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28화
데이비가 돌아왔다!
하인스 영지는 제 주인의 귀환에 어수선한 분위기를 띠었다.
페르세르크는 자신의 배를 쓸어내리며 조용히 창밖을 보다 입을 열었다.
“그대. 외박이 너무 길어.”
“미안하다.”
“메가로드리아로부터 소식은 전해 들었으니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테니 이리 와보게.”
그녀가 고개를 돌린다.
아름다운 은발을 흩날리며 옅게 미소지어 보인 그녀는 볼록하게 부른 자신의 배를 가리켰다.
“아이가 아빠를 많이 찾는 게지. 그토록 발길질하더니 고요해진 것을 보면.”
“하하 우리 막내. 잘 지냈지?”
자신의 아이라는 존재는 참 묘한 존재였다.
저렇게 꼬물거리는 것을 보면 세상을 다 가진 듯한 붕 뜨는 기분이 들게 한다.
막내가 뱃속에서 발길질을 자주 한다더니 지금은 아주 조용하기 그지없다. 페르세르크의 말처럼 내가 와서 그런가?
“그런데 아이가 마기도 같이 지니고 있는 듯한데…….”
“안 그래도 그림자에게 마기를 억누를 수 있는 성초를 좀 찾아보라 했는데.”
“그렇지 않아도 중부대륙 남부에 있는 왕국에서 성초가 발견됐다는 이야기는 들었음이야. 한데 그걸로 충분한 겐가?”
“걱정 마. 내 자식 잘못되라고 실수하진 않으니.”
막내는 페르세르크의 아이다. 그런 만큼 마족인 페르세르크의 피를 이어받아 마기를 지닐 수밖에 없다.
문제는 아직 마족과 인간이 화해를 한 게 아닌 터라 마기를 제어하지 못하고 풀풀 풍기면 골치가 아파진다는 게 문제였다.
그래서 찾고 있던 것이 성초이기도 했다.
“데이비.”
“응.”
말없이 그녀의 배에 귀를 대고 눈을 감고 있던 내 뺨에 그녀의 손이 닿는다.
“안전하게 돌아와서 다행이야.”
“네 남편 어디 가서 죽거나 다칠 상은 아니잖아?”
“그래도 걱정이 되는 것을 어찌할까. 다음부터 똑바로 정기적으로 연락하지 않으면 아주 혼쭐이 날게야.”
가족이기에 당연한 근황. 걱정할 수밖에 없기에 알리는 것이다.
“메가로드리아 확실히 조져놓을게.”
“본래라면 말려야겠지만…… 이번엔 먹을 것에 정신이 팔려서 알려야 할 것도 똑바로 알리지 않았다지.”
“그러니까. 누굴 닮은 건지.”
“그대를 닮은 거겠지.”
키득 웃어 보인 그녀가 몸을 일으킨 나를 올려다보았다.
“해서. 오랜만에 돌아온 남편이 부인에게 해주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한번 보여주시게.”
그 잔망스러운 미소에 얼이 빠진 듯 그녀를 바라보던 나는 천천히 손을 뻗었고 그녀의 입에 내 입을 가볍게 맞추었다.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보다는 사랑한다는 말이 더 좋네만.”
“그것도 좋네. 둘 다 하지 뭐.”
내 웃음에 그녀는 살짝 붉어진 얼굴로 시선을 피하다 한켠에 앉아 뭔가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에이리아를 시야에 담았다.
“본녀에게만 해줄 건 아니겠지?”
“그럼.”
곧바로 에이리아에게 다가가자 그녀 또한 잔뜩 기대한 듯 눈을 감았다.
“주…… 준비됐어요!”
부부가 입 맞추는 데 준비까지 필요할까. 이에 내가 에이리아에게 다가가 그녀에게 입을 맞추려던 그 순간.
낭창하게 에이리아의 품에 안겨 나를 바라보던 다리안이 내 머리카락으로 손을 뻗더니 그대로 당겨버렸다.
“꺄하하하!!”
그리고는 뭐가 그리 좋은지 꺄르륵 웃어댔다.
“이 자식이…….”
“다리안! 아빠 머리를 잡아당기면 안 돼!”
뭔가 불만이 찬듯한 표정으로 다리안을 혼내는 에이리아였지만 다리안은 에이리아의 품에 더욱 파고들 뿐이었다.
