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35화
에반젤린의 하루는 늘 그렇듯 늦잠으로 시작된다.
잠이 많은 편인 에반젤린에게 있어서 수면은 그날 최고의 행복 중 하나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날 만큼은 그런 수면을 뒤로 하고 일찍 일어난 그녀였다.
“준비 다 됐지?”
“응. 간식도 챙겼어.”
“그래.”
이른 시간부터 찾아온 코오나가 에반젤린의 머리를 툭툭 쓰다듬으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감정이 제법 풍부해지긴 했지만, 그녀는 감정을 확연히 드러내는 게 마냥 쉽지는 않은 듯했다.
“그럼 갈까?”
현재 코오나는 국제기업이 된 신성 그룹의 소속으로 국제 균열 조사나 관련 일을 하고 있다.
사일런스 게이트는 현재 몇몇 국가에서 소리소문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있다.
그 범위는 대부분 마나의 농도가 일정 수준 이상 짙어진 장소들로 이전 한국의 대전이 그러한 케이스이기도 했다.
콧노래를 부르며 차에 올라 주변을 둘러보던 에반젤린은 지구의 풍경을 눈에 담으려는 듯 눈동자를 쉴 새 없이 굴렸다.
2차 성장 전에 왔던 지구와 지금 보는 지구는 느낌이 다른 것인지 새삼 즐거워 보이는 기색이었다.
“그런데 우리 어디로 가요?”
그 물음에 코오나가 빙그레 웃었다.
“미국에서 각성자 한 명이 올 거야. 그 사람과 합류해서 홍천 쪽으로 갈 거고.”
“홍처언?”
“그래. 작지만 공기가 맑은 도시라고 들었어. 나도 가는 건 처음이라 신성에서 파견한 조사원들과 함께 움직일 거야.”
현아는 결국 같이 오지 못했다.
그녀가 현장까지 갈 수 있는 여건이 사실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옷은 어디서 난 거야?”
차를 타며 이동하던 중 코오나가 에반젤린에게 질문을 던졌다.
현재 에반젤린이 입고 있는 옷은 일반적인 지구의 평상복이나 티오니스의 복장과 달리 약간 영화에서나 볼법한 판타지식 의상이었다.
“아. 이거요? 아저씨가 만들어준 거예요.”
그 말에 코오나는 그녀를 도와주고 있는 중동의 왕자님이 대단한 제작계통 각성자라는 것을 상기했다.
확실히, 데이비가 나서서 포도맛캣타워와 마가 두 사람을 완전히 개조수준으로 바꾸기 전까지 알하자드는 알프 온라인에서 제작 1위의 랭커였었으니까.
그가 만드는 작품이 마냥 수준이 떨어지는 물건도 아니리라.
“그리고, 이건 포도 오빠가 만든 거구요. 이건 마가 언니가 만들었어요!”
에반젤린은 그들 모두에게 인기가 많았다.
산소맛곰탕 윤지아 이외엔 관심도 없던 마가라곤 하지만 에반젤린 특유의 귀여움에 제법 매료되었는지 그녀만 보면 상당히 호의적인 기색을 내비치는 것도 사실이었다.
“흐응…….”
신기하다는 듯 물건을 보던 코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강원도 지방까지 올라간 코오나는 문득 과거가 생각났다.
몇 해 전만 해도 이 지구에서 몬스터가 점령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지금이야 대부분 땅을 되찾았다지만 과거엔 지금 같은 모습은 사치에 가까웠다.
이윽고 차가 멈추자 에반젤린은 기다렸다는 듯 문을 열고 양팔을 펼쳤다.
이곳도 마냥 달의 숲이나 신목의 성지처럼 공기가 맑지는 않다.
하지만 이곳은 이곳대로의 상쾌한 공기가 제법 마음에 들어 그녀의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헤이~ 아가씨들? 아저씨가 길을 잃어서 그런데 혹시 여기가 어디인 줄 알아?”
그때 어눌한 한국어가 들려와 고개를 돌리자 선글라스를 쓴 제법 느긋해 보이는 인상의 남성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장난치지 마세요. 크리스.”
