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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1104화 (1,103/1,559)

제1104화

륀느를 통해 협상이 시작되었음을 전해 들은 나는 고깃덩어리가 되어버린 하이브의 오버 브레인 파편을 보며 심드렁하게 레바테인을 털어냈다.

처음 오버 브레인을 처리한 직후 동시다발적으로 발견된 하이브의 수는 총 일곱.

지금 내가 있는 곳은 그 일곱 번째 하이브였다.

처리 과정 자체는 신속하고 빠르지만, 이실디가 그것을 추적하는 데에 제법 시간을 잡아먹고 있었다.

“야. 거북이냐? 빨리 좀 해라.”

“아씨 좀 조용히 해! 나도 오랜만이라 집중이 안 되니까!”

“오랜만이라서가 아니라 타나토스가 없어졌으니 그런 거겠지.”

“알 게 뭐야, 그딴 거.”

자신의 창조주를 상대로 저렇게 말할 수 있는 건 아마 그녀뿐이리라.

“처음 감지한 일곱 장소를 모조리 털었는데도 아직도 있는걸 보면 좀 더 근본적인걸 처리해야 할 거 같은데.”

본래대로라면 하이브를 처리하는 순간 토트리아스는 오합지졸처럼 무너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이놈들은 하이브를 처리하면 숨겨져 있던 하이브가 드러나는 식으로 몇 겹의 위장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하이브는 하나같이 생겨난 지 얼마 안 된 것들이며, 대부분이 바탄과 알베르타의 국경선에 몰려있었다.

“찾고 있으니 좀 조용히 해.”

그녀가 이를 부득부득 갈며 눈을 감고 용을 쓰기 시작한다.

그녀는 이런 마법 같은 분야에서는 상당히 약한 면을 보였으니 말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베르단데를 남길 걸 그랬나.”

“그 녀석은 왜!”

“너 지금 꼴을 봐라…….”

“웃기지 마! 내가 더 잘할 수 있어!”

자존심에 불이 붙은 것처럼 소리치고는 다시금 집중하던 그녀가 멈칫했다.

“찾았어, 따라와!”

망설임 없이 푸른 빛을 번뜩이며 검을 휘두르자 지하의 천장이 마치 깍두기처럼 썰려 무너져 내린다.

그렇게 떨어지는 파편을 가볍게 밟고 튀어나가는 그녀를 따라 이동하면서도 나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 하이브가 존재하는 이유가 마치, 시간을 끄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마치 여길 처리했으면 이쪽도 보라는 식으로 나오는 느낌.

하이브는 토트리아스의 구심점이나 다름없지만, 지금의 하이브는 구심점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거대한 의지체를 지키기 위한 위장 같았다.

“이실디.”

“빨리 와! 거기서 뭐 해!”

무너지는 동굴 천장을 올려다보며 내가 말했다.

“우리 지금 놀아나고 있다는 생각은 안 드냐?”

내 물음에 그녀가 인상을 찡그렸다.

쿵!!

그때 벽면을 밟고 지지하고 있던 그녀의 머리 위로 커다란 바위가 떨어져 그녀의 머리를 때렸다.

“아야야…… 씨이…….”

울상을 지으며 그녀가 나를 노려보았다.

* * *

“그러니까. 네 결론이 뭐야. 하이브가 거짓말이다?”

“아니. 하이브는 사실 그대로 하이브 역할을 하고 있을 거야. 다만.”

“하이브가 너무 빠른 시간에 증식하고 있다는 거지?”

6개의 하이브를 박살 내는데 고작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 몇 개의 하이브가 추가로 발견된다.

“진짜 모체가 있다는 소리네. 이런 경우는 처음인데…….”

“토트리아스는 진화하는 놈들이니까. 그 긴 시간 동안 시스템에 변화가 생겼을 수도 있겠지.”

“아무리 진화에 폭이 넓어도 그놈들이 가능한 게 있고 불가능한 게 있다고. 하…… 그래서.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건데? 하이브는 벌써 4개나 감지됐어. 저걸 다 부수면 또 나올 거라는 게 네 의견이잖아.”

“그렇지.”

부서져 내린 지하 동굴을 내려다보며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진짜 모체는? 네 말대로면 토트리아스와 하이브까지 조종해서 위장하는 진짜가 있다는 건데. 그놈은 어디 있는데.”

“찾아봐야지.”

“어디서?”

프리아 여신은 불러도 답이 없다. 그뿐만 아니라 회랑 또한 대답이 없었다.

내 스스로 판단하라는 무언의 답변이리라.

