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22화
“어서 오거라!”
나를 반갑게 맞이하는 천녀는 한 손에 커다란 카드를 쥐고 있었다.
뭔가 일이 잘 풀리지 않아서였는지 그녀는 대뜸 카드가 놓인 판을 엎어버리며 내게 달려왔고, 그 탓으로 인해 그녀와 카드 게임을 하고 있던 륀느는 묘한 감정이 서린 무표정으로 나를 불만스레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곁에는 초단이도 보였다.
“천녀님. 판을 엎는 실력이 제법이시네요.”
“음?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구나. 어쨌든! 어딜 그리 다녀온 게냐?”
“아 별거 아닙니다. 선물입니다.”
나는 들고있던 금화 주머니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어? 이것은 짐의 것이 아니더냐! 그걸 찾아온 것이냐?”
“예.”
“그렇구나. 어디서 잃어버린 겐지…….”
그녀는 자신이 소매치기당했다는 사실을 쉬이 생각할 정도로 세상일에 밝지 못했다.
“초단이도 있었구나. 에반젤린은?”
“어머니와 함께 있어요.”
화해를 잘 한 모양이었다.
“죄송해요. 아버지. 괜히 제가 나선 건 아닌지…….”
“아니야 잘했어.”
사실 에반젤린이 그렇게 외쳤을 때. 초단이가 나서지 않았다면 내가 어떻게 화를 냈을지 쉬이 감이 잡히지 않았다. 정도를 모르고 화를 낼 수도 있었기에 초단이가 눈치 빠르게 적절하게 쳐낸 것이었다.
딸에게 도움을 받는 아비라니 참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고마워.”
짧은 감사 표현에 초단이가 볼을 붉게 물들였다.
그리고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그럼 아버지.”
“응?”
“소원하나 들어주실 수 있나요?”
그녀의 말에 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원?”
“네!”
환하게 웃으며 그녀가 어떤 보석 같은 것을 내밀었다.
“이건…….”
“오딘 님이 주셨어요. 방대한 마나를 저장해둘 수 있다고.”
보통 마나석 백여 개를 합쳐서 마정석이라는 자연 압축 마나석을 만들 수 있다. 당연히 세상에서 흔히 사용하는 마나석과는 효율부터가 남다른 물건으로 실제로 골렘 편대의 핵이 바로 이 마정석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내민 것은 그런 마정석과도 격이 다른 수준의 보석이었다.
“이걸 채워주세요.”
그녀의 말에 나는 말 없이 손에 마나를 끌어모아 그 특수한 보석에 담아 넣었다.
“이건 어디에 쓰게?”
내 물음에 그녀가 화사하게 웃으며 뒷짐을 지고 돌아섰다.
“제 모습을 유지하는데 사용할 거에요.”
오딘이 준 보석이라면 내가 없어도 며칠 정도는 초단이가 형태를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곁에 있는데 굳이 형태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원하면 얼마든지 힘을 빌려주면 되는데.”
“아녜요. 이거면 충분해요.”
그녀가 옅게 웃어 보였다. 이상하게 불안한 생각이 든다.
* * *
며칠 동안 학대에 가까운 생존으로 버텨온 천녀의 몸은 며칠의 유예를 두고 빠르게 회복했다.
그동안 에반젤린도 어느 정도 변화가 있었다. 반항기는 여전하지만 그래도 일정 선은 확실히 두고 그 선만큼은 절대 넘으려 하지 않으려 하는 모습이 못내 기특했다.
자존심이 상당히 강해져 있을 시기이기도 하니 의도하지 않은 효도를 받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삼촌이 현아와 연희 누나를 그렇게 좋아해 주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우선 명국과 콘타스 제국의 상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콘타스 제국이 전면전을 시작한 이상 명국은 사실 오래 버티지 못합니다. 벌써 요새가 세 곳이 점령당했고 지금도 시시각각 탐색전이 벌어지고 있어요.”
현국은 콘타스와 손을 잡았지만, 직접적인 공격보다는 명국이 병사를 함부로 돌리지 못하도록 틀어막고 있는 모양새였다.
제법 영리한 편이긴 하지만 콘타스 제국의 입장에선 달갑지는 않으리라.
“…….”
말없이 주먹을 꼬옥 쥐는 천녀의 표정은 상당히 어두워 보였다.
“많이…….”
“음?”
“많이 죽은 게지.”
그래. 전쟁은 이런 것이다. 많은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다.
내가 마족과의 전쟁에서 수많은 버프를 이용해 밸런스를 붕괴시켰어도 상당한 전쟁고아가 나올 수밖에 없었으니까.
