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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1196화 (1,196/1,559)

제 1196화

다시 없을 기회. 어쩌면 이 순간의 선택이 그의 평생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머릿속에 많은 생각을 했다.

처음엔 단순히 에반젤린에 대해 괜한 걱정으로 찾아온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에반젤린에 대한 문제는 제쳐놓고 이런 상황이라니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퍽 우스웠다.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용기 한번 내고 말지.

뭐든 들어줄 것 같은 그의 모습에 절제 박승현은 용기를 내 입술을 달싹였다.

“저…… 혹시 레이나 누님을 사랑하십니까?”

벌게진 얼굴로 용기를 내 묻는 그 모습에 율리스가 휘파람을 불었다.

“풋풋하네요. 좋을 때로군요. 원래 썸을 탈 때가 가장 두근거리는 법입니다.”

“그런데 이건 썸이라고 해야 합니까?”

“그러지 않을까요?”

아직 두 사람이 그런 관계는 아닐 텐데. 율리스는 제법 뻔뻔하게 대답했다.

“글쎄요.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레이나 양은 좀…….”

“안 됩니다.”

데이비의 단호한 대답과 동시에 승현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반발했다.

조금 전까지 같이 카드 게임이나 잡담을 나누며 제법 편해졌다곤 해도 그에게 있어서 이일은 납득할 수 없었다.

“왜죠?! 레이나 누님은 아직 만나는 사람이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왜 그런지는 알고 계십니까?”

데이비가 한숨을 내쉬며 물어오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린이에게 들었어요. 그녀가 남성공포증이라고.”

“예. 사실 그것도 문제지만 그건 얼마든지 치유할 수 있어요. 다만 문제는…….”

데이비가 자리에서 일어나 벽장을 열었다.

그리고는 와인을 하나 꺼냈다.

“후…… 마음 같아선 응원해주고 싶은데 말입니다. 우선 한잔 받아요.”

그리고는 그윽한 향이 풍기는 와인을 잔에 따라 주었다.

사실 레이나가 어떤 사람을 만나건 데이비가 이래라저래라할 권리는 없었다.

그렇기에 데이비도 마냥 일방적으로 이야기하진 않았다.

승현이 레이나에게 느끼는 마음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안 되는 겁니까?”

“레이나가 몇 년을 살 거 같아요?”

그 질문에 승현은 시작부터 말문이 막혔다.

“인간과 천족은 달라요. 게다가 그녀는 살아온 환경이 달라서 다른 사람을 마음에 품을 수도 없습니다.”

즉.

“승현 씨. 60년. 아니 앞으로 100년 더 산다고 칩시다. 그럼 남겨질 레이나는 어떻게 될까요.”

그 질문에 승현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물론 결정은 그녀가 하겠지만 내 입장에선 말리고 싶네요.”

그의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설명에 승현은 한참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한순간의 혹한 마음으로 다가가기엔 그녀가 안고 있는 짐이 너무 무거웠기 때문이었다.

* * *

절제 박승현이 어떤 일을 벌였는지도 모른 채 레이나는 현재 눈앞의 골치 아픈 상황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으으!! 으으으!!”

레이나에게 착 달라붙은 레인보우 슬라임을 강제로 떼어내려 아등바등하는 악몽 때문이었다.

레이나에게 집착하는 건 둘 다 비슷했다.

힘적인 면에선 악몽이 압도적으로 높을 수밖에 없지만, 레이나 앞에서만큼은 얌전한 고양이가 되는 악몽은 결국 힘을 최대한 억제할 수밖에 없었다.

“후…… 그만 싸워.”

그녀가 푹신푹신하고 넓은 침대에 눕자 레인보우 슬라임과 악몽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스르륵 다가와 그녀의 양옆을 차지했다.

마치 부모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려는 아이들의 기 싸움 같아서 퍽 귀엽게 느껴졌다.

레이나는 자신의 오른쪽을 당당히 차지한 채 추욱 늘어져 있는 슬라임을 바라보았다.

이 슬라임 녀석이 데이비로 변해서 얼마나 당황했던가.

오해도 그런 오해를 사버렸으니 내일부터 데이비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지 고민이 되는 그녀였다.

“나는…….”

몸을 뒤척이며 한숨을 내쉰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오해가 있긴 했지만 역시 그녀는 데이비를 이성으로 보는 게 아니었다.

고마운 은인, 혹은 소중한 가족.

레이나에게 있어서 현재의 데이비는 한때 모두 죽어버린 그녀의 오빠들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반면 그 사람의 경우.

절제 박승현. 에반젤린의 은인이자 방송 파트너이기도 한 청년이다.

아르바이트 도중에 우연찮게 알게 된 사이로 당황하는 게 귀여워서 자주 놀리곤 했던 청년이기도 했다.

인성도 훌륭하고 딱히 모난 곳도 없었다.

