심했으니까.
“자! 보고 있지? 얼른 오지 않으면 튜나 재상을 내가 어떻게 할지 모른다 벨가.”
내 외침과 함께.
효과가 바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놈은 역시 모든 토트리아스를 이용해 세상을 보고 있다면 놈은 반응을 보일 가능성이 높다.
휘이이이잉!!! 쩌어엉!!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이실디와 격돌하고 있던 가짜 슬리지아였다.
그녀는 마치 홀린 것처럼 이실디를 무시한 채 그대로 튜나를 협박하고 있는 나를 향해 공간을 찢어 날렸다.
찢어진 공간은 당연히 위협적이었다.
공간 자체가 찢어지며 그 사이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흡입력이 느껴진다.
아무것도 없는 인간이 저 사이로 빨려 들어가면 분쇄기에 갈린 것처럼 사라져버리리라.
하지만 내 목표는 슬리지아의 어그로가 아니었다.
콰직!!
당연히 그걸 그냥 보고 있을 일리나도 아니었다.
칼디라스를 이용해 허공을 그어 내 근처의 공간 균열을 상쇄시켜버리자 유리창이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튜나가 눈을 꼭 감았다.
“야.”
그리고, 그렇게 이실디에게서 등을 돌린 가짜 슬리지아는…….
“너 미쳤구나?”
콰득!!
슬리지아의 경우 정말로 강력한 심연의 공주였지만 현재 그녀와 싸우고 있는 건 진짜 슬리지아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했던 특이적인 존재. 바로 이실디였다.
그런 그녀가 이실디에게 등을 보였으니 그 결과는 훤했다.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수차례의 파육음이 들려왔고, 슬리지아의 전신에서 피가 터져 나오며 추락하기 시작했다.
“누굴 앞에 두고 감히 돌아서는 거야.”
쓰러진 슬리지아의 목을 틀어잡은 이실디가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제압한 뒤 말했다.
“데이비. 하던 거 마저 해.”
“크윽…….”
고통으로 인해 인상을 찡그린 슬리지아지만 방금전의 타격이 너무 컸는지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자. 그럼 방해꾼은 끝났고, 메인 배우가 나오셔야지.”
“자…… 잠깐만요! 서…… 설마 날 죽일 건 아니죠?! 그쵸?!”
파랗게 질린 튜나가 외친다. 아이스 스피어들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억지로 그녀에게 날아가려는 걸 붙잡고 있는 듯한 모양새였다.
“글쎄. 한번 죽어봤는데 두 번은 못 할까.”
“이…… 이 미친 새끼야!”
그녀의 외침에 나는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눈을 크게 떴다.
“어이쿠…… 놓쳤다.”
쩌어엉!!!
그리고, 아이스 스피어 하나가 그녀를 향해 맹렬하게 날아들었다.
그와 동시에…….
쿠우우우웅!!
대지가 울리며 지면 속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자신이 죽을 거라 생각해 눈을 감았던 튜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린 아이스 스피어의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고생했다. 덕분에 저놈 끌어냈으니.”
“대체 무슨…….”
“환각이야.”
내 대답에 튜나는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당신…… 진짜 죽여버릴 거야…….”
허탈하게 중얼거리는 그녀는 이윽고 바닥에서 튀어나온 괴물이 축소하며 어떤 인간의 형체를 만들자 눈을 부릅 떴다.
“너…… 넌?!”
“정신체 벨가. 저 녀석이 바탄을 공격한 이유는 너 때문이야.”
내 말에 그녀가 혼란스러운 기색을 내비쳤다.
“그게…… 무슨 말이죠?”
“널 지키려고. 널 헤치려 한 바탄을 죽여야 한다는 의지만 남은 거라고.”
그러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질렀지.
“부…… 분명 벨가는…….”
“죽었지.”
그런데. 정신체에게 육신의 소멸이 죽음을 뜻할까.
다른 정신체는 몰라도 벨가는 아닐 거라 생각한다.
“그럼 저건…….”
“벨가가 맞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사람인 너도 살아났는데 벨가라고 다를 게 있나.”
“벨가…….”
튜나와 벨가는 사실 그리 오래 관계를 유지해온 사이가 아니었다.
