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25화
“조 비서!!”
“예! 부대표님! 이미 도착했습니다!”
“위성 지금 몇 개 쓸 수 있어요?!”
“현재 가용 가능한 건 2개 정도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빼 오기가…….”
“두 개 전부 가동해요! 무슨 일 터지기 전에 찾아야 해!”
현아는 자신의 비서로 있는 조 비서를 통해 에반젤린을 빠르게 찾았다.
그녀가 처음 왔을 때 에반젤린이 이전과 조금 다르다는 느낌도 있었거니와 최근 몬스터 출몰 현황이 심상찮은 터라 에반젤린의 목걸이에 추적장치를 달아둔 건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저…… 부대표님? 그런데 이렇게까지 찾을 필요가 있습니까? 사람 하나 찾자고 위성을…….”
“조 비서.”
한숨을 내쉰 현아가 조용히 경고하듯 말했다.
“그 애 잘못되면 진짜 나 그 세발낙지 절대 못 막아.”
세…… 세발낙지?
떨떠름한 얼굴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기색을 보이던 그가 조심스레 물었다.
“저…… 그 아가씨가 대체 누구시기에 그러십니까.”
“자세한 건 묻지 말고 얼른 찾아줘요. 그리고, 튜브 유저 관리팀장에게 전화해달라고 연락 넣어요.”
“바로 연락하겠습니다.”
더 이상 질문하지 않고 황급히 움직이는 그를 뒤로한 채 현아는 손톱을 물어뜯었다.
“하…… 왜 이렇게 불안하지…….”
“신현아. 또 손톱 물어뜯는다.”
“후우…… 초단아. 걱정하지 말고, 고모가 에린이 꼭 찾아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려.”
“부탁해요. 고모.”
초단이의 대답에 그녀는 고개를 주억거린 뒤 에반젤린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말없이 에반젤린이 남겨놓은 흔적들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엔 당황해서 보지 못했지만, 컴퓨터의 아래 최소화된 창을 열자 어떤 세 사람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게 보였다.
척 봐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언니와 그녀 본인. 그리고 이제는 볼 수 없지만 다른 인간으로 버젓이 환생해서 살고 있는 오빠 신현수의 모습이었다.
사진과 같은 구도의 그림이지만 조금 달랐다.
약간 툴툴거리는 표정으로 있는 자신과 신현수의 얼굴이 행복하다는 듯 웃고 있었으니 말이다.
초단이도 에반젤린도 그림실력이 제법이라는 건 들어 알고 있지만 직접 보니 새삼 놀라운 수준이었다.
아마 방에 들어와서 먼저 그림을 그렸던 것이리라.
그러다가 우연찮게 영상 사이트에 접속했고, 거기서 익명에 휩싸여 어그로를 끄는 악질과 싸움이 붙은 것일 터였다.
그 원인은 대충 안 봐도 알만했다. 제 아빠를 욕하는 놈의 도발에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겠지.
에반젤린이 마냥 착하고 순해 빠진 아이가 아니라는 건 금방 알 수 있었지만 이 정도 변화는 예상을 아득히 넘어서고 있었다.
피가 안 이어졌다고? 지금 에반젤린은 예전 제 오빠와 성격이 아주 판박이 수준이었다.
우우웅!! 우우웅!
“찾았어요?”
-예 부대표님이 주신 위치 추적기가 간헐적으로 신호를 보내오는 걸 겨우 찾았습니다.
“그 애…… 지금 어디 있어요.”
그 물음에 조 비서가 조심스레 답했다.
-대전입니다.
벌써?
그녀가 인상을 찌푸렸다.
게다가 대전이라면 최근 마나 계측이 상상 이상으로 높아져서 언제 몬스터가 쏟아져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장소였다.
한국에는 이런 말이 있다.
가는 날이 장날이다.
이상하리만치 묘한 느낌을 받은 그녀가 표정을 찌푸렸다.
“코오나에게 대전으로 바로 와달라고 해요.”
-네 부대표님.
우우우웅!!
통화를 종료하기가 무섭게 또다시 연락이 왔다.
“현아에요.”
-오랜만입니다. 부대표님. 저를 찾으셨다고요.
“아. 팀장님. 실은 팀장님의 도움이 꼭 필요한 일이 있어서요. 가능할까요?”