그러더니 제 어미와 내 얼굴을 번갈아 보고는 그제야 내게 양팔을 높이 뻗었다.
안아달라는 신호였다.
“후…….”
이에 한숨을 내쉰 나는 다리안을 허공에 띄운 뒤 가볍게 에이리아에게 입을 맞춰주고는 다리안을 품에 안았다.
“왜. 아빠가 너무 오랜만에 와서 삐졌냐?”
“이거! 이거! 이거!”
녀석은 그러거나 말거나 작은 팔을 뻗어 어딘가를 계속해서 가리킬 뿐이었다.
“저기로 가자고. 저쪽 벽면에 가자고?”
부드러운 털 장식이 달려있는 곳으로 나를 유도한 녀석은 조심스레 털 장식을 손에 대어본 뒤 꺄르륵 웃으며 나와 시야를 맞췄다.
버릇없니 뭐니 하지만 아이의 그런 미소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풀어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데이비. 지구에서 전쟁이 벌어졌던 건 알고 있지?”
“나차 제국에서 보낸 병력.”
악마에게 홀려 악마에게 변질된 존재들. 악마가 빙의한 황제가 사라진 뒤로 그놈들도 다 해결된 줄 알았지만 그건 아닌 듯 보였다.
“그대의 설명대로라면 분명 없어져야 하는 게 맞는데. 독립체라도 되는지 아직도 전쟁 중인 모양이야.”
“으음…….”
“그렇지않아도 그 일로 피해가 커지니 그대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싶어 하는 눈치던데.”
“아니. 그냥 내버려 둬.”
나는 지구와 손을 잡고 협력관계에 있지만, 조약 이외의 조력은 이쪽의 가치를 스스로 낮추는 꼴과 같다.
“필요하면 저쪽에서 바리바리 싸 들고 올 거야. 그때까지 방치해.”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인간이 다칠지 모르는데?”
“인류애적으로 보면 도와주는 거야 어려울 건 없는데.”
정작 그걸 이용하려는 놈들이 성가실 뿐이었다.
“별수 있나. 그런데 일리나는? 설마 전쟁터에 끼어든 건 아니겠지?”
“그렇지 않아. 일리나도 그대와 같은 입장이니까, 다만, 요시아가 사고를 쳤어.”
“뭐?”
요시아 프랑소스. 이 사고 많이 치는 조교수가 또 무슨 짓을 했나 싶었다.
하인스 영지에는 두 집단의 또라이 싸이코 집단이 존재한다.
하나는 유리아 헬리샤나를 필두로 한 미식연구회.
최근 연구자금을 얻은 뒤로는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지 조용한 편이다.
그리고 또 하나가 바로 진리탐구 동아리였다.
에디손 기술고문의 손녀, 비공정 아스가르드의 함장이자 천재 연금술사이자 오래전 나와 정략혼으로 묶여있었던 대륙 6대 미녀 중 하나인 티아라.
그리고 내 동생이지만 어릴 때부터 범상치 않은 연구욕을 보이던 에오니샤 올 라운.
그리고 요시아 프랑소스가 포함된 진리탐구 동아리.
“이번엔 무슨 사고를 쳤다던?”
“그대가 피를 안 주고 가니까 요시아가 아주 금단증상에 빠졌는지 여기저기 하악질이나 하고 다녔지 뭐.”
생각해보니 최근 그녀에게 피를 거의 준 적이 없었다.
그래도 내 혈액을 담은 팩을 보관함에 담아 줬을 텐데.
묘한 기분이 든다.
“그게…… 얼마 전께 마지막이었는데 피를 주러 안 온다고 투정을 부린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
이건 내 잘못이 맞다. 어지간하면 용서해주마.
나는 그녀의 상태를 깨달았다.
“그래서. 무슨 사고 쳤는데.”
“소환.”
“뭐?”
“직접 피를 빨러 가겠답시고 계약소환 마법을 연구하다가 이상한 소환진에 불려가 버렸어. 티오니스 중부 쪽에 있는 왕국인데 잠깐 계약으로 묶여 있나 봐. 일리나가 상황을 보러 갔지.”
페르세르크의 설명에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큰 문제는 없을 테지만 자칫 요시아가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들켜버리면 피곤해질 가능성이 높았다. 밀피유와 다르게 요시아는 직접 피를 빠는 모습만 보이지 않으면 상관없지만 말이다.
