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17화
적은 여럿. 이쪽은 하나.
바닥에 쓰러져서 눈치를 살피다가 눈만 마주치면 말라 죽는다며 퍼덕거리는 인어 소야가 보이지만 그녀는 무력 면에선 형편없는 수준이다.
“황녀님.”
“…….”
굳은 얼굴로 따라 나온 황녀를 보며 내가 물었다.
“아는 이들입니까?”
“황실 호위대…… 피닉스 기사단…… 전에 시찰을 나갔을 때 본 적이 있는 얼굴들이에요…….”
그녀의 말에 나는 다시 놈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가 탄로 난 것에 대한 혼란. 내가 여기 있다는 것에 대한 혼란. 그리고, 알 수 없는 적의가 서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역시…… 정말로 나라를 팔아먹을 작정이십니까.”
그때 가장 선두에 있던 사내가 싸늘한 표정으로 뮤린 황녀를 노려보았다.
“무슨 뜻이죠?”
“발뺌하시는 겁니까 황녀 저하! 저자는 나차제국의 수도에 단신으로 쳐들어와 폐하를 시해한 자입니다! 또한 제국의 병사들을 도륙했으며! 반란군의 탈출을 도운 자입니다! 한데 그런 자와 밀담을 가지시다니요!”
“그렇습니다! 혹…… 황녀 저하께서는 황위를 찬탈하실 목적을 가지고 미리 저자와 손을 잡으신 겁니까?!”
그들의 말에 뮤린 황녀의 표정에 당혹감이 서렸다.
저들의 행동, 말, 원하는 바는 간단했다. 자신들의 정당성을 내세워 황녀를 압박하겠다는 소리였다.
큰소리를 내어 일부러 사달을 냄으로 인해 어그로를 더 끌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렇다는데 어떻게 할까요.”
“…….”
말없이 그들을 노려보던 황녀는 이내 표정을 정리하고 냉정하게 말했다.
“그래서, 경들이 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말하세요.”
“당장 저자를 추포하십시오. 저자와 대 나차 제국은 한 하늘 아래에 같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또.”
뮤린 황녀는 묵묵히 그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황녀 저하를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폐하께 용서를 구하신다면 폐하께서도 다시…….”
“이봐요.”
“…….”
황녀가 한 걸음 내디뎠다.
“검 좀 빌려주세요.”
“여기 있습니다.”
아공간에서 미스릴제 검 하나를 꺼내 그녀에게 건네자 그녀는 망설임 없이 검집에서 검을 거칠게 뽑아냈다.
탕!! 타탕!!
대리석 바닥에 떨어진 검집이 요란스러운 소리를 낸다.
“상아 재질 검집이라 저게 얼마짜린데…….”
내 투덜거림에 그녀가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벼…… 변상하면 되잖아욧!”
“장난입니다.”
“당신은 진짜…….”
한숨을 내쉰 그녀가 걸어 나간다.
그리고는 가장 선두에 있는 사내를 노려보며 말했다.
“경의 할 말은 그걸로 끝인가?”
“황녀 저하?”
“현 황제는 나차 제국을 버리고 홀로 도망쳤다. 그렇기에 현재 나차 제국의 전권은 나, 뮤린 프라시아스 나차가 위임받았다. 따라서.”
어린 나이 답지 않게 그녀가 격하게 소리쳤다.
“제국의 배신자를 따르는 그대들을 용서할 수 없어.”
쾅!!
검 끝을 바닥에 강하게 꽂으며 그녀가 손수건을 그들에게 던졌다.
“어디 덤벼보거라.”
그녀의 목소리엔 슬픔이 어려있었지만 단호함도 엿볼 수 있었다.
그러자 긴장한 얼굴로 그들이 순식간에 무기를 뽑아 들기 시작했다.
“꺅! 뭐해요! 빨리 안 도와주고!”
동시에 황녀가 후다닥 내 뒤로 숨어버렸다.
뭐 하자는 것인지.
