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21화
[에린.]
“…….”
어두운 방 안 무릎을 웅크린 채 머리를 파묻고 침묵하는 에반젤린을 보며 초단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초단이는 청단이나 홍단이와 다르게 상당히 성숙한 정신을 지니고 있다.
비록 청단이 홍단이처럼 온전한 하나의 개체가 될 순 없지만, 초단이는 그것으로 불만을 품은 적은 없었다.
[에린아.]
“언니도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해?”
[에린아…….]
“아빠 술 냄새난단 말이야! 나 술 냄새 싫은데…….”
그 말에 초단이는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곁에 다가갔다.
[그래. 우리 에린이…… 아버지가 술을 마시는 게 싫은 거구나?]
“…….”
눈물을 뚝뚝 흘리는 에반젤린을 사랑스럽다는 듯 다독여주면서도 초단이는 꼭 해야 할 말을 해야 했다.
[에린이는 아빠를 사랑해?]
그 물음에 에반젤린이 흠칫 놀랐다.
과거엔 아빠를 굉장히 좋아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그런 행동 하나하나가 마치 어린애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고 있던 참이었다.
“시…… 싫어하는 건 아닌 데에…….”
[그래. 그거면 돼. 아버지는 에린이를 많이 사랑하니까. 에린이가 싫어하는 건 하지 않으실 거야.]
“응…… 언니 미안해…….”
딸꾹질로 몸을 간헐적으로 떨면서 에반젤린이 울먹였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그런 말을 한 건 에린이가 잘못한 거야.]
“그렇지만…….”
[에린이는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두…… 둘 다.”
어렵사리 진심을 털어놓은 그녀였다.
싫다기보다는 예전 같이 행동하는 건 마치 어린아이처럼 유치하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정신이 성장하는 단계인 반항기는 어느 생명을 통틀어 비슷한 듯 보였다.
[어머니는 널 정말로 아끼고 사랑하셔. 그깟 피가 이어져 있지 않아도, 피가 이어진 자식보다 더 너를 아끼고 사랑하신걸.]
“그…… 그렇지만…….”
[에린아. 언니 잠깐 볼래?]
동시에 초단이는 제 목걸이에 걸린 작은 아티펙트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어떤 영상을 기록해주는 영상이었다.
[에린이 착하지?]
그 영상 안에는 아직 어린 시절의 에반젤린이 행복하게 웃는 모습과 그런 에반젤린을 사랑스러워하여 어찌할 줄 모르는 페르세르크가 보였다.
그 외에도 에반젤린이 고열에 시달리니 어쩔 줄 몰라하며 눈물까지 뚝뚝 흘리는 모습이나. 한밤중에 배가 고파 우는 에반젤린에게 가장 먼저 달려와 안고 달래주며, 잔잔하게 예쁜 목소리로 자장가를 불러주는 모습도 보였다.
누가 봐도 한눈에 애정을 느낄 수 있는 모습이었다. 가식 하나 없이 너무도 소중한 이를 위해 밤낮없이 고생하는 모습을 보며 에반젤린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이 해선 안 될 말을 했다는 것을.
시시각각 변하는 에반젤린의 표정을 보며 초단이가 조심스레 물었다.
[이래도 피가 중요하니?]
“…….”
결국, 에반젤린이 눈물을 더욱 구슬프게 떨구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겠지? 어머니에게 가서 사과하고 안아드리는 거야. 죄송해요. 사랑해요. 구구절절이 말할 것 없이 그거면 돼.]
“흐어어엉!! 언니이!”
[옳지, 착하지? 언니도 에린이를 때려서 미안해.]
“허어어엉! 미안해 언니! 내가 정말 미안해!”
마치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아이 같은 울음이었다.
초단이의 말에 에반젤린은 결국 엉엉 울음을 터뜨리며 초단이의 품에 안겼다.
[휴우…….]
그런 에반젤린을 다독이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역시 지구에서 사 온 책을 본 덕이 제법 있다.
정신적으로 성장하지만 아직 불안정한 시기. 그렇기에 이번 일로 에반젤린이 마음을 고쳐먹었다 해도 며칠이 지나면 다시 본래대로 돌아올 것이다.