본래엔 적이었고, 서로에겐 존재 자체도 크게 관심 없었으니까.
-튜나…….
낮게 튜나를 부르던 벨가의 눈이 섬뜩하게 번뜩였다.
동시에 녀석의 손이 일렁이며 거대한 발톱으로 변했고, 망설임 없이 내게 덤벼들었다.
쩌어어엉!!
묵직한 소리와 함께 청단이의 검신이 그의 발톱을 막아낸다.
가장 효율적인 무기는 당연히 화검 레바테인이지만 녀석은 이미 화검의 효능을 잘 알고 있기에 경계하고 있었다.
“벨가!!”
그때 주저앉아있던 튜나가 벨가를 향해 소리쳤다.
“대체…… 대체 왜 그렇게 된 거야…….”
-튜나…….
다른 말은 하지 않고 오로지 튜나만을 부르는 그의 모습에 튜나는 눈동자를 파르르 떨며 그에게 다가가려 했다.
“야. 뭐하는 짓이야. 저게 벨가로 보여?”
“벨가 맞잖아요! 나를 구하러 와줬던 그 벨가! 배고파서 힘들어하던 그 아이!”
그녀의 외침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넌 생각이라는 게 없냐? 네 아버지를 죽인 게 저놈이야.”
내 말에 튜나가 벨가를 바라보았다.
“정말…… 네가 죽인 거야?”
그녀는 제발 아니라고 말하라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진상은 바르고 후작의 독살로 추정되지만 그 당시 바르고 후작의 손을 거들고 있던 건 벨가였다.
-나…… 나는……. 나는…….
그때 벨가가 처음으로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움찔하며 비틀거리더니 다른 말을 내뱉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외침은 끝맺어지지 못했다.
“쏴라!!!”
어디선가 날아온 외침과 함께 불화살이 그를 향해 날아들었기 때문이었다.
불에 취약한 토트리아스에게 잠식당한 벨가답게 녀석은 하던 말을 멈추고 역안을 섬뜩하게 번뜩이며 화살을 향해 거대한 발톱을 휘둘렀다.
카가가각!! 소리와 함께 화살들이 허공에서 박살 났고, 그는 마치 폭주한 것처럼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벨가…… 벨가!!”
“튜나 드 머전트. 선 넘지 마라.”
싸늘하게 말하자 그녀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정말 저 아이가 한 게 아니라면…….”
“아니든 맞든 저놈은 바르고 후작을 도와서 알베르타에 대규모 흉년을 가져온 놈이다. 그걸 잊지 마.”
그리고는 병사들을 향해 덤벼들려는 벨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쩌엉!!
동시에 검은 빛의 탄환이 그를 강타했고 그는 짧은 신음을 터뜨리며 튕겨 나가 바닥을 몇 차례고 굴렀다.
거대한 체격을 응축시킨 탓에 몸의 단단함 하나만큼은 괴물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게 전부라곤 생각지 않았다.
슬리지아 같은 괴물을 만들어낼 정도로 토트리아스는 어디선가 대량의 생명력을 보유했다.
그러니 이 정도에 당하진 않으리라…….
“튜…… 나…….”
쓰러진 놈은 광기에 찬 모습을 보이면서도 오로지 튜나만을 부르짖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는 이들 중 가장 큰 충격에 휩싸이는 건 다름 아닌 튜나였다.
“싫어…… 이런 건 진짜 싫어…….”
혼란스러운 듯 그녀가 주저앉은 채 중얼거렸다.
-그아아아아! 튜나!!
바닥에 쓰러져 있던 그가 날뛰며 그대로 나를 향해 돌진해오기 시작했다.
-튜나…… 해치지 마!!
나를 튜나를 해칠 존재라 인식한 벨가는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았다.
쩌어엉!!
손에 모여든 거대한 에너지 체가 응축되어 그의 상반신 일부를 날려버림에도 그는 미친 듯이 괴성을 내지르며 나를 향해 덤벼들었다.
토트리아스의 장점은 방대한 유전자를 먹어치우고 진화한다.
하지만 녀석은 그 유전자의 대부분을 사용하지 않았다.
“너. 알고 있구나.”