“그건 됐고. 데이비.”
페르세르크가 내 팔을 잡아당겼다.
“저 둘은 왜 저렇게 된 게야.”
이미 내게 자잘한 설명은 전해 들었다.
내 상태와 레이나의 상태. 그리고 외곽 차원인 나차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말이다.
“설명한 그대로인데.”
“그건 알겠는데. 하면 이제 부정적인 에너지는 전부 사라진 거 아닌가?”
“그렇지. 이제는 하나도 안 남았지.”
“그런데 저래?”
그녀의 말에 이상함을 느끼고 내가 시선을 돌리자 영지의 정원 티 테이블에 앉아 조용히 담소를 나누며 차를 마시고 있는 레이나와 내 성녀, 슈네리아 레켄이 보였다.
“사이 좋아 보이네.”
“저게?”
“음?”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는 에이리아와 페르세르크를 보며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빠! 저 두 사람 왜 저래요?!”
급기야 문을 열고 들어온 에반젤린이 내게 설명을 요구하듯 소리쳤다.
“에반젤린!”
내가 양팔을 뻗으며 어서 아빠의 품에 안기라는 시늉을 한다.
소중한 딸아이가 아닌가.
아무리 소중해도 직접 배 아파 낳은 아이가 아닌 이상 차이가 생긴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지금껏 그런 차이를 느껴본 바가 없었다.
내 행동에 반사적으로 팔을 뻗어 안으려 하던 그녀가 흠칫 놀랐다.
“애…… 애 취급하지 말아요!”
그리고는 다시 도망쳐버렸다.
문득 나는 그런 에반젤린의 어깨에 있던 레인보우 슬라임이 굉장히 주눅이 들어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페르 언니…….”
“그렇구나. 너무 좋아하기에 종이 한 장 차이로 비틀리는 게 가능하다라, 일리나 본인이 맞긴 하구나…….”
“그런데 조금 다른 느낌이던데요. 언니 말대로라면 저희에게도 영향이 왔어야 하지 않을까요?”
“아마 조금 다른 독점욕이겠지. 본녀가 보기에 저 아이는 아직도 남자를 무서워해.”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하는 둘을 무시한 채 나는 곧 방문을 열고 들어와 내게 보고 서류를 올리는 에이미에게 관심을 돌렸다.
* * *
데이비의 성녀 슈네리아 레켄은 사실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얼굴로는 웃고 있는데 기세가 흉흉하기 그지없는 레이나였다.
이곳에 온 뒤로 슈네리아는 데이비의 부인이라는 존재를 만날 수 있었다.
솔직히 생각지도 못한 다수의 존재에 당황하긴 했지만 애초에 왕국의 왕자였다던 자신의 신이니 일부다처제로 여러 정략혼을 했다는 가능성 정도는 얼마든지 인지하고 있었다.
실제로 슈네리아와 정략혼 이야기가 오갔던 나차의 황제 또한 부인이 상당수 존재했으니 말이다.
그건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녀는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너무 예뻐…….
많은 미인들을 봐왔지만, 특히 페르세르크라는 사실상 이 저택의 실세로 보이는 아름다운 여인은 슈네리아가 보기에 질투가 날 정도로 아름답고 우아했다.
가식 없는 미소에 여유로움.
저것이 정실의 품격일까.
자신도 언젠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고 결혼하게 되면 저런 우아한 품격을 내보일 수 있을까.
괜히 그런 생각을 하니 반정도는 우울해지고 반정도는 기대가 되는 느낌이었다.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눈앞의 존재.
천족 레이나. 데이비에게 종속된 천사라고 했던가.
그녀가 처음 슈네리아에게 광기 어린 질투를 내비쳤을 때 그의 부인들에게도 똑같이 날을 세우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녀는 데이비의 부인들에겐 정말 살갑게 대했다. 가식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그런 살가운 태도.
사실상 데이비에게 연심을 품었다면 가장 경계해야 할 이들인데 전혀 그런 낌새가 없다.
그제야 그녀는 눈치챌 수 있었다.
레이나. 이 싸이코 같은 년이 질투하는 건 연심으로 이루어진 관계가 아니라…….
“저기…… 저는 곧 돌아가잖아요. 그렇죠? 그러니까 그렇게 노려보실 것까지는 없지 않을까요?”