무엇보다. 자신과 다르게 그는 그녀에게 다른 마음도 품고 있는 듯 보였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그의 마음에 보답할 순 없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무서우니까.

그녀에게 있어서 이성으로 다가오는 남성은 아직 공포의 대상이었다.

데이비는 그녀가 조금이라도 빨리 자리를 잡고 안정을 취했으면 하는 모양이었지만 그녀에게 있어서 지금만큼 마음이 편안했던 적은 없었다.

가능하다면 영원히 이렇게 있고 싶은 마음만이 가득했다.

물론 남녀의 관계라는 게 종족의 본능이기도 하거니와 이제 와서 과거의 일에 마냥 얽매일 생각은 없었다.

게다가 과거 빛의 용사를 이용하여 활동할 당시 데이비의 친구인 막시무스와 콘타스 대제의 여동생인 모르지아나 황녀가 알게 모르게 썸을 타는 모습을 그녀도 봐온 적은 있었다.

호기심은 가지만 가까이하기는 두려운 것. 복잡하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 레이나는 자신의 아래쪽에서 무언가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이에 고개를 슬쩍 들어보자 왼쪽에 자리를 잡고 있던 악몽이 어디서 꺼낸 건지 모를 유성 매직을 이용해 잠든 레인보우 슬라임의 표면에 낙서를 하고 있는 꼴이 보였다.

“쉬이…….”

자신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조용히 하라는 듯 쉬이 소리를 낸 녀석이 악동처럼 꺄르륵 웃었다.

“쿡…….”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래. 알면서 모른척하는 것도 할 짓이 아니야.”

그래도 단번에 찾아가 자신에게 두고 있는 마음을 덮어두라 하기엔 조금 그랬다.

“일단은…… 좀 다독여줄까.”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지구로 통하는 차원 문에 한걸음 내디뎠다.

* * *

하인스 영지에서 에반젤린의 별장으로 돌아온 승현은 선물 받은 아티펙트를 이용해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 뒤 멍하니 침대에 엎어졌다.

그리고는 중얼거렸다.

“사는 기간이 다르다라…….”

처음엔 호기심이었고 지금은 제법 진심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풀이 죽은 승현을 향해 데이비는 차라리 다른 걸 요구하는 건 어떠하냐 질문을 들었지만, 그에게 있어서 제대로 된 대답을 할 상황은 아니었다.

많은 국가에서 단순히 그런 요구사항을 위해 부단히 노력한 점을 생각하면 승현도 확실히 보통 심지는 아니었다.

“후…… 망할…….”

속이 꽉 막힌 기분이 든 그는 벌떡 일어나 냉장고에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물병을 꺼내 벌컥벌컥 들이켰다.

차가운 감각이 식도를 타고 흘러 내려가자 머리가 그나마 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후…… 그래. 예상했던 일이잖아.”

체념에 이어 타협에 이른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림이나 그리자.”

곧 그림 행사가 다가온다. 에반젤린에도 참가하기로 했으니 자신은 일단 자신의 일에도 열중을 해야 했다.

“음? 저게 뭐야.”

그때 그의 시선을 잡아끄는 무언가가 있었다.

이에 어두운 방 속에 있는 무언가를 향해 다가간 그는 그저 기분 탓이었는지 아무것도 없는 방안을 스윽 둘러보았다.

“요새 기가 허한가. 아무것도 없네.”

허탈하게 중얼거린 그가 돌아서려던 순간.

생각지 못한 냉기가 그를 감쌌다.

“어후…… 뭐야 이거.”

갑작스런 소름에 몸을 파르르 떨며 그가 몸을 돌렸다.

정말 아무것도 없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려던 찰나.

푸욱!!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분명 이쯤이었는데.”

연락을 받지 않는 승현을 직접 만나러 온 레이나는 알고 있는 절제의 집 주소를 찾아 도착했다.

“와…… 집 좋네.”

젊은 나이에 이 정도 집을 구하는 건 쉽지 않았을 텐데.

생각해보면 절제는 스트리머들 중에서도 상당히 인지도가 높은 편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그녀였다.

띠리리리-

입구에 있는 초인종을 누른 그녀는 곧 들려올 대답을 기다렸다.

그가 집에 없다면 헛걸음이 되겠지만 이상하리만치 그가 꼭 집에 있을 거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단순한 착각이었을까.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주택을 보며 그녀가 눈을 살짝 찌푸렸다.

“하긴 너무 두서없이 찾아왔나?”

간다고 연락을 한 것도 아닌 데 없다고 뭐라 하다니 스스로가 생각해도 우스운 꼴이었다.

결국 두어 번 초인종을 눌러보고 나서도 인기척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다시 걸음을 돌렸다.

아니, 돌리려 했다.

“…….”

순간적으로 눈을 크게 뜬 그녀가 몸을 돌렸다.

익숙하면서도 역겹고 지겨울 정도로 자세히 알고 있는 냄새였다.

파악!!