결과적으로는 저들을 잡아서 확인해볼 게 있으니 나는 그녀를 살짝 밀어낸 뒤 한 발 내디뎠다.
겉보기엔 멀쩡한 인간이다.
황제에게 감화된 멍청한 인간.
하지만, 속 내용물에 묘한 이물질이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이 아니리라.
나는 말없이 한 놈에게 신성력을 그대로 노출시켰다.
-그아아아아아악!!!
동시에 한 명의 몸이 순식간에 부풀어 올랐고, 그대로 터져버렸다.
갑작스런 사태에 모두가 입을 쩍 벌렸다.
“일반적인 신성 마법에 노출되면 숙주와 함께 터져버리는구나.”
마치 실험하듯 중얼거리는 내 말에 그들의 표정에 혼란이 서렸다.
이 일을 내가 저질렀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이…… 이 악마 놈이!?”
그들이 기겁하며 소리치지만 나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너희들 약점이 뭔지 좀 알아보자.”
내 미소에 뮤린 황녀는 처음에 당황한 듯 보였지만 이내 처절하게 비명을 지르는 이들을 보며 눈을 감고 귀를 틀어막은 채 오돌오돌 떨었다.
* * *
샤드란은 다른 집행관과 달리 말석이라는 이유로 비교적 자유로운 행동이 보장된 편이었다.
“이곳은…… 과거 신수님께서 머무르시던 신전이 아닌가.”
집행관 알보 단장과 마법사 이니스는 자신들을 안내하는 말석 집행관 샤드란에게 질문을 던졌다.
“맞아요. 지금은 폐쇄되어 아무도 없는 곳이죠.”
“이곳엔 황제가 없어요.”
레이나의 말에 샤드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없겠죠. 하지만 중요한 단서가 있을 겁니다. 황제를 찾기 전에 나는 확인부터 해야 하니까요.”
“이봐 샤드란.”
마법사 이니스가 물었다.
“만약 현 황제가 네 생각과는 달리 정말로 황제가 맞다면. 어떻게 할 거야?”
“나는 폐하께 충성을 바쳤어. 내 착각이라면…….”
그가 피식 웃으며 걸음을 내디뎠다.
“목숨으로 갚아야겠지.”
“미련하긴…… 쯧.”
“다 왔다.”
그는 뮤린 황녀에게서 받은 반지를 꺼내 들었다.
“그건?”
“오기 전에 황녀 저하께 요청하여 받은 황족의 피가 머금어진 인장입니다.”
“그게 이곳과 무슨 상관인가.”
“몇 해 전 폐하께서 갑자기 이상증세를 보이기 시작했을 때. 신수님이 사라진 이곳을 계속해서 찾으셨더군요.”
“이곳을?”
의외의 정보에 알보와 이니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레이나의 입장에선 별로 관심이 없는 이야기지만 두 사람에겐 달랐던 모양이었다.
“예.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홀로 이곳을 찾으셨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곳엔 아무것도 없는…….”
“그래서 조사해봤습니다. 그랬더니 재밌는 게 이 신전의 아래에 잠들어있더군요.”
그는 곧 신전의 가장 안쪽에 놓인 제단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완전히 변해버린 후 폐하께선 더 이상 이곳을 찾지 않으셨습니다.”
“음?”
“아니. 정확히는 이 장소를 기억조차 못 하시더군요. 그게 내가 가장 먼저 의심을 한 이유입니다.”
그 말에 모두가 그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샤드란은 황녀에게서 받은 인장을 제단 위에 올려놓은 뒤 한발 물러났다.
고요하기 짝이 없는 신전을 보며 샤드란은 조용히 눈을 감고 기다렸다.
“이봐. 아무것도 없…….”
이에 이니스가 답답하다는 듯 뭔가 말하려던 찰나.
제단이 쩍! 하고 갈라지며 벌어지기 시작했고 놀랍게도 그 아래로 이어진 계단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볼까요?”
