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40화
크리스 마텐의 연락을 받고 바로 집을 나선 그녀는 그가 찍어준 주소를 떠올리며 빠르게 달렸다.
순식간에 빌딩에서 빌딩으로 몸을 튕기듯 쏘아져 나가며 풍경이 변한다.
평소라면 에반젤린이 정말 좋아했을 풍경이지만 지금 그런 풍경은 그녀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더 빨리 가야 해.’
거리가 제법 되는 탓일까. 뛰어서 가는 데엔 한계가 있음을 절실히 느낀다.
이 속도로 가면 못해도 30분은 걸릴 거리.
이에 그녀는 더욱 빠르게 목적지까지 가기 위해 다리에 힘을 가했다.
하지만 그녀의 현재 속도에는 한계가 있었다.
‘왜 더 빨리 못 가는 거야!’
울상을 지은 그녀가 격하게 소리치자 그녀의 감정이 맹렬하게 요동쳤다.
동시에. 어떤 변화가 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녀의 감정이 격해질 때 그녀의 눈동자가 자색으로 변하는 것처럼 그녀의 안에 있던 힘이 그녀의 몸에 변화를 주기 시작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드래곤 아이처럼 세로로 찢어진 동공이나 자색의 빛깔은 흔히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한가지가 달랐다.
찌익!! 투둑!!
그녀의 등 언저리에 천이 찢어지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검은빛의 거대한 날개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용족의 날개처럼 펼쳐진 날개의 크기는 양 너비는 고작 1미터 정도로 그리 커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단단한 뼈대나 검은 피막은 알 수 없는 묘한 위압을 선사했다.
“더 크게!”
이윽고 거대한 빌딩의 옥상을 박차고 오른 에반젤린의 외침과 함께 그녀의 날개의 형체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마치 일렁거리는 거대한 빛의 날개처럼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거칠거칠한 표면을 가진 검은 날개는 이내 순식간에 그 크기를 너비 5미터에 달할 정도로 커졌고, 날개보다 훨씬 작은 그녀를 중심에 둔 채 강하게 대지를 향해 날갯짓했다.
쿠웅!!! 투쾅!!
그리고, 그렇게 휘둘러진 날개는 에반젤린의 신형을 음속을 돌파하는 속도로 움직이게 만들어주었다.
막대한 소닉붐으로 인해 고층빌딩의 일부 유리창이 거침없이 박살 나버렸고,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에반젤린은 그런 걸 신경 쓸 여력이 없다는 듯 맹렬하게 어딘가로 날아올랐다.
사실 위치를 문자로 받은 게 전부였다.
대충 방향만 알기에 정확한 위치 또한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움직임에는 거침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예측한 방향으로 날아갈수록 비틀린 마나의 불순물 향이 그녀의 코와 기감을 가차 없이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상당히 역한 냄새. 비틀린 탄내 같은 마나의 흐름.
마나의 흐름에 있어서는 고대룡은 굉장히 민감할 수밖에 없다.
처음엔 방향만 잡히던 목적지가 서서히 세세하게 잡히기 시작했고. 이내 그녀의 시야에 지름 수십 미터의 게이트와 그런 게이트 앞에 모여있는 다수의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내려가자.”
창공에서 날개를 빠르게 펄럭인 그녀가 나타나자 사람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그녀에게 향했다.
거대한 날개를 한차례 펄럭이자 어마어마한 광풍이 주변을 덮쳤고 지상에 있던 이들이 경악하며 몸을 웅크렸다.
일반인과 각성자를 가리지 않고 짓누르는 엄청난 풍압이었다.
“크억?!”
“이게 무슨 풍압…….”
상상을 초월하는 풍압을 일으키며 지상과 가까운 거리까지 내려오자 그녀의 거대한 날개가 이내 조각처럼 흩어지며 부서져 내렸다.
동시에 그녀를 지지하던 부유력이 사라지며 그녀가 빠르게 지상으로 착지했다.
날개가 사라졌을 때 그녀와 지상의 거리는 고작 1미터 정도의 높이였기에 착지 자체는 꽤 깔끔하고 조용했다.
그리고, 본래 돋아났던 그녀의 날개는 마치 할 일을 마쳤으니 잠든다고 말하는 것처럼 빠르게 접히며 그녀의 등 뒤로 사라져버렸다.
“당신은 누구…….”
“게이트! 저 안인가요?!”
그녀의 외침에 사람들이 서로의 시선을 살폈다.
방금전의 날개를 보면 분명 일반인은 아니었다.
몬스터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예쁜 몬스터가 있는가 의심이 들 정도.