“내가 언제 노려봤는데요?”
“아니…….”
전날 먹은 게 체한 기분이 든다.
이곳은 평화롭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다른 세상이라는 게 체감이 되듯 여러 면에서 그녀의 고향과는 달랐다.
분명 듣기로 데이비가 있던 차원은 다른 문명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는데.
슈네리아로썬 이해할 수가 없지만 그러려니 할 뿐이었다.
데이비의 부인들은 정말로 친절하고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렇다고 레이나가 나쁜 인물이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다만. 그녀는 이상할 정도로 자신의 종주인 데이비를 모시는 것에 집착이 강했다.
천사인 그녀에게 있어서 성녀는 그야말로 최고의 질투대상이 아닌가.
처음엔 그녀가 부정적인 에너지에 오염되어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은 건 언제 그랬냐는 듯 얼굴을 싹 바꾸고 데이비에게 말을 하던 레이나를 봤을 때였다.
이 여자. 역시 싸이코가 맞다.
그렇게 생각하며 제 가슴을 콩콩 두드린 슈네리아는 차라리 빨리 고향으로 돌려보내달라고 빌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럼에도 바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데이비의 말로는 몇 주 정도 이곳에 머물러야 할 거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무언가 문제가 있기 때문이리라.
누가 됐든 좋으니 제발 자신 좀 꺼내달라고 더 이상 레이나의 눈총을 받고 싶지 않다 소리치고 싶었다.
“저…… 이해를 못 하는 건 아닌데 진짜 부담스럽거든요?”
“저는 아무것도 안했는데요?”
“하…….”
한숨을 내쉰 슈네리아가 양손을 모았다.
“그 손 푸는 게 좋을 텐데…….”
“나도 생각이 있거든요? 자꾸 이러면 기도해서 다 고자질하는 수가 있어요.”
슈네리아의 협박과 동시에 기도가 이어진다.
[나의 신이시여…… 당신의 가련한 어린양이 비옵건대…….]
침묵하는 슈네리아를 제지하기 위해 레이나가 벌떡 일어난 그 순간.
[도움!!!!!!!]
그녀의 필사적인 외침과 동시에 데이비가 허공에 나타났다.
“야! 머리 울리니까 그냥 기도하지 마!”
“성녀가 신께 기도를 안 하면 어쩌라는 건데요?!”
“네 기도가 너무 불량해서 기도문이 악마의 속삭임과 같이 춤을 춘다!”
“아 몰라요! 그러게 누가 나 성녀로 삼으래요?!”
“오냐 아주 그냥 그 성흔 내가 뜯어줄 테니까 등 대!”
“꺄악!!”
그녀는 데이비를 소환하지 않았다.
성녀가 자신의 신을 소환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경지였으니 말이다.
그게 설마 온전한 신이 아닌 신격일지라도.
그럼에도 나타난 것은 그녀의 기도가 정확히 뇌리에 꽂히듯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여신이 아주 작정하고 나를 엿 먹이네 진짜.”
다만 슈네리아는 일단 저 무시무시한 싸이코에게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주를 이루었다.
“나 진짜 서러워서! 나…… 나 좀 도와줘요!”
데이비에게 그대로 안겨드는 슈네리아는 반사적으로 영주성의 창문을 훑었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데이비가 있던 그의 집무실에서 페르세르크가 귀엽다는 듯 키득거리는 얼굴이 보였다.
반면.
“…….”
말이 없어진 레이나의 시선이 조용히 슈네리아를 향했다.
“그냥 죽여도 되지 않나…….”
웅얼거리듯 중얼거린 목소리지만 슈네리아의 귀엔 분명히 박혀 들어갔다.
저 미친 여자가 진짜!
아무리 레이나가 한때 그녀와 그녀의 동생들을 구해준 은인이라곤 하지만 이건 정도가 지나치지 않은가.
“레이나?”
“네? 무슨 일이세요?”
동시에 언제 그랬냐는 듯 반짝이는 눈으로 해맑게 웃는 레이나를 보며 슈네리아는 생각했다.
여기 더 이상 있으면 안 된다.
놀랍게도 저 여자와는 같은 신격을 모시지만 이건 아니었다.
“저…… 저 돌려 보내주세요! 제 동생들이 기다리고 있다고요! 뮤린 황녀님께도 보고해야 하고…….”