그녀는 생각할 것도 없이 담을 타고 넘어 내부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열려 있는 창문 너머로 가볍게 몸을 날렸다.

이거, 주거침입인지 뭔지 그거인데.

속으로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멈추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조금 전부터 그녀의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는 일반적으론 절대 나선 안 되는 수준이었기 때문이었다.

“승현아!”

이윽고 방 안으로 들어간 그녀는 그대로 걸음을 멈춰버렸다.

바닥에 쓰러져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엄청난 피를 흘리고 있는 승현과.

그런 승현을 무시한 채 주변을 조사하고 있는 갑옷의 기사들 때문이었다.

스릉!!!

당연히 그들은 레이나를 발견하자마자 무기를 빼 들고 그녀를 겨누었다.

티오니스의 기사들과는 조금 다른 형식의 갑옷이다.

단순한 병사라고 하기엔 그 안에 담긴 마법의 정수가 상당하기도 했다.

“당신들 뭐야.”

쓰러진 승현과 그들을 번갈아 보면서 그녀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승현에게 칼침을 놓은 게 누군지 사실 물어볼 것도 없었다.

레이나의 눈에 서슬 퍼런 기세가 오갔다.

승현은 일반인이다. 아무리 스트리머라지만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와서 칼로 찌를만한 인간은 아니라는 소리였다.

순식간에 허공에서 금빛의 기검을 뽑아 든 그녀가 검을 그들에게 겨누었다.

그리고는 대화 없이 그대로 덤벼들었다.

그를 데려가기 위해선 쓸데없는 대화나 할 시간 따윈 없었다.

당연히 레이나의 공격에 반격하기 위해 기사 하나가 어디서 꺼낸 건지 모를 마법이 각인된 얇은 방패를 들이밀었다.

투구 아래로 보이는 입매가 비뚜름하게 올라가는 것이 굉장히 비웃음이 서린 듯한 느낌이었다.

콰앙!!!

레이나의 기검은 기본적으로 마나를 응축시킨다.

그녀의 특유 힘인 천족의 힘을 사용하는 것도 방법이긴 하지만 마나는 그녀에게 제법 익숙하니 말이다.

당연히 그녀의 숙련도가 있는 만큼 기검의 예리함은 가히 비교가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무슨…….”

그녀의 검이 막힌 것이다.

정확히는 마나로 이루어진 기검의 구조를 흩트리면서 방해를 하는 느낌이었다.

이런 장비는 지금껏 본 적이 없었다.

막을 자신이 있었기에 그렇게 나선 것일까.

그녀를 향해 창을 찔러 들어오는 이들의 움직임은 일반적인 병사나 기사들과는 달리 훨씬 날카로웠다.

순식간에 몸을 날려 피해낸 그녀가 인상을 찡그렸다.

“조심해라. 이 세상에도 우리와 같은 강화 병사들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미개하게도 마나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군요.”

알아들을 리 없다고 생각하는지 중얼거리는 그들을 보며 레이나는 기검을 다시 만들어냈다.

똑같은 마나로 만들어낸 기검이었다.

이에 좀 전 방패로 막은 기사가 다시 앞으로 나섰다.

콰앙!!!

또 한차례 격돌. 하지만.

서걱!!

결과는 달랐다.

“컥…… 이…….”

자신이 왜 죽은 건지도 모른 채 방패와 갑옷째로 몸이 양단되어버린 사내가 쓰러진다.

동시에 놀란 기사들이 흠칫 몸을 떨며 무기를 겨누고 그녀와 거리를 벌렸다.

“니들 수준 다 알았어.”

서걱!!

하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가장 가까이 있는 이들에게 파고든 그녀가 허공에서 만들어낸 또 하나의 기검을 그대로 찔러넣은 것이다.

“컥!!”

순식간에 신장과 폐 그리고 목젖을 관통당한 두 번째 기사는 쓰러져 버렸고, 마지막 기사만이 경악한 얼굴로 물러났다.

“으…… 으아아아!!!”

그리고는 겁에 질린 듯 그녀를 향해 무기를 강하게 휘둘렀다.

우웅!!

막대한 마나 흐름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그녀는 멈추지 않고 그대로 그의 공격을 빗겨냈고, 그의 목을 베어버렸다.

셋의 기사가 순식간에 당해버린 것이었다.

“후우…….”

승현이 쓰러졌다는 사실에 과하게 손을 써버린 그녀는 인상을 찡그렸다.

좀 전 자신을 막아섰던 기사의 입매.

그 비열한 웃음은 그녀의 트라우마를 순간적으로 자극했다.

하지만 멈춰있을 순 없었다.

살인범이 더 있는지 찾아야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승현을 빨리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 했다.

‘피를 너무 흘렸어. 그 사람이 아니면 소생이 불가능해.’

병원에 가도 살릴 수 없는 수준.

아슬아슬하게 레이나가 회복시켜줄 수 있는 수준도 넘어버렸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절제를 품에 안아 들어 올렸고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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