“일단 저희 측 정보원에 따르면 명국의 사상자가 5천 정도, 콘타스가 2천 정도입니다.”
역시 같은 숫자라도 그 저력부터가 다르다. 명국이 대국이라 불리면서도 제국의 위치까지 오르지 못하는 데엔 그런 차이가 하나하나 존재했다.
“5천…….”
“사망자는 대충 천여 명 정도 중경상자가 3천 나머지 천여 명은 질병으로 인해 전쟁이 불가능한 수준입니다.”
그 말에 천녀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지금은 탐색전입니다. 사실 저 정도 사상자로 끝난 것도 명국 측에서 요새를 버리고 도망친 자들이 제법 많으니까요.”
본래 요새 세 곳을 모두 점령했다면 사상자는 그 이상으로 나왔어야 했다.
하지만 지휘관이 도망치고 병사들이 흩어지면서 콘타스 제국이 손쉽게 요새를 점령한 덕에 그 문제는 커지지 않았다.
“사실상 콘타스 제국이 전쟁을 건 명분은 간단합니다. 명국이 당신을 시해하고, 당신을 돕기 위해 콘타스에서 파견한 이들을 모두 죽였기 때문이에요.”
“…….”
결국, 참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힌 그녀가 내게 물었다.
“전쟁을 막아야 하느니라, 데이비가 해줄수있는게 없겠느냐.”
“그래서 여기 오신 것 아니었습니까?”
“짐의 말은, 데이비 그대가 직접 나서서…….”
“천녀님.”
나는 거대한 문을 앞에 두고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말 제가 나설까요?”
내가 나선다면 전쟁을 막는 건 어렵지 않다.
양측에 대규모 전력을 파견시켜버리면 그만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절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앞으로 생길 문제에 대해 전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천녀는 어리석지 않았다.
순수함과 바보 같은 건 별개의 문제였다.
“그러니 지금부턴 당신이 직접 하셔야 합니다.”
명국의 국왕이라면. 그에 걸맞는 결단을 보여줘야지.
그렇게 말한 나는 담담하게 거대한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라.”
동시에 젊은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문이 저절로 열리며 내부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소파와 비슷한 옥좌에 비스듬히 누운 채 한 손엔 서류를 쥐고 남은 손엔 과일을 쥔 채 한입 베어 물고 있는 사내가 보였다.
구릿빛 피부에 젊은 인상을 가진 황제.
바로 서대륙의 패자. 콘타스의 대제였다.
“음? 그대는?”
“일전에 제가 보낸 사절과 한바탕하셨다고요.”
내 말에 그가 킥킥 웃었다.
“그렇군. 그 푸른 머리의 도마뱀이 그대의 종자였지.”
“정확히는 종자는 아닙니다만. 아무리 그래도 다짜고짜 공격하면 이쪽도 참 섭섭한데요.”
내 우스갯소리에 그가 킥 웃어 보였다.
“그토록 강한 놈이라면 짐이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지. 그래서. 부하가 결과물을 가져오지 못하니 직접 온 겐가?”
“뭐 일단은요.”
“이상하군. 그대는 머리가 나쁜 이가 아닐 텐데. 왜 이런 이득도 없고 손해만 보는 짓을 하는 거지?”
그가 손짓하자 그의 곁에서 시중을 들던 이들이 고개를 숙여 보인 뒤 빠르게 물러났다.
넓은 황제의 어전에서 그와 내가 조용히 눈싸움을 했다.
“대제님.”
“질문을 허한다.”
“질문이 아닙니다. 경고는 해야 할 거 같아서요.”
빙그레 웃은 내가 미소를 지웠다.
“한 번만 더 사절로 보낸 이들에게 무력을 행사하시면 이쪽도 똑같이 나갈 겁니다.”
내 말에 그의 미소가 짙어졌다.
“무력이라…… 글쎄 그건 단순히 대련…….”
“대제님.”
지웠던 미소가 다시 피어난다. 하지만 그 미소를 본 대제의 표정이 핼쑥하게 변했다.
“지금 제가 말장난을 하시는 거로 보이시나 봅니다.”
내가 보낸 사파이어는 현 사태에 대해 알려주고 그에게 전쟁을 잠시 멈추는 게 어떠한가. 질문을 한 것뿐이었다. 강압적인 요소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럼에도 콘타스 대제는 사파이어에게 무력을 휘둘렀고, 예전과 다르게 상당히 침착함이 높아진 사파이어는 크게 대응하지 않고 돌아와 이 사실을 모두…….
내게 고자질했다.