-흐음…… 사적으로 돕는 게 쉽진 않습니다만…… 부대표님이라면 못 도와드릴 것도 없죠.
“시간이 없어요. 팀장님 잘 들어요. 팀장님이 관리하는 사이트에 악성 유저 하나가 애 앞에서 부모 욕을 박았어요.”
-예? 아아…… 뭐 종종 있는 일이긴 합니다만…….
“그런데 얘가 그냥 어린애가 아니란 말이에요. 지금 현실로 만나러 간 거 같거든요? 나 이거 일 커지면 못 막아.
-그게 무슨…….
“아니 이 인간이 애 앞에서 애 아빠 욕을 했는데 그 아빠가 티오니스 성자란 말이에요!”
다른 이도 아니고 하필!
“아시잖아요. 잘못되면 그 아이도 문제가 되는데…… 티오니스 성자가 이 일을 알면 진짜 골치 아파져요. 그 인간, 공인 아니에요. 대통령이나 어디 한자리 차지한 사람들처럼 인간들 눈치 보는 사람 아니라고. 무슨 뜻인지 아시죠?”
사고를 치면 여론은 에반젤린을 돕지 않을 수 있다. 공인이 욕 좀 먹었다고 쪼잔하게 뭐하는 짓이냐 라며 오히려 비하해댈 가능성이 오히려 높았다.
하지만. 현아가 아는 오빠는 그걸 듣고 어떻게 행동할지 너무 눈에 뻔히 보인다는 게 문제였다.
다른 이는 몰라도 현아는 현재 지구에 데이비라는 존재가 얼마나 필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희망적인 관측이다.
만약 이 뒤끝 강한 세발낙지가 열이라도 받아버린다면?
과연 그 뒤끝을 감당할 수 있을까.
그렇기에 그냥 둘 수 없었다.
“아시겠죠? 일 커져서 공론화되기 전에 제가 막아볼 테니까. 협조 좀 해주세요.”
-진짜 돌아버리겠네…… 알겠습니다. 최대한 협조하겠습니다.
* * *
악의가 가득 담긴 냄새는 에반젤린에게 굉장히 역하게 다가왔다.
알 때부터 인간의 감정을 먹고 자라온 에반젤린에게 있어서 감정의 냄새는 상당히 민감한 문제였다.
커다란 빌딩의 옥상에 내려선 에반젤린은 본능적으로 만들어낸 날개를 다시 사라지게 만든 뒤 눈을 가늘게 뜨고 짧게 킁킁거렸다.
“여기야…… 여기가 분명해.”
그녀의 눈은 현재 눈물기가 어려 있었다.
아무리 밉다 싫다 하지만 남이 아버지라는 존재를 함부로 말하고 멋대로 누명을 씌우며 이상한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걸 보고 참을 수가 없었다.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다는 게 이런 걸 뜻할까.
인간들의 감정은 가지각색이지만 컴퓨터 너머까지 전해져오는 인간의 감정이 담긴 악취는 고스란히 에반젤린의 후각에 각인되듯 남았다.
말없이 도시를 내려다보던 그녀는 손에 쥔 용신검 트와일라잇을 꽈악 틀어쥐고는 그대로 점프하듯 날아올랐다.
그리고, 점점 지독해지는 악취가 향하는 곳으로 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캬…… X신같은 게 까불기는.”
낄낄거리며 컴퓨터 앞에 앉아 담배를 피우던 한 남성이 비릿하게 웃어 보였다.
새하얀 민소매 티에 반바지를 입고 한 손에 쥐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끈 그가 낄낄거렸다.
그런 그의 반응에 동조하듯 방송에 많은 사람들이 [ㅋ]을 연발하기 시작했다.
“거봐, 대가리 깨져서 그 새끼 빠는 것들은 논리가 없어요.”
낄낄거리는 그의 컴퓨터에 띠리링 소리가 들려왔다.
[동동 님께서 10,000원을 후원하셨습니다.]
-솔직히 개 꼽긴 했음. 힘 하나 있다고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게 까불어대는 거 진짜 개 꼴 보기 싫었지.
[‘그’를 언급해선 안 돼.]
[우리도 잡혀갈지 몰라.ㅋㅋ]
[당신들 누구…… 읍읍! ]
“그렇다니까? 이래서 함부로 힘이란 걸 쥐여주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킥킥 웃어대며 그는 좀 전까지 사과하라며 항의하는 얼빵한 유저를 비웃었다.
