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83화
“으…… 으으으! 내 머리!”
악몽을 꾸는 듯 시달리는 절제, 박승현을 안타깝게 보는 한 여인이 있었다.
어두컴컴한 방안에는 그녀의 시선이 조용히 그에게 향해 있었다.
젊은 나이에 머리가 날아가 버렸다면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후우…….”
짧게 한숨을 내쉰 여인은 이내 품 안에서 새하얀 빛이 머금은 구체를 꺼냈고 그의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새하얀 빛은 그의 가슴에 스며들었고 이내 그의 몸 전체를 환하게 빛나게 만든 뒤 사라졌다.
“에반젤린과 잘 놀아준 보답은 해야지.”
가볍게 웃으며 식은땀을 흘린 채 잠든 그를 본 여인은 이내 소리 없이 스르륵 사라졌다.
다음날 승현은 비명을 내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으아악!! 내 머리!”
그리고는 반사적으로 정수리에 손을 가져다 댔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까칠까칠하…… 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도 그럴 것이 손끝에 이런 감촉이 느껴질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절하기 전 느낀 손의 감촉에는 분명 맨들맨들한 두피의 감촉이 분명히 느껴졌었다.
정신이 아찔해지고 머리가 띵해지는 감각은 도저히 잊혀질만한 것이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화장실로 뛰어간 그는 거울 앞에 비친 자신의 멀쩡한 모습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뭐야…… 멀쩡하잖아.”
이게 환각은 아닌지 혹시 머리가 빠진 곳은 없는지 꼼꼼히 살펴봤지만, 그의 머리는 여전히 멀쩡했다.
“꿈이라도 꿨나…….”
그렇다면 지독한 악몽일 것이다.
그러던 중 그는 자신의 옷 주머니에 무언가가 들어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저씨. 다음엔 진짜로 없애버릴 거예요.’
섬뜩한 한마디가 담긴 쪽지를 누가 남긴 것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그리고는 상의를 벗어 던진 뒤 샴푸를 마구잡이로 손에 짜기 시작했다.
“당분간 휴방하면서 힐링이나 하자…….”
그가 휴방을 한 이유였다.
* * *
에반젤린은 늘 하는 방송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난 왜 합방을 못 할까요.”
그림을 빠르게 그려 나가던 그녀의 중얼거림에 시청자들의 물음표가 빠르게 올라왔다.
[???]
[??]
[갑자기? 뜬금없이 뭔 소리야 방장.]
“아니, 그렇잖아요. 제가 뭐 아직 스트리머 신입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같은 신입 스트리머분들끼리 합방도 하고 서로 밀어주는 거라고 들었는데.”
실제로 그녀는 타 스트리머와 합방을 한 바가 없다고 여겼다.
[그럼 절제는?]
[절제쉑 어디 팔아먹음?]
[그러네. 툭하면 같이 그림 그렸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 질문에 에반젤린의 손이 잠시 멈췄다.
“절제 아저씨…… 흐음.”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절제 아저씨는 뭐라고 해야 하지. 타 스트리머 같지가 않아서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절제쉑 의문의 1패 ㅋㅋㅋㅋㅋ]
[스트리머도 아니다? 에반젤린 발언 논란.]
“아…… 아니 누가 스트리머도 아니래요? 그냥 그렇다는 거지.”
[ㅋㅋㅋㅋ 가족끼리 그런 거 하는 거 아니야.]
[이걸 가족으로 엮는다고? 우결 각 떴냐?]
[에라이 미친 악성 우결충x끼 방장 나이가 몇인데 그딴 드립이야.]
“우결이 뭔데요?”
에반젤린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7]
[쉿. 괜한 소리 하지 마라.]
[^^7 어린애는 몰라도 돼요.]
그들의 단합력을 보며 에반젤린의 표정이 팍 찡그려지는 것도 동시였다.