“흠…… 네놈은 참 알 수가 없구나.”
“적당한 선을 유지하고 있잖습니까.”
“…….”
“제가 할 말은 여기까지입니다. 선택은 대제께서 하시되. 그 불똥이 하인스에 튀기는 일은 없게 해주세요.”
“제국의 대제를 겁박하려 들다니 정말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게로군.”
그리 말하면서도 그는 별다른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래. 짐에게 할말이 없는데도 남아있는 건 그 곁에 있는 작은 꼬마가 짐에게 할말이 있는 것인가?”
그 말에 내 곁에 있던 천녀가 어두운 로브의 후드 자락을 넘겼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대제.”
“……천녀.”
대제의 미소가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회복이 되었다곤 하지만 고생한 기억으로 인해 피로가 그녀의 얼굴에서 온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천천히 걸어 나가 대제에게 다가간 천녀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심호흡을 하며 국왕 특유의 위압을 뿜어냈다.
“종전 협상을 하러 왔어요. 자격은 명국의 국왕으로서.”
그녀의 말에 대제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협상 제의 자체는 받아들이겠소. 명국의 국왕이여.”
“전쟁을 지금이라도 멈춰주세요.”
“그건 불가하군.”
“어째서죠?”
“현재 명국을 장악한 놈들은 당신을 시해하려 한 자들이오. 반대로 보면 우리 콘타스 제국과 우호적인 당신을 쳐내고 우리와 적대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지.”
“그들은…….”
“또한. 그들은 그 과정에서 우리 제국민을 죽였다.”
그 한마디에 천녀가 입을 다물었다.
“죽은 이는 돌아오지 않아. 당신은 그것을 알고 단순히 멈춰달라고 내게 말하는 것인가?”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이건 쓸데없는 죽음을…….”
“쓸데없는 죽음이라…… 콘타스 제국 신민의 목숨이 쓸데없는 죽음이라 말하고 싶은 것인가?”
“그렇다면 더 이상의 피는 흘리지 말아야 할 테죠!”
천녀가 한 치도 물러나지 않고 반박했다.
“그 일을 저지른 자들을 색출해내 명확한 죄를 물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 이상 죄 없는 이들이 희생당하는 것은 막아야 할거에요.”
“만약 못하겠다면?”
“그래서 찾아온 겁니다. 서로의 합의점을 찾기위해.”
엉엉 울며 내게 도움을 요청하던 어린 소녀였지만 지금 그녀는 일국의 국왕에 걸맞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두 분의 조약을 보증하는 입회인은 제가 되어드리겠습니다. 천녀님.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고맙다. 데이비. 그대의 은혜는 이 명국의 천녀가 절대 잊지 않을 것이야.”
그녀가 또박또박 발음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대제께서는?”
“짐도 네놈이 증거가 되어준다면 딱히 불만은 없다.”
죽었다고 알려진 명국의 국왕과 제국의 대제 간의 비밀리에 벌어진 회담이 시작되자 나는 품 안에서 영상석을 하나 꺼내 그 모습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우선 우리 콘타스 제국이 바라는 건 간단하지. 감히 우리 제국의 신민을 죽이는데 일조한 놈들, 그리고 천녀 당신을 해하려 한자들을 단 한 놈도 남김없이 제국에 양도할 것.”
“불가합니다.”
단호하게 그녀가 말한다.
“아직 그들이 누구인지. 어째서 그런 일을 벌였는지에 대해서도 전혀 들은 바가 없을지니. 그에 따라 짐은 적법한 절차에 따라 그들을 제압한 뒤 재판하고 결정을 내릴 것입니다.”
“짐은 그놈들을 당장 넘기라 말했소.”
“불가해요. 만에 하나라도 억울한 이가 한 명이라도 나오게 할 수 없으니까…….”
천녀는 또박또박 억울한 이가 없게끔 절차를 놓고 정론을 펼치기 시작했다.
* * *
데이비가 지구를 떠나고 또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다. 각성자의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를 보내던 현아는 서류 정리를 멈추고 책상에 추욱 늘어졌다.
“하아…… 쉬고 싶다…….”
다른 이들은 이 나이에 연애도 하고 한다는데. 자신은 어쩌다가 이러고 있는 건지.
그녀는 의대 출신이지만 요즘 들어서 의사가 될 준비는커녕 바빠질 대로 바빠진 삼촌의 일을 돕느라 상당히 지쳐있었다.
의사가 되기 위한 준비와 회사를 경영하는 일을 병행하는 건 어지간한 정신력이 아니고선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대부분의 일은 신연희가 도와주고 있지만, 그녀에게 맡겨놓기엔 일거리가 너무 많은 것도 사실이었다.