“애초에 우리나라 사람도 아니고, 해외도 아니고,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도 모를 놈을 왜 추앙하는 건지…… 쯧 기분만 잡치네요. 그럼 다음 겜 가실까요.”
방송 BJ 나룻배는 유명한 데이비 안티였다.
그리고 그의 방송을 보는 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의 방송을 보는 시청자들의 입장에선 데이비라는 인물이 어떤 사람이고는 관계없었다.
그저 인터넷에 평소의 스트레스를 푸는데 그 대상이 제일 부러우면서도 뭔가 아니꼬운 인물로 걸렸을 뿐이었다.
다만, 나룻배는 달랐다. 그는 명확하게 티오니스 성자. 데이비 올 라운이라는 인간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인 인물이었다.
“솔직히 내가 그때 티오니스 성자 그 새끼만 아니었으면 지금쯤 떵떵거리면서 살았을 거란 말이지. 아 생각하니까 또 꼴 받네.”
[웃기고 있네 그냥 운이 안 좋아서 각성 못한 거면서 무슨ㅋㅋ]
[뭐 이 새끼 논리 없는 거 하루 이틀인가?ㅋㅋ]
한때 흉신이 나타나 난동을 부릴 때 지구에서는 알프 온라인을 플레이했던 유저들이 각성한 사례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 그들 중 살아남은 이들은 상당한 위치에서 큰돈을 버는 이들도 제법 있었다.
문제는 나룻배도 각성자 중 하나였다는 사실이었다.
큰 능력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해먹을 수 있는 정도의 힘.
하지만 그는 몬스터와의 싸움에서 큰 부상을 입고 각성한 능력을 잃어버리는 특이한 케이스가 되어버렸다.
그때 나타난 것이 데이비 올 라운이었다.
목숨은 건졌지만 장기가 크게 상하면서 각성자로써 활동할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는 사실과 조금만 더 일찍 그가 나타났었어도 자신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은 그로 하여금 애꿎은 이를 향한 분노를 향하게 했다.
현실은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일이 벌어질 때가 많다.
나룻배가 극한의 티오니스 안티가 된 것도 사실 그런 이유였다.
그가 조금만 더 일찍 와서 자신을 지켜냈으면 자신은 지금쯤 여성들을 옆에 끼고 떵떵거리면서 살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
그게 그의 생각이었다.
“하 씨. 오늘 게임 더럽게 안 되네. 팀운이 더럽다 더러워.”
패배라는 글귀가 뜨는 게임창을 보며 그가 담배를 한 모금 깊게 흡입했다.
그리고는 거칠게 재떨이에 비벼 꺼버리고는 말했다.
“한 판 더 합시다. 솔직히 이거 팀운이 너무 안 좋았어.”
[응 1/7/2]
[티오니스 성자 그 인간도 게임 잡더니 혼자서 상위 티어들 다 쓸어 담고 가던데 ㅋ]
“아 그 새끼 이야기는 하지도 말라고!”
짜증을 내며 그가 강하게 책상을 내리쳤다.
늘 있는 일이다. 시청자 수가 고작 몇십 명 밖에 안되는 작은 방송 BJ 오래전 있었던 방송사이트의 골수 유저였던 그로서는 세상 돌아가는 꼴이 참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었다.
“후. 잠깐 화장실 좀 갔다 올게요.”
자리에서 일어나 툭 튀어나온 배를 벅벅 긁으며 돌아선 그는 문득 창문의 틀에 올라앉아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어떤 예쁘장한 소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뭐…… 뭐야.”
검은 머리칼에 공허한 느낌이 드는 자색의 눈동자를 지닌 십 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녀는 8층 높이의 낡은 아파트 난간에 마치 깃털처럼 가볍게 앉아있었다.
싸늘한 죽음의 천사가 저러할까.
그녀를 보며 당황하는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캠을 통해 소녀를 인식한 채팅창 쪽에서도 물음표가 연신 올라오기 시작한다.
“사과해…….”
“뭐, 뭔 소리야.”
“사과하라고! 우리 아빠 욕한 거 사과해!!”
격하게 화를 내는 소녀는 마치 울음을 겨우 삼킨 듯 격분하고 있었다.
