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84화
륀느의 목을 졸라봐야 돌아오는 게 있겠는가.
모래가 잔뜩 낀 것처럼 텁텁한 복장을 툴툴 털어낸 에반젤린은 눈을 게슴츠레 뜨고 바다를 바라보았다.
새하얀 바다는 굉장히 아름다워 보였다.
그녀가 봤던 한국의 바다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으니 말이다.
물속이 모두 비쳐 보이는 것을 두고 화이트 비치라고 했던가.
그녀로썬 한번 가볼까 생각은 했던 것이지만 막상 직접 보니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머지는 어디 있어요? 탈출할 방법이라도 찾고 있어요?”
그 물음에 륀느는 조용히 에반젤린을 안내했다.
그리고는 이내 숲 깊은 곳에서 멈춰섰다.
“내가…… 사흘간 기절해있었다고…….”
“차원진의 여파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분석.”
그녀가 안내한 숲 안에는 이미 점순이와 유리아가 커다란 거처를 만들어놓고 과일을 말리고 있었다.
“아니 지금 뭣들 하는 거예요? 당장 탈출해야…….”
“어머나. 왔네요. 아가씨.”
유리아가 해맑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미안하지만 당장 저희들이 여길 빠져나갈 수가 없어요.”
생각외의 답변에 에반젤린이 침묵했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이 섬 안에 어떤 장막이 처져있어요. 문제는 륀느도 깰 수 없는 수준이라는 거죠.”
륀느는 신의 사도, 그것도 처단부대의 수장이다.
비록 생전의 힘을 온전히 끌어내는 건 불가능하거니와 그렇게 끌어낸다 할지라도 현재로선 불가능한 상황이지만 기본적으로 륀느가 가진 세피로스의 힘이 어딘가에 막힌다는 걸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찬드라, 아니 점순이 또한 융합이 사라지면서 힘이 상당히 약화되어있고 유리아의 경우 하이엘프로써 고위정령과 계약하고 있지만, 이곳에 있는 이들에 비하면 정말 한없이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에반젤린,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과거에도 그랬듯 속칭 관종 드래곤인 그녀에게 있어서 고작 세 명의 인지 정도로는 힘을 제대로 발현할 수 없었다.
“시도해본 거예요?”
“당장은요. 다행히 섬이 크고 나무가 많아요. 나무 열매나 자연 동물도 많구요.”
“동물의 분포를 보면 이곳이 어디 섬인지 알 수 있지 않나요?”
차원진이 열린 만큼 이곳은 다른 차원의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이곳에 서식하는 동물 같은 것을 조사해보면 이곳이 어느 차원인지 정도는 인지할 수 있으리라.
“그게, 지구이기도 하고, 티오니스이기도 하고…….”
“뭐라고요?”
“동물이 다 섞여 있어요. 이렇게 이질적인 차원은 처음이라고 륀느 양이 그러더군요.”
륀느는 이미 여러 차원을 경험해봤을 테니 그녀의 말이 틀리진 않았을 것이다.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섬. 그리고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장막을 쳐 안에 갇힌 이들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들어놓은 섬.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우리가 내린 결론은 이거야. 여기서 버티면서 기다리면 그 인간이 우리를 찾아내 줄 거니까.”
즉 버티고 버텨서 구조가 오기를 기다리자는 뜻이었다.
“아치 그 차원진을 일으킨 건 대체 뭔데요.”
“글쎄요. 그건 저희도 잘…….”
애초에 그게 차원진을 일으킬 정도의 물건이었으면 그걸 먹겠답시고 수집해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에반젤린은 새삼이 먹을 것에 진심인 미치광이들이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일단 밤공기가 묘하게 쌀쌀하니 이리로 와.”
이윽고 점순이가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먼저 눈을 뜬 그녀들이 만들어놓은 나무줄기와 나뭇잎으로 만든 집은 놀라울 정도로 아늑했다.
“이것은 지구의 과일, 저건 티오니스 과일. 그리고 저것은 유르기안에서만 나는 과일이라고 륀느가 보고해.”
그녀는 미리 손질해둔 과일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모두 식용 가능한 과일. 특별히 독성을 띤 과일은 없었다고 보고.”
“제가 기절한 동안 계속 섬을 조사한 거예요?”