당장 필요한 것은 정보. 본래라면 이실디의 지식을 이용하려 했지만 이렇게 된다면 남은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이실디. 너 고대문자 읽을 줄 알아?”

“엉? 아아…… 읽을 순…… 있는데.”

“가자.”

“야…… 야! 어디가!”

진짜 사람 뺑뺑이 치게 만드네.“

내가 향할 곳은 역시나 처음 하이브를 박살 냈던 그곳이었다.

* * *

완전히 파괴된 이곳에서 원하는 정보를 찾을 확률은 낮다.

다시는 누가 진입하지 못하게 무너뜨린 탓에 본래 장소를 찾는 것도 일이었다.

“야. 너 제정신이야? 아예 무너진 이곳에서 무슨 수로 자료를 찾아. 애초에 멀쩡히 남아있긴 할까?”

“이실디.”

“응?”

“조용히 해.”

내 대답에 이실디가 입을 삐쭉였다.

완전히 파괴된 지형을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쉰 뒤 손에 정령 마나를 끌어 올렸다.

“노아스.”

그러자 내 손바닥 위로 거대한 돌덩이들이 빠르게 모여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손바닥만 한 작은 흙인형의 모습으로 변했다.

[귀찮은 냄새가 나는군.]

“맞아. 좀 귀찮은 일이야. 여길 좀 조사해줄래?”

[계약자. 네놈이 박살 낸 곳이 아닌가?]

“고대 인간들이 이곳에서 어떤 실험을 했거든. 자세한 내막을 좀 알아야겠다 싶어서.”

귀찮은 듯 녀석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필요한 게 뭐냐.]

“전부다.”

깔끔한 대답에 노아스는 한숨을 내쉬며 스르륵 흩어졌다.

[파괴된 단서는 가져오지 않겠다.]

그래. 얼마나 남아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조금이라도 힌트가 남아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찾을 수 있을 거 같아? 내가 볼 땐 어림도 없어 보이는데.”

이실디의 불평도 일리는 있었다.

“그런데 여기 연구 시설의 재질이 륀느가 있던 연구실 것과 비슷한 게 있더라고. 내구성 하나는 대단하니까. 운 좋으면 건질 순 있겠지.”

내 말에 이실디는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기다렸다.

“지금도 하이브가 하나씩 늘어나고 있어요. 일부러 계속 내 어그로를 끄는 것처럼 말이야.”

“좀 기다려봐.”

노아스가 사라지고 약 10분 정도가 흘렀을까.

이윽고 파괴된 유적의 바닥이 일그러지며 그 안에서 거대한 흙의 거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는 내 앞에 조각난 어떤 것들을 내려놓았다.

장비들을 대부분 파괴되었지만, 그중에서 내 눈에 띄는 건 어떤 서류 더미였다.

당연 서류 더미의 글귀는 나도 모르는 고대의 문자. 하지만 이번엔 그 문자를 번역할 수 있는 녀석이 있었다.

“이실디. 번역해봐.”

“이리 줘봐.”

말없이 서류를 스윽 읽어내린 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홀른은 역시 미친 종족이야.

“뭐라 적혀있는데.”

내 물음에 그녀는 종이를 팔랑팔랑 흔들며 말했다.

“유전생명체 무기화 프로젝트.”

“…….”

“인간이 직접 유전자를 주입시켰어. 그 표본은 총 2만 3천.”

2만 3천. 많기도 하네. 그만한 수가 땅속에 잠들어있었으니 지금 같은 대참사가 벌어진 꼴이다.

“그래서?”

“이들의 무기화 프로젝트의 내용은 간단해. 하이브는 토트리아스들을 조종하는 객체야. 하지만 하이브는 강대한 정신체이기에 일일이 하나하나 조절하다간 변수가 생길 가능성이 높다고 해.”

그녀가 종이를 한 장 한 장 팔랑 소리를 내며 넘겼다.

“그래서 결론을 내린 게 오버 브레인들의 힘을 약화 시키는 대신 이들을 조종할 수 있는 하이브 마인드(군체의식) 시스템을 도입하는 거지.”

기본적으로 유전자를 먹어치우는 놈들이다. 당연히 이놈들은 좋은 유전자 나쁜 유전자를 가리지 않고 먹어치우기에 고대의 인간들은 이 특성을 이용해 그들을 조종하고 무기화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다.

“그렇게 나온 게 하이브 마인드의 모체. 다만, 하이브인 오버 브레인의 정신체를 사용하면 무기화가 불가능하니 같은 인간을 그 모체의 정신체로써 사용했어.”

이후 그녀는 서류를 계속 넘기며 설명해주었다.