그러던 중 한 사람이 그녀의 얼굴을 알아봤다.
“에…… 에반젤린 올 라운! 티오니스 성자의 딸!”
“비켜줘요. 내가 가야 해.”
“안됩니다. 물러나세요.”
아직 이야기를 전해 받지 못했는지 그녀의 진입을 방해하는 건 정부 인사들이었다.
검은 양복을 입은 요원들은 그녀의 앞을 막아선 채 팔을 들어 그녀를 물러나게 했다.
“왜 막는 거예요! 안에 사람이 갇혀있다면서요!”
“알고 있습니다. 아가씨. 하지만 이일은 한국의 일이지 아가씨가 위험하게 나설 일이 아니에요.”
“내가 구할 수 있어요! 내가 가야 한다고요! 왜 불러놓고 막는 거예요?!”
에반젤린이 티오니스 성자의 딸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보통 사람의 경우 그녀를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는 이곳에 밀어 넣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혹여라도 그녀가 잘못되면 한국은 돌이킬 수 없는 사태에 직면하게 될 테니 말이다.
“안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대체 왜 안된다는 거죠?”
그녀의 반박에 요원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침묵하고 있던 찰나.
그녀의 곁으로 한 사내가 다가왔다.
요원이 아닌 주변을 통제하던 국가 소속 각성자였다.
“이봐. 꼬마 아가씨. 티오니스 성자의 딸이라는 건 잘 알겠지만. 이번 일은 위험해.”
“그러니까 제가 가겠다는 거예요.”
“지금 구조를 위해 들어간 S급이 고립된 상황에 아가씨를 홀로 보내라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할 거 아니야.”
애초에 그녀가 아니면 사일런스 게이트에 대적할 수 없다. 그런데 이렇게 막고 있다니. 그들의 그런 저지에 에반젤린은 힘으로라도 밀고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만. 공주님은 이번 일에 꼭 필요해.”
약간 어색한 한국어를 내뱉으며 한 사내가 다가왔다.
“당신은…….”
하와이에서 볼법한 알로하 셔츠에 반바지,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사내. 크리스 마텐이 선글라스의 한쪽을 가볍게 집어 들어 올렸다.
“크리스 마텐. 미국의 S급 각성자다.”
“당신이 어째서 여기에.”
“복잡한 이야기는 됐고. 한국 헌터 협회와 신성 그룹 사이에 이미 허가가 떨어진 일이야. 나는 미국이 아니라 신성 그룹의 계약 각성자로써 온 것이고.”
갑작스런 국가 최고 각성자의 출현에 요원과 주변을 통제하던 이들이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이미 내부에 수십 명이 고립됐지. 신성 그룹에서 파견한 S급 각성자 코오나 양도 연락이 두절됐다. 틀렸나?”
“그걸 당신이 어떻게…….”
“시간 없어. 지금 이 순간에 몇 명이 죽어 나가고 있을지 모른다. 틀렸나?”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아참 그리고 이거.”
이윽고 그가 무언가 종이를 내밀자 요원은 그것을 받아 읽고는 눈을 크게 떴다.
“이게…… 정말입니까?”
“거기 사인 있잖아. 어서 비켜. 한 명이라도 더 구하려면 시간이 부족해.”
그의 말에 요원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모쪼록 조심하십시오. 아참.”
요원이 손짓한다. 그러자 다른 요원이 작은 장치 두 개를 가져왔다.
팔찌 같은 장치였지만 중앙에 어떤 전자장치가 달려있었다.
“이걸 가져가세요.”
“이게 뭔데?”
“생존 신호를 보내주는 장치입니다. 아시다시피 이곳은 상시 게이트라 외부와 내부를 잇는 라인이 있으니까요. 특수소재를 사용해서 만든 것이라 어지간해선 부서지지 않을 겁니다.”
“알았어.”
작은 빛을 내뿜는 장치를 대충 손목에 감은 다음 그가 하나를 에반젤린에게 건넸다.
“공주님도 받아.”
“공주님이라 하지 마세요.”
“그래그래.”
귀엽다는 듯 피식 웃은 그가 균열에 손을 뻗었다.
츠츠츠츳!!!
그러자 균열에서 옅은 스파크가 일어나며 두사람을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저…… 팀장님…… 저 두 사람 정말로 보내도 되는 겁니까?”
“정식 지원 서류까지 가지고 있으면 문제는 없겠지.”
“후우…… 그렇다고 해도 진짜 놀랐습니다. 그렇게 거대한 날개라니요.”
“하긴. 티오니스 성자의 딸은 인간이 아닌 존재의 혼혈이라고 했던가? 정확히 어떤 종족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린 소녀가 품기엔 너무도 무거운 힘이었다.