“오우. 미스 코오나. 그렇게 깐깐하면 남자친구 안 생겨요.”
영어로 중얼거리는 사내를 향해 코오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그녀가 아는 최고의 대답을 내려주었다.
“엿이나 드세요.”
“컥…….”
코오나도 그렇지만 미국의 S급 각성자 크리스마텐 또한 신성 그룹과 계약하여 힘을 보태주고 있는 실정이었다.
크리스마텐은 미국의 S급 각성자이며 신성 그룹과 계약을 맺고 국제 각성자로써 활동하고 있기도 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미국 내에서 가장 인기 있는 각성자 1위의 빛나는 인간상이었다.
비록 S급이라 움직임에 제약이 많은 것도 사실이나 현 미국은 신성 그룹과의 관계에 상당히 힘을 쓰고 있으니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당신까지 올 줄 몰랐네요.”
“뻔하지. 자국 내에도 사일런스 게이트가 있으니까.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여기서 정보를 최대한 얻어오라는 상부의 뜻이지.”
피해가 자국에서 발생하기 전에 이곳에서 정보를 얻어 대처하라.
나름대로 생색을 낸 시점이었다.
미국의 S급 각성자이자 슈퍼히어로라 불리는 크리스의 우스갯소리는 가벼워 보이지만 가볍지 않았다.
“그나저나 아가씨가 데이비 왕자의 딸이야?”
“……네.”
조금 굳은 얼굴로 그녀가 대답하자 그가 환하게 웃으며 에반젤린의 손을 잡아 흔들었다.
“미국 소속 S급 각성자 크리스 마텐이야.”
“코오나에요. 일본소속 각성자지만 요즘은 신성 소속이에요.”
“에…… 에반젤린이에요!”
그 말에 크리스가 뭐가 그리 웃긴지 킥킥거렸다.
“왜 웃어요?”
“아니. 생각해보니 웃기지 않아? 우리 둘 다 신성 소속이긴 한데. 한국의 균열인데 정작 한국 각성자는 하나도 없잖아.”
그 말에 코오나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에도 S급 각성자는 있지만. 그들은 전부 사설이니까.”
물론 사설이라고 해도 정작 한국의 일에 한국 각성자가 하나도 없다는 건 어이없는 일이었다.
“걱정 말아요. 그렇지 않아도 한국 정부에서 한 길드에 합류를 요청했으니.”
그 말에 크리스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발해? 발해라는 곳이에요. 중견 길드치고는 사이즈가 좀 작은 곳이긴 한데…… 무슨 일인지 갑자기 아티펙트를 얻어와서…… 아마 저력 자체는 그 이상일 거예요.”
“오…… 보증수표가 따로 없군.”
* * *
휘청거리던 중견 길드 발해에선 한 명의 각성자가 왔다.
최대 인원 넷에서 다섯 정도로 소규모로 조사를 진행해야 한다는 점 때문이었다.
“반가워요. 발해의 길드원인 연수아입니다. 탐색계로 참가할 거에요. 전투력은 그리 높지 않지만…… 믿어도 되겠죠? 슈퍼 히어로 씨?”
“와우~ 베리 나이스 리액션. 얼마든지 지켜주지.”
크리스와 코오나를 향해 살짝 고개 숙여 인사한 연수아는 에반젤린을 보자마자 살갑게 웃어 보였다.
“또 보네? 방송 잘 봤어!”
“바, 바, 방송이요?”
연수아의 여유 있는 웃음과 대비되게 에반젤린은 몸을 파르르 떨었다.
지금은 방송인 에린이 아니다. 그러니. 지금 보여야 할 대처는 하나뿐이다!
“바, 방송이라니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네요.”
“오호? 아직 숨기시겠다?”
그 말에 에반젤린은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열심히 사실을 은폐하려 들었다.
문제는 연수아 뿐만이 아니었다.
“아 그러고 보니 방송도 하지. 방송 잘 보고 있어. 물론, 생방송 풀타임을 챙겨볼 순 없지만, 하이라이트 정도는 구독과 라이크를 박아놨다 이 말이야.”