하이브의 오버 브레인은 본래 이실디가 알고 있던 오버 브레인보다 정신력도 약한 반쪽짜리였다.

대신 그만큼 양산이 쉬워졌고 씨앗만 심어두면 언제든지 하이브를 이용해 토트리아스 개체들을 조종할 수 있다.

현재의 하이브는 중계탑일 뿐이라는 소리였다.

“그럼 이 말도 안 되는 힘의 축적은 뭐고, 그 진짜 하이브 마인드는 어디 있는데.”

“좀 기다려봐!”

짜증스레 중얼거린 그녀가 눈동자를 빠르게 굴렸다.

“힘의 축적에 대해선 나오지 않았어. 토트리아스의 생존력이나 변수를 차단하기 위한 여러 실험은 행해졌지만, 본래대로라면 그만한 힘을 품게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는 게 현실적인 이론이야.”

“그럼 누군가가 그 이후에 주입했다는 거네.”

“토트리아스는 생명력을 근원으로 힘을 축적해.”

생명력.

대부분의 생명력은 내 쪽에서 관리를 하고 있는 만큼 이만한 거대한 힘의 움직임을 모를 리가 없었다.

가능하다면 처음부터 힘을 가지고 있었던 경우. 혹은 내가 관리하지 않는 쪽의 생명력들이 전부였다.

“흐음…….”

“하지만 하이브 마인드 실험은 결국 실패했어. 이곳에 남은 건 사실상 그 하이브 마인드를 만들기 위한 설비뿐이란 말이야.”

“그럼…… 하이브 마인드가 없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무래도 그 이후에 누군가가 뭣도 모르고 손을 댔다가 우연스럽게 만들어진 것 같은데? 예를 들면 네가 처음 죽인 그 괴물 말이야. 문어 같은 그 괴물.”

“그래.”

“그놈 아니야?”

“아니야. 그놈은 그만한 생명력이 없…….”

말을 하던 내가 멈췄다.

“이실디.”

“어…… 어?”

“하이브 마인드, 분명 실험은 실패했다고 했지.”

“어…… 어어. 그랬지?”

“내가 죽인 그 문어 같은 놈도 어떻게 보면 실패작이야. 그건 인간의 몸으론 불가능한 거라고 되어있어.”

하지만. 막대한 생명력을 품고 있는 인간이 아닌 존재라면?

“인간이 아닐 경우엔…….”

“무슨 뜻인지 좀 설명해줄래?”

“하이브 마인드의 모체가 된 놈. 그리고 방대한 생명력을 보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놈.”

머릿속에 떠오르는 놈은 하나뿐이었다.

다만 이놈은 분명 죽었을 텐데…… 라는 의문이 서렸다.

문제라면 이놈이 생명력을 가진 놈이라도 이만한 양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다는 점이었다.

이놈은 괴물에게 잡아먹혔고, 그 잡아먹힌 게 트리거가 되어 괴물과 하나가 되어 완성되었다.

“정신체 벨가.”

내 결론에 이실디는 말없이 나를 직시했다.

“조금 이상한데? 그게 가능해?”

“인간의 몸으론 하이브 마인드가 될 수 없는 게 힘이 약해진 벨가가 괴물에게 잡아먹히면서 영향을 준거겠지. 이후에 괴물의 정신은 소멸했지만, 벨가의 힘은 그대로 남아있었고,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아귀가 들어맞긴 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쓴 채 끙끙거리던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건데? 하이브가 가짜라는 것도 확인했다고 치자. 그놈은 어떻게 잡을래?”

“찾지 말고 불러내야지.”

하이브 마인드가 벨가라는 것을 알았다면 해답도 간단했다.

이놈이 바탄을 공격하는 이유를 생각하면 되었으니까.

“불러낸다고? 숨어있던 놈이 잘도 오겠다.”

“아냐. 내 예상이 맞으면 그놈은 반드시 와.”

눈을 크게 뜨며 음산하게 웃자 그녀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이후 나는 주작 불닭이를 불러낸 뒤 전쟁협상이 진행되고 있는 국경지도 쪽으로 향했다.

쿵!!! 쿵쿵!!

거대한 폭음과 함께 거대한 괴물을 상대로 레이나와 일리나가 섬광처럼 파고들었다.

평행선을 그리듯 엄청난 속도로 달려나간 두 사람은 한 명은 하단부를 한 명은 상단부를 노리며 동시에 괴물의 형체를 베어냈다.