“그 아빠의 그 딸이라니. 하나같이 대단하네.”
허탈하게 중얼거린 그는 다시 고요해진 상시 게이트의 표면을 보며 소리쳤다.
“뭣들 해! 다시 통제 시작해! 지금 입장하면 입장위치가 계속 바뀌어서 구해내기도 어렵다! 절대 들어가게 하지 마.”
B급 A급 각성자가 수십 명. 그리고 그들을 구하기 위해 진입했다가 연락이 두절된 S급이 둘.
절대 가벼운 일은 아니었다. 팀장이라 불린 정태수는 제발 자기 관할에서 큰 사고가 터지지 않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 * *
내부는 마치 황혼이 진 것처럼 노을이 지는 색을 띠고 있었다.
“공주님.”
“에린이에요.”
“오, 좋아. 원하는 대로 불러주지. 에린. 현 상황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어?”
“잘 몰라요. 코오나 언니가 휘말렸다는 거랑 다수의 사람이 휘말렸다는 것만.”
“그래 잘 알고 있네. 우선 게이트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면서 이동하자고. 에반젤린은 내가 몬스터를 처리하는 동안 잘 따라오도록 해.”
“나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가 손을 뻗었다.
스르릉…….
동시에 그녀의 손에 검붉은 장검인 용신검 트와일라잇이 쥐어진다.
텅!!
그리고, 그것을 강하게 튕기듯 틀어쥔 그녀가 허공에 검을 휘둘렀다.
촤아악!!!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그녀의 검은 기습을 벌이듯 크리스를 향해 진입한 몇 마리의 몬스터를 순식간에 조각내버렸다.
“와우, 지져스.”
순간의 검붉은 번뜩임과 함께 B급 몬스터 다수가 비명도 못 지르고 조각나버리자 크리스는 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녀가 보통 아이와 다른 건 조금 전 그녀가 펼친 날개만 봐도 알 수 있다.
사일런스 게이트의 암흑신관이라는 몬스터를 처리한 이야기만 들어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정도인 줄은 그도 예상치 못했다.
‘나라면 반응할 수 있을까? 몸으로 막아낸다고 막아질 위력이 아닌데.’
허탈하게 웃으며 그가 혀로 입술을 핥았다.
섬뜩하지만 그만큼 든든한 아군이 아닐 수 없었다.
부전여전이라고, 딸이 아빠를 닮지 않는 게 이상할 지경이긴 했다.
“적어도 너와 네 아빠가 지구와 적대하지 않은 건 신의 보살핌이 아닐 수 없네.”
“흐…… 흥! 빨리 가요!”
때아닌 칭찬에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에반젤린이 성큼성큼 걸어간다.
“아참. 에반젤린.”
“네?”
“나도 오빠야~ 라는 거 한 번 해줄래?”
그의 말에 에반젤린의 약간 붉어진 얼굴이 더욱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잠시간의 침묵 끝에 그녀가 크리스에게 다가왔다.
“왜 그래 에반…… 커헉?!”
순식간에 발끝으로 그의 정강이를 걷어차 버린 에반젤린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그를 노려보듯 올려다보았다.
“오우 쉣…….”
그가 짧게 중얼거렸다. 지뢰를 밟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오케이. 오케이. 조금만 진정하자고, 레이디.”
“한 번만 더 그런 말 하면 진짜…….”
“진짜?”
“아빠한테 이를 거예요.”
그 한마디에 크리스의 표정이 파랗게 질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딸바보로 유명한 티오니스 성자가 이 사실을 들으면 그의 멘탈을 유지하는 게 쉽진 않으리라.
“오우. 그건 좀 그렇구만. 어어? 같이 가자고.”
“장난치지 말고 빨리 와요!”
“아니 길은 알아? 여기가 얼마나 넓은지 모르겠는데 딱 봐도…….”
“여기에요.”
장난기 없는 그 한마디에 크리스는 그녀의 긴장을 풀어주는 행동 자체가 의미 없음을 깨달았다.
성큼성큼 걸어 어디론가로 향하는 에반젤린의 뒤를 따라 크리스가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아니 무슨 꼬맹이가 보폭이 이렇게 빨라?!’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 * *
“허억…… 허억!”
숨을 헐떡이며 코오나는 팔에 생긴 환부를 지압해 출혈을 강제로 멈췄다.
아직까지 죽은 이는 없다.
천운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누군가가 마치 손을 쓴 것 같다고 해야 할지.
현재 그녀는 해태의 힘이 많이 약해져 있다.