“지쳐있을 텐데. 신성력을 좀 회복하라고 거기다가 너 일반적인 경로가 아닌 방법으로 차원 넘어서 내게 왔잖아. 네 몸 상태가 어떤지는 알고 있냐? 의사의 소견으로 말하는데 최소 일주일 이상 요양 안 하면 아주 몇 달은 팔다리 삭신이 쑤실 거다.”
“그…… 그냥 보내주세요! 제발요! 진짜 너무 무섭단 말이에요!”
결국, 울먹이며 애원하는 그녀였다.
* * *
“피…….”
어두운 방 안에서 누군가가 붉은 눈을 번뜩였다.
“선생님 피 마시고 싶어!!!”
“아 그만 좀 해요! 진짜 내가 돌아버리겠네!”
짜증이 극도로 솟은 한 소년이 바닥을 뒹굴거리는 흑발의 소녀를 향해 소리쳤다.
“그럴 거면 돌아가요. 좀! 계약이고 나발이고 다 필요 없으니까!”
“조용히 해! 나도 가고 싶은데 쉽게 안 되는 걸 어떻게 하라고! 두고 봐, 돌아가면 밀피유의 머리칼을 다 뽑아서 대머리로 만들어버릴 테니까.”
“위대한 존재라면서요! 무슨 위대한 존재가 이렇게 말투가 천박해요?”
“아 몰라! 난 그딴 거 몰라! 너 빨리 마법 공부 안 해?! 바뀌고 싶다면서!”
“아니 알려주는 게 너무 어렵잖아요!”
소년의 외침에 요시아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다가와 소년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쿡쿡 눌렀다.
“마나의 심화배열 조합식. 이걸 왜 몰라? 사람의 머리는 생각하고 계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단다. 그리고 네 손은 그런 머리가 딸리는 걸 직접 계산식으로 도와줄 수도 있지!”
“이…… 이익!”
“침팬지? 오랑우탄? 진짜 너무 멍청해서 말이 안 나오는데. 이걸 왜 못하지? 고라니도 네 지능수준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거야.”
그녀의 거침없는 매도에 소년이 씩씩거렸다.
“당신 설명대로 보는 족족 다 이해하면 세상 대부분 마법사가 대마법사일 겁니다.”
“대마법사가 우습게 보여? 내가 가르쳐주는 마법식들은 죄다 초급과정이야!”
“살다 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초급과정은 처음 보는 데요! 그리고 지금까지 안 하던 공부가 이제와서 될 거 같아요?!”
서로 지지 않고 노려본다.
“그런 주제에 욕심은 커서 말이야. 저질러온 잘못도 많은 주제에 저도 모든 걸 바로잡고 사람답게 살고 싶습니다? 풉. 어휴 내가 어쩌다가 이런 모질이의 소환식에 낚였는지…….”
“그냥 다 알려버리는 수가 있어요! 여기 미친 뱀파이어가 있다고!”
“미안한데 나는 도망칠 방법은 많아, 근데 너는? 대륙 공적인 뱀파이어와 손을 잡았으니 바로 화형대 직행 아냐?”
“으아아아아!!”
요시아의 쉬지 않는 극딜이 이어진다.
자신은 그저 절박하게 도움을 요청했을 뿐인데.
머리를 쥐어뜯는 소년이었지만 요시아는 무시로 일관하며 울먹거렸다.
“아니 선생님…… 언제 와요오……. 진짜 피한 모금만. 피 한 모금만 마실 게 제발.”
요시아 프랑소스.
데이비가 오지 않으면 직접 찾아가겠다는 일념으로 소환계약 마법을 연습하던 요시아는 생각지도 못하게 간절한 바람을 내비치는 이에게 이끌려 이곳에 내던져졌다.
소년이 전투적으로 주머니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우적우적 씹는 걸 본 요시아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야 그거 뭐야? 굉장히 거슬리는 냄새가 나는데.”
“흥. 뱀파이어니까 그렇겠죠. 이건 성초 [성스러운 풀]이라는 거에요. 우리 가문 영지에서 재배하는 건데 가끔씩 머리 아플 땐 씹어요.”
“됐고 그거 치워 난 그거 냄새나서 싫어.”
데이비가 찾고 있는 성초는 다름 아닌 이 소년의 가문에서 재배 중인 물건이었다.