그쯤 되니 그도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사과. 아빠. 나름대로 눈칫밥 굴려서 밥 벌어먹고 살아온 그에게 있어서 소녀의 말은 그녀의 정체를 충분히 유추하게 만들어줬다.
“너 설마…… HA1123이냐?”
HA1123. 현아의 아이디였다.
에반젤린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를 노려보자 그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니 형님들. 이 미친년이 남의 집에 무단침입해서 사과하라는데요?”
[뭐임? 뭐임?]
[지금 상황 못 따라가겠는데.]
계속해서 올라오는 채팅을 흘끗 본 그가 물었다.
“너 설마 티오니스 성자 그 새끼 딸내미냐?”
“이익! 아빠 함부로 말하지 마!”
에반젤린이 화가 난 듯 소리치자 모두가 이해한 듯했다.
그리고, 나룻배는 그녀의 상황과 자신의 상황을 빠르게 계산했다.
티오니스 성자의 팬인 줄 알고 그 앞에서 신나게 그를 비방했는데 알고 보니 그 대상이 티오니스 성자의 딸이었던 모양이었다.
아니 애초에 십 대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저만한 딸이 있을 수가 있나?
이해가 되지 않지만 애초에 그 인간이 인간 같아야 인간이라고 하지.
생각을 정리한 나룻배가 스마트폰을 들었다.
“아니 형님들 저 또라이 같은 게 지금 욕 몇 마디 들었다고 현피 뜨러 온 거 같은데요? 와 어이없네.”
과장되게 말한 그는 씨익 웃었다. 티오니스 성자가 강한 건 알고 있다. 그런데 어쩌란 말인가. 지금 상황에서 불리한 건 눈앞에 있는 이 겁 없는 꼬맹이일 뿐이고, 자신은 이 일을 크게 공론화시켜서 피해자 코스프레만 하면 될 일이었다.
“아니 고작 인터넷에서 욕 몇 번 먹었다고 사람을 패러 찾아와? 애초에 내 개인정보는 어떻게 알고.”
그는 최대한 자신이 피해자라는 식으로 포장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반젤린은 제 아빠를 모욕당했다는 사실에 격분한 상황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공인이 욕 좀 먹을 수 있지 그거 욕 좀 먹었다고 사람을 죽이어와?”
“안 죽여. 사과받으러 온 것뿐이야.”
에반젤린이 이를 악물고 화를 냈다. 하지만 나룻배는 더욱더 그녀를 몰아붙이려 했다.
“사과는 얼어 죽을 치졸해서 살겠나. 형님들 제가 이렇게 삽니다. 세상을 구한 영웅이고 성자면 뭐하나. 욕 몇 마디 들었다고 아주 이 악물고 달려드는데.”
[등신 ㅋㅋㅋ]
[근데 공인이면서 치졸하긴 하네.]
당연히 시청자들은 자신의 일이 아니었기에 불이 더욱 크게 지펴지는 쪽을 선호할 뿐이었다.
“사과해!”
“안 해 이 X년아. 내가 뭐하러.”
“…….”
“어? 노려보네? 노려보면 어찌할 건데. 지금 피해자 겁박하나? 와 이거 무서워서 살겠나 진짜. 아니면 뭐, 고소라도 하게? 특정성 없어서 성립 안 되는 거 알지?”
척 봐도 어린애. 살살 말장난 몇 번 하면 엉엉 울면서 나가떨어질 상이다.
어떻게 자신을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고작 욕 몇 마디 한 걸 봤다고 눈물까지 보일 정도면 안 봐도 비디오였다.
“…….”
하지만 그는 잘 알지 못했다. 지금 에반젤린이 어떤 상황인지를 말이다.
파직…… 파지직…….
“어?”
나룻배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건 이성의 끈이 끊어져 버린 에반젤린이 허공에서 검은 검을 꺼내기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뭔가 잘못됐다. 아무리 막 나가는 인간이라도 이렇게 마냥 찾아와서 자신을 해코지할 거라곤 생각지 못했기도 하고 자존심도 있어서 몰아붙였는데 만약 그녀가 갑자기 돌변해서 자신을 죽이려 든다면?
일반인보다 조금 튼튼한 정도인 그는 저 기세를 내뿜는 이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죽여버릴 거야…….”