해태는 강력한 힘을 지녔지만, 상시 그런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신수였다.
하필 약해져 있는 시점에서 급히 구조신호를 받게 될 줄이야.
그녀야 한국 소속은 아니라지만 신성 그룹의 소속인 만큼 나설 생각이었다.
애초에 큰 문제가 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상시 게이트로 진입해 몬스터들을 처리하고 빠져나오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설마 각성자들을 위험에 빠뜨린 게 사일런스 게이트의 몬스터였을 줄이야.
게다가 이놈은 지금까지 봤던 사일런스 게이트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크기로 나타났고, 암흑신관 또한 경악스러울 정도로 무서운 힘을 발휘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S급 각성자마저 위압에 짓눌리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사방에 몬스터가 가득하다.
사일런스 게이트는 출현할 때 게이트를 지키기 위해 일대 몬스터들을 불러들인다.
문제는 이번 놈은 단순 불러들이는 걸 넘어 아예 강화까지 시킨다는 점이었다.
휘말린 각성자 중 일부는 몸을 숨기게 했지만. 아직 남은 이가 다섯.
적어도 이 괴물들 틈 사이로 그들을 보낼 때까지 그녀 혼자서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나머지 한 명의 S급 각성자?
그는 이미 의식을 잃고 미리 안전한 후방으로 빠진 지 오래였다.
그가 무능한가 하면 코오나는 절대 아니라 말할 수 있었다.
그저 상성이 극도로 나쁠 뿐. 사람을 구하기 위해 달려온 그는 육체계통의 각성자였다.
하지만, 아무리 단단한 신체를 지녀도 영혼에 직접적인 타격이 가해지는 걸 막을 순 없었다.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으니 기습에 대처할 수가 없다.
놈은 과거 BJ 나룻배가 죽은 것처럼 영혼에 무언가 거대한 사슬을 걸었고, 그것에 적중당한 S급 각성자는 비명 하나 지르지 못하고 가사상태에 빠져버렸다.
즉. 이곳에서 지금 싸울 수 있는 건, 오로지 그녀뿐이었다.
그나마 그녀는 해태로 인해 감이 좋은 터라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아도 자신의 위협을 경종 삼아 몇 차례 피해냈다.
하지만 그것도 슬슬 한계였다.
감각과 현실이 일치하는 건 우연에 불과하니까.
“읏!”
섬뜩함이 순간 몰려온 그녀가 소리쳤다.
“달려요! 이 이상 시간을 끌 수 없으니까! 이 비틀린 영역만 벗어나면 그 이상 추격하지 않을 겁니다!”
“젠장! 움직여!”
이들은 먼저 도망친 이들과 달리 이곳에서 소식을 듣지 못했거나 부상으로 인해 도망치지 못한 이들이었다.
이제 이들만 빠져나간다면 이 영역에서 구해야 할 사람은 없으리라.
스릉!!
순간적으로 섬뜩한 기류에 코오나가 황급히 몸을 던졌다.
동시에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무언가 날아들어 그녀가 있던 바닥을 크게 비틀어버렸다.
‘맞았으면 나도 그 사람처럼 영혼이 묶였을 거야.’
이건 정상이 아니었다.
이 정도의 공격능력이 고작 B급 게이트에서 나온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S급 이상. 아니 과거에 봤던 흉신과 흡사한 위협이 아닌가.
‘전과 공격방식이 달라졌어!’
섬뜩한 느낌에 그녀가 몸을 튕기듯 움직였다.
스거거걱!!
동시에 그녀의 검이 한차례 번뜩였고, 그녀와 도망치던 각성자들을 향해 달려들던 거대한 몬스터들이 일제히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단단하다. 공격이 먹히질 않아.’
손이 찌르르 울리는 감각에 그녀는 다친 몸을 이끌고 허겁지겁 도망치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코오나가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듯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당연한 수순이지만 마냥 그리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그 사람이 있었다면…….’
데이비 올 라운 그가 있었다면 이렇게 상황이 악화되었을까.
처음부터 사일런스 게이트의 위험성을 가볍게 본 그녀의 잘못이었다.
그때였다.
“크아아아악!!”
도망치던 각성자 측에서 비명소리가 울려 퍼진다.
화들짝 놀란 그녀가 고개를 돌렸을 때. 그녀는 볼 수 있었다.
좀 전까지 보이지도 않던 거대하고 검은 형체가 한 손에 각성자를 쥔 채 입을 우물거리고 있는 것을 말이다.
새하얀 가면 같은 얼굴에 전신이 검은 안개처럼 이루어져 있다.