샤드란의 미소에 이니스와 알보가 잠시 멍한 얼굴을 했다.
“아니 이런 게 있었다고? 어떻게 알아낸 거야.”
“오랜 시간 조사했습니다. 정말 힘들었어요.”
그리 말하며 계단 아래로 걸어 내려가는 그를 보며 레이나가 질문을 던졌다.
“굳이 제가 필요는 없어 보이네요.”
“이곳은 그렇죠.”
“하지만 다른 장소들은 저희의 힘으론 뚫기가 어렵습니다.”
“복잡하게 사는군요.”
누가 누구보고 하는 소리인지.
레이나는 자조 섞인 웃음을 흘리고는 가장 후열에서 그들을 따라 내려갔다.
묘하게 익숙한 기운이 더욱 강해졌다.
“뭔가 느껴지는 게 있소?”
“네. 아까부터 계속 익숙한 느낌이 드네요.”
레이나의 대답에 알보 단장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계단의 끝에 내려섰을 때. 모두 눈을 크게 떴다.
“이것들은…….”
“세상에 하나같이 귀한 성물들이야.”
계단의 끝 비밀의 방에 숨겨진 것들은 전부 진짜배기 성물들이었다.
성스러운 힘이 깃든 검부터 갑옷, 투구, 건틀릿이나 부츠, 그 외에 액세서리나 아티펙트. 하물며 성배나 촛대조차 상당한 신성 에너지를 머금고 있었다.
레이나는 좀 전부터 느껴지던 묘하게 익숙한 기운의 정체가 성물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데이비가 프리아 여신은 아니라지만 그 또한 신력을 가진 존재.
그에게 종속된 레이나로서는 어떤 의미로는 신의 사자나 다름없으니 익숙함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대륙 내에 있던 성물들이 어디로 사라진다고는 들었지만…….”
“전부 이곳에…… 그런데 왜 이것들이 여기 있는 거지?”
“하나같이 대항 도구들이네요.”
레이나가 문득 생각난 대로 읊자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돌아갔다.
“무슨 뜻입니까?”
“그냥 한소리에요. 성물은 과거부터 특정 악의 존재들을 멸할 때 사용하던 물건이니까요. 물론 성배나 촛대는 이야기가 다르지만……안에 담긴 신성력들은 하나같이 멸마와 수호의 힘을 품고 있어요.”
그 말에 서로를 바라보는 집행관들이었다.
“생각보다 성물에 대해 잘 아시네요?”
“이래 봬도 인간은 아니니까요.”
담담하게 말한 레이나는 고고하게 장식되어있는 거검을 하나 검집에서 뽑아 들었다.
동시에 환한 빛이 터져 나오며 마치 일렁이는 줄기처럼 새하얀 빛이 검신에서 뿜어져 나왔다.
“…….”
성물의 이런 모습을 처음 보는지 놀란 이들이었다.
“역시 맞네요. 이것들은 전부 멸마의 힘이 강하게 담긴 것들이에요. 몇 개는 가짜지만…… 적어도 이 검은 진짜가 분명해요.”
레이나의 말에 샤드란이 허…… 하며 웃었다.
“인간은 아니라고 하더니…….”
“세상에…….”
그 외에 이니스와 알보는 멍하니 레이나의 모습을 바라만 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레이나는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지만, 그녀의 등 뒤로 새하얀 빛으로 된 날개가 세 쌍 뻗어 나와 새하얀 깃털을 흩날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검과 공명하는 그녀의 전신으로 천족 특유의 신성력과 신력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신성력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조차 신성하다고 여길 정도였다.
아름다운 신의 사자.
모두가 넋을 놓고 보고 있던 찰나 마법사 이니스는 문득 자신에게 닿은 석상의 양손에 쥐어진 물건을 보고 눈을 꿈틀거렸다.
“이게 뭐지?”
그녀는 곧 석상에 끼워진 물건, 두꺼운 책을 꺼내 손에 쥐었다.
그때였다.