끝내 이성의 끈이 완전히 끊어져 버린 에반젤린의 목소리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동시에 섬뜩함을 느낀 나룻배는 자신이 너무 과하게 도발했다는 생각에 식은땀을 흘렸다.
그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은 경찰이 아닌 언론이었다.
마침 방송 중이니 이 상황을 알려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한다면 조금 잘못되더라도 꼴 보기 싫은 티오니스 성자에게 시원하게 엿이라도 먹여볼 수 있지 않을까.
믿고 싶은 대로 믿었던 그는 언제부터인가 그게 진실인양 신봉하는 수준에 이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대로 되진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맹렬하게 반응하던 채팅창이 굳어버린 것처럼 멈춰있었기 때문이었다.
고장이 났나? 아니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공간이 격리된 느낌이었다.
스릉…….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에반젤린이 용신검 트와일라잇의 끝을 그에게 겨누기가 무섭게 펄럭! 소리가 강하게 났다.
새하얀 날개와 함께 하얀 깃털들이 방안에 흩날렸다.
“야! 내가 잡고 있을 테니까 저 멍청한 인간 놈 빨리 치워!! 망할 뒤지고 싶으면 혼자 강에 뛰어들던가! 왜 일거리를 만들고 난리야!”
그 외침과 함께 푸른 머리카락의 소년이 에반젤린의 양팔을 제압하듯 잡았다.
“망할! 진짜 계시가 조금만 늦게 내렸어도 진짜 큰일 날 뻔했네.”
“놔! 놓으라고! 저 사람한테 사과를 들을 거야! 아빠 욕한 대가를 치르게 할 거라고! 우리 아빠가 뭘 잘못했는데?! 왜 구해주고 욕을 먹어야 하는데?! 아빠가 지구 사람들 지키려고 얼마나 많은 희생을 했는지도 모르는 주제에!”
에반젤린의 동공이 세로로 찢어지며 흉포한 피어가 스멀스멀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그것을 보던 나룻배는 다리가 풀려버린 듯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언론을 이용하면 자신을 해칠 수 없다 안일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이 지금 얼마나 큰 상황에 휘말려있는지를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버둥거리며 소리치는 에반젤린이 굉장히 낯설게 느껴지는 케인이였지만 그는 필사적으로 그녀를 말렸다.
“괜찮아. 에반젤린! 저놈은 우리가 해결할 테니까 일단 진정해!”
“싫어! 케인 오빠 이거 당장 놔!”
“네가 여기서 사고 치면 네 아빠가 얼마나 피곤해질지 생각이나 해봤냐?!”
“그딴 거 몰라! 아빠는 나한테 관심도 없어! 날 두고 서대륙으로 가버렸다고!”
“그래서 막 나가겠다고? 정신 안 차려!? 장담하는데 네가 여기서 저놈을 해치면 네 아버지는 며칠 동안 잠도 못 잘 거다.”
그 외침에 에반젤린의 몸이 마치 거짓말처럼 우뚝 멈췄다.
기세가 굉장히 날카롭게 변하긴 했지만 역시 데이비를 좋아하는 건 여전하구나 싶은 생각에 케인은 묘하게 씁쓸한 감정이 들었다.
침묵하는 에반젤린이 힘을 빼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에반젤린이 사고를 쳤으면 그 뒷감당을 할 수나 있었을지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뭔가 불안한 것일까.
케인은 최근 현아에게서 받았던 격언이 담긴 책에서 읽은 대목들이 갑자기 떠올랐다.
[가는 날이 장날이다.]
[운이 없으면 엎어져도 뒤통수가 깨진다.]
별일 없겠지.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 다른 건 몰라도 그 인간이 꼭지가 도는 사태만큼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
하지만.
에반젤린을 겨우 진정시키고 현아에게 양도한 뒤 고작 4시간도 채 되지 않아 골치 아픈 일이 터지기 시작했다.
인터넷에 어이없는 소리가 나돌기 시작했다.
[개인 방송인 BJ 나룻배.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 목격자의 증언에 따르면 티오니스 성자를 아빠라 부르는 한 소녀가 범인으로…….]
근거를 알 수 없는 기사가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기 시작했다.
* * *
천녀를 데려다주기 위해 서대륙에 왔던 데이비는 천녀가 비밀리에 객실로 향한 뒤 콘타스 대제와 독대하고 있었다.