팔은 몸체에 비해 극도로 가늘고 길었으며 다리는 없고 거대한 형체 아래에 발만 보이는 기이한 괴물이었다.
처음 보는 괴물. 하지만 코오나는 놈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사일런스 게이트의 유일한 몬스터. 암흑신관.
-그으으으…….
얼굴의 반을 차지하는 놈의 각진 입이 파르르 떨린다.
-맛…… 있. 다.
기이한 소리를 내며 그가 인간을 내려놓았다. 외상은 없다. 하지만 그는 처음 쓰러진 s급 각성자처럼 가사상태에 빠진 것처럼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이, 이게 뭐야.”
“괴물…….”
도망치다 자신들의 앞을 틀어막은 존재를 보며 섬뜩함을 느낀 각성자들이 두려움에 찬 얼굴로 주저앉아버렸다.
단순히 크기만 해도 10여 미터에 달하는데 그 검은 구멍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눈동자는 보는 이를 미치게 만들 정도로 섬뜩했다.
“더…… 먹는…… 다.”
이윽고 놈이 다시 손을 뻗는다.
“신휘광참.”
서걱!!
순식간에 코오나의 검이 거대한 선기를 품은 검기 다발이 되어 놈이게 쏟아져 나갔다.
하지만 검기 다발은 놈을 스치지 못했다.
“뭐…….”
어느새 그녀의 지근거리까지 다가온 놈이 가늘고 긴 손을 이용해 그녀의 머리를 낚아채 버렸기 때문이었다.
콰아앙!!!
엄청난 폭음과 함께 그녀의 몸이 바닥에 처박혔다.
아찔한 충격에 정신이 일순간 나갔다가 돌아온 그녀가 고통스런 숨을 내뱉었다.
이대로 가면 다 죽는다. 그렇다면 하다못해 신수를 폭주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그녀는 재차 공격을 가했어야 할 괴물이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어딘가를 보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고개를 기이한 각도로 꺾은 채 어딘가를 보는 괴물의 시선을 따라 눈동자를 굴린 그녀는 이내 볼 수 있었다.
눈을 부릅뜬 채 저 멀리 서서 이 상황을 보고 있는 검은 머리의 작은 소녀를 말이다.
누가 봐도 위험해 보이는 곳에 어울리지 않는 소녀다.
그리고 본래라면 그녀가 이곳에 있을 리가 없었다.
“맛…… 있는…… 거.”
어눌한 목소리로 놈이 한 손으로 코오나를 짓누른 채 나머지 한 손을 뻗으려 했다.
공격은 원거리도 먹힌다. 확실하게 영혼에 타격을 줄 순 없어도 무언가가 방출되는 건 확실했다.
하지만 에반젤린은 움직이지 않고 숨을 거칠게 몰아쉴 뿐이었다.
“흐으…… 하아…… 흐으…….”
눈을 부릅뜬 그녀의 자색 눈동자는 드래곤의 것처럼 이미 세로로 찢어져 흉포하게 피어를 발산하고 있었다.
코오나의 신형을 짓누를 정도로 두려운 피어가 퍼져나간다.
뭔가 이상하다. 그녀의 상태는 마치…….
이성이 날아가고 폭발해버린 것 같은 모습이었다.
쩌어엉!!
이윽고 괴물의 손에서 뻗어져 나간 무언가가 그녀가 있던 장소에 닿았다.
하지만 이미 에반젤린은 그곳에 없었다.
대신. 놈의 거대하고 흰 가면 바로 앞에서 모습을 드러낸 채 손에 쥔 검붉은 장검, 트와일라잇을 높게 쳐올렸다.
-그우우우우…….
에반젤린이 가진 힘은 놈들에게 치명적이다. 위험을 눈치챈 것일까. 놈이 급히 손을 뻗어 에반젤린을 막으려 들었다.
하지만 에반젤린은 그 작고 흰 손으로 놈의 손가락을 잡았고.
뿌드득!!
터프할 정도로 강하게 놈의 손가락을 꺾어버린 뒤 강하게 검을 내리찍었다.
콰아아앙!!!
엄청난 폭음과 함께 놈이 서 있던 지면에 거대한 상흔이 생겼고. 놈의 형체는 크게 잘려나간 채 저 멀리 튕겨 나갔다.
“하아…… 흐으…….”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에반젤린에겐 어떤 이성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르르르…….
낮은 용의 포효소리.
코오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에반젤린이 자신이 다친 걸 보자마자 감정이 폭주해버렸다는 것을 말이다.
이윽고 에반젤린의 형체가 빛으로 휘감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빛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수십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용의 머리였다. 검은 비늘에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용이 놈을 향해 낮게 포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