“흡?!”
“피해라!!”
순간적인 살기가 퍼져나간다.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레이나였고 그녀가 고개를 돌리기가 무섭게 알보 단장 또한 살기를 감지한 듯 이니스를 품에 안고 몸을 날렸다.
콰앙!!!!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 듯 멍하니 있던 이니스는 자신의 손에 쥐어진 책을 가지고 있던 석상을 바라보았다.
천사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석상은 분명 정면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천사는 붉은 안광을 번뜩이며 이니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석상의 옆으로 커다란 헬름을 쓴 석상 기사들이 무기를 찔러넣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어느새 공격해온 것일까.
저 석상들 모두가 이곳에 있던 석상들이었다.
“긴장을 늦추지 마라. 저 석상들에서 강한 힘이 느껴진다.”
섬뜩한 표정으로 고개를 든 천사 석상이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쾅!! 콰쾅!!
동시에 벽에 붙어 고정되어있던 다른 석상들도 하나둘 몸을 일으키며 내려서기 시작했다.
-이곳은 구국의 영령들이 휴식을 취하는 곳이다. 침입자여.
“뭐?”
-왕족이 아닌 자의 피가 느껴지는구나. 신성한 장소를 침입한 죄. 선대 집행관의 이름으로…….
책을 쥐고 있던 석상이 압도적인 힘을 뿜어내기 시작하자 세 사람의 얼굴에 긴장이 어렸다.
선대 집행관이라니. 이니스는 이런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다고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알보 단장은 달랐다.
“그래. 들은 적이 있다. 죽어서도 충성을 맹세하겠다 다짐한 선대 집행관들은 혼을 어떤 성물에 보관하여 아직도 이 나라를 지키고 있다고…….”
“그건 또 뭔 개소립니까!”
“아무래도 저 석상들은 우리 선대 집행관들의 혼이 서린 것 같다.”
그 말에 샤드란이 긴장한 얼굴로 실실 웃었다.
확실히 이곳엔 황족의 인장만 지니고 있지, 황족의 피를 지닌 이가 오지 않았다.
그 결과가 이것인가 싶었다.
“잠깐!! 잠깐만요! 우리는 폐하의 명령에 따르는 집행관입니다! 인장 또한 황녀 저하의 윤허를 받고!!”
다급히 알보 단장이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소리쳤다.
하지만 석상은 전혀 행동에 멈춤이 없었다.
-이곳은 성스러운 혼이 잠드는 장소, 침입자는 죽인다.
그 말과 함께 모든 석상들이 공격하려던 찰나.
“저승으로 돌아가야 할 혼이 여기 숨어있었네요.”
레이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석상들이 흠칫 놀라며 레이나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봐요들. 재령 당할 생각은 하고 여기 짱박혀 있는 거겠죠?”
레이나가 한 발 내디디며 성검을 가볍게 튕기듯 내려 세웠다.
동시에 그녀의 등 뒤로 새하얀 날개가 한 쌍, 두 쌍, 세 쌍 생겨나기 시작하자 검에 어린 새하얀 기류가 더욱 빠르게 짙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때 석상 두엇이 빠르게 레이나를 향해 덤벼들었다.
그야말로 신속에 가까운 공격이었다.
도저히 석상이 낸 것이라곤 믿기 어려운 속도에 알보와 이니스 샤드란이 숨을 크게 들이켠 그 순간.
쩌억!!
레이나를 향해 덤벼들었던 석상들이 반토막이 나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검을 털어낸 레이나가 대장으로 보이는 선대 집행관 석상을 향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저승이 씨는 여기까지 관리하지 않는 거로 아는데. 우치 님이 하시는 건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던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됐다. 내가 무슨 상관이람…….”
-자…… 잠!
서걱!!
섬뜩한 소리와 함께 석상의 머리가 떨어졌다.