생명체의 마음이라는 건 참 간사하니까.
초단이는 유별나게 공부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예전엔 초단이의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 굉장히 많은 힘이 필요했지만, 데이비가 신격을 얻고 그와 연결된 그녀가 연결점을 만든 뒤부터 제법 많은 시간을 변해 있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흑, 흐흑, 나 갈래…… 엄마한테 갈래.”
끝내 마음을 다잡은 에반젤린을 기특하다는 듯 바라보던 초단이가 고개를 끄덕인 뒤 그녀의 머리를 쓸어내려 주었다.
[같이 가자. 언니가 곁에서 도와줄게.]
“그…… 그래도 아빠 술 냄새는 싫어!”
물론, 첫술에 배부를 순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은 이 정도면 충분하리라.
‘음…… 맞겠지? 책에 그렇게 쓰여있었으니까.’
사실 초단이의 입장에선 책에서 본대로 에반젤린을 이해하고 다독여본 것이었다.
‘기회가 되면 지구에 가서 학교에 다녀보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며 초단이는 에반젤린을 다독여주고 그녀를 일으켜 세워주었다.
* * *
“지금 명국의 상태는 알고 있습니까?”
“전혀…… 모르고 있구나……. 어찌…… 되었느냐?”
“천녀께서는 콘타스 대제와 제법 친분이 있으셨지요.”
과거 태후 세력이 섭정을 할 당시엔 근처 국가들과 굉장히 적대적인 정치를 해왔지만, 어린아이의 순수함 때문인지 그녀의 천성이 그러한 건지 천녀는 자신이 정식으로 계승권과 통치권을 이어받은 이후로 국가의 운영방침을 하루아침에 돌려버렸다.
다 같이 잘 지나면 더 좋지 아니한가. 짐은 그런 세상을 만들고 싶소이다. 수많은 이들을 구한 동대륙의 성자처럼.
현국과 콘타스 제국을 포함한 다수의 왕국 통수권자들을 앞에 두고 겁에 질려있던 그녀가 용기 내 한 말이었다.
그 한마디에 콘타스 대제는 싸늘한 표정을 지우고 그 자리에서 대소를 터뜨렸고. 타국도 천녀의 놀라울 정도로 순수하고 올곧은 마음에 잠깐이라도 분쟁을 멈추는 기적을 보였다는 일화는 편지로 들어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하던 이야기는 마저 하시죠. 그러니까 천녀께서 펍에 들어와 일부러 성인인 척 웃긴 연기까지 하면서 포도주를 구하려 했던 게…….”
“그렇다. 짐은 정보 상점을 찾으려 한 것이다.”
정보 상점…….
대부분의 정보 길드는 특수한 전례를 통하여 접촉하는 게 정상적인 경우라 할 수 있었다.
“후우…… 천녀님. 당신이 이곳에 온 게 얼마나 되었습니까.”
“수…… 숲에서 사흘 정도. 그리고 영지를 발견하고 들어온 건 하루 정도 되었느니라.”
“그동안 잠은 어찌 주무셨는데요.”
“그, 그것이…….”
두려움도 있지만, 인간은 잠을 자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그녀는 작은 체구를 이용해 나무 옹이 밑이나 작은 동굴 등에 몸을 의탁해 잠을 청했고, 식사는 거의 불가능했던 터라 물로 허기를 달랬다는 모양이었다.
“이곳에 온 뒤에 이곳이 하인스 영지라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짐을 노리는 자들이 추적했을 가능성을 생각해 짐은 소리 없이 그대와 접촉하려 하였느니라.”
나와 접촉하면 자신을 신변을 보호받을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을 내세웠고, 명국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을 터.
문제는 정보 길드에 관해 그녀가 자세히 알 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접선이나 거래방법. 그 외에 모든 것을.
그래서 뒷골목에서 아무나 붙잡고 물었건만, 천녀의 제안을 받아들인 그들은 수고비를 받아먹고 거짓 정보를 그녀에게 알렸다.
그 후 펍에 찾아왔고, 거짓 정보에 홀랑 속아 포도주를 주문하는 우스꽝스러운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그 후에 돈이 있냐는 질문을 듣고 소지품을 뒤져본 그녀는 자신의 돈이 사라진 걸 깨달았다.