삐익-
“커피 한 잔 부탁드려요.”
비서실로 이어진 핫라인을 통해 커피를 주문한 현아는 퀭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하아…… 조카 보고 싶다…….”
다리안과 에반젤린은 여전히 귀엽겠지. 잘 지내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던 그녀는 다 내려놓고 며칠 정도 아이들과 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망할 꼴뚜기는 한 번도 찾아오질 않네. 하다못해 전화라도 하던가…….”
사실 신현수는 죽었고 지금 있는 건 데이비. 즉 다른 인간이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
하지만 그 영혼은 오래전 너무 소중했던 오빠의 혼이었다.
그렇기에 피가 섞이지 않은 남이라도 이렇게 남매처럼 있을 수 있는 것이리라.
추욱 늘어져 있던 그녀는 얼마 전에 온 그녀를 향한 약혼 제의와 함께 건네받은 명함들을 한 손에 구겨버렸다.
“뭔 결혼이야. 쯧…….”
혀를 차며 고개를 돌린 그녀가 도시의 풍경이 보이는 바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청적색의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아름다운 소녀와. 그런 소녀의 손을 잡은 채 마치 낯가림하듯 시선을 피하고 있는 흑발의 소녀를 말이다.
초단이와 에반젤린.
두 사람의 등장에 현아가 눈을 부릅뜨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황급히 핫라인을 눌렀다.
“커피 두 잔 추가해서 응접실로 보내줘요.”
그리고는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후다닥 뛰어가기 시작했다.
조카들이 자신을 보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오랜만에 보는 두 아이의 모습에 기쁨이 차오른 현아는 기다렸다는 듯 회사로 들어온 두 조카를 바라보았다.
“초단아! 에반젤린!”
그녀가 황급히 뛰어가 두 아이를 끌어안자 초단이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헤헤 오랜만이에요.”
“고모라고 해봐. 응?”
“헤헤 고모.”
“하아…… 치유된다 진짜.”
한숨을 내쉬며 초단이의 등을 토닥거려준 그녀가 두사람을 소파로 안내했다.
“자자! 어서 앉아 무슨 일로 온 거야? 세 발 낙…… 아니 너희 아버지는?”
그 물음에 초단이는 어색하게 웃는 얼굴로 제 볼을 긁적였다.
“아빠는 오지 않았어요. 티오니스에 일이 있어서요. 아마 잠깐은 바쁘실 거 같아서.”
“흐음? 그럼 너희끼리 온 거야?”
“네. 어머니가 문을 열어주셨거든요.”
초단이의 대답에 현아는 금발을 한 귀여운 아가씨를 떠올렸다.
제 오빠인 데이비를 제외하고 지구로 올 수 있는 문을 열 수 있는 유일한 이는 그녀밖에 없었다.
“그래? 그럼 새언니는…….”
“같이 안 오셨어요.”
그렇게 말하며 초단이가 현아의 손을 꼭 잡았다.
“저…… 고모.”
“응? 뭔데? 바라는 게 있으면 다 말해봐. 내가 다 들어줄게!”
“저…… 학교에 다니고 싶어요.”
그 말에 현아가 움찔했다.
“엉?”
“학교요. 대학교 공부를 해보고 싶어요. 아버지가 티오니스 일로 바쁘신 지금이 아니면 안 돼요. 절대 허락하지 않으실 테니까.”
“그거야 네가 걱정이 되니…….”
“하지만 지구의 공부도 해보고 싶은걸요. 그러니까 지금밖에 없어요. 도와줄 수 있는 건 고모뿐이고.”
그 말을 연희나 삼촌이 들었다면 슬퍼할 거다 라고 말하진 않았다.
의외로 고지식한 제 오빠 데이비의 버릇은 여전한 모양이었다.
그러니 거의 반쯤 작당하고 가출해서 여기까지 온 것일 테고.
초단이의 대답에 현아는 잠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다 에반젤린에게 고개를 돌렸다.
“에린이도?”
“……전 그냥 언니가 가자고 해서 온 것뿐이에요.”
툴툴대듯 말하는 게 예전 에반젤린과 조금 다른 느낌이 들었다.
“에린아?”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 짧은 시간 안에 그렇게 변할 수가 있나 생각이 들어 현아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초단이가 현아의 귀에 속삭였다.
“지금 에린이가 아버지와 대판 싸워서요. 바람도 좀 쐴 겸 데려왔어요…… 사실 지금 한번 성장한 뒤로 반항기가 와있어서.”
아…….
이해가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