크리스의 장난스런 말투에 에반젤린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리고는 식은땀을 흘리며 시선을 피한 채 어색하게 말했다.
“무…… 무슨 소리인지. 전혀 모르겠는데요오.”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네 마음속에선.”
“허, 헛소리 말고 이동이나 해요!”
“그럴까? 그나저나 왜 현아 양은 오지 않는 거지…….”
코오나의 눈이 날카롭게 변한다.
“엄한데 수작 부리지 말아요. 빌어먹을 난봉꾼 히어로.”
“오…… 그건 좀 슬픈데…… 하지만 나는 애인이 없는 솔로라고.”
“네, 그러시겠지요. 해태 님의 눈으로 보이는 당신은 정말 대단한 과거이력을 가지고 있는데요?”
“이런, 사생활이 1도 없군.”
과장되는 제스처를 취하며 그가 한발 물러났다.
물론, 코오나에게 선녀의 힘과 예지를 주는 해태라고 만능은 아니지만 말이다.
조사팀은 총 네 명이다.
하지만 이들 중 누구도 걱정하는 이는 없었다.
단순 무력만 따지면 코오나는 둘째 쳐도 크리스는 확실한 멤버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엄마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오, 베이스볼의 여신. 일리나 양.”
“베…… 뭐요?”
몰랐나 하는 심정으로 크리스는 목적지로 향하는 도중 일리나가 미국에서 했던 시구에 대해 알려주고 영상을 보여주었다.
그곳에선 예쁜 옷을 입은 채 각선미를 드러낸 일리나가 야구공을 던지는 장면이었다.
“야구팬이라면 모를 수가 없지.”
“미…… 미국? 그곳은 엄마를 많이 좋아해요?”
“당연한 소리. 일리나 왕자비는 미국에서 단연 섹시한 여성 순위 탑에 들 정도로 인기가 많으니까.”
특히 야구팬들 사이에선 여신 취급을 받고 있다며 우스갯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런데 왕자비도 지구에 있었던 건가?”
“엄마는 언니와 함께 오지 않았어요.”
담담하게 대답하며 에반젤린이 고개를 들었다.
이윽고 미리 한국과 신성에서 파악한 마나 농도가 이상할 정도로 짙은 장소에 도달한 이들은 간단한 장비를 점검했다.
맨손을 가볍게 풀며 기세를 끌어올리는 크리스는 사실상 알려진 최고의 전력이다.
물론, 에반젤린이 있지만, 그는 에반젤린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에반젤린의 무력이 알려져 봐야 D급 게이트에서 늑대 몇 마리를 처리한 게 전부였으니 말이다.
평화롭기 그지없는 거대한 산지를 보며 크리스가 손뼉을 가볍게 쳤다.
“자. 그럼 아가씨. 어디 실력 좀 보자고.”
그 말과 함께 에반젤린은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그러자 자색으로 변한 드래곤 아이가 매섭게 드러나며 주변의 시야를 담기 시작했다.
“저쪽.”
그녀는 단순 균열을 보는 수준을 넘어 그 흐름까지 볼 수 있다.
탐색계인 연수아가 있지만 아무리 탐색계라고 해도 연수아가 사일런스 게이트를 볼 수는 없었다.
사실 그렇게 놓고 보면 그녀가 할 일이 있는가. 그렇게 물을 순 있었다.
하지만 정확히 말해서 연수아는 탐색계로 참석했을 뿐 정확히는 보조, 지원이었다.
힐러.
연수아가 각성한 능력 중엔 회복 이능이 존재했으며, 그 이능은 현재 데이비 때문에 강화되어있는 상태였다.
물론, 그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지만.
“부디 제가 할 일이 없는 탐사가 되면 좋겠네요.”
연수아의 말에 크리스가 씨익 웃었다.
“걱정 말라고. 아무도 다칠 일 없을 테니.”
“찾았어요.”
이윽고 에반젤린이 눈을 게슴츠레 뜨며 말했다.