단순한 존재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위압을 지닌 괴물이었지만 일리나와 레이나는 마치 한 사람이라고 말하듯 놀라울 정도의 협력을 보여주며 놈을 빠르게 무력화시켜나갔다.

육신이 베어지고도 빠르게 회복하려 하지만 일리나의 시공격검이 그것을 방해하고 그 틈을 이용해 레이나가 강격을 쏟아부어 넣었다.

제아무리 재생력이 뛰어나도 괴물은 점차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그렇게 흘러가니 병사들의 사기가 빠르게 상승하는 결과도 일어났다.

함성을 지르는 병사들의 표정에는 자신이 살 수 있다는 희망으로 가득해 보였다.

“이놈, 다른 녀석들보다 압도적으로 강한데.”

레이나의 중얼거림에 괴물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비틀거렸다.

“하지만 곧 끝날 거 같은데요?”

“마지막까지 방심하면 안 돼요.”

그 점은 두 사람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

“핵이다.”

그때 일리나가 눈을 번뜩이며 괴물의 육신 속에 있는 거대한 구체를 확인했다.

“갈게요.”

그녀들의 목표는 전쟁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생기는 문제를 처단하는 것.

현재 문제가 되는 이 괴물만으로 충분했다.

그때였다.

기괴한 울음을 터뜨리며 비틀거리던 녀석이 한차례 쓰러지더니 거대한 팔을 대지에 박아넣은 채 무언가를 빨아먹기 시작한 것이다.

“뭐야. 무슨 짓을?!”

본능적으로 저 행동을 막아야 한다는 판단이 선 두 사람은 빠르게 놈을 향해 파고들었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 팔을 꽂아 넣은 것만으로도 충분한 듯 보였다.

쩌어어어엉!!

무형의 충격파가 터져 나오며 일리나와 레이나 모두가 튕겨 나갔다.

“아파라…….”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든 일리나는 곧 괴물의 형태가 변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거대한 체격을 지닌 형태 불명의 괴물은 이내 점점 축소되기 시작했고, 내뿜는 힘도 이전보다 훨씬 더 짙게 내뿜었다.

그리고. 그 괴물이 고작 사람 형체 정도의 크기로 축소되었을 때.

일리나와 레이나는 어떤 여인을 볼 수 있었다.

회색 피부를 지닌 여인은 몸을 비척거리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는 서늘하게 웃어 보였다.

“하아…… 이 역겨운 공기. 너무 마음에 들어.”

홀로 중얼거린 그녀가 레이나와 일리나를 바라보았다.

“너희. 굉장하다? 제법이야.”

담담하게 말하며 그녀가 천천히 움직였다.

그리고, 그녀가 손을 가볍게 튕겼을 때.

반사적으로 일리나가 시공격검으로 레이나의 앞을 베어냈다.

쩌어어엉!!

공간이 단절되는 충격파가 터져나간다.

단 한방에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병사 수십의 몸이 터져나가 버렸다.

압도적인 힘. 섬뜩한 위력. 도대체 어디서 저런 힘을 품고 있었는지 의문이지만 가장 놀란 것은 일리나였다.

“차원의 힘…… 뭐야 저거 대체…….”

여인이 사용한 힘은 엄연히 차원의 힘이었다.

현재 차원에 간섭할 수 있는 건 데이비와 일리나가 전부였다.

하지만 그녀는 마치 본래부터 자기의 힘이었다고 말하듯 능숙하게 차원을 찢어버렸다.

“음? 그런데 왜 내가 여기 있는 거지?”

고개를 갸웃거린 그녀가 씨익 웃었다.

“아 무슨 상관이야. 귀찮게.”

“당신. 정체가 뭐죠?”

이윽고 팔을 쥐고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일리나를 보호하듯 레이나가 물었다.

“나? 응. 그래. 심연의 공주라고 해.”

그 한마디에 두 사람 모두 눈을 부릅떴다.

심연의 공주는 모두 죽었다.

그 창조주인 타나토스가 사라졌으니 말이다.

“심연의 공주중에 이런 말도 안 되는 힘을 사용하는 이가 있을 리가 없는…….”

혼란스레 중얼거리던 일리나의 눈이 크게 뜨여진다.

있다.

심연의 공주중 차원을 다루는 존재.

초창기에 데이비가 평행선에서 찢어버린 괴물.

“야단났네…….”

주변을 짓누르는 듯한 어마어마한 힘의 파동에 일리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심연의 공주…… 슬리지아.”

“어머나. 내 이름을 알고 있네? 경품으로 넌 마지막에 죽여줄게.”

담담하게 말한 그녀가 손에 힘을 끌어모은다.