안 봐도 비디오라더니.
척 봐도 알려주는 척 거짓 정보를 떠넘긴 그들은 스리슬쩍 천녀의 소지품을 소매치기한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치안이 좋아도 완벽한 치안을 이루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빈부격차나 빈민가가 뒷골목을 만드는 원흉인 것을 아는 나는 특수한 제도를 통하여 그들을 모조리 양지로 끄집어내 버리면서 왈패들의 움직임을 최소한으로 줄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소매치기로 끝난 정도일 것이다. 천녀의 외모는 예쁘장하기 그지없으며 고생이라곤 해본 적 없을 만큼 맑은 탓에 노려지기 참 좋은 대상이 분명하다.
그놈들이 조금만 나쁜 마음을 먹었다면 천녀는 나와 만나지도 못하고 어이없는 사고에 휘말렸을 가능성이 높았다.
“후…… 진짜 골 때리네 이거.”
물론 어느 정도 왈패조직이 있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한때 인신매매조직이나 마약 조직을 아작내버린 뒤로 왈패쪽에서도 하인스 영지는 장사하다가 목숨이 남아나질 않는 곳이라며 대부분 철수했지만 자잘한 왈패까지 치우는 건 사실 불가능에 가까웠다.
“수고비는 얼마나 쓰셨는데요?”
“그…… 백금화 하나…….”
금화 수십 개짜리?
콰직!!
내가 테이블을 꽉 잡아 부숴버리자 천녀가 눈을 크게 떴다.
“화…… 화내지 말 거라! 지, 짐이 잘못했느니라!”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와들와들 떠는 것을 보니 극도로 격한 장면에 스트레스를 받은 게 보일 지경이었다.
“그놈들 특징 기억하십니까.”
내 물음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기억한다! 내 어찌 정보를 알려준 은인들을 잊겠느냐! 한 사람은 거친 근육질에 새하얀 피부를 지니고 있었다. 아 머리는 닭 볏과 같이 밀고 나머지는 새하얀 대머리였다!”
“그리고요.”
“또 한 명은 검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지만, 송곳니를 보았을 때 수인족이나 오크가 아닐까 생각 중이다!”
오크나 수인족이나 이 하인스 영지에선 제법 흔히 볼 수 있는 종족이었다.
“그래요. 걱정 마세요. 천녀님. 내가 반드시 안전하게 명국으로 모셔다드릴 테니.”
정치문제를 떠나 이런 어린아이가 나흘 가까이 고생한 걸 보면 에반젤린이 떠올라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다만 당장은 안됩니다.”
“어째서더냐.”
“직감이네요.”
내 대답에 그녀가 인상을 찌푸렸다.
“저…… 전쟁이 벌어진다 하지 않았더냐! 그럼 하루빨리 돌아가야…… 아…… 미안하구나……. 짐에게 이렇게까지 해줄 이유는 없건만…….”
“아니 도와주는 건 어려운 게 아닌데 말입니다. 좀 느낌이 안 좋아서요.”
대륙에서 인격이 변해버린 이들은 모두 고쳐냈다.
내가 기억하는 바에 따르면 명국 쪽에서 변한 인간은 총 40명 정도.
그중 20명이 천녀의 호위대였고, 나머지는 흔히 볼 수 있으며 영향력이 별로 크지 않은 평민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너무 매끄럽다.
“우선 전쟁이 확산되지 않게 대제와 접선을 해볼게요. 다만 그전에.”
의미 없는 짓이긴 하지만. 조금 안심은 시켜야 한다. 그렇다면.
그 불안과 공포를 다른 방향으로 돌리는 수밖에.
에반젤린은 잘 화해했을는지…….
아마 초단이가 나서지 않았다면 나는 반사적으로 에반젤린의 뺨을 쳐올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너무 소중하기에 그런 소중한 딸이 잘못된 길로 드는 걸 도저히 두고 볼 수가 없었으니까.
처음 아장아장 기어 다니던 아기일 땐 어떻게 이 귀여운 아이라도 혼을 낼 땐 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아이가 크는 것을 보니 그것도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린디스 제국의 황제. 데오르트 알 린디스가 어째서 에이리아를 그리 끔찍이도 아꼈는지 알 것 같은 느낌이었다.