“애석하지만 그렇게 건진 건 없어요.”
미안하다는 기색을 내비치는 유리아를 보니 화를 내려다가도 씁쓸함이 밀려왔다.
이번 사고는 그녀들도 전혀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알이라고 가져왔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알이 아니고 차원진을 일으키는 물건이었으리라곤 생각지 못했을 테니 말이다.
“후우…… 그런데 전 왜 모래사장에?”
“모래사장 쪽에 상당한 마나가 밀집되어있다고 보고해. 따라서 마나가 충만한 곳에서 회복이 필요했다고 보고.”
그리고 그녀가 어떤 물건을 내밀었다.
그것은 그녀가 야외 방송을 할 때 사용하라며 알하자드가 직접 주문제작 해준 커다란 태블릿이었다.
“이건…….”
“이곳 기이한 에너지 파장. 차원균열을 통해 여러 차원과 이어져 있다고 보고. 륀느의 분석대로라면 특수파장이 연결.”
륀느가 태블릿을 톡톡 두드렸다.
그녀는 그리 말했다.
“이 섬 어딘가에 그 파장이 강한 장소가 존재. 찾아서 방송 가능. 따라서 구조요청 또한 가능하다 보고.”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에반젤린은 조용히 그녀들을 보다 고개를 끄덕였고, 륀느가 건넨 사과를 한입 베어 물었다.
“비록 이곳에선 정령술도 잘 먹히지 않고 우리들의 힘도 상당히 꼬여있지만 걱정 마세요. 아가씨. 우리 미식연구회는 이런 상황에 대해선 전문가니까요.”
유리아는 손에 든 나뭇가지를 꺾어 모닥불에 던져넣었다.
그녀의 말은 이상할 정도로 믿음직스럽지 못했다.
* * *
륀느가 건네준 태블릿이 그녀가 기절한 사이 약 5분 정도.
신호가 잡혔다고 하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이탈이라고 뜨는 태블릿을 하루종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 반대로 륀느와 유리아는 아주 물 만난 고기처럼 서로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이것저것 만들어대기 시작했다.
“아니 그러니까. 이건 작은 밭을 먼저 일구는 게 우선이에요.”
“고기가 필요. 륀느가 사냥을 우선시할 것을 명시.”
“동물을 잡아 와서 키운다고 처요. 그 아이들의 먹이는요? 어떻게 할 생각이죠? 거기다가 새끼는 원하는 크기로 키우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해요. 그럴 거면 차라리 우선 밭을 만들어서…….”
“됐으니까 우리 일단 지내는 거처부터 보강하지 않을래? 이틀 전에 비가 와서 얼마나 찝찝했는지 알아?”
점순이까지 끼어들어서 의견 다툼을 하고 있는걸 보면 저 셋은 이 사태의 심각성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후…….”
말없이 셋을 흘겨보던 에반젤린은 다시 태블릿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세요. 아가씨?”
“근처에 좀 돌아볼게요. 신호가 잡힐 수도 있으니까.”
“아직 탐사가 거의 되지 않았으니 륀느 양이 따라가 줄 거에요.”
“아니 됐어요. 혼자서도 충분해요.”
스르릉…….
한 손에 용신검 트와일라잇을 들고 나머지 한 손에 태블릿을 든 그녀가 베이스캠프를 떠나가려던 찰나였다.
꼬르륵…….
입을 다물어버린 에반젤린이 빨개진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한창 먹어야 할 시기에 그렇게 굶는 건 좋지 않아요.”
유리아가 해맑게 웃으며 근처에 있던 과일과 나뭇잎을 가져와 내밀었다.
“꺄악?!”
그리고 그 내용물을 본 에반젤린이 비명을 내지르며 물러났다.
그도 그럴 것이 유리아가 내민 것은 손보다 더 큰 거대한 애벌레였기 때문이었다.
“버…… 벌레잖아요! 이걸 어떻게 먹어요!”
“맛있는데요?”
그저 해맑게 웃는 유리아를 보며 에반젤린은 직감했다.
차를 우려낼 때도 귀뚜라미 날개를 쓰는 그녀인 만큼 이 섬은 어쩌면 그녀에게 있어서 최고의 식자재 창고가 아닐까.