“저쪽으로 가야 하는데…….”
그 말과 함께 숲 안에서 언제 나왔는지 모를 몬스터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한다.
“허어…… 균열도 없었는데 몬스터가 튀어나왔다고?”
“뭐가 되었건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네요.”
담담하게 말한 크리스가 손가락을 뚜둑 꺾었다.
“자 그럼 밥값 해보자고.”
여유롭게 손을 꺾으며 걸어 들어가는 그와 한 자루의 일본도를 뽑아 파고드는 코오나 두사람을 보던 에반젤린은 용신검 트와일라잇을 검집째로 소환했다가 잠시 멈칫했다.
“괜히 나설 필요 없어. 저 두 사람에게 맡기면 돼.”
연수아의 말에 에반젤린은 검을 뽑으려다 말고 검을 내려놓았다.
콰아앙!! 쾅!!!
그 수가 많진 않지만, 적의가 이쪽으로 몰린 건 놀라운 일이다.
마치 에반젤린을 두려워하듯 몰려드는 몬스터들을 보며 에반젤린은 눈을 가늘게 떴다.
쾅!!! 쾅!!
이윽고 크리스가 섬광처럼 쏘아져 나가는 걸 시작으로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크리스는 영화에서 흔히 볼법한 슈퍼히어로 같은 면모를 보이며 숲을 누비고 파괴적으로 몬스터들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몬스터의 힘이 강한 것도 아니고 크리스가 각성자 중에선 제법 강한 편이기에 당연한 결과였다.
서걱!! 촤아악!!
또 한켠에선 코오나가 빠르게 검을 휘두르며 변이된 늑대들을 베어 넘기고 있었다.
도와줄 필요가 전혀 없어 보이는 두사람을 보며 연수아가 짧게 탄성 한다.
“역시. 실력은 끝내주네. 세상에서 가장 각성자 보유력이 강한 건 신성 그룹이라더니.”
연수아는 그렇게 말하며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정작 나도 나설 일이 없으니까 좀 그렇긴 하네.”
담담하게 말한 그녀가 문득 생각나서 물었다.
“그런데 에반젤린 양?”
“네?”
“방송에서 정체를 왜 숨기는 거야?”
“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데요!”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그녀가 어색하게 소리쳤다.
“아니 그렇잖아. 솔직히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모, 몰라요 그런 거!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자꾸 다른 사람이랑 착각하는 거 같아요!”
당황한 그녀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소리쳤다.
쾅!! 쾅!!
그러거나 말거나, 크리스와 코오나는 몬스터를 상대로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토벌을 감행했다.
아무리 그들이 강해도 사일런스 게이트를 감지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런 만큼 에반젤린의 존재는 반드시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직감이라고 해야 할까.
에반젤린은 묘하게 좀 전부터 느껴지는 그 균열의 기색이 이상하게 불안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 * *
에반젤린이 균열 탐사에 참가한 시각.
초단이는 1차 시험에 성공한 이후 제법 한가해진 마음으로 도서관을 찾았다.
지구든 티오니스든 새로운 정보나 지식은 그녀에게 굉장히 기쁜 느낌을 전해주었다.
비록 본체는 검이기에 형체만 인간형태를 지녔을 뿐 그녀 자신은 영체에 가까운 가짜 몸이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고요하고 시원한 도서관 내부로 들어간 그녀는 사실 조용히 책을 읽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존재는 어딜 가나 눈에 띠일 수밖에 없었다.
“저기요.”
“네?”
청적색의 브릿지가 된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고개를 돌린 초단이는 그녀의 앞에 다가온 한 청년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혹시, 배우 해볼 생각 없어요?”
“배…… 배우요?”
의아한 기색을 내비치는 초단이를 보며 사내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네. 배우요. 드라마나 영화. 어디든 좋아요. 혹시 관심 있어요?”
그 물음에 초단이는 잠시 고민하다 대답하려 했다.
그런데.
잠시 시선을 숙였다가 들었을 때. 사내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죄송하지만 생각 없…… 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