모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진화를 거듭할수록 벨가는 본래의 자신을 점점 잃어버릴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겉모습은 자유롭지만, 그 내면은 그렇지 않았다.
-그아아아아!!
“…….”
그토록 두려움을 뿜어낸 하이브 마인드인 벨가지만 그 누구도 지금 그를 향해 두려움을 드러낼 순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을 보는 이들의 표정에 담긴 감정은 안타까움이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저 괴물인 벨가가 튜나를 내게서 지키기 위해 덤벼들고 있다는 걸 모를 리가 없으니 말이다.
“당신이 완전히 악당인데요.”
레이나의 중얼거림에 나는 혀를 찼다.
그리고는 놈의 틈을 보고 태워버리려던 레바테인을 역소환 시킨 뒤 청단이와 홍단이를 공명시켜 초단이로 만들어냈다.
-떨어져!!!
놈은 절대로 물러날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놈을 그냥 두면 피해는 더욱 커질 터.
지금도 계속해서 바탄을 공격하고 있는 괴물들은 지금은 바탄에서 끝날 테지만 후에는 인류 전체를 공격할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 그렇게 될 터다.
[중검]
[마스터피스]
청적색의 긴 직검인 초단이에 막대한 힘이 서리며 회오리 같은 힘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나는 그것을 뒤로 당기듯 잡은 뒤 한 손으로 그립을 쥐고 남은 한 손으로 폼멜을 지탱했다.
그리곤 정확히 시야에 놈을 담았다.
그때였다.
놈이 갑자기 눈을 크게 뜨더니 그대로 방향을 튼 것이다.
이제와서 위험을 눈치채본들 늦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놈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노 네임드 킹.]
쩌억!!
대기 전체가 갈라지는 듯한 느낌과 함께 중검의 극의가 발현되었다.
범위 안의 모든 것을 베어버린 검기는 그대로 날아들었고. 그 범위 끝에 노출된 벨가의 몸이 허공에서 멈췄다.
거대한 빛이 한차례 주변을 감싼다.
그리고.
그 거대한 검기의 세례 이후 빛이 사라졌을 때.
튜나는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아 버렸다.
“…….”
놈은 찰나의 순간 자신의 모든 힘을 방출하며 노 네임드 킹의 여파가 오로지 자신에게 오게 만든 것이었다.
물론, 내 공격이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줄 리는 없지만, 그 지진 여파로 인해 주저앉아있던 튜나가 다칠 수도 있었다.
그런 상황을 벨가는 오로지 자신이 모두 받아들임으로써 막아버린 것이었다.
허공에서 털썩 떨어진 놈의 힘이 약해지자 일방적으로 당하던 슬리지아도 마치 고깃덩어리처럼 일그러지며 사라져 그에게 스며들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하늘 저편에서 어마어마한 수의 보랏빛 살덩어리 같은 것들이 비처럼 쏟아지며 그에게 모여들기 시작했고, 이내 완전히 스며들었다.
바탄을 공격하던 토트리아스 군체들이 분명하리라.
어떻게든 벨가를 살리려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노 네임드 킹에 핵을 당해버린 벨가는 일어서지 못했다.
“아…… 아아…….”
그때 튜나가 천천히 쓰러진 벨가에게 향했다.
그리고는 쓰러진 그의 손을 잡으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왜…… 왜 이렇게 되는 거야…….”
끝에 자신을 구하기 위해 모든 타격을 정면으로 받았음을 눈치챈 튜나는 소리 없이 오열했다.
“왜 네 목숨까지 버려가면서 나를 지키려는 거야…….”
적이었고,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음에도 그녀는 이 알 수 없는 슬픔에 더욱 눈물을 참지 못했다.
그런 그녀의 눈물을 보며 벨가는 천천히 시선을 돌렸고, 어렵게 손을 뻗어 튜나의 눈물을 닦았다.
-그, 그…… 그냥, 울지마…….
어렵게 입을 연 그의 그 한마디에 튜나는 결국 참던 슬픔을 토해내고 말했다.
아마 자신의 아버지인 선대재상이 그녀를 위해 소멸이라는 희생을 택한 것처럼 벨가도 그녀를 위해 폭주하고 이렇게 죽어간다는 사실을 겹쳐 본 모양이었다.