“천녀님. 잘 새겨두세요. 누군가가 천녀님의 왼쪽 뺨을 때리면 말입니다.”
“으…… 으응? 짐은 어디 맞지 않았느니라. 자! 보아라! 멀쩡하다!”
허둥지둥거리며 자신의 왼쪽 뺨을 내게 들이미는 그녀였다.
목욕을 마친 터라 뽀얀 피부가 퍽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한 대 맞으셨습니다. 어쨌든 잘 기억해두세요. 누가 한 대 때리면. 반대쪽 뺨을 내주지 말고 상대의 강냉이를 뽑아버리세요.”
그 말에 천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강…… 냉이? 그건 무엇이더냐? 간식이더냐?”
“예. 우수수 터져나가는 게 정말 재미있는 겁니다. 곧 가져올 테니. 륀느와 잠시 이야기라도 하고 계시겠습니까?”
나는 잠깐 어딜 좀 다녀올 테니.
* * *
어두운 뒷골목의 허름한 펍.
하인스 영지가 아무리 발전해도 낡은 건물이 없을 순 없다.
물론, 그 정도가 심한 것은 허물고 새로 지은 것들이 많지만 극히 외곽에 위치한 건물 중엔 그렇지 않은 것도 있었다.
“캬…… 이게 다 얼마야.”
백금화만 무려 7개. 최소 금화 50여 개에 달하는 최상위 화폐로 그야말로 부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화폐이기도 하다.
보통 소매치기로 캐봐야 억세게 운이 좋으면 아주 적은 푼돈을 얻는 그들에게 있어서 백금화 7개는 평생을 놀고먹어도 될 만큼 큰돈이었다.
“세상에. 그 꼬맹이가 이만한 돈을 가지고 있을 줄이야.”
“그러게나 말이오. 형님. 내가 척 보고 알아챘잖수. 거 어디 곱게 자란 아가씨라고.”
“크흠. 적당히 납치해서 팔면 돈이 되긴 하겠지만요.”
“어허. 쓸데없는 소리 마라. 우리 같은 좀도둑 놈들은 솔방울을 먹고 사는 거다. 자! 카드 비었다! 어이 브룩스! 가서 문 좀 확인하고 와라! 밤바람이 영 거칠다.”
그렇게 말하며 카드를 내미는 두목을 향해 그의 부하들이 낄낄거렸다.
“막내야. 넌 모르냐?”
“예?”
“예전에 하인스 영지에서 인신매매가 있었단 말이지.”
“그렇습니까? 제가 보기에 이 영지에 왈패들 중에 인신매매를 하는 자들은 없었던 거로…….”
“없을 수밖에. 다 토막 나서 늑대 밥이 됐으니.”
그 한마디에 막내의 표정이 파랗게 질렸다.
“저…… 전부 다요?”
“그래. 두목부터 말단까지 한 놈도 남김없이. 싹 다.”
그게 가능이나 한 일인가. 좀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막내의 눈빛에 졸개 중 하나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그게 말이 됩니까? 제국도 그런 식으로 싹 다 박멸하는 건 안 될 겁니다. 어디 빠져나간 놈들도 있겠죠.”
그 말에 옆에 있던 이가 카드를 늘어놓았다.
“아니 없어. 단 한 놈도.”
“예?”
“대가리부터 하나하나 꺾고 비틀어서 끝내 말단 꼬리 놈들까지 싸그리 다 잡아서 아작냈거든. 다른 곳은 몰라도 하인스 영지는 인신매매, 마약. 살인. 강도, 강간. 방화. 정말 칼같이 쳐내는데 몰랐나?”
“세상에…… 그게 가능합니까?”
“가능하지.”
낄낄거리며 대화하던 중 카드에 집중하던 사내가 기시감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입을 다물었다.
“에이! 형님도 참. 그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무슨 하인스 영지의 위병들은 뭐, 탐지마법이라도 달고 산답니까? 어림도 없죠.”
“왜 어림도 없어. 지금 여기도 그렇잖아.”