“그래 왕자. 아니 대공이라 불러주어야 하나.”
“어느 쪽이든 변하는 건 없으니 편한 대로 불러주십시오.”
“하나 물어도 되겠나?”
“예.”
담담하게 대답하는 데이비를 보며 대제가 피식 웃었다.
“이번 일에 대해 아는 게 있나?”
“……없습니다.”
현재로선 아무런 결정이 내려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진실을 털어놓는 건 시기상조였다.
이 콘타스 제국에선 아비가 아들을 당당하게 목 졸라 죽인 사건도 있었다. 하지만 세상이 원래대로 돌아온 이후 아비는 아들을 죽인 사실은커녕 요 몇 년 사이의 기억을 통째로 잃어버렸다.
대제는 그런 이야기를 내게 하며 물었다.
“짐이 말이야. 눈치가 좋은 편이거든.”
“…….”
“아무리 봐도 이게 단순한 사고 같진 않은데 말이야. 이를테면 카트린느 대공이나. 대륙 각지에서 비슷한 사례에 대한 정보가 올라오더군.”
“하고 싶은 말씀이 무엇입니까 대제.”
“알고 있는 거 같은데 털어놓지 그러나.”
그 물음에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알아도 말해줄 수 없는 게 있는 법입니다.”
“그래도 알아야겠다면?”
“굳이 밑바닥을 보고 싶다면 말리진 않겠습니다만…….”
담담하게 답하며 내가 물었다.
“대제께선 이 일이 잘못된 무언가로 인해 벌어진 사고라고 한다면 누구의 편을 들 생각입니까.”
내 물음에 그가 잠시 침묵하며 고민에 빠졌다.
“아비는 잠시 어떤 이유로 미쳐버린 겁니다. 기억에도 없는 아들을 제 손으로 죽였지요.”
“…….”
“아들은 억울할 겁니다. 하지만 아비는 그 이상으로 원통하고 참담하겠죠.”
내가 다시 물었다.
“대제께선 이 상황에 어느 쪽도 억울하지 않게 할 수 있으십니까?”
결국, 진영논리였다. 세계의 법칙에 피해를 받아 변해버린 인간들을 감싸야 할지.
아니면 그들이 의도한 게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들이 저지른 죄를 그들이 모두 갚아야 할지.
대제나 팔란의 살리반. 그리고, 카트린느 대공의 상황을 직접 보았던 알베르타의 튜나 재상이나 린디스의 데오르트 황제.
이미 대륙의 몇몇 인물은 이번 일이 정상적인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지혜를 한번 빌려주시지요.”
내 말에 대제는 한 손으로 미간을 꾹꾹 눌렀다.
“명국에서도 비슷한 사례인 듯하군.”
“아뇨. 거긴 범인이 따로 더 있어요. 사실 천녀님과 함께 명국에 가자마자 그놈부터 잡아낼 생각이긴 한데. 완전히 틀린 건 아니겠죠. 천녀님의 호위들은 같은 경우일 테니.”
담담하게 답한 내가 다시 물었다.
“그래서, 대제께선 어떻게 이 일을 생각하는지 그냥 궁금했습니다.”
내 말에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약아빠진 놈이구나. 딜레마에 가까운 선택을 짐에게 떠넘기다니.”
“어차피 결정을 내리셔야 할 겁니다. 그 결정에 관해서 제가 간섭할 것도 아니지요.”
능수능란한 혓바닥 놀림에 그가 피식 웃었다.
“대가를 치르고 죽일 이들은 죽여야겠지.”
죽은 이들이 돌아오는 건 아닐 테니까.
“그게 대답입니까.”
“그래. 짐은 그렇게 생각한다.”
나야 권한이 없다지만 그는 이 나라의 황제. 그렇기에 이 나라의 대소사 법에 직접 판결권이 있다.
그리고, 그가 내게 내어준 답변은 내게 어떤 방법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어떻게 보면 그게 구원일 수도 있겠네요.”
인격이 반전된 경우가 많다.
사랑한 사람을 직접 죽이는 사태가 많다는 뜻이기도 했다.
과연 진실을 들은 그들이 앞으로 받아가야 할 좌절감을 생각하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지도 몰랐다.
재수 없으면 엎어져도 뒤통수가 깨진다더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