마치 재앙을 불러오듯 그녀의 손으로 모여든 파장은 빛으로 된 어떤 구체를 만들어냈다.

“젠장. 데이비도 없는데…….”

일리나의 힘이 강한 것은 그녀가 시공격검이라는 특수한 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슬리지아는 그녀와 비슷한 계통의 힘을 사용하는 만큼 일리나의 장점이 퇴색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녀가 내뿜는 힘은 척 봐도 엄청나게 위험해 보이는 수준이 아니던가.

긴장한 채 슬리지아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던 일리나는 차원 자체를 절단하는 한이 있어도 그녀를 이곳에서 밀어내야 한다는 판단에 이르렀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역으로 크게 다칠 수 있지만 자칫했다간 대참사가 터질 가능성이 높았다.

“토트리아스가 어떻게 심연의 공주의 힘까지 쓰는 건지 모르겠지만…….”

“데이비 그 사람이 알겠죠.”

레이나도 긴장한 채 검을 틀어쥐었다.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데이비에게 이곳으로 와달라 부탁한들 그녀의 힘이 퍼져나가기 전에 도착하리란 어려워 보였다.

그때였다.

스릉…….

“어?”

쩍!!!

하늘이 갈라지며 푸른 머리카락의 소녀가 어마어마한 속도로 낙하한다.

그리고. 일순간에 슬리지아의 몸을 반으로 갈라버렸다.

“이실디? 네가 왜 여기?”

“닥쳐 가짜주제에. 어디 진짜 흉내를 내고 있어.”

“아하하…… 하하하하! 뭐라는 거야. 난 진짜야.”

낄낄거리는 그녀의 육신이 다시 달라붙었다.

“홀른의 편에 선거야? 뭐 상관없지만.”

슬리지아의 기억조차 일부 먹었다. 지금까지 만난 심연의 공주와 다르게 슬리지아는 놀라울 정도로 완성도가 높았다.

마치. 슬리지아가 일부러 막대한 정보력을 토트리아스에게 먹여놓은 것처럼 말이다.

“잘됐어. 사실 난 네가 정말 마음에 안 들었거든.”

“누가 할 소리.”

레이나와 일리나의 앞을 막아선 채 슬리지아와 대치하고 있던 이실디는 힘의 파장에 놀라 나온 베르단데를 바라보았다.

“뭘 하고 있길래 아직까지 이러고 있는 거야.”

“슬리지아…….”

베르단데도 인상을 찡그렸다.

“어이쿠 베르단데까지 있네? 배신자들은 싸그리 찢어버려야…….”

“야. 바쁜데 뭘 자꾸 떠들어.”

이실디가 중지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덤벼 이년아. 나도 힘이 반쪽이지만 너도 반쪽이잖아. 안 그래?”

“하…… 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

광소와 함께 슬리지아가 허리를 꺾일 것처럼 젖혔다.

그리고는 일순간 미소를 지우며 그대로 손을 튕겼다.

쩌어어엉!!

무형의 공간이 찢어지며 이실디를 향해 날아든다.

하지만 이실디는 평소에 사용하지 않는 어떤 힘을 이용해 그것을 쳐내버리고는 역으로 파고들어 슬리지아의 목을 틀어잡고 평야 저편으로 날아가 버렸다.

멍하니 그 장면을 보고 있던 베르단데와 일리나는 저 둘의 충돌에 끼어들어야 하나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실디의 힘은 슬리지아와 비슷하다고 할 정도라고 들은 바 있지만, 이실디도 본래 심연의 공주로서의 힘을 절반 가까이 잃었으니 어떻게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그녀들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잠깐만요!! 협상 다 끝나가는데 뭐하는 짓이야!!”

천막 속에서 언제 왔는지 데이비가 튜나를 둘러메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벨가는 지금 너밖에 모르거든. 그래서 말이야. 튜나 재상님.”

데이비의 입가에 스산한 미소가 걸린다.

“그놈을 낚으려는데 인질 좀 돼줘라.”

데이비가 생각한 벨가를 불러들이려는 유인방법.

그것은 튜나의 적이라 판단하고 바탄을 공격하는 벨가의 어그로를 한방에 끌어버릴 인질 작전이었다.

튜나를 빛으로 된 밧줄로 묶어 허공에 띄운 데이비가 음산하게 웃었다.

“자! 보고 있지? 얼른 오지 않으면 튜나 재상을 내가 어떻게 할지 모른다 벨가.”

데이비는 슬리지아로 변신하며 떨어진 파편들을 향해 말했다.

그리고. 그 효과는.

구구구구구구!!!

굉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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