“아가씨. 과일만 먹는 것도 좋지만, 고대룡은 특히 아가씨처럼 성장하고 있는 고대룡은 단백질도 필수랍니다.”
“됐거든요?! 당장 그거 안 먹는다고 문제 생기는 것도 아니고!”
“흐음…… 맛있는데.”
그렇게 말하며 그녀가 우울한 표정으로 얼굴을 숙였다.
이에 에반젤린이 움찔거렸다.
사고야 그녀들이 쳤지만 이건 말 그대로 대형 사고였다. 그리고 륀느와 유리아는 이번 사태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만큼 에반젤린의 영양 관리에는 철저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 그래도 그건 좀…… 야생동물도 있…….”
“자자! 드셔보세요!”
푸웁!
순식간에 애벌레를 입안에 밀어 넣어버리는 이 망할 귀쟁이의 행동에 에반젤린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리고 이내 그녀의 눈가에 눈물방울이 몽글몽글 맺혔다.
“우웩…… 맛은 둘째치고 비주얼 때문에 나는 도저히 못 먹겠다. 저건…….”
아무리 미식연구회라 해도 점순이는 취향이 륀느나 유리아에 비해 많이 달랐다.
* * *
애벌레 먹방 사건 이후 유리아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다다른 에반젤린은 베이스캠프를 뛰쳐나갔다.
그녀가 가장 분한 것은 유리아에게 속았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왜 맛있는 건데…….”
그녀가 준 애벌레가 생각 이상으로 고소하고 쫄깃했다는 게 가장 그녀를 슬프게 만들었다.
미식연구회 회장 유리아 헬리샤나. 하이엘프인 그녀의 취향은 확고했다.
맛이 있거나 몸에 좋으면 먹는다.
그런 그녀가 오랜 시간 연구해온 데이터는 가히 상상 이상이었다.
“퉤퉤…….”
물론 비주얼이 감당이 되지 않는 것도 사실인 만큼 그녀는 맛이 있었던 애벌레에 대한 기억을 애써 지우며 태블릿을 이리저리 뻗었다.
“신호야…… 빨리 잡혀…… 집에 가고 싶어…… 엄마 보고 싶어…… 아빠도 보고 싶어…….”
울먹거리며 애써 도움을 청해보지만 놀랍게도 신호는 잡히지 않았다.
단순히 우연이었던 것일까.
그런 우울함에 그녀가 바위에 주저앉아 한숨을 내쉬던 찰나.
그녀의 주변으로 멧돼지 한 마리가 빠르게 달려드는 게 보였다.
어릴 때 멧돼지가 돌격하는 것을 보고 기겁하면서 엉엉 우는 것을 아빠가 막아주었었던가.
지금은 그녀보다 훨씬 큰 멧돼지를 봐도 두려움보다는 무감정에 가까운 기분만 들 뿐이었다.
스릉 촤아악!!
그녀의 손에 쥐어진 검붉은 검이 한차례 궤적을 만들며 그어졌고 그녀를 향해 달려들던 멧돼지는 지지할 힘을 잃고 수차례 바닥을 구르며 그녀의 옆에 쓰러졌다.
이후 신호가 잡히지 않는 태블릿을 내려놓고 멧돼지에 검을 들이민 그녀가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집에 가고 싶다… 침대에 눕고 싶다.”
자아를 가진 자는 가진 것을 누릴 수 없게 되었을 때 그 향수를 강하게 느낀다.
슬픈 감정이 그녀를 휘감기 시작하자 마치 이 섬도 그녀의 감정에 연동되듯 하늘이 어둑어둑해지는 기분이었다.
툭…… 투툭…… 투투투투툭…… 쏴아아아아!!!
동시에 쏟아지기 시작하는 폭우.
겨우 마른 그녀의 얇은 옷이 순식간에 축축하게 젖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녀는 이내 한숨을 내쉬며 방수처리 된 태블릿을 한 손에 쥐고 나머지 한 손으로 죽은 멧돼지의 다리를 잡아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누구야!!”
뒤돌아본 그녀가 흠칫 놀라며 소리쳤다.
분명 숲속에서 어떤 시선이 느껴진 것이다. 살의나 적의와는 조금 다른. 방금전까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데 알고 보니 바로 옆에 누군가가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마냥 온 전신에 섬뜩한 느낌이 밀려 들어왔다.