아무리 전생을 기억해도 그녀가 견디기엔 너무 쓰디쓴 현실이 아닐 수 없었다.
차갑게 식어가는 벨가의 손을 꼭 잡은 채 엉엉 우는 그녀를 보며 나는 초단이를 한차례 털어냈다.
“베어내실 건가요?”
“그래야겠지.“
조용히 물어오는 레이나의 질문에 나는 가라앉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벨가는 지금까지 본 다른 정신체와는 확실히 달랐다. 마치 순수한 의지체. 아이 같은 모습이었으니까.
그가 튜나에게 집착하는 건 처음으로 그에게 배고픔을 잊게 해주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대체 그게 어떻게 가능했는지는 나로서도 알 길이 없지만 말이다.
내 대답에 레이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두세요. 그는 위험합니다.”
그리고는 튜나를 떼어내기 위해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때였다.
-아…… 안돼…….
쓰러져서 침묵하던 벨가가 눈을 부릅 떴다.
“베…… 벨가?!”
-떨어져!!
동시에 녀석이 본능적으로 튜나를 밀치자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튕겨 나갔고 레이나가 빠르게 튜나를 안전하게 받아냈다.
-떨어져…… 떨어져……. 위험해…… 여기…… 도망쳐…….
그는 힘겹게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대체…… 대체 왜…….”
튜나가 눈물을 흘리며 묻자 그가 처음으로 웃었다.
-넌…… 내가 배고픔을 잊게 해줬으니까.
그 한마디면 충분하다는 듯 녀석은 처음으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동시에 튜나가 오열하기 시작했고, 튜나를 받아안고 있던 레이나 또한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눈시울을 붉히며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콰드드드득!! 콰득!!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몸이 폭주하듯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의 몸 안에서 대량의 무언가가 태동하기 시작했다.
마치. 지금까지 잠자코 있던 무언가가 깨어난 것처럼.
벨가는 자신의 몸에서 텨져 나오는 것들을 억누른 채 튜나에게서 멀어지려 필사적이었다.
사소한 이유 하나로 자기 목숨까지 버려가며 튜나를 지키려는 그의 모습에 그 모습을 보던 이들은 침묵한 채 입을 열지 못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데이비! 빨리 처리해! 저거 터지면 복잡해질 거야!!”
그때 이실디가 황급히 소리쳐왔다. 그건 그녀뿐만 아니라 나도 느끼고 있었다.
벨가의 내면에서 그와 같은 수를 헤아리기 힘든 정신체들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막대한 생명력. 그것은 어쩌면 벨가의 안에서 잠들어있다가 벨가가 토트리아스의 하이브 마인드가 되면서 깨어난 무언가처럼 보였다.
[말살과 구원. 네 결정과 네 선택에 따라 흐름이 바뀔 거야.]
마치 계시가 내리듯 목소리가 들려왔다. 프리아 여신이 내게 말했던 말살과 구원이라는 건 끝까지 내 선택을 존중하겠다는 뜻이었나 싶었다.
물론, 지금 와서 벨가를 어떻게 해볼 수 있는 방법은 상식적으로 없었다.
그래. 없어야 했는데.
본능적으로 아공간을 열어 나는 어떤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다름 아닌 베헤모스가 나타났을 때 프리아 여신이 내게 건네주었었던 어떤 석판이었다.
옅게 공명하는 석판을 내려다본 나는 폭주를 억지로 억누르며 도망치라는 말만 반복하는 녀석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시선을 돌렸을 때 오열하는 튜나를 억지로 끌어안은 채 소리 없이 눈물을 보이고 있는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 모습을 보고 무엇을 떠올린 것일까.
“멍청아! 계속 멍 때릴 거야?! 저거 안 치우면 진짜 귀찮아진다고!”
짧게 침묵하던 나는 석판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아 몰라. 그냥 해봐.”
나는 마치 홀린 것처럼 읽을 수 없는 글귀가 새겨진 석판의 언령을 읊었다.
[먹어치워, 태초의 포식자.]
석판에서 터져 나오는 힘은 어째서일까. 내가 사용하던 포식의 힘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