“아니 어린애 취급하지 말아요. 그리고 평소에 그렇게 단합 안 되는 분들이 왜 이럴 때만 단합하나 몰라. 됐어요 됐어. 내가 찾아보고 말지.”
과거에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절제가 올려놓은 그림 때문에 한바탕 난리가 나긴 했지만, 에반젤린은 알면서도 또 판도라의 상자에 손을 대려고 했다.
“우결…… 우리 결혼했어요? 이게 뭐예요? 내가 절제 아저씨랑 결혼을 왜 해?”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순수하게 한방 맥이는 거 보소 ㅋㅋㅋ]
[우리 절제가 뭐 어때서!]
[ㅋㅋㅋ 아니 근데 해도 웃기긴 하겠다.]
“아니.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이랑 하는 거잖아요.”
[그냥 콘텐츠임 신경 쓰지 마. 어차피 방장한데 선 넘을 미친놈들은 없어.]
그 한마디가 진실인 양 모두가 수긍했고 곧바로 궁금증으로 이어진 에반젤린은 관련 콘텐츠를 검색해서 이리저리 확인하기 시작했다.
“아…… 그러니까 연극…… 같은 거네요? 재밌겠다.”
그녀가 눈을 반짝였다.
“절제 아저씨한테 해보자고 할까.”
띠링.
절대 안 돼 님께서 20,000원을 후원하셨습니다.
-절제 죽이고 싶은 거 아니면 안 하는 걸 추천할 게 방장.
“죽어요? 왜요?”
띠링.
-네 아빠가 절대 가만히 안 있을걸?
“음…… 그런가.”
아쉽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그녀가 포기선언을 했다.
[속보, 방금 방장 방송 도방하던 절제쉑. 안도의 깊은 한숨 ㅋㅋㅋㅋㅋㅋ]
동시에 영상 후원이 이어지며 진심으로 안도하는 절제의 얼굴이 영상에 드러났다.
[ㅋㅋㅋㅋㅋ 절제쉑 의문의 페도행 될 뻔 ㅋㅋㅋ]
[아 본인 업보지 ㅋㅋ]
“뭔가 이렇게 보니까 기분 나쁘네.”
투덜거리며 그녀가 절제에게 음성 채팅을 걸었다.
“아니 이 아저씨 왜 안 받아?!”
[ㅋㅋㅋ 방장 같으면 받겠냐고 ㅋㅋㅋ]
[절대 안 받지, 아니 못 받지 ㅋㅋㅋ]
[받는 순간 잘못하면 논란에 휩싸인다.]
낄낄거리는 시청자들의 즐거움은 그녀의 고통이 되어 다가왔다.
“후…… 됐어요. 됐어. 안 하고 말지. 그보다 어쨌든. 왜 합방을 못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신입 스트리머 중에 방장처럼 대규모 월드클래스 급이 없는데 일차적인 이유고 이차적인 이유는 그냥 다가가기 어려워서 아님?]
한 시청자의 날카로운 추측에 그녀가 눈을 게슴츠레 떴다.
“흐음…… 그럼 별수 없죠. 절제 아저씨한테 부탁해봐야지. 아니 이 아저씨 왜 자꾸 안 받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노예 절제 ㅋㅋㅋ 신입 발굴 한번 잘못했다가 영원히 고통받는다 ㅋㅋㅋ]
늘 있는 일이었다.
“자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까지 할게요.”
담담하게 중얼거리며 방송의 종막을 알린 그녀가 방송을 끄려 할 때였다.
덜컹!!
갑자기 바깥에서 큰소리가 울려 퍼졌다.
깡!깡!깡!깡!! 지이이잉!!!
도저히 방송을 진행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커지는 소음에 그녀의 표정이 확 찡그려졌다.
[어우. 이게 뭔 소리야.]
[어디 공사함?]
“……미식연구회. 또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미식연구횤ㅋㅋㅋㅋㅋㅋ]
[그 또라이들 ㅋㅋㅋ]
이미 에반젤린의 시청자들에게 있어서 미식연구회의 수장인 유리아와 부회장인 륀느 그리고 부원인 점순이는 유명한 고정 게스트나 다름없었다.