그 말에 낄낄거리던 막내가 웃음을 지웠다. 그리고 좀 전까지 자신과 대화하던 이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처음 듣는 목소…… 헉?!”
이미 주변의 인간들은 퍼렇게 질린 채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그리고 유일하게 유유히 미소를 지으며 카드를 들고 있던 이가 천천히 후드를 넘겼다.
검은 머리에 섬뜩할 정도로 붉은 눈동자가 막내의 뇌리에 강하게 박힌다.
“니들. 하인스 영지로 이주할 때 내가 분명 사고 치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 한마디. 마치 하나하나 모두 기억하고 있다는 듯한 그 말투에 더욱 소름이 돋았다.
“내 말이 참 우스웠나 봐.”
쿠당탕!!!
동시에 왈패들이 의자에서 일어나 머리를 숙이고 와들와들 떨었다.
“사, 사사사…… 살려주십시오. 저하!!”
“저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겁에 질려 소리치는 제 형님들을 보며 막내도 엉겁결에 머리를 숙이고 와들와들 떨었다.
그러자 후드를 쓰고 있던 이. 데이비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매치기…… 그래 좋아. 사실 내가 소매치기 같은 경범죄를 처단할 정도로 여유가 없었던 건 사실이거든.”
담담하게 말한 데이비가 몸을 낮춘 뒤 무릎을 꿇은 채 와들와들 떠는 두목의 머리채를 잡고 시선을 맞췄다.
“야.”
짧고 낮은 음성은 섬뜩할 정도로 무거웠다.
“예…… 예예 저하…….”
알 수 없는 어마어마한 공포에 눈물이 쏙 빠질 정도로 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선 넘지 말라고 했지.”
“저…… 저하! 소…… 소매치기는 어디에서나 흔한!”
“흔해? 돌았냐?”
그 말에 두목은 자신이 말을 잘못했음을 깨달았다.
“뭐. 사태파악이 안 되는듯하니 알려줄게. 니들이 평생을 먹고살 돈인 백금화 7장. 그 7장을 가지고 있던 그 꼬마가 누구일 거 같나.”
설마. 영주의 친족인가! 겁에 질린 왈패들이 서로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그런 이가 없다는 건 분명히 깨달았다.
아니 애초에 영주성에 있어야 할 고귀한 아가씨가 왜 허름한 로브를 뒤집어쓰고 뒷골목을 배회하겠는가.
조금만 들어가면 바로 향락가인 것을.
감정이 사라진 데이비 올 라운의 표정을 보던 두목이 당장이라도 심장이 멈출 것처럼 떨었다.
“너희. 일국의 국왕을 소매치기한 거야. 이해됐나?”
될 리가 있나.
파랗게 질려버린 왈패조직을 보며 데이비가 말했다.
“자. 그럼 국왕을 소매치기한 놈들에겐 어떤 벌이 좋을까.”
“사…… 살려주시옵소서!! 저하!”
“살려만 주신다면 뭐든 하겠습니다요!”
그들은 눈물 콧물 다 쏟으며 소리 질렀다. 소매치기는 경범죄로 감옥에 조금 갇혀있다가 나오는 수준이다. 하지만 그 대상이 왕족, 그것도 외교에 문제가 될 정도의 강국의 국왕이라면?
목숨이 열 개라도 모자랄 수밖에.
“살고 싶냐?”
“그…… 그것이…….”
대답을 쉬이 하지 못하는 두목을 보며 데이비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한 손으로 머리채를 잡은 채 나머지 한 손으로 두목의 앞니를 겨누듯 손가락을 둥글게 말았다.
딱밤의 자세였지만 기세가 예사롭지 않다.
“힘 빼.”
콰직!!
“끄아아아아악!!!!
앞니 하나를 힘으로 날려버린 데이비가 염동력 마법으로 그것을 끄집어냈다.
사이코패스 같은 새끼!!
왈패들은 속으로 데이비의 행동에 욕지기를 뱉었지만 그 누구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두 번 안 묻는다. 살고 싶냐고.”
“사, 살려주십디오! 다, 닷시는!! 닷씨는 하지 않겠습니다요!
앞니가 날아가 버린 탓에 발음이 뭉개졌지만, 그는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좋아. 루델.”
스르륵…….