검을 들이밀며 침묵하고 있던 그때였다.
띠링!!
갑자기 신호가 잡혔다는 사운드가 울려 퍼졌고 에반젤린은 눈을 부릅 뜬 채 곧바로 태블릿을 두드렸다.
그리고 그녀가 지구와 이어진 유일한 연결점인 방송을 빠르게 켰다.
“제발…… 제발…… 제발!”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소리와 함께 방송이 송출되며 on air 마크가 뜬다.
“됐어!!”
비명을 지르며 그녀가 뛸 듯이 기뻐하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비를 맞은 미친년 마냥 날뛰는 꼴이지만 에반젤린에겐 이것이 마치 섬 주변에 지나가는 비행기를 발견한 것마냥 기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방송을 켜기가 무섭게 약 5분이 지나자 수많은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
[뭐야. 방장 방송이 왜 켜져?]
[갑자기 방종한 거 해명해]
[해]
[명]
[해]
[명]
빠른 도배가 이어지고 나락을 외치는 이들도 많았다.
[아이 씨 꼴 받게 할래? 빨리 해명하란 말이야 방장! 돈으로 맞구 싶어?]
현 상황에 대해 모르는 이들의 화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하지만 곧 화면이 에반젤린을 비추자 채팅이 일순간에 침묵에 휩싸였다.
[아니 방장, 꼴이 왜 그래 ㄷㄷ]
[뭐야 거기, 웬 숲? 비는 왜 맞고 있어.]
그들도 알고는 있었다.
사흘 전 방송 도중에 빛이 터져 나오면서 뭔가 사고가 터진 것을 말이다.
그 후 휴방 공지도 없이 소식이 끊긴 탓에 한때 게시판을 뜨겁게 불태운 것도 사실이었다.
“미안해요. 여러분 내가 진짜 이럴 생각은 없었는데…… 나 아무래도 무인도에 떨어진 거 같아요.”
에반젤린의 우울한 중얼거림에 시청자들은 이해를 못 한 듯 물음표를 띄웠다.
“직접 보여줄게요…….”
그리고 에반젤린은 쓰러진 멧돼지를 질질 끌고 베이스캠프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무인도에서 식량과 식수 그리고 잘 곳을 마련하고 있는 셋을 본다면 상황 설명이 되지 않을까.
게다가 조금 전 느낀 시선에 대해서도 그들에게 경고를 해줘야 했다.
어째서 갑자기 신호가 잡혔는지는 알 수 없으나 비가 오면서 갑자기 신호가 잡힌 건 확실했다.
당장은 끊어지지 않으리라.
이윽고 베이스캠프에 도착한 그녀는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세 사람을 위해 캠을 전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걸음을…….
멈췄다.
“…….”
[????]
[???]
[??????]
[ㅗㅜㅑ 미친]
그녀가 멈춘 이유는 간단했다.
비를 맞으면서도 꺼지지 않는 거대한 캠프파이어를 보며 신이 나서 노래를 부르고 간이 악기를 두드리며 캠프파이어 주변을 빙빙 돌고 있는 세 또라이들 때문이었다.
점순이가 속이 빈 열매를 두드리며 박자를 맞춘다.
그리고 야시시한 옷을 입은 유리아와 륀느가 캠프파이어 주변을 돌며 춤을 추고 있는 꼴은 도저히 머릿속으로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비가 와서 한층 옷이 더 달라붙은 두 사람의 모습은 상당히 선정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아…… 아니 이건!!”
[무슨 원주민 코스프레 함?]
[그 와중에 미식회 회장님 몸매 쩌는 거 실화냐 ㅋㅋㅋ]
[아니 왜 저러고 있는 건데 ㅋㅋㅋㅋㅋ]
[진짜 미식회 또라이들 진짜 ㅋㅋㅋ]
단 한 번도 정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질 않는 저들을 보며 에반젤린의 인내심에 한계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손뼉을 치고 빙글빙글 돌며 캠프파이어를 선회하는 이들의 모습은 무슨 원주민 같은 모양새였다.
어디 짚단으로 인형 만들어서 주술이라도 할 기세가 아니었나.
그 모습을 본, 아니 정확히 자신들의 시청자에게 보여줘 버린 에반젤린이 결국 폭발했다.
“뭐 하는 거야 이 또라이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