최근엔 에반젤린의 끝도 없는 뒤 끝에 계속 당하는 모습을 보이곤 있지만 새로운 먹을 것에 진심인 그녀들의 행동은 여러 면에서 시청자들에게 재미를 선사해줄 수밖에 없었다.
[아니 미식회 대체 뭐하길래 이런 소리가 나는 거임?]
[전에 음식에 소금 들어갔다가 폭발한 것도 레전드긴 했음.]
그들의 의문을 대신 해결하듯 에반젤린은 무선 캠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하는지 보죠. 잠깐 너무 시끄러우니까 소리 좀 줄일게요.”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을 튕기자 옅은 유색의 막이 그녀가 쓴 헤드셋 주변에 들어갔다.
그리고 방송룸의 문을 열기가 무섭게 전기톱을 들고 있는 륀느와 거대한 빠루를 쥐고 있는 유리아가 보였다.
“…….”
잠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넓은 거실에 커다란 비닐을 깔아놓고 처음 보는 생명체를 분해하고 있는 그녀들이었다.
“이게 대체 뭐한 짓이에요?!”
그녀의 외침에 전기톱으로 커다란 갑각을 분해하던 하이엘프, 유리아 헬리샤나가 반색해왔다.
“어머나. 마침 잘 왔어요. 어때요 튼실해 보이죠?”
“뭔데요 이게…….”
“티오니스에서 갓 잡아 온 멸종위기종인 갑각새에요.”
갑각새.
이름은 들어봤지만, 실물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새 답지 않게 거대한 덩치와 단단한 갑각으로 몸을 보호하는 조류로 몬스터로 구분하기엔 좀 애매한 위치에 있는 동물이기도 했다.
“곰곰이 생각해봤는데요. 티오니스의 식자재와 지구의 식자재를 잘 배합하면 더 끝내주는 게 나오지 않을까요?”
그동안은 티오니스 재료는 티오니스 재료들끼리만 이용해서 만들었고 지구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 문제 덩어리 미식연구회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지구와 티오니스 식재를 섞어보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
늘 하던 일이다. 그렇게 당하면서도 꿋꿋하게 자신들의 염원을 찾아 헤매는 꼴에 에반젤린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진짜 미식연구회는 전설이다.]
[저 정도로 유쾌하면 나도 가입하고싶넼ㅋㅋㅋ]
“됐고, 좀 조용히 해줘요. 너무 시끄럽…….”
치잉!! 콰창!!
그때였다.
갑작스런 소음과 함께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고 열심히 재료를 손질하던 넷 모두가 흠칫 놀랐다.
“차원진이잖아! 뭐…… 뭘 가져온 것에요?!”
비명과도 같은 에반젤린의 외침에 륀느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중앙대륙 북부 판도라 영역에 있던 마물왕이 가지고 있던 알…… 알이 아니고 응축된 에너지 구슬이었다고 륀느가 보고…….”
그와 동시에 빛이 그녀들 전원을 휘감았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에반젤린은 자신의 곁에 다가와 야자열매를 들고 있는 륀느를 확인할 수 있었다.
“륀느…… 이게 어떻게 된…….”
“에린. 사흘간 일어나지 않았다고 보고해.”
“뭐라고요?”
“아울러 현재 이곳은 무인도로 추정. 다만 특수한 전자 파장으로 인해 부유가 불가능하다 분석. 당장 탈출 불가능. 륀느가 조난을 낮게 평가.”
살면서 이런 어이없는 일을 겪을 일이 얼마나 될까.
그녀는 새하얀 백사장과 새파란 바다 아름다운 하늘을 보며 잠시 멍하니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에반젤린은 눈을 부릅 뜨며 그대로 륀느의 목을 콱 졸랐다.
“아주 그냥 맨날 사고만 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