검을 휘두르는 것조차 보지 못할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
직접 검을 휘두르는 것에 거부감이라도 있는지 인상이 찡그려진 레이나를 멍하니 보던 집행관들은 그녀가 천천히 석상의 머리를 집어 드는 것을 보고 입을 열었다.
“저기…… 알보 단장.”
“왜 그러느냐. 이니스.”
“……방금 꺼…… 반응할 수 있었어?”
그 질문에 알보는 입을 다물었다.
“보이지도 않았다…….”
“저런 괴물이 대체 어디서 이렇게 불쑥불쑥 튀어나오는데…….”
수용소만 해도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그곳이 단신으로 난장판을 만들 수 있는 곳인가.
집행관 서열 1위 스토벨 바르샤라면 가능할까.
의문이 서릴 지경이었다.
그때 레이나가 뭔가 마음에 안 드는지 검을 노려보더니 이내 이니스에게 말했다.
“그 책 읽어봐요.”
이에 이니스가 화들짝 놀라며 손에 쥐어진 책을 펼쳤다.
-이 책을 읽은 자, 왕실의 피를 이었을 터.
아닌데.
-또한 시련을 통과하였을 터.
시련? 통과한 적 없는데.
이니스는 식은땀을 흘리며 책을 낭독했다.
-이곳은 짐이 괴물로 변하기 전에 남기는 마지막 안배가 될 터. 짐의 몸은 지금도 악마에게 점점 빼앗기고 있다. 밤이 올 때마다, 밤의 올빼미들이 울 때마다. 짐의 정신력이 점점 약해지는 게 느껴진다.
마치 일기장 같은 그 글들을 보며 이니스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이 책을 읽는 자가 있다면 그땐 이미 짐은 본래의 짐이 아닌 악마에게 모조리 잠식당한 괴물이 되었을 터.
그 말에 이니스의 손에 힘이 강하게 들어갔다.
설마설마했던 가설이 현실이 된 것이다.
현 황제는 몇 해 전부터 악마에게 잠식당했다고.
-짐의 육신을 붕괴하여 부디 이 나라를 지켜주기를.
마치 언젠가 이곳에 올 용사를 위해 안배했다고 여길법한 말을 써놓은 황제였다.
-짐의 몸에 깃든 악마는 불사의 존재. 짐은 그런 불사의 존재를 해치우기 위해 많은 안배를 이곳에 해두었다.
홀로 이것들을 준비하면서 얼마나 괴로웠을까.
어디에 말도 못 하고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니스는 오래전 그녀에게 따뜻한 손을 내밀어주던 황제를 기억하며 눈물을 삼켰다.
-이곳에 있는 성물들을 이용해 악마의 육신을 금제하고, 성검 알두레인으로 짐과 함께 악마를 베어다오.
마지막 문장에 모두의 시선이 레이나의 검에 향했다.
잠식이다. 그렇다면 저 검으로 황제를 잠식하는 존재를 베어버리면 황제를 구할 수 있는 것일까.
확실히 황제는 일반적인 무기로 베어도 베어도 계속해서 부활을 했었다. 지금 손을 잡은 데이비 올 라운의 힘이라도 그를 죽이는 건 불가능한 상황이라 생각했다.
황제의 말대로라면 즉, 황제에게 빙의한 악마를 죽이기 위해선 지금 레이나가 쥐고 있는 검이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그때였다.
콰직…… 챙그랑!!!!
“어?”
인상을 찡그리고 있던 레이나의 손에 쥐어진 성검이 맥없이 부서져 버린 것이었다.
악마를 죽일 수 있는 유일한 수단. 성검이.
이곳에서 박살 나버렸다.
모두가 침묵하는 그 순간. 레이나가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검이 너무 싸구려에요. 고작 석상 하나 베었다고 부서지는 게 어딨어.”
자기 잘못을 회피하려는 것처럼 그녀가 빨개진 얼굴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아…… 아아 폐하를 구할 유일한 수단이.”
“안돼…… 안돼…….”
집행관들은 정신이 아득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절망하는 집행관들을 보며 레이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어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