그 말과 함께 붉은 머리칼의 청년이 그의 뒤에 나타났다.
“…….”
“이놈들 묶어서 전부 감옥에 처박아. 한 달 정도면 되겠다.”
경범죄치고는 그 기간이 길다.
“살려주시는 겁니까?”
“천녀님을 인신매매하려 했으면 조각냈을 텐데. 아쉽게 됐네.”
아쉽다는 그 말에 섬뜩함이 서리자 왈패들은 와들와들 떨었다. 그가 이런 결정을 내린 의도를 깨달은 것이다.
여긴…… 절대 장사할 곳이 못 된다. 빛이 있으니 그림자도 있다고? 그림자가 전부 겁에 질려서 다 튀어야 하는 이곳은 그야말로 그림자 하나 없는 빛의 성지다웠다.
빌어먹을 성자가 있는 성지.
“아 그리고.”
돌아서서 가던 데이비가 말한다.
“너, 에반젤린 곁 잘 지켜라. 혹시라도 가출한답시고 사라지면 진짜 그땐 너도 죽고 나는 죽이는 거야.”
“하, 하하…… 말하지 않아도 들을 겁니다.”
“그래. 부탁한다.”
그 말과 함께 떠나가는 데이비를 보며 왈패들은 압박이 사라지기가 무섭게 탈진한 듯 추욱 늘어져 버렸다.
“저 사이코패스 같은 새끼, 아가씨께서 술 냄새가 싫다고 했다는 이유로 아무 데나 스트레스를 풀고 있네.”
척 봐도 훤한 이유였다. 물론 루델은 겉으론 불만을 표할 뿐 딱히 짜증이 난 기색이 아니었다.
* * *
“이상이 그 인간이 보낸 서신이다.”
조용한 서신 한 장을 보며 구릿빛 피부의 사내는 푸른 머리칼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래. 네 이름이 뭐라고?”
“블루 일족의 사파이어라고 한다. 인간.”
담담하게 말하는 푸른 머리칼의 사내, 아니 드래곤 사파이어의 말에 콘타스 대제가 피식 웃어 보였다.
“거참 대단하군. 이젠 드래곤까지 부릴 줄이야. 고작 손톱만 한 영지 하나가 대륙 전체와 싸우고도 이길 전력이라니 웃기지도 않아.”
마스터급 존재나 6서클 마법사는 전략 병기라고 한다. 하지만 그런 전략 병기들을 다 끌어모아도 과연 하인스 영지를 이길 순 있을까.
아니겠지. 애초에 그렇게 될 수도 없을 만큼 그의 입지도 강하고.
“부린다는 말은 웃기는군. 나는 에반젤린 아가씨를 모실 뿐이다.”
“웃기는 소리하지 마라. 도마뱀. 척 봐도 데이비 그 애송이…….아니 애송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하군. 그 왕자에게 손을 보태는 주제에.”
그 말에 사파이어가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 하지만 끝내 종족 특유의 위압감인 피어를 드러내진 않았다.
“그가 레어의 어린아이들을 치료해주고 우릴 도운 것은 사실이다. 우리 드래곤은 은원이 확실하다.”
사파이어의 말에 콘타스 대제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래서. 전쟁을 멈추라?”
“신중하게 재고해주길 바란다는 게 그의 입장이다.”
“가서 데이비 왕자에게 전해. 도마뱀. x까지 말라고.”
콘타스 대제가 으르렁거리며 권태로이 앉아있던 옥좌에서 일어났다.
구릿빛 근육이 씰룩거리며 사파이어는 반사적으로 주먹을 들어 올렸다.
쩌어어엉!!!
대제의 묵직한 주먹이 사파이어와 정면으로 충돌하며 주변의 공기를 한순간 무겁게 만들었다.
손을 뻗어 대제의 주먹을 막아낸 사파이어는 생각 이상으로 강한 그의 힘에 인상을 찡그렸다.
"사정이 어떻건, 천녀가 살아있건 그놈들이 죽인 제국의 신민이 돌아오진 않아. 짐을 우롱하지 말고 돌아가라."
세계의 규칙이 인간들을 바꾸면서 생긴 문제는 상상 이